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전승되어오는 탈놀이로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다 그 근원은 서낭제의 탈놀이로서, 우리 나라 가면극 전승의 주류를 이루는 산대도감계통극과는 달리 동제에 행하여지던 무의식극적(無意識劇的) 전승이다 서낭제에 탈놀이를 놀았던 곳은 경상북도 안동시 일대에서는 하회리와 병산리가 알려져 왔으나, 하회별신굿은 1928년(戊辰) 이래 중단되고 병산별신굿도 거의 같은 시기에 중단되어 하회와 병산의 가면 12종 13개만이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온다 계승자는 1928년 마지막 별신굿 때 각시역을 맡았던 이창희(李昌熙, 1913∼1996)이다. 이 놀이는 10년에 한 번씩 혹은 신탁(神託)에 따라 임시로 거행되는 별신굿의 하나로서 행해지는데, 별신굿은 먼저 섣달보름날 산주(山主)가 마을 뒷산의 서낭당에 올라가서 대를 내려 신의 뜻을 묻고, 또 마을 어른들의 동의를 얻어 별신굿 준비를 시작한다 하회리의 서낭신은 ‘무진생 서낭님’으로 17세 처녀인 의성김씨라고 하고, 혹은 15세에 과부가 된 서낭신으로 동네 삼신의 며느리신이라고도 전한다. 준비과정은 먼저 부정이 없는 목수를 골라 서낭대와 내림대를 만들고, 가면과 악기 등 모든 도구를 점검한다 이어 스무아흐렛날 동민대표들이 동사(洞舍)에 모여서 부정이 없는 사람들 중 배역에 맞추어 광대 12명과 산주 외에 서무를 맡는 유사(有司) 2명, 가면관리를 하는 청광대와 무동꾼들을 선정하고 섣달 그믐날부터 정월 대보름날까지 합숙에 들어간다.「하회별신굿 탈놀이」는 대내림에서부터 시작된다. 정월 초이튿날 아침 산주와 광대들이 서낭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서낭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서낭대에 옮겨 달고 하산한다.동사에 다다르면 서낭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고, 모여든 마을 사람들 앞에서 농악을 울리며 한바탕 놀이를 벌인다. 이창희의 구술(口述)에 따르면, 탈놀이의 첫째마당은 ‘각시의 무동’마당이다. 각시광대는 무동을 타고 꽹과리를 들고 구경꾼들 앞을 돌면서 걸립(乞粒)을 한다.이 걸립은 탈놀이 전마당을 통하여 수시로 행하여졌고, 이렇게 모은 전곡(錢穀)은 모두 별신굿 행사에 쓰고, 남으면 다음 행사를 위하여 세워둔다. 둘째마당은 ‘주지놀이’로서 주지는 곧 사자를 뜻하며, 액풀이마당으로 벽사(辟邪)의 의식무(儀式舞)라는 의미를 지닌다. 셋째마당은 ‘백정(白丁)’마당으로 백정이 춤을 추다가 사람이 멍석을 뒤집어써서 만든 소를 죽여 우낭(牛囊)을 꺼내어 구경꾼들에게 판다. 이것도 걸립의 일종으로, 이 돈도 별신굿행사에 쓴다. 넷째마당은 ‘할미’마당으로 쪽박을 허리에 차고 흰 수건을 머리에 쓴 할미광대가 등장하여 살림살이를 한다. 베를 짜면서 고달픈 인생살이를 「베틀가」에 얹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쪽박을 들고 걸립한다. 이처럼 각시걸립과 백정걸립에 이어 할미걸립까지 세 마당의 걸립이 계속되는데, 이 걸립마당들은 이 탈놀이의 주제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파계승마당과 양반풍자마당을 위한 도입부 구실을 한다. 다섯째마당은 ‘파계승’마당으로, 부네(妓女 혹은 小室)가 오금춤을 추며 등장하여 치마를 들고 오줌을 눈다. 이때 중이 등장하여 이 광경을 엿보다가 흥분하여 부네를 옆구리에 차고 도망간다. 이 마당은 대사 없이 진행된다. 여섯째마당은 ‘양반과 선비’마당으로 양반이 하인인 초랭이를 데리고 나오고, 선비는 소첩인 부네를 데리고 나온다. 초랭이가 양반과 선비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서로 인사를 시키고는 자기가 뛰어들어 양반 대신 선비 인사를 받는다. 