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주 검성 독고진천은 세간에서 검의 끝을 봤다고 평
해지는 인물이다. 그는 나이가 팔십이 넘었지만 외모만 봐서
는 환갑도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가진바 무공이 너무 엄
청나 세월마저 그를 조금 비껴갔다.
세간에 그는 꽤나 근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독고
진천이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장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무림
맹의 장로들이 그 앞 탁자에 둘러앉아서 은자가 새겨진 판자
를 만지작거렸다.
검 좀 쓴다는 화산의 장로가 판자의 새겨진 면을 쓰다듬었
다.
"흠. 진정 실력이 보통은 아니군. 검의 길이 무엇인지 조금
은 깨달은 자의 솜씨야."
좋은 검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서는 다른 장로들도
그걸 보고 할 말은 많다.
"하지만 제가 하고자 하면 못 할 것도 없는 솜씨지요. 뭐,
이 그림 그리는 재주는 나보다 나은 것 같지만 검 실력은 우
리가 이렇게 모일 수준까지는 아닌 것 같군요."
이걸 가져온 청허자가 나섰다.
"어허. 사람들 그림 보는 수준하고는. 중요한 것은 검 실
력이 아니오. 쾌검을 가지고 그 객잔에 있는 것 같은 품격 높
은 십장생도를 단숨에 만들었다는 거지요. 그건 진정 어려운
일이니까 너무 검술만 보지 마시오. 검술만 본다면 나무를 보
느라 숲을 보지 못하는 꼴이오."
개방의 장로 취걸개가 청허자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면
서 질문했다.
"늙은 도사, 혹시 그 객잔 주인에게 속은 거 아냐? 사실은
어떤 장인이 만들었거나 아니면 노년의 고수가 남긴 거 아
냐?"
그 말에 청하자가 탁자를 쳤다.
"늙은 거지 눈에는 거지같은 짓만 보이나보군. 내가 일반
인의 거짓말을 구분할 정도 눈도 없는 줄 아시오?"
"거 왜 흥분하고 그러나. 하도 안 믿어지는 말이니까 그러
지. 반로환동의 고수라니. 쳇."
무림맹주 독고진천은 평생 검을 닦느라 그림에는 별 재주
가 없다. 그림을 보니 좋은 줄은 알겠는데 청허자처럼 인생이
니 뭐니 하는 것까지 구분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무림맹주 체
면이 있어 내색은 못하고 가만히 손을 들었다. 장로들이 일제
히 그를 쳐다보았다.
"반로환동의 고수라. 확실히 믿어지지 않는 말이기는 하
오. 무림 역사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은 몇 건 있지만,
현 시대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취걸개가 반가운 얼굴로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하아! 것 보라고. 맹주님도 그리 말하시잖소?"
독고진천이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현대에 그런 경지의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은 있
소. 평생을 깊은 산중 심처에서 무공 수련에만 뜻을 두는 사
람들 중 누군가는 반로환동의 경지에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 정도가 되면 아무리 무공만 수련했다고 하더라도 무림에
출도하고 싶어지겠지. 그런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
이번엔 청허자가 취걸개 쪽으로 손을 뻗어 탁자를 쳤다.
"그것 보라니까. 맹주도 저리 말씀하시지 않는가? 자네가
직접 그 객잔, 십장생에 가서 십장생도를 봐야 해. 그걸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이번엔 취걸개가 청허자 쪽의 탁자를 또 쳤다.
"어허. 그 객잔 주인이 워낙 놀라 그리 봤을 수도 있잖아.
시간은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거니까. 목숨을 걸고 집중하면
느리게 흐르는 게 시간이거든."
청허자가 벌떡 일어나서 취걸개 바로 앞부분 탁자를 강하
게 내리쳤다. 어느새 공력을 운기했는지 탁자 위에 검게 타
들어간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
"겨우 객잔 주인이 그런 무학의 깊은 묘리를 일 리가 없잖
은가! 거지가 도사와 놀자는 건가!"
취걸개도 벌떡 일어나서 청허자 바로 앞 탁자를 쳤다. 탁자
가 요란한 소음과 함께 커다란 손 모양으로 터져나갔다.
"면장으로 위협하면 내가 물러설 줄 알아? 내 옥룡팔장도
만만치는 않거든!"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는 것을 보고 독고진천이 손을 저었
다.
"이 사람들. 진정들 하시게나. 어찌 그리 만나기만 하면 싸
우시나들. 잘 지내는 게 신기하구만."
취걸개가 먼저 발끈했다.
"맹주, 그 무슨 말씀이시오? 늙은 도사가 먼저 시비를 거는
것을 보셨잖소."
청허자도 할 말은 많다.
"흥. 무식한 거지가 예술을 알 리 없지. 맹주, 내가 그의 무
공을 가지고 반로환동의 고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
장생에는 맹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연륜이 느껴집니다. 그건 결
코 젊은 놈이 만들 수 없습니다. 인생의 쓴맛을 본 자가 아니
면 그런 예술작품은 봐도 이해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예술품 하나 정도야 타고나면..."
