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6월, 태안을 향해 가다
태안에 다시 떠나기로 결심한 건 학교 후배의 제안 때문이었다. 학교 후배는 충청도로 자주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그 이유는 리솜 리조트 회원권을 가족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솜 리조트는 충남 예산, 충남 태안, 충북 제천에 있기 때문에 충청도 여행을 할 때 회원권이 있으면 아주 편리하다. 제천에도 발걸음이 닿았으면 좋았겠지만 3박 4일의 일정 중 제천을 포함시키는 건 무리였다. 첫날 예산의 스플라스 리조트에 들린 뒤, 둘째 날에 태안의 아일랜드 리솜, 셋째 날에 천리포 수목원에서 자는 일정으로 충청남도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원래 숙소의 질을 그렇게 따지는 건 아니지만 여행 일정 내내 내리는 비 때문인지 좋은 숙소에 묵을 수 있었던 게 참 다행으로 느껴졌다.
국립공원 이야기 52 - 태안에서 반드시 먹어봐야 할 음식
태안은 태안반도에서 안면도에 이르기까지 수십 km에 걸쳐 서해와 접하고 있는 독특한 지형이다. 이런 이점 때문인지 태안은 서해에서 잡히는 해산물을 위주로 수많은 음식이 발달했다. 밥도둑이라 불리는 꽃게장을 비롯해 서해에서 많이 잡히는 우럭을 이용해 만든 우럭젓국 등이 태안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이 외에도 대하구이, 박속밀국낙지탕, 실치회 등 태안을 대표하는 음식은 수없이 많다.
이 중에서도 태안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은 꽃게장이다. 서해 어딜 가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꽃게장이라고 생각하지만, 태안의 꽃게장의 맛은 특별하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덕분인지 태안의 청정해안에서 잡힌 꽃게로 만든 꽃게장은 가히 밥도둑 중에서도 최고라 꼽을 정도로 맛있다. 태안읍내에서도 꽃게장으로 알려진 맛집이 많으며, 안면도나 태안반도의 한적한 시골에서도 꽃게장 맛집으로 손꼽히는 식당이 많으니 보물찾기 하는 기분으로 태안의 꽃게장을 먹어보는 것도 괜찮다.
꽃게장의 명성에 비하면 많이 밀리지만 우럭젓국도 태안에서 먹어봐야 할 음식 중 하나다. 우럭이 태안에서 많이 잡히기 때문인지 태안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사에 올린 우럭 포를 두부와 채소 등을 넣고 쌀뜨물에 끓여 먹던 음식이라고 한다. 따로 양념하지 않고 새우젓으로 간을 해 맛을 낸다. 덕분에 국물의 맛은 자극적이지 않으며 구수한 국물은 속까지 따뜻하게 데워준다. 주로 겨울에 즐겨 먹는데, 봄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우럭을 잡아 염장하고 반건조시켜 국을 끓여 먹는다.
여행 내내 야속하게 내린 비
스플라스 리조트에서 묵으며 홍성과 예산의 명소를 들린 뒤, 저 멀리 서쪽 끝 안면도로 향했다. 안면도의 리솜 리조트 이름은 아일랜드 리솜으로 태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인 꽃지 해변 바로 옆에 위치한다. 안면도로 가기 위해 태안읍까지 버스를 타고 간 뒤, 1시간 정도 걸리는 농어촌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오후 늦게 도착한 안면도의 날씨는 좋지 않았다. 비가 내릴 듯 말 듯 먹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 아래 세차게 부는 강풍은 세기말을 연상시켰다. 겨울에 평화롭게만 보이던 꽃지 해변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를 덮칠 듯한 무서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름에 꽃지 해변에 들어가 수영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대신 아일랜드 리솜이 갖추고 있는 수영장에 몸을 담글 수 있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아일랜드 리솜에서 호캉스를 보낸 뒤 태안의 다른 관광지도 둘러보기로 했다. 태안은 넓기도 하고 대중교통이 불편해 자동차 없이 곳곳을 둘러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날씨도 좋지 않아 태안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해변에 가봤자 사진으로 보았던 아름다운 모습과는 정반대 되는 풍경이 우리를 맞을 것만 같았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태안과 서산의 불교 유적을 보기로 했다. 태안의 유일한 국보인 태안 마애삼존불과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불, 신비로운 폐사지인 보원사지까지 하루 만에 보기엔 약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것이다.
