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에세이 ?___윤세영
사진, 그 치명적 유혹
윤세영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만약 그 소리가 임금님 귀에 들어가면 당장 죽임을 당할 터이지만, 자기만 아는 비밀을 말하는 것이 설령 목숨과 맞바꿀 모험이라 해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표현욕, 그것은 인간에게 치명적 유혹이며 본능이다. 나만 아는 정보, 나만 아는 느낌, 나만 체험한 기억의 흔적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 말하고 글 쓰고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 결과물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다면 그것은 예술이라 불릴 것이다.
사진 역시 자신이 본 것과 느낀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사진은 타 장르와는 다르게 선천적으로 남다른 재능을 타고났다든가 어렸을 적부터 몸으로 익히지 않았어도 어느 날 갑자기 입문할 수 있는 종목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접근한다. 바로 그 점이 사진의 매력이지만 때로는 사진의 발목을 잡는 덫이기도 하다. 어느 수준까지는 기계가 대신해주기 때문에 자칫 카메라가 사진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는 아마추어들, ‘사진’보다 카메라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류도 꽤 있다. 요즈음 CEO를 대상으로 하는 예술 관련 최고위 과정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사진으로 몰리는 현상을 본다. 촬영하면 그 순간에 결과물이 나오는 사진은 바쁘게 사는 현대인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그러나 사진애호가들의 급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업작가들은 고전을 면치 못 하고 있다. 사진을 찍는 애호가들은 많아도 전업작가들의 작품을 인정하고 좋아하고 소장하는 사람들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진예술에만 국한된 건 아니어서 사진가뿐 아니라 예술가들은 거의 대부분이 고독하고 고통스럽고 고민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밭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그 무엇’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비밀을 누설할 수밖에 없는, 천기누설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평창에서
목련이 환상적인 봄날에 강원도 평창에서 만난 사진가 최광호도 그런 사람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사진에 빠져든 그는 5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거의 3, 40년을 사진 속에 살고 있다. 필자는 그를 20년 가깝게 지켜봤지만 “나는 사진이다.”라고 말해도 조금의 과장이 없는 작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를 아는 동안 청량리, 상계동, 부천 그리고 강원도 평창, 이렇게 순차적으로 그의 작업실을 취재해 왔다. 늘 고급스럽고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먼 거칠고 가난한 작업실이었지만 그는 항상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작년에 작가가 임대를 받은 강원도 평창의 다수초등학교를 올봄에 찾아가 보니 아직 폐교의 쓸쓸함이 남아있지만 40년 가깝게 사진으로 살아온 작가를 담기에는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사진을 전공했고, 일본과 뉴욕에서 사진 유학을 했고, 사진에 대한 신앙과 열정이 누구보다 깊은 작가지만 그는 거창한 사진 이론 대신 그저 사진을 호흡과 같다고 생각한다. 1977년 첫 개인전 제목이 ‘사진일기’였던 그는 사진으로 일기를 쓰듯이 사진이 일상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이 세련되었거나 폼나거나 화려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그런 것들에 일침을 가하 듯이 평상심이다. 하긴 우리의 일상이란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이 닦고 밥 먹고 일하다가 잠자고……. 특별할 게 없는 게 일상이다. 아니 특별한 것도 일상 속에 들어오면 일상적인 것이 된다. 그렇지만 그 일상들이 모여 일생이 된다. 최광호 작가는 사진으로 호흡하고 생활하는 작가이므로 그의 사진은 일상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최광호답다. 그의 사진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가 자신을 드러내고 세상에 한번뿐인 순간을 포착하므로 작가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평창에서 그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작가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다른 분야에서 삼사십 년을 그렇게 진취적으로 적극적으로 애정을 갖고 열심히 했다면 부든 명예든 움켜쥐었을 텐데 그는 여전히 다수초등학교 임대료를 걱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이다. 사진으로 밥 먹고 사진으로 잠자고 사진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사진으로 놀고 있음을 즐거워하고 그 즐거움을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열성을 부린다. 그러니 사진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인사동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은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에서 전시 오프닝이 열린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사진전이고, 그들 사진전의 과반수는 사진을 업으로 하지 않는 작가의 전시다. 사진이 평생 업이 아닌데 무엇이 이들을 충동질하는 것일까.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인 아마추어 작가들의 전시를 보면서 생각하는 점이다.