"그 정도로 뛰어난 무공과 인생을 담는 듯한 그림 실력을
젊은 놈이 동시에 가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어느 하나
도 젊은 놈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로지 반로환동으로
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청허자의 말을 들은 독고진천은 생각에 잠겼다. 의자에 앉
아 심각한 얼굴로 고뇌하는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잠시 입
을 다물었다.
'난 봐도 모르겠는데. 이게 정말 반로환동을 한 자의 증거
일까? 만에 하나 진짜라면 그 사람은 무슨 신공을 배워서 반
로환동까지 했지? 내가 겨우 세월을 비껴가는 정도로 검성 소
리를 듣는데 아예 젊어졌다고 하면 나보다 세겠군. 누군지 장
난이 아니잖아.'
장로들을 힐끗 보니 모두 자기만 쳐다보고 있다. 재빨리 눈
을 내리깔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무림맹주는 근엄해야 한다.
'그 사람 찾아냈더니 자기가 무림맹주 하고 싶다고 그러면
난 어떡하지? 허허 웃어주고 물러서야 하겠네. 쳇. 취걸개 장
로 말이 맞았으면 좋겠군.'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딴생각만 하고 있는 독고진천을 기
다리다 답답해진 청허자가 강력히 자기 주장을 펼쳤다.
"맹주, 조사단을 파견해야 합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
지만 앞으로 무림에 끼칠 영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교나
사파 무리가 접근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합니다."
취걸개도 그 문제만은 반대하지 않았다.
"맹주, 확실히 찾아서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찾아서 선인
이면 다행이고 악인이면 잡아오지 뭐."
"어허, 반로환동의 고수를 어찌 쉽게 잡는다는 거요? 행여
그러다가 실수하면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나는 그에게서 도
를 느꼈소. 그와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소."
"오호라. 도사는 결국 도가 목적이었군."
"도사가 도를 찾지 않으면 거지가 도를 찾는단 말인가?"
"헹. 도사는 세상 물정에 몰라서 속은 거야. 세상에는 사기
꾼이 많단 말이야. 내가 보기에 십장생도를 만든 놈은 사기꾼
이야. 어떤 놈인지 보통 사기꾼은 아니겠다. 무당의 늙은 도
사를 속일 정도면 무공도 제법이겠지."
"제법인 무공만으로 그런 것을 그릴 수는 없어!"
"어허, 그런 세상은 거지가 가장 잘 안다니까. 솜씨가 나쁘
면 사기를 칠 수 없지. 보통 사람을 속이려면 보통 실력이 필
요하고 늙은 도사를 속이려면 도사 못지않은 경지의 실력이
필요하지. 그 자는 그림조각에 뛰어나고 무공이 높은 자야.
하지만 그뿐이야. 내 손에 걸리면 개 잡듯이 단숨에 잡아버리
겠어."
청허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줄 아는가!"
골치가 아파진 독고진천이 탁자를 작게 탁 두드렸다. 작은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모든 장로는 무공의 고수다. 군사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
작은 소리에 깊은 무학의 이치가 숨어있음을 느꼈다.
즉시 모두의 관심이 독고진천에게 향했다. 독고진천이 그
들을 보고 빙긋이 웃었다.
청성파의 장로이자 무림맹의 장로인 적명자는 새삼 놀랐다.
'맹주의 무공은 정말 그 끝을 알 수가 없군. 가벼운 손바닥
소리에서 생사대적을 만난 고수의 필사적인 기운이 느껴지다
니.'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경계심이 들었다.
무림맹주 독고진천이 장로들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어쨌든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지요. 그러니 조사단을 만
들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하지만 다들 업무가 막중하니 이
런 불확실한 일에 나설 수는 없지요. 그러니 젊은 아이들 몇
을 골라 일을 맡기고 장로 한두 분이 지원을 해주는 방향으로
갑시다."
장로들로서는 나쁜 이야기가 아니다.
무당의 장로 청허자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빈도는 찬성입니다. 반드시 그를 찾아 도를 얻겠습니다."
개방의 장로 취걸개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본개도 찬성. 늙은 도사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아이들
보고 좀 움직여 보라고 하지 뭐."
독고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군. 자, 그럼 누가 아이들의 뒤를 봐주는 일을 맡
겠소?"
청허자가 먼저 손을 들었다.
"빈도가 하겠습니다. 이건 빈도가 시작한 일이지요. 그리
고 그에게 얻을 것이 있으니까."
취걸개도 청허자를 따라 손을 들었다.
"늙은 도사가 하는 일에 내가 빠질 수가 있나. 본개는 반드
시 그 놈이 사기꾼임을 밝혀내겠소이다."
독고진천은 두 명의 지원에 만족했다.
"두 분의 능력이 워낙 출중하니 이 일은 믿고 맡겨도 되겠
군요. 그럼 그렇게 결정하겠습니다."
그 때 청성의 적명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잠깐. 맹주님, 빈도 역시 참가하고 싶습니다."
