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만난 이현일은 담담했다. 어렵게 도전하는 마지막 올림픽이기에 초조하고 긴장될 법도 한데 그는 침착했다. 긴장은커녕 오히려 담담하지만 자신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최선을 다 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짧은 소감과 함께 출국장을 통해 런던으로 떠난 그는 4위라는 성적표를 들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비록 메달을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투혼은 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드라마 같은 그의 인생 스토리가 주목을 받으며 그는 아름답게 올림픽 도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글 문영광 기자 사진 연합뉴스/월간 배드민턴 DB
이미 서울체고와 한국체대를 거치며 국내에서 이름을 알린 이현일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남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국제무대에 제대로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이때부터 한국 배드민턴 단식을 이끌어줄 에이스로써 활약하게 된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이후 약간의 슬럼프를 겪던 이현일은 다시금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대한민국 에이스로서 국제무대에서 활약한다.
이윽고 2004년 2월, 한국 남자 단식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랭킹 1위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누구나 다 알만한 사실이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복식이 강하다. 남자 단식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던 한국 배드민턴이었기에 이현일의 세계랭킹 1위 기록에 배드민턴 관계자들과 팬들은 환호했다. 이 남단 세계랭킹 1위 기록은 앞으로도 한국에서 언제, 누구에 의해 또 나올지 전혀 기약이 없을 정도다. 이현일의 세계랭킹 1위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현일은 첫 번째 올림픽인 2004 아테네올림픽에 도전한다. 실력도 자신감도 최고조에 올라 있던 터라 지켜보는 국민들도 그의 메달 획득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16강전에서 대만의 분삭 포사나(30)에게 0-2로 완패하며 충격적으로 탈락하고 만다. 그리고 친구이자 대표팀 라이벌이었던 손승모의 은메달 획득을 지켜보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너무나 큰 충격에 빠진 이현일은 이때부터 방황하기 시작했고 몸무게가 7~8㎏이나 불 정도로 운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이현일이 돌아온 것은 1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이렇게 아테네올림픽 이후 쉽게 마음을 잡지 못하던 그는 2007년 1월 코리아오픈 1회전에서 탈락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은퇴 선언을 하고 코트를 떠났지만 올림픽의 꿈을 져버리기에는 너무 일렀다. 주변 동료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다시 코트로 이끌었다. 어렵사리 마음을 다잡고 대표팀에 복귀한 그는 2007년 국제대회를 통해 어느새 50위권 밖으로 떨어져있던 랭킹을 다시 끌어올리며 베이징올림픽에서 다시 한 번 메달 획득에 도전한다.
이번에는 승승장구. 그간의 마음고생이 그의 실력 뿐 아니라 정신력마저 탄탄하게 단련시켰다. 뭔가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중국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에도 불구하고 연달아 중국 선수들을 누르고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당시 남자 단식 왕자였던 말레이시아의 리총웨이에게 1대2로 너무도 아쉽게 패배했다. 실망하기는 일렀다 동메달을 통해 아테네의 한을 씻고 싶었다. 하지만 이어진 3, 4위전에서 중국의 첸진에게 무너지며 메달 문턱에서 또 다시 좌절을 맛보았다.
베이징올림픽이 이렇게 끝난 후 이현일은 아쉽지만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대표팀에서 명예롭게 은퇴했다. 그러나 무언가 아쉬움이 남았다. 그의 실력도 여전히 최고였을 뿐더러 그 없이는 대표팀을 이끌어 줄 구심점이 부족했다. 때문에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김중수 감독은 이현일의 복귀를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많은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런던올림픽을 진정한 은퇴무대로 삼고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이루지 못한 메달 획득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진했다.
우여곡절 끝에 고대하던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이현일의 몸은 가벼웠다. 풋워크와 스트로크, 강력한 공격력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경기력을 보여줬다. 16강전까지 상대를 압도하는 경기력으로 8강에 올랐고 거기서 만난 상대는 다름 아닌 첸진. 4년 전 메달의 꿈을 앗아 갔던 중국 선수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더 이상 패기만 가득 찬 신예가 아닌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의 모습을 한 이현일은 첸진을 요리하며 2-0으로 가볍게 꺾고 통쾌한 복수극을 완성하며 준결승에 오른다.
준결승 상대는 리총웨이를 꺾고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는 중국의 린단. 모든 국민들은 그의 결승 진출을 바라며 숨 죽여 경기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강력한 공격보다는 정교한 기술과 허를 찌르는 노련한 경기운영을 펼치는 이현일은 경기초반 철저히 상대의 스타일을 분석하고 나온 린단의 빠른 페이스에 밀려 연속실점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 페이스를 완전히 잃어버린 이현일은 린단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2-0으로 패배, 아쉽게도 또 다시 3, 4위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그리고 이어진 3, 4위전. 역시 중국의 첸롱을 만나 첫 게임을 너무 쉽게 내준 이현일은 2게임에 페이스가 살아났다. 2게임 초반부터 멀찍이 달아나며 21:15로 승리한 이현일은 그러나 3게임에서 첸롱의 강력한 스매시에 고전하며 15:21로 패배, 아쉽게도 메달획득에 실패하고 말았다. 정말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내려줘야 하는 것일까. 올림픽 출전 랭킹이 10위였던 것을 감안하면 4위라는 성적은 분명 호성적이다. 하지만 이현일의 올림픽 사연 많은 올림픽 도전사를 볼 때 마지막이었던 이번 올림픽 성적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대한민국 에이스의 자리를 내려놓고 실업팀 활동에 주력하려 한다. 그는 “단식에도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선수들마저 복식만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며 아쉬워했다. 한국 단식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 에이스 이현일. 그의 앞날에 또 어떤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지 주목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