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9 금요 성령집회 / 최용희 목사
말씀 : 베드로전서 4:7-11
제목 : 만물의 마지막 때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할렐루야~!
오늘도 이렇게 금요성령집회에 주님의 말씀을 사모해서
또 주님을 은혜를 사모해서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 그리고 능력이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벌써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한 해가 마감될 때면, 그 해를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가 무엇인지 발표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웹스터에서는 올해의 단어로 '오센틱'이라는 단어를 선정했습니다.
진짜, 진품 이러한 뜻을 담고 있는 '오센틱'입니다.
오늘날에는 AI라든지 디페이크라든지 GPT라든지 여러가지 기술들이 발달하면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사를 쓴 것이 사람인지 컴퓨터인지를 구별하기가 어렵고,
영상 속에 나오는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구별하기 어려운 시대가 현대사회입니다.
과학기술이 이렇게 점점 발달함에 따라 가짜가 점점 더 세상에서 많아지고 있지요.
그렇게 때문에 가짜가 많아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짜가 가지는 가치는 상대적으로 더 커지고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오센틱, '진짜', '진품'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매우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센틱'의 중요성은 과학기술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살펴보면 진짜 교회의 중요성이 더욱 더 절실해 지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 위임 목사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홍수가 나면 물은 많은데 먹을 물은 없습니다. 참 신비롭지 않습니까..
온 천지에 물이 그렇게 많은데 먹을 물이 없다라는 이 아이러니, 이게 바로 오늘날 위 한국사회의 모습입니다.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방을 다니다 보면, 상가마다 아파트 단지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여지없이 십자가가 밝게 붉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십자가들이 세상을 비추고 있지만,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더 풍요로워졌습니까? 사람들은 더 행복해졌습니까?
과거보다 더욱 더 치열한 경쟁사회여서 정신적으로 타락한 문화에 중독되어 가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아졌습니까?
자살율은 왜 그렇게 높으며, 게임과 도박은 말할 수도 없고 이제는 마약까지 한국사회를 점점 잠식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붉은 십자가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을 통해 전국 어디에 있는 교회이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고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공허하고 중독에 더 많이 빠지며 더 많이 외롭고 정신적인 질병을 더 많이 앓고 있다는 것이지요.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 줄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을 닮아가는 교회가 점점 많아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의 논리를 따라가며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어려운 일보다는
세상의 이익을 탐하며 세상의 가치관을 수용하는 쉬운 길을 선택하는 교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교회들, 그러한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영혼의 갈급함에 목 말라 하는 성도들은
더욱 더 말씀을 찾아서 예배를 찾아서 하나님을 찾아서 헤매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리다 보니까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라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여
세상을 살리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지난 코로나 기간 이러한 현상들은 더욱 더 급속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지요.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만나야지만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한 해결자이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한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예수님을 말씀을 추구하는 교회, 말씀을 사모하는 교회에서만 만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결국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진짜 교회에서 한국 교회가 점점 멀어짐에 따라
세상은 생수의 근원이 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세상은 더욱 더 어두움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짜 교회는 세상적인 교회가 점점 늘어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 더욱 더 빛을 잃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오센틱', 곧 진짜 물은 홍수일수록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주안교회가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가 아니라 말씀을 추구하며 말씀 속에서 길을 찾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안교회가 이러한 어두움의 시대 속에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고
선교적 삶으로 복음의 빛을 비추어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래서 시대를 깨우고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살리는 그러한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본문은 이러한 참된 교회가 되는 몇 가지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우리로 하여금 종말, 곧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 상반절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아멘!
초대교회 성도들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실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었지요.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그 십자가에 기반한 탁월한 윤리의식과 선교적 삶의 열정들은 점점 식어가게 되었습니다.
곧 오실 예수님이 안 오시다 보니까 지치기도 하고, 언제 오실지 모르다 보니까
기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게 되는 것이지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라나타! 곧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설교가 강단에서 약해지고 줄어들수록
성도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보다는 현재적인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현재 어떻게 하면 내 삶이 더 풍요로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사람들과 행복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시험이 있다라는 사실을 알고 공부하는 학생과 그냥 공부만 하는 학생은 성적이 전혀 다르게 나옵니다.