독고진천이 의외라는 듯이 적명자를 쳐다보았다.
"적명자께서? 이런 소소한 일에는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
는데."
적명자가 눈을 빛냈다.
"빈도는 아주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호기심이 강하게 드는
군요. 꼭 정체를 밝혀내고 싶습니다."
'정말로 반로환동의 고수라면 내 일에 도움이 많이 될 테
니까.'
독고진천이 흔쾌히 허락했다.
"좋소이다. 세 분 장로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내 마음이 다
편안해지는군요. 다만 너무 이 일에 집중하지는 마시기 바라
오. 다들 바쁜 일들이 많으시니까."
'에잉. 왜 그런 자가 튀어나와가지고. 어지간하면 그냥 산
으로 돌아가 주지 말이야. 가짜면 다행이고 혹시 진짜라도 못
찾았으면 좋겠다. 너무 열심히들 찾지는 말아주시게나.'
무림맹주 검성 독고진천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내심 자기
맹주자리가 조금 걱정이다.
'반로환동까지 했으면 자리욕심은 버렸을지도 모르지. 혹시
그런 사람이라면 찾는 건 대환영이라고.'
* * *
주진한과 당소소는 주가장에서 오붓한 한때를 보내고 있
다. 당소소가 주유성을 생각하며 말했다.
"유성이가 보고 싶네요."
주진한이 당소소의 어께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당소소는
타고난 미모에 동안이다. 거기다가 외모 관리에 어찌나 공을
들였는지 아직도 이십대 후반으로 보인다. 반면에 관리하지
않은 주진한은 그냥 봐도 확실한 사십대다. 언뜻 보면 아버지
와 딸만큼의 나이 차로 생각된다.
주진한이 당소소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유성이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큰 뜻을 펼쳐야지. 무림맹
이라는 큰물에 갔으니 제 녀석도 느끼는 것이 있을 거야."
당소소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말이다.
"유성이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주진한은 확신에 차 있다.
"물론이지. 낭중지추라고 했어. 우리 유성이가 어디 보통
아들인가? 무림맹 사람들이 다 눈이 삔 건 아닐 테니 다들 유
성이의 진가를 알아볼 거야. 혹시 알아? 장로들과 어떤 관계
를 맺을지도 모르잖아?"
당소소도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 유성이는 불세출의 대천재이니까 무림맹주
의 눈에 들지도 몰라요. 그런다고 무공을 열심히 익힐 아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무림 어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면 좋겠
네요."
"그럼. 그럼. 차후 사회생활 할 때 무림의 어른들과 친해놓
으면 여러 가지로 유리해지지."
부부는 꿈을 꾸며 행복해했다.
* * *
청허자는 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으로 무림맹을 걸어갔다.
"사람들 참. 눈으로 증거를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군. 이건
사실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하는 일이거늘. 쯧쯧쯧. 맹주마저
그렇게 소극적일 줄은 몰랐는데."
그는 젊은 사람들 위주로 구성되는 소극적 조사단이 마음
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무림맹의 사람을 충분히 풀
어 신비의 고수를 찾고 싶었다.
"이거 내가 우리 아이들이라도 적극적으로 동원해야 하려
나? 하지만 사형이 허락할 것 같지 않단 말이야."
처음 십장생도를 봤을 때는 정말 놀랐다. 하지만 무림맹에
서는 마음에 들 만큼 호응해주는 사람이 없다.
언짢은 기분으로 돌아다니던 그의 눈에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쬐며 놀고 있는 주유성이 보였다.
'요 놈 봐라. 감히 무림맹에서 놀고먹어?'
좋은 건수를 찾아낸 청허자가 주유성에게 걸어갔다.
"무림의 평화가 길어지니 무림맹에서 볕이나 쬐고 앉아서
노는 놈이 다 있구나."
청허자가 들으라는 듯이 말했지만 주유성에게는 씨도 먹
히지 않는다.
청허자는 좋은 기분에 말을 건 것이 아니다. 거기다가 기대
이하의 반응이 나오자 인상이 나빠졌다.
"이 녀석.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게냐? 무림의 위기가 코앞
에 닥쳤는데 스스로를 갈고닦아야 할 놈이 이 무슨 짓이냐."
청허자가 대놓고 귀찮게 하자 주유성이 고개를 슬쩍 들었
다. 말이라면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는 주유성이다. 즉시 빈틈
을 쑤셨다.
"도사 할아버지, 조금 전에는 평화가 길다 하시고 이제 위
기가 코앞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청허자는 멈칫했다. 평소에는 그가 입에서 튀어 나오는 대
로 떠들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의 명성이 높고 직업이 도사란 선입견을 가진 보통 사람들은
알아서 좋은 뜻이 있을 것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대놓고 반박하는 녀석은 오랜만이군. 하지만 내가
명색이 도사인데 말싸움 공력이 네 녀석에게 당할 만큼 빈약
할 줄 알았느냐?'
"인석아, 원래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는 바람이 평소보다
더 조용해지는 법이다. 작금의 무림 상황이 바로 그것이니라.
