오랜만에 거닐어 본 경복궁의 가을 (1)
1. 일 시 : 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3호선 경복궁역 5번출구 14시
2. 장 소 : 경복궁 -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3. 참 가 : 옆지기와 함께
4. 코 스 : 경복궁역 → 국립고궁박물관(14:00) → 흥례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 → 경회루
→ 태원전 → 신무문(청와대) → 집옥재 → 건청궁
→ 향원정 → 함화당과 집경당 → 국립민속박물관
(18:00) → 안국역
(산행시간 : 약4시간 / 휴식 시간 포함)
5. 특 징 :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
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
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
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일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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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원래의 이름은 정문이었으나,
세종때에 와서 광화문으로 명칭이 바뀐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으나, 광화문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잠시 이동하였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2010년,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공개되었다.
↓ 수문장 교대 의식. 시각 : 10시~15시까지 매시간 정각. 장소 : 경복궁 흥례문 앞 광장.
↓ 흥례문 앞에서...
↓ 흥례문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근정전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근정문
뒷편의 사정전과 강령전, 교태전도 모두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다만 경복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은 한쪽으로 틀어져 있는데 일제가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헐어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하면서 원래의 위치가
아닌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추어 지었기 때문이다. 이후 광화문은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으로 인해 한일강제병합 100년인 2010년 8월15일에 기울여졌던 3.75도를
바로 잡고 고종때 제건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경복궁 안내판
↓ 근정문
근정문(勤政門)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정문과 행각은 고종 4년(1867년)에
근정전과 함께 중건되었다.[22]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금천교, 어구,
흥례문을 비롯하여 이곳도 해체ㆍ철거되었는데,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고 이 일대를
재건하면서 원래 모습을 찾았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고 대신 관리들이 궁에 출입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 근정전
근정전은 경복궁에서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法殿)이었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23] 임진왜란 전에는 주변 회랑이 단랑(單廊)이었으나,
현재의 근정전은 복랑(復廊) 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서 약간 북쪽에
상ㆍ하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어진 다포계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이다.
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박석(薄石)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어도(御道)
좌우로 문ㆍ무관이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쌍의 품계석이 놓여있다.
근정전 건물 외관은 충층이지만, 내부는 층의 구분없이 전체가 트인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 내진주 중앙에는 어좌를 마련하였고, 그 뒤에는 일월오악도의 병풍이 있다.
천장 중앙에는 보개(寶蓋)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그리고, 발톱이 7개인 칠조룡(七爪龍)
한 쌍을 만들어 달았으며, 건물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본래 건물 안에는 의장기물이 가득 장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 근정전의 내부 모습
↓ 궁궐내에서 왕이 행차하는 행사가 재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