은퇴할 날이 있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일을 하는 직장인들과,
(제가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박사 논문을 썼거든요, 꽤 잘 압니다. 믿으셔도 돼요)
은퇴하는 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직장생활을 하는 분들과
은퇴하는 날의 생각 없이 그냥 그냥 직장생활 하는 분들은 삶과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사임하는 날이 있다라는 사실을 알고 사역하는 사람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역을 바라보는 안목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고 하는 것이지요.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현재만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찾아온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늘의 중요성, 지금의 가치, 현재 누리고 있는 은혜의 풍요로움을 보다 더 생생하게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게 영원하지 않다' - 여러분의 그 아름다운 미모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그 찬란한 아름다움이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4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나서 제가 이 자리에 또 선다면,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분이 한 분도 없겠지요. 그때 그 아름다웠던 분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렇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 '오센틱'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꿈이 있습니다. 꿈을 기억하십시오"라고 하는 주님의 이 절대적인 명령을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의 삶과 우리들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나의 위치가 결코 영원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알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저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주안교회에 와서 제일 감사했던 것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저 뚜껑입니다.(교회의 천장, 지붕)
뚜껑을 보면 어떻지요? 저기가 창으로 되어 있어요. 저기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하늘이 보입니다.
아마 이건 제 해석입니다.(건축자의 의견과는 관계없는)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십시오!" 이게 어쩌면 우리 주안교회의 지붕(천장)이 갖고 있는 뜻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곳에 있는 우리 주안의 모든 성도들이 저 천국 저 하늘을 바라보면서(열려 있잖아요.)
우리가 갈 곳은 저기입니다. 땅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내 옆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로는 속상하기도 한 그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두번째로,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7절 하반절입니다.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아멘!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의 원어는 무슨 뜻인가 하면 "기도하기 위해 정신을 맑게 하십시오"라고 하는 뜻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창원에 교구 결혼식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결혼식장 근처에 주기철 목사님의 기념관이 있어서 그곳을 잠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님의 사역에 대한 여러 내용들을 좀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 하나의 글이 제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진으로 찍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주기철이 민족 계몽 운동을 할 즈음 일제는 한국을 영구 식민지화 하기 위해 화투, 아편, 창녀를 보급했다.
이러한 시도는 설움과 울분을 삭이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애국애족의 대열에 서서 일제를 향한 항일운동에 나서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젊은이들의 정기를 흐려 놓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으려 한 술책이었다.
이에 격분한 청년 주기철은 오산학교에서 배운 민족애를 바탕으로
일제의 이러한 만행에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지역 청년을 상대로 계몽운동을 하였다."
저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으로 찍었어요.
주기철 목사님은 시대를 읽는 눈이 그 시대의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완전히 탁월했습니다.
영적으로 주기철 목사님은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일제가 우리 조선 우리 한국에 보급했던 화투와 아편과 창기가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 때문에 젊은이를 망가뜨리는 거다 라고 보는게 아니라,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에 탐닉하면 결국은 정신을 잃어버리게 된다라는 사실을 주기철 목사님은 보셨던 거예요.
이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면 한국인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되고, 한국인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되면
10년이 지나든 20년, 30년이 지나든 반드시 일본의 노예가 된다라는 사실을 주기철 목사님은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셨고 항거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탁월한 영적인 안목을 가진 목사님이 계셨기 때문에 당시에 조선의 교회들은 시대를 깨우는 등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한국도 똑같습니다. 젊은이들이 도박과 게임과 성 중독은 이미 너무 보편화되었고,
동성애를 포함한 타락한 문화는 한국사회 저변에 다 깔려 버렸습니다.
이제는 마약을 중고등학생들까지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타락한 문화들은 육체적 쾌락을 가져다 줄지는 모르지만, 일제시대의 화투와 아편과 창기들처럼
다음세대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의 정신을 흐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게 더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문화에 기독교인들이 깨어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을 다시 또 순교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목사님이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삶을 태워 버리면서까지
정신이 깨어나야 한다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정신이 깨어나야 한다라고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주기철 목사님은 저 신사참배에 대해서 항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포함하여 모든 문화들이 결국은 한민족의 정신, 그리스도인의 정신,
기독교인의 정신이 파괴되도록 만드는 것에 저항하셨다는 점에서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의 가장 위대한 목사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그래서 베드로는 같은 말로 초대교회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정신을 맑게 유지하십시오!