이런 위중한 때에 너는 어째서 놀고 있느냐?"
주유성이 사람 좋게 웃었다. 그 웃음에서 인생 경험 많은
청허자는 자기의 말이 씨도 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도사 할아버지, 잘 갈린 낫이 벼를 더 쉽게 베는 법이지
요."
청허자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 말에 현기가 느껴졌
다.
'이, 이놈. 강적이다. 말싸움의 공력이 노화순청의 경지구
나.'
하지만 청허자는 낫에 쓰러질 인물이 아니다.
"그럼 네가 하는 짓이 낫을 가는 행동이란 말이냐?"
"저는 놀고 있습니다."
의외의 대답은 반격을 준비하던 청허자를 당황하게 만들
었다. 하지만 곧바로 반색을 하며 호통 쳤다.
"인석아! 놀고 있는 것이 어찌 낫을 가는 행위란 말이냐?"
주유성이 청허자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도사 할아버지는 수련이 깊어 보이는데 왜 들은 그대로
해석하십니까? 제가 낫이 아닌데 왜 갈겠습니까? 모든 것에
는 그 용도가 있는 법입니다."
청허자가 입을 다물었다. 주유성의 학문은 넓지는 못하지
만 그래도 깊이는 깊다. 그런 놈이 작정하고 하는 말이다 보
니 평범한 것도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이 든다. 청허자는 머
리가 혼란해졌다. 주유성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 치고 들
어왔다.
"낫은 벼를 베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당연히 날을 갈아
야지요. 하지만 저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렇
게 가만히 있는 것이 저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잔뜩 치장을 했지만 결국 게으름뱅이는 계속 게으름이나
피우겠다는 소리다.
하지만 청허자는 이미 주유성의 말에 말려들었다. 혹시 거
기 무슨 깊은 뜻이 있을까 싶어 생각에 빠졌다. 그때 그의 눈
에 주유성이 땅에 낙서해 놓은 것들이 들어왔다.
청허자의 눈이 빛났다.
'대단한 솜씨다. 단순히 땅에 작대기로 대충 그렸을 터인
데 구도며 배치 하나하나 아주 자연스럽다. 더구나 이 분위기
라니. 그림을 그릴 줄 아는군. 이 녀석. 뭔가 있다.'
청허자가 주유성을 유심히 살폈다.
'얼굴에 귀티가 흐르는구나. 이렇게 잘생긴 녀석이 평범할
리는 없지. 그리고 저 편안해 보이는 표정은 또 어떤가. 그야
말로 세상에 물욕이 없는 무욕의 경지가 아닌가. 이 녀석. 인
물이다.'
문득 청허자는 현재 닥친 문제에 대해 주유성의 의견을 들
어보고 싶었다.
"인석아, 내가 네 의견을 구할 것이 하나 있는데 대답해 주
겠느냐?"
주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이 할아버지 질문에 얼른 대답하고 보내버려야겠다. 가
만 놔두면 자꾸 귀찮게 하시겠네.'
만족한 청허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반로환동을
한 고수의 이야기를 직접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직까지는
관계자만 알아야 하는 이야기다.
"어느 객잔 벽에 십장생도가 하나 새겨져 있다. 객잔 주인
이 천으로 가려 단골이 아니면 보여주지도 않는 그림이란다.
그런데 그 그림 솜씨가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란다. 내가 그
십장생도가 하도 마음에 들어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 알아
보고 싶다. 그를 우리 무림맹에 끌어들여 일을 시키고 싶단
다."
주유성의 안색이 조금씩 굳었다.
"그런데 우리 무림맹에서는 그것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작은 조사단을 하나 파
견해서 알아보자고 한다. 하지만 나는 대규모 조사대를 파견
해서 누가 그것을 새겼는지 알아내고 싶단다. 어떻게 하면 좋
겠느냐?"
말을 하고 청허자는 스스로의 이야기에 만족했다.
'무공 부분을 뺐으니 이 녀석이 어디 가서 소문낸들 무슨
상관이랴.'
주유성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십장생도는 흔한 그림입니다. 꼭 그것을 그린 사람을 찾
아 무림맹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가 그것을 원하
지 않을 수 있잖습니까?"
청허자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의 재능이 마교나 사황성 같은 곳에서 사용될까
두렵다. 그러니 반드시 우리 무림맹에서 먼저 끌어들여야 하
지. 왜인지 아느냐? 그걸 그린 사람의 나이가 젊다고 했거든.
앞으로가 기대돼. 그런 인재를 다른 곳에 빼앗길 수는 없다.
내게는 그를 잡아둘만한 힘이 있으니 걱정마라."
주유성이 환히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뻘뻘 흘
리고 있었다.
'젠장. 대충 갈겨놓은 거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망했다. 거
기 그거 그려놓은 게 나라는 걸 들키면 무지하게 귀찮아지겠
네. 무림맹에 붙잡혀서 평생 그림이나 그리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빠져나가자.'
주유성이 청허자에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도사 할아버지. 제 의견을 말씀드리지요."