서산 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는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불교유산이었다. 특히 서산 마애삼존불은 이 불상이 왜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지 단번에 이해시킬 정도로 훌륭한 걸작이었다. 이 두 불교유산에 대해선 추후 서산 여행에서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 여행의 주제인 '태안해안 국립공원'에 따라 태안 마애삼존불만 소개하려고 한다.
태안 마애삼존불은 태안읍에 있어 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택시를 타도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으로 국보로 지정된 불상을 볼 수 있다. 옆동네 서산의 마애 삼존불의 명성에 미치지는 못 하지만 태안 마애삼존불 또한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비록 서산 마애삼존불만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지는 않지만 시대상으로 서산의 그것보다 앞서기 때문에 백제 최고(最古)의 마애불상이란 점에서 국보로서의 가치가 인정된다.
태안 마애삼존불은 우리나라 마애불상의 초기 예로 부채꼴 바위 면에 사각형 감실을 마련하여 중앙에 보살상을 두고 좌우에 불상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1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삼존불상과 달리 2구의 불입상과 1구의 보살입상이 한 조를 이루는 특이한 삼존불상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2구의 불입상은 양감 풍부한 얼굴에 크게 번지는 미소, 넓게 벌어진 당당한 어깨와 장대한 체구, U자형 주름과 y형 내의가 보이는 착의법, 도톰한 듯 날카로운 대좌의 연꽃무늬 등 세부적으로는 거의 동일한 양식 특징을 보인다.
좌우 두 불상 사이에 끼여 있는 듯 뒤로 물러나 작게 새겨진 보살입상은 높은 관에 아무런 무늬도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본래는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타원형으로 길고 통통한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 원만상이다. 어깨를 덮어 내린 천의는 길게 내려와 무릎 부분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며 묵중하게 처리되었으며 배 앞에 모은 두 손은 오른손을 위로 하여 보주를 감싸 쥔 이른바 봉보주인(捧寶珠印)을 나타내고 있다.
태안 마애삼존불을 보고 나니 비가 더욱 세게 내리고 있다. 걸어서 내려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날씨가 이러하니 다시 택시를 탈 수밖에 없다. 이왕 택시를 탄 거 태안읍에서 꽃게장 맛집으로 소문난 곳에 곧바로 가기로 했다. 바다꽃게장은 태안읍의 꽃게장 맛집 중 하나로 주인이 직접 배를 타고 잡은 꽃게를 사용한다고 한다. 제철이 아니었음에도 태안에서 먹는 꽃게장은 밥도둑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옆동네 서산의 불교유적을 보고 난 뒤 다시 태안으로 와서 향한 곳은 향토꽃게장이었다. 향토꽃게장도 식당의 이름답게 꽃게장이 유명하지만 우럭젓국을 먹는 것도 좋다. 우럭젓국은 매운탕처럼 자극적인 맛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심심한 음식임에 틀림없다. 특별한 양념장 없이 새우젓만 첨가한 우럭젓국을 한 숟가락 떠먹어보면 실망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하지만 먹다 보면 참 맛을 아는 것이 꼭 만나보면 그 진가를 알게 되는 충청도의 성향과 비슷하다.
끝없이 오는 빗줄기 속에서 태안반도로 향하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음에도 야속한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다. 안면도의 아름다운 해변 이후 태안반도의 해변을 보는 것이 목표였는데, 이런 날씨에서 굳이 해변에 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미 숙소 예약으로 인해 일정을 바꾸는 건 무리였던 터라 어쩔 수 없이 태안반도로 향했다. 태안반도에서 쉬어간 곳은 천리포 수목원으로, 한국으로 귀화한 민병갈 (1921~2002)이 조성한 수목원이다. 다양한 식물을 만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천리포 수목원의 가장 큰 장점은 수목원 내 멋진 숙소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와중에도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천리포 수목원이 다음 목적지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