초랭이는 계속해서 양반을 풍자하고 골려준다. 양반과 선비는 서로 문자를 써가며 지체와 학식을 자랑하고 춤을 추고 노는데, 이 때 별채〔別差〕역인 이매가 나와 환재〔還子〕 바치라고 외치면 모두 깜짝 놀라 도망간다. 여기서는 관리가 마을사람들에게 곡식을 거두면서 중간착취하는 횡포를 풍자하고 있다. 이로써 여섯 마당의 탈놀이는 끝난다. 섣달 그믐날부터 동사에서 합숙한 일행은 매일같이 동사 앞마당이나 초청받은 대갓집에 가서 탈놀이를 하는 등 14일까지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지내다가, 15일이 되면 아침밥을 먹고 나서 서낭대를 모시고 서낭당에 올라가 당제를 지낸다. 제사는 산주가 주제하며, 축문은 없고 비념만으로 마을의 평안과 풍년들 것을 축원한 다음 종일 소지(燒紙)를 올려 계속된다. 광대들은 처음 탈을 쓰지 않고 산주와 더불어 서낭당에 재배한 뒤 서낭당을 돌면서 풍물을 치고 나서, 탈을 쓰고 서낭당 둘레에 모여든 구경꾼들 앞에서 탈놀이를 놀았다. 저녁무렵 당제를 마치고 서낭대와 내림대는 당 처마에 매어달고, 광대들은 청광대에게 각기 탈을 반납하고 보름 만에 합숙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간다. 다만, 유사와 광대 1명, 양반광대·각시광대만이 남아 하산하여 동네 입구에서 혼례마당과 신방마당을 치른다. 멍석 위에 장구 2개, 그 위에 고깔을 하나씩 놓아 혼례상을 마련하고, 양반광대가 혼례식을 진행하며, 각시광대와 남은 광대 하나가 각기 탈을 쓰고 신부·신랑역을 맡아 각시가 두 번, 신랑이 한 번 절하고 혼례마당을 끝낸다. 이어 같은 멍석 위에서 신랑·신부의 첫날밤 행위를 모의적으로 행함으로써 신방마당을 치른다. 이 혼례마당과 신방마당은 17세 처녀신인 서낭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치르는 것이라 하는데, 풍요의례(豊饒儀禮)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신방마당이 끝나면 각시광대도 탈을 청광대에게 주고, 청광대는 탈을 동사에 봉납하고 귀가한다. 마지막으로 유사의 책임하에 동네 입구에서 무당들이 허천거리굿을 행하여 별신굿 동안 묻어 들어온 잡귀·잡신들을 몰아낸다.「하회별신굿 탈놀이」의 가면은 주지(2)·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 10종 11개가 현재 전한다. 가면의 재료는 오리나무이며 그 위에 두 겹, 세 겹으로 옻칠을 한 뒤 색을 칠했다. 하회리에서는 이 탈들을 신성시하며, 특히 각시탈은 서낭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때 외에는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산주가 고사를 지내야 한다. 이처럼 의례용 가면으로서의 신성성을 지니고 있다. 악기는 농악기로서 탈놀이 광대들이 농악대를 겸하였고, 탈놀이 마당과 마당 사이에 한 차례씩 농악을 울려 놀이마당을 구분하였다. 장단은 주로 세마치장단을 많이 쳤다고 한다. 춤이나 동작은 놀이할 때 서낭님이 시켜서 저절로 하게 된다고 일러오며, 다른 탈춤의 경우처럼 춤사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 즉흥적이며 일상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것이었다고 한다. 춤사위로는 몽두리춤과 오금춤이 있다.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는 이상호(李相浩, 백정역)가 있다. 채록본으로는 최상수(崔常壽)채록본(1959)과 유한상(柳漢尙)채록본(1959)이 있는데, 놀이마당의 순서가 약간 다르다. 2000년 김춘택(할미), 임형규(상쇠)가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선정되었다.