청허자도 뭔가 있어 보이는 주유성이 대답해준다고 하자
반색을 했다.
"그래. 어서 말해보아라.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사람이야 시간이 지나면 결국 찾을 수 있습니다. 조사대
의 규모가 작다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들이면 결국 찾을 것
아니겠습니까? 도를 닦으시는 분답게 너무 서두르지 마시지
요. 욕심은 화를 부릅니다."
"그렇기는 하다만, 나는 그가 다른 놈들에게 넘어갈까 두
렵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찾지 못하게 하면 그만입니다."
청허자가 기대에 찬 얼굴로 질문했다.
"그런 방법이 있느냐?"
주유성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결국 문제는 십장생도, 그 그림을 객잔에서
사들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사들여 깊숙한 곳에 숨겨
둔다면 누가 있어 그 화가의 존재를 알겠습니까?"
청허자는 조금 실망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의 작품 중 하
나일 뿐이다. 그가 다시 새로운 그림들을 그리고 돌아다닌다
면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주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청허자를 뚫어져라 쳐다
보며 말했다. 주유성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할아버지가 감탄하셨다고 하는 수준입니다. 그가 계속 같
은 일을 하고 다녔다면 벌써 소문이 나고도 남았습니다. 아직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아무 곳에나 그림을 그
리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유성의 말에는 강렬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분위기에
넘어가 청허자의 얼굴이 좀 밝아졌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주유성이 고개를 아주 크게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그림을 조금 배워봐서 압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다 마찬가지이지만 대가들은 특히 더 자기
작품을 아낍니다. 그가 어떤 흥이 돋아 그런 일을 했는지 몰
라도 한 번으로 끝입니다. 절대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
습니다."
'다시는 객잔 벽에 그림을 새겨주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겠
어. 아니, 객잔 벽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함부로 남기지는 않
을 테다. 이렇게 귀찮아질 줄 몰랐단 말이야.'
십장생도를 만든 사람의 진심이 청허자에게 전해졌다. 청
허자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역시 그런 것이었어. 나는 그 사람이 왜 객잔에 그
런 것을 남겼는지 내내 궁금했지. 호기가 동해서 어쩌다 한
번 한 거였어. 다시 하지 않을 일이었어. 하하하."
시원하게 웃기까지 하는 그를 보며 주유성은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휴우. 큰일날 뻔 했네.'
기분 좋게 웃던 문득 청허자는 주유성의 실력을 시험해 보
고 싶었다.
'여기는 무림맹이란 말이지. 이 녀석이 여기 있다는 말은
무림인이라는 뜻. 생김새나 말, 그리고 행동으로 볼 때 무공
도 아마 범상치 않을 거야. 어디 조금만 시험해 볼까?'
청허자가 씩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에 내공이 살
짝 맴돌았다.
그 때 목소리 하나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머, 주 공자님 아니세요?"
남궁서린이다.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던 그는 청허자를 보
더니 깜짝 놀라며 허리를 공손히 숙였다.
"남궁서린이 청허자 장로님을 뵙습니다."
청허자는 이제 기분이 대단히 좋다. 남궁서린을 반갑게 맞
았다.
"껄껄껄. 남궁가의 아이구나. 그래. 가주님은 잘 계시고?"
"예. 할아버지는 항상 정정하십니다."
"그런데 네가 이 아이를 아나보구나? 주 공자? 성이 주씨
인가?"
남궁서린은 이것을 하나의 작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주 공자를 무림 명숙인 청허자 어른께 소개해드릴 기회
다. 그럼 주 공자가 나한테 신세를 지게 되는 셈이지. 좋았
어!'
쾌재를 부른 남궁서린이 주유성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네. 하남 서현의 주가장에서 온 주유성 공자예요. 주 공
자. 어서 인사드리세요. 이 분은 무림맹의 장로이시며 동시에
무당파의 장로이신 청허자 장로님이세요."
그 말에 주유성은 자신이 조금 전에 얼마나 심하게 귀찮아
질 뻔한 일에서 빠져나왔는지 깨달았다. 이미 학문 때문에 충
분히 귀찮음을 겪은 그는 무림 유명 인사와는 가능한 한 관계
를 맺고 싶지 않다.
'이 여자애는 왜 이런 귀찮은 일을 시키는 거야?'
주유성은 가능한 한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고픈 마음을 숨
기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주유성입니다."
그 표정에 몸에 배인 귀찮음이 드러났다. 예리한 청허자의
눈이 그 기색을 간파했다.
무당이 있는 무당산은 호북의 북쪽 끝에 있고 주가장이 있
는 서현은 하남 남쪽 끝에 있다. 하남과 호북이 남북으로 붙
어 있다. 그 두 지역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가깝다. 한곳의 소
문이 다른 곳으로 전달되고 남을 만큼 인접한 거리다.
"서현의 주가장이라면 주진한 대협과 당문의 당소소 여협
이 있는 곳이군."
주가장의 게으름뱅이 이야기는 서현에서 멀지 않은 무당
산에 오래전부터 퍼져 있다.