사탄이 당신의 마음을 유혹하지 못하고 흐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베드로는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이 맑은 사람은 한쪽으로 치우쳐 휩쓸리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좌우를 분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꼭 붙잡고 있습니다.
사실 정신이 맑지 못하면 기도할 수가 없지요. 정신이 맑은 사람은 역사를 종말로 이끌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종말 이후에도 영원토록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 하나님과 붙어 있기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한계를 가진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연약한 존재,
그래서 어쩌면 우리들의 삶 자체가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정신이 맑은 사람들은 비로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땅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것들을 향한 진짜 기도는 정신이 맑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듭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 5:8)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아멘!
오늘도 우리가 기도할 것입니다.
땅의 것도 구해야 하지만, 우리의 정신이 땅의 것으로 인해 흐려지지 않을 만큼만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정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먼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세상에서 진짜 교회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선교적 교회로 자리매김 하게 될 줄 믿습니다.
세번째로,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사랑해야 합니다.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본문 8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아멘!
우리 말 성경에는 없지만, 원어를 보게 되면 "사랑을 하되 너희 신을 위해 사랑을 해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뜨겁게 사랑한다"라는 말은 정서적으로 뜨거운 사랑을 말하는게 아니라
운동선수가 팽팽한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하게 노력하는 그러한 사랑을 뜻합니다.
즉, "변함없이"라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그러므로 원어에 가깝게 '사랑하십시오'라고 하는 본문을 번역해 보면 이런 뜻입니다.
"너희 자신을 위해서 변함없이 열렬하게 사랑하여 이웃의 죄를 덮으시기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랑하여 공동체에 속한 타인의 죄를 덮어주는 것이 왜 나를 위한 것입니까? 생각해 보셨나요?
내 옆에 있는 구역원들, 내 옆에 있는 찬양대원, 내 옆에 있는 믿음의 동료, 내 옆에 있는 사역자들의 죄를 덮어주는 것이
사실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라고 베드로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사랑에 매여 있지 않으면 사이로 틈이 생깁니다.
제가 하나 질문해 볼게요.
여러분, 혹시 지금도 배우자를 사랑하시나요? 그러면 결혼을 결정할 때만큼 사랑하십니까?
사랑이 약해지고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는 틈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틈은 사탄이 들어오는 좋은 공격루트가 됩니다.
사탄의 원어는 '디아블로스'입니다. 원어적으로는 '참소한다', '고소한다', '비방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공동체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갈라치기라고 하는 전략을 자주 사용합니다.
참소하고 고소하고 비방해서 사랑과 신뢰를 깨뜨려 버리는 것이지요.
특별히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는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납니다.
여러분, 요즘도 남편이 다 이해가 되시나요? 다 이해가 되면 사랑한단 뜻인 거고,
가끔 '왜 저럴까' 이해가 잘 안된다라면 사랑이 쬐끔 식었는지도 모릅니다.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나요.
그리고 이러한 불필요한 오해로 말미암아 마음이 나뉘어지게 되고 더 쉽게 분열됩니다.
바로 그 때 사탄의 갈라치기 전략은 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언 10:12) 미움으로 인해 서로를 조롱하고 비방합니다.
그 결과 관계 속에서 선한 것들은 다 사라지고 수치스러움과 불명예만 남아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은 사랑이 없는 곳, 미움만 있는 곳에는 갈라디아서 5장 15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상처를 주다가 피차 멸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이 없는 그 한 가지, 사랑이 없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 그 틈 하나가 사탄이 비집고 들어와서
그 틈을 멀리 만들어서 결국은 둘이 싸우고 싸우고 싸우다가 파멸하고 멸망되도록 만드는 것이 사탄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권면하는 것입니다.
"틈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사랑에 매여 있으십시오. 변함없이 열렬하게 사랑하십시오.