출처: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하회별신굿 탈놀이(河回別神─))
사진 : 문화재청 & Google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탈들 (오리나무와 한지 옻칠을 해서 만듬)
양반 (한국을 대표하고 안동을 대표하는 탈로 한국인의 웃음을 잘 표현했다 흰 민복에 흰 도포를 입고 정자관을 쓰고 갖신을 신고 부채를 들었다 혼례마당에서는 주례를 본다)
선비 (양반과 대립하는 인물로 팔대부 문상시대 팔서육경이라는 엉터리 문자를 써서 양반을 골려주는 역할을 한다 다혈질 적인 얼굴이며 흰 민복에 옥색도포 유건을 쓰고 갖신을 신고 예전에는 부채를 들었으나 지금은 장죽을 든다 혼례 마당과 신방 마당에 신랑으로 나온다 )
백정 (심술궂고 험상궂은 얼굴이며 소를 잡아 살생을 한다 흰 민복에 패랭이를 쓰고 짚신을 신었고 도구로는 나무로 만든 도끼와 칼 그리고 짚으로 만든 오쟁이(곡물을 갈무리하거나 물건을 담아 두기 위해 짚으로 엮어 만든 물건. `섬'과 비슷하나 크기가 작음.)를 든다)
할미 (15살 어린 나이에 청상 과부가 되어 고생 고생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얀 저고리에 회색 치마를 입고 머리수건을 쓰고 미투리를 신고 바가지를 들고 베틀에 앉아 신세타령을 부른다 양반 선비 마당에서 양반과 선비가 소 불알 하나 가지고 싸웠다고 나무라 한다)
중 (호탕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부네가 오줌을 싸는것을 보고 파계한다 승복과 장삼을 입고 붉은 가사를 두르고 짚신을 신고 나온다 염주와 단주를 들고 나온다 신방마당에서 총각을 살해하고 각시와 도망을 친다)
초랭이 (양반의 종으로 방정 맞고 촐싹 거리는 성격이다 흰 민복에 검정 더거리를 입고 벙거지를 쓰고 짚신을 신는다 선비의 하인인 이매와 쿵짝이 잘 맞는다)
부네 (한국과 안동을 대표하는 여성탈이며 한국 여인의 미소를 잘 표현했다 갸름한 얼굴이며 남정네들을 유혹한다 노란 저고리에 파란 치마를 입고 꽃신을 신는다)
이매 (턱이 없는 하회탈로 옛날에 허도령(또는 안도령)이 하회탈을 다 깎고 만들고 나서 마지막으로 만든 것이 이매탈인데 김씨처녀가 허도령을 짝 사랑하다가 허도령의 탈방을 엿보는 바람에 그만 피를 토하고 죽자 결국 이 이매탈이 허도령의 미완성 작품이자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매탈은 턱이 없는 탈이 되었다고 한다 파계승 마당 마지막에 초랭이와 같이 나오는데 흰 민복에 조끼를 입고 짚신을 신고 나온다 연희 도중에 구경꾼들을 불러다가 같이 춤을 춘다)
각시 (고된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 한 여자의 표정을 표현했다 눈을 감고 있으며 입은 꾹 다물고 있으며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이라 시집살이가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탈의 얼굴 표정을 통해 똑똑히 보여준다 초록색 치마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고 한삼을 끼고 꽃신을 신었다 무동마당에서 나오고 혼례마당과 신방마당에서 나온다)
주지 (2개 상상의 동물로 주지마당에서 나온다 흰 민복에 짚신을 신고 몸통 전체에 포대를 뒤집어 썼으며 탈은 나무판에 눈만 그리고 코와 입은 나무를 이용해 따로 깎아 손잡이로 만든다 손으로 가지고 연희 하는 손탈이다)
발견 당시 모습
복원 한 모습
별채 (일본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탈이며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전리품으로 가져 간 탈이다 발견 당시 옻칠이 되었고 조각이 잘 되었으나 벌레가 갉아 먹어서 탈의 형체를 알아 볼수가 없었다 일본 규슈(九州) 구마모토(熊本) 현 야쓰시로(八代) 시립박물관이 19일부터 전시할 예정인 탈을 조사해 본 결과 우리 국보인 하회탈과 조각 기법과 생김새가 같은 것으로 드러났다”며 “별채 탈은 사라져 형태를 알 수 없지만 탈의 얼굴 모양으로 보아 세금을 징수하는 포악한 관리인 별채의 탈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이번 별채 탈 발견은 하회탈의 완전한 복원 및 연구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전경욱 교수는 8월에 야쓰시로 시립박물관의 고증 의뢰를 받아 탈을 확인했으며 “인물의 표정이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조각됐으며 코와 광대뼈의 생김새, 옻칠 흔적이 하회탈과 같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또 “사라진 탈 3종의 형태를 기록한 문헌은 없지만 하회별신굿 놀이에서 역할이 13종으로 전해 왔으므로 사라진 탈의 종류는 3종이 맞고 그 가운데 별채의 생김새와 이 탈의 모습이 가장 가깝다”고 말했다 야쓰시로 시립박물관은 이 탈이 임진왜란 때 왜군의 장수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전리품으로 일본에 가져갔던 유물이라고 확인했다. 이에 따라 이 별채탈은 늦어도 16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별채는 하회별신굿 탈놀이 일곱번째 마당인 양반 선비마당 맨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환재(환곡) 바쳐라!"라고 크게 한 마디하는 역할이 전부다.양반과 선비의 위선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이 마당이 끝날 무렵 느닷없이 나타나 '빌려간 곡식을 이자를 쳐서 갚으라'고 외치면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혼비백산해 자리를 뜨는데 당시 환곡 제도의 폐해로 고통을 겪던 백성들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이렇게 짧은 역할이지만 지금까지는 별채탈이 전해지지 않아 이매(선비의 하인)탈이 그 역할을 대신해 왔다 당시 별채 복장은 흰 민복에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짚신을 신고 나왔다고 한다)
하회탈 중에서 현재 총각과 별채 떡달이는 전해지지 않지만 최근에 별채탈이 발견 되어서 다시 한번 잃어버린 하회탈을 연구하고 찾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
사진 : 하회동탈박물관 & Google
첫댓글 다음 시간에는 강릉 관노 가면극을 소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