"그럼 네가 금검의 아들인 그 엄청난 게으름뱅이로구나."
이야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주유성이 씩 웃었다.
이제 청허자는 사물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됐다.
"잘 생긴 얼굴은 단지 네 어머니를 닮았을 뿐이군. 무욕의
경지가 아니라 단지 게으름일 뿐이야. 바닥의 이 그림도."
청허자가 주유성이 그려놓은 낙서를 발로 탁탁 뭉갰다. 그
리고 호통을 쳤다.
"얼마나 낙서를 많이 했으면 이 경지에 이른단 말이냐. 네
녀석이 그러고도 무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는 자신이 주유성에게 당했다고 생각했다. 무림의 명망
높은 자신이 애송이의 말에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조금 불쾌
해졌다.
주유성이 거기다 대고 한마디 툭 던졌다.
"전 무인 아닌데요? 전 상인이거든요?"
사실은 상인도 아니고 그냥 지독한 게으름뱅이다.
청허자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이 녀석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느새 내력이 들어간 손이 들어올려졌다. 하지만 그 손으
로 때릴 수는 없다. 정말 무공을 모른다면 그 손에 맞은 주유
성은 죽는다. 청허자는 곧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그만두자. 내 너에게 기대를 한 것이 잘못이구나."
청허자가 잔뜩 실망한 채 걸어가 버렸다.
주유성이 그 뒤에 대고 한 마디 덧붙였다.
"십장생도 잊지 말고 구입하세요."
청허자가 짜증 가득한 소리로 대답했다.
"알았다, 이 녀석아."
주유성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일은 그의 뜻대로
해결됐다.
사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남궁서린이 초조한 얼굴로 주
유성의 옆에 서 있었다.
"저, 주 공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주유성이 고개를 젓더니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벌써 세 번
째 남궁서린과 만났지만 엮일 때 좋았던 기억이 없다.
"알면 다쳐요."
항상 놀려먹던 청허자가 없으니 취걸개도 심심하다. 그도
무림맹을 어슬렁거리며 뭐 주워 먹을 거라도 없는지 찾았다.
그런 그의 눈에 어디서 구했는지 거적때기를 깔아놓고 누
워서 뒹구는 주유성이 보였다. 그가 다가가며 들으라고 말했
다.
"요 녀석 봐라. 감히 무림맹에서 거지보다 더 팔자 좋은 놈
을 보네?"
주유성이 그런 소리에 일일이 대답할 리가 없다. 하지만 취
걸개도 만만치 않다.
그는 주유성의 거적때기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 이 거지 같은 녀석아. 어른이 말했으면 냉큼 대답을 해
야 할 거 아니냐?"
주유성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말했다.
"언제 질문했다고 무슨 대답을 원해요?"
"요놈이 어른 말을 콧구멍으로 들었나? 네 놈 팔자가 거지
보다 더 좋다고 하지 않았냐?"
"그게 질문이에요?"
"크흠. 질문은 아니군. 거지가 언제 그런 것 따졌냐? 여하
튼 내가 물으면 네 녀석은 '네. 이러이러해서 제 팔자가 거지
같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 아니냐?"
주유성이 코웃음을 쳤다.
"거지 할아버지, 내 팔자가 거지보다 좋은 건 당연하지요.
난 구걸 안 해도 먹고 살만큼 사지가 멀쩡하거든요. 이 얼마
나 좋은 팔자에요?"
주유성은 분명히 거지보다 상팔자다.
취걸개의 무림에서의 위치는 높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림
맹에서 주유성처럼 젊은 녀석에서 이런 대접을 받을 거라고
는 생각하지 못했다.
취걸개가 허리를 툭툭 쳤다.
"건방진 아가야, 네 눈에는 이게 안 보인단 말이냐?"
그의 허리에는 일곱 개의 매듭이 매어져 있다. 매듭 일곱
개는 개방 장로의 신분을 표시한다.
주유성이 피식거렸다.
"쳇. 거지가 거지지 다들 무슨 매듭 자랑은 그렇게 해 대는
지 모르겠네요. 내가 그거 몇 개 더 매 드려요?"
취걸개가 발끈했다.
"이 놈아! 네 놈도 무림인이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
지는 않겠지. 개방 칠결제자를 보고 아직도 예의를 차리지 못
하겠느냐?"
당연히 주유성에게는 씨도 안 먹히는 소리다.
"저 무림인 아니거든요? 상인이거든요? 상인이 거지를 거
지로 대하지 뭐로 대해요?"
"거짓말 마라. 상인이 무림맹에 왜 들어온다는 말이냐?"
주유성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대답했다.
"물건 납품하려 왔거든요?"
취걸개가 입을 다물었다.
"정말 무림인이 아니라고?"
무림인은 개방 칠결제자를 무시하지 못한다. 구파일방의
장로를 무시할 간 큰 무림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일반인은 그런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일반
인이 칠결제자를 일반 거지로 잘못 봤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다. 일반인에게 그런 걸 따지고 들면 개방은 구걸해 먹기
글러버린다.