죄를 덮을 만큼 사랑하십시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 속에 있는 한 지체의 연약함과 죄를 덮어버리는 것은
사탄이 공동체 속에서 장난치지 못하도록 만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진 가장 위대한 능력인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지체가 가지고 있는 죄, 내 옆에 있는 지체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보이더라도
그것을 덮기 위해서,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하나님 더 많이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더 많이 아끼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저 연약함을 내가 감싸 안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내 마음은 그 지체와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분열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면 사탄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못들어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알았기에 "사랑하되 열렬히 사랑해서 허물까지 덮어 버리십시오"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이웃의 죄를 덮어주는 것은 그래서 내 삶 속에 사탄이 들어오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은 나를 보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타인의 죄를 덮어주어야 하는 보다 큰 근본적인 이유는 나 역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지금은 내가 의인의 자리에 서 있을지라도,
그래서 누군가의 죄와 연약함을 내가 보고 정죄할 수 있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분명히 나도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나의 죄와 연약함을 용서 받아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먼저 용서해 주어야
나도 누군가의 용서, 누군가의 긍휼함과 누군가의 자비가 필요할 때, 그 사람으로부터 그 사랑과 자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영원한 힘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의인의 자리에 재판관의 자리에 영원토록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혹, 지금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자리에서 내려와
죄인의 자리에,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자리에 내려가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숙명을 아는 사람이라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기에 지혜로운 자입니다.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에 매여 이웃의 죄를 용서하고 덮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탄이 공동체 속에 틈타지 못하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힘이 빠졌을 때 누군가로부터 용서와 긍휼과 자비를 우리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아멘!
이 베드로전서가 처음 쓰여졌을 때에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매우 심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다 라고 말하면 친구와 집에서 환영과 환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향과 친구의 집을 멀리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유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돕기를 원하셔서 낯선 사람을 환대하며 봉사할 것을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읽는데 마음에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셔서 수백만 명을 먹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반석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게 만드셔서 목마른 사람들이 없도록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수천 명 수만 명을 먹일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능력이 많은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옆에 있는 이웃을 섬겨라 옆에 있는 이웃을 환대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작고 작은 우리들의 손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환대하는 우리들의 작은 손 위에 우리 하나님이 계신다라는 사실이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느껴지는데, 너무 감사하고 은혜가 되더라고요.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가 이웃을 위해 내가 그 환대를 위해 짊어지고 있는
작은 봉지 속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담겨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작은 자를 섬기고 작은 자를 돌보는 그곳에 온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놀라운 손이 담겨 있습니다.
이웃을 환대하는 바로 그 자리에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 비로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저 우주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이웃을 위해 내가 내민 손입니다.
배고파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사탕 하나를 꺼내서 그의 손에 쥐어주고 '힘내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그 작은 손 하나에 온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손이 담겨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여러분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봉사는 그래서 특권인 것입니다. 창조주의 손에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특권인 것입니다.
세상은 대통령과 같이 눈에 보이는 힘, 그 힘과 잡는 손, 그게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통령과 손잡은 손을 커다랗게 사진으로 찍어 놓지요.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러한 정치적인 힘들이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그렇지만, 정신이 맑아서 내가 사라질지라도, 온 우주가 다 사라질지라도 하나님은 영원토록 거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바로 우리들의 손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적 삶으로 복음의 빛을 비추기를 소망합니다.
선교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새벽에 위임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가 다윗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열심히 사용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사용하고 또 사용하고 사용하다 보면,
이러한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영광의 때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 반드시 찾아오게 될 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바로 우리들의 손을 오늘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다라는 사실을 믿기에
환경에 적응하고 그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신실하게 성실하게 진실하게...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하듯이....
그러면,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아름다운 열매로 거두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은사를 사용해 선교적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연습하고 사용한 은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더 풍성한 은혜를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현대 사회는 물은 많지만, 먹을 물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물이 부족한 시대에서 생수가 가지는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우리 주안의 성도들이 이러한 시대 속에 '오센틱' 크리스찬, 진정한 크리스찬,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의 역할을 감당하는 그러한 크리스찬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과 같이 그러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결심하며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찬양 : 주는 완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