사진은 만만하다. 노래방 덕분에 전 국민이 마이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듯이 누르기만 하면 찍히는 콤팩트 카메라와 카메라가 내장된 핸드폰 덕분에 전 국민이 사진을 찍는 경험이 가능해졌다. 카메라 한 대가 한옥 한 채 값에 육박했다는 옛날이야기는 지금은 전설이다. 초등학교 학생까지 카메라를 소유하는 시대가 되다보니 ‘사진’이 소수의 사치가 아니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만한 분야가 되었다.
그 순기능으로서, 예술에 대한 로망을 사진작품으로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사진 전문 월간지 편집장으로서 어떻게 하면 사진으로 예술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는지, 그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문화센터에서, 대학의 평생교육원에서, 사설 사진학원에서 혹은 그룹지도를 통해 사진을 공부하고 있다. 늦은 나이에 출발하여 사진가가 되는 지름길은 무엇이며, 사진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궁금증이다.
사진 전문지 편집장으로서 충고는 일단 “왜 사진을 하려고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그 이유에 따라 목표가 달라질 것이고 목표가 정해져야 그곳에 도달하는 지름길이 보일 것이다. 취미이면서 그것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면 단순히 사진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즐기면 그만이다. 진정한 예술가를 꿈꾸는 전업작가처럼 고민하고 번민할 필요도, 그 흉내를 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소비적인 즐거움의 단계를 벗어나서 나를 표현하고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라면 당연히 더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는 작가로서의 소질과 몰입, 즉 투자가 병행되어야 한다.
필자에게 찾아와 사진집 제작을 의논하고 개인전을 상의하는 분들이 그런 분들이다. 전업작가보다 오히려 더 뜨거운 열정을 보이는 그분들은 대부분 사회적인 성취의 마무리 단계에 있는 분들이다. 이미 열심히 사는 법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사진공부에도 매우 적극적이고 열성적이다. 수년 동안 촬영해온 결과물을 들고 와서 보여주고 조언을 구하는 그 분들에게서 오랜 경륜에서 나온 깊이를 읽게 되고 기대 이상의 작품을 만나는 것은 프로작가들을 만날 때와 다른 즐거움이다. 때로는 그분들이 진짜 부럽기도 하다. 자신이 진정 좋아서 하는 것이기에 ‘행복한 작업’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프로는 눈물겹지만 아마추어는 눈부시다고 할까?
■제3의 눈
옛부터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이니 보는 것에 대한 신뢰감이 짐작이 간다. 장애 가운데 가장 불편한 장애를 시각장애로 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게다. 카메라는 우리의 두 눈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볼 수 있게 하는 제3의 눈이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먼 것을 눈앞으로 끌어당겨 보여주고, 아주 작은 사물을 확대해서 보여준다. 더구나 내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을 내가 원하는 것만 프레이밍해서 간결하게 볼 수 있게 한다. 육안으로 보던 것과는 분명 다른 세상이다.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면 평소에 스쳐 지나던 것들이 다르게 보인다. 즉, 사물에 대한 무관심에서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이,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이, 낡은 것과 새로운 것들이,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이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느껴지면서 내 주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다. 삶의 다양한 표정이 눈에 들어오고 삶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나 자신에게로 귀결된다. 결국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대상에 투사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한 송이의 꽃을 촬영해도 그 꽃 한 송이만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꽃의 향기까지 담으려는 사람이 있고, 꽃과 그 주변까지 한 화면에 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슨 꽃인지 모를 정도로 가깝게 당겨서 그 꽃의 색감과 질감만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물론 꽃에 대한 미의식과 표현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만 들여다보면 작가의 내면이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카메라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지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창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진에 끌리는 근본적인 이유다. 사진의 치명적 유혹은 나르시시즘에 있다. 나를 들여다보는 매력이다. 호수에서, 꽃에서 나무에서, 들판을 부는 바람에서 나를 발견하는 기쁨, 나를 향한 유혹이다. 요즈음 젊은 세대가 끝없이 자기 자신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명 셀카(셀프 포트레이트 카메라)의 유혹이다. 비단 내 얼굴만 찍는 것이 셀카가 아니다. 나랑 무관한 대상을 찍는 것도 결국은 나를 찍는 행위다. 나를 유혹하는 나 자신, 그러니 뿌리칠 수 없는 치명적 유혹이다.
윤세영 / 1956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으며 2010년 『시와산문』으로 등단했다. 산문집 『때론 길을 잃어도 좋다』, 작가론 『한국의 사진가 14』, 역서 『숨어사는 난장이들』이 있다. 현재 월간 『사진예술』 편집장으로 있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전문가의 향취가 느껴집니다.
저는 아마추어 사진가, 단순히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사진은 제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카메라로 바라보는 세상은 여린 마음을 가진 시인의 눈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