취걸개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여기는 무림맹이다. 무림맹에 뭘 팔아먹으려면 무
림의 규칙을 좀 따라야 하지 않을까?"
"싫은데요."
취걸개는 이제 정말 할 말이 없다.
'아무래도 내가 속는 것 같단 말씀이야.'
의심이 부쩍 든 취걸개가 바닥의 자갈 하나를 주웠다. 그리
고 주유성의 이마를 향해 슬쩍 던졌다. 딱히 무슨 대단한 암
기술은 아니다. 맞으면 잘 해야 혹이나 하나 날까 싶은 정도
세기다. 하지만 암기술의 묘리에 따라 불시에 날린 자갈을 무
공을 모르는 일반인이 피하기는 어렵다.
주유성의 고개가 재깍 틀어졌다. 돌멩이는 그의 머리 옆을
스쳐지나갔다.
취걸개가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뭐시라? 무공을 몰라? 이 녀석이 감히 이 어르신을 속이려
고 들어? 에라이!"
취걸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주유성이 거적에 누운 채 대답했다.
"누가 무공을 모른다고 했어요? 무림인이 아니라고 했지."
"이 녀석아, 무공을 알면 무림인이지 무림인이 별건 줄 아
냐?"
"싸움 잘하면 무림인이게요? 나는 그저 가전 무공을 조금
익힌 것뿐이라고요."
취걸개는 청허자가 아니다. 주유성의 말이 전혀 먹히지 않
았다.
"너 일단 좀 맞아라. 내가 너를 때려서 예의와 부지런함을
가르치겠다."
주유성이 마침내 발끈했다.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자꾸 그렇게 나오시면 서현에 사는 거지들을 앞으로 쫄쫄
굶게 만들겠어요."
취걸개는 어이가 없어서 손을 내렸다.
"이 거지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빼 먹을 지독한 녀석 좀 보
게. 그럼 네가 거지보다 먼저 구걸을 다 해버리겠다는 말이
냐?"
"쳇. 누가 그렇게 귀찮은 일을 해요? 서현의 시장에 가서
거지한테 먹을 걸 나눠주는 집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
는 걸로 충분하다고요."
취걸개는 거지 집단의 최고위층이다. 개방은 정보에 밝다.
음식에 관한 정보는 특히 더 밝다. 구걸 음식에 관한 고급 정
보는 취걸개의 귀에까지 들어온다. 더구나 취걸개는 서현에
잘 아는 사람이 있다.
"가만. 서현? 그럼 네 놈이 설마 신이 내린 혀라는 그 게으
름뱅이냐?"
"날 알아요?"
취걸개가 다시 주유성 앞에 반가운 기색으로 털썩 주저앉
았다.
"알다마다. 서현에서 구걸해 본 거지들은 그 맛을 잊지 못
해 그곳을 그리워할 정도니까. 그러니까 네가 소소의 아들이
구나."
주유성은 취걸개가 자기 어머니를 친근하게 언급하자 자
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관계에 따라서는 아무리 거지라고 해
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우리 어머니도 알아요?"
취걸개가 환히 웃었다.
"하하하. 알다마다. 네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잘 알지. 거
지는 원래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거든. 소소가 나를 얼마나 잘
따랐는데."
워낙 마당발이라 당소소를 잘 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
만 잘 따랐다고 하는 것까지 정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주유성이 재빨리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나? 취걸개라고 하는 상거지니라."
주유성은 그 이름을 듣고서 이 거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윽. 어머니가 거지 아저씨라고 말하던 분이잖아. 막 대했
다가는 어머니한테 죽는다.'
주유성은 즉시 꼬리를 말았다.
"취걸개 할아버지셨군요. 언제 한번 서현에 들르십시오.
특별히 맛 좋은 집에서 구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하하. 요 녀석. 알았다. 내가 거기 가게 되면 오랜만에 구
걸 한번 제대로 하마. 맛이 없으면 각오해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다들 맛이 보통이 아니니까요."
"하하하. 좋았어. 그나저나."
취걸개가 웃으며 주유성을 쳐다보았다.
"네 녀석. 어째서 무림인이 아니라고 했느냐? 네 아버지가
바로 금검 아니냐?"
"아버지가 금검이시지 제가 금검인 건 아니잖습니까? 저는
금검은 고사하고 짱돌도 못됩니다."
취걸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는 말이냐? 내 돌을 피하는 네 실력
은 보통이 아니었는데?"
주유성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귀찮은 일에 말려드는 건 질색이다.'
"어머니의 교육 방침이 무공은 제 한 몸만 지킬 정도면 충
분하다는 것이라서요. 피하는 법이나 몇 수 배웠어요."
취걸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럴 수도 있지. 소소 그 아이가 무공 수련을 워
낙 힘들게 했거든. 여자 아이라 비전은 하나도 전수 받지 못했
지.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데릴사위는 싫다고, 남편은 자기가
고른다고 아주 당당하게 주장했으니까. 고것이 그때 이미 금
검을 찍어뒀더라고. 무슨 애가 남자 얼굴을 아예 안 봐. 여하
튼, 그래서 소소가 네 녀석은 그 고생을 안 시키려는 건가 보
구나."
"네.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주유성이 어느새 거적에 슬쩍 몸을 눕혔다.
"할아버지도 여기 누우시지요. 햇볕이 참 따사롭습니다."
취걸개가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나저나 너도 참 게으름이 극에 달했구나. 정말 거지 같
은 녀석이로세. 이 녀석아. 나는 무림맹의 장로다. 다른 곳은
몰라도 무림맹 안에서는 나도 부지런한 척 한다. 나 그만 가
마. 너랑 같이 있으면 눕고 싶어서 안 되겠군."
취걸개가 웃어주며 떠났다.
주유성은 누워서 햇볕을 쬐었다. 그는 조금 갈등했다.
'여기 지세가 안 좋다. 땅에 수맥이라도 흐르나보다. 벌써
두 번이나 귀찮은 사람들이 들렀단 말이지. 다른 조용한 곳으
로 옮겨야겠는데 귀찮아서 이거...'
주유성의 머리는 명석하다. 당장의 귀찮음 때문에 계속 누
워있으면 오히려 더 피곤해진다는 것을 명확히 안다. 어느
게 이익인지 답이 나왔는데 손해 보는 짓을 할 수는 없다. 나
중의 큰 게으름을 위해서 당장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주
유성의 인생철학이다.
"끙."
주유성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거적을 둘둘 말았다.
"어디 조용한 곳을 찾자. 내일 떠날 때까지는 더 이상 괴롭
힘 당하고 싶지 않아."
주유성은 마침내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는 작은 장소를
찾았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나뭇가지에 의한 그
늘이 많고 바람도 선선하게 분다.
'사람들이 몇 명 매복하고 있네? 이 너머는 접근하면 안 되
는 곳인가 보다. 일종의 금지라는 뜻이잖아. 아싸. 그럼 여기
는 아무도 안 찾아오겠다. 이게 바로 명당이지.'
보통 무림인과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대만족한 주유성이
돗자리를 펴고 드러누웠다. 속 편하기로 따지면 따라올 자가
없다. 매복자들이 노려보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잠들었다.
무림맹에는 검성 독고진천이 조용히 명상을 하기 위한 공
간이 있다. 검성 독고진천이 맹주로서의 특혜로 사용하는 지
극히 개인적인 곳이다. 그 둘레에 나무를 많이 심었고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실력 좋은 수하들이 매복까지 서고 있다.
무림맹주 독고진천은 반로환동의 고수가 정말 존재하는지
어떤지를 생각하면서 걸어왔다.
'난 그림 보는 눈이 별로 없어서 그 은자 그림을 봐도 모르
겠지만 청허자 장로가 그렇게까지 주장하는데 가짜라고만 생각
할 수도 없잖아.'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자신의 명상 장소로 걸어오던 그는
입구 한복판에 드러누워 있는 주유성을 발견했다.
'다들 기합이 얼마나 빠졌으면 대낮에 드러누워 자는 녀석
이 다 있을까. 이게 다 내가 잘 해서 무림에 태평성세가 온 덕
분이구나. 으흐흐흐.'
천성과 다른 근엄함을 유지하느라 힘들었던 독고진천은
장난기가 돌았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발끝으로 자갈 하나를
툭 찼다. 작은 돌멩이가 포물선을 그리며 솟아올라 주유성의
이마를 향해 떨어졌다.
'녀석, 눈을 뜨면 나를 보고 깜짝 놀랄게다. 내가 이 맛에
맹주를 하지. 어서 무림맹주님을 뵙거라.'
돌이 주유성의 이마에 부딪치려는 순간 주유선의 손이 스
르륵 움직였다. 내력이 실리지 않은 돌은 주유성의 손에 잡혀
자기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독고진천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요 녀석. 제법인 걸?"
깨 있는 상태에서 저런 수법을 펼치는 것은 삼류라도 한다.
하지만 잠자던 중에 살기조차 없는 공격에 반응을 보이는 것
은 쉽지 않다.
주유성이 부스스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아이참. 이봐요. 아저... 할아버지. 왜 잘 자는 사람 괴롭
히고 그래요? 돌멩이라니. 이거 맞고 잘생긴 이마 터지면 할
아버지가 책임지실 거예요?"
독고진천은 나이는 많지만 외모는 노인이라고 보기는 조
금 어렵다. 검성에게 사람들은 존경의 의미를 담느라 노인이
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가 손자손녀 이외의 사람에게 할아버
지 소리를 들어본지도 오랜만이다.
"요녀석아. 내가 가는 길을 네가 막고 있으니 그러잖느
냐?"
주유성이 독고진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와. 이 젊은 할아버지. 보통 사람이 아니네. 자연스러운
기세로 보니 실력이 장난이 아니겠다.'
주유성이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할아버지가 지내는 곳이에요?"
독고진천이 인자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단다. 내가 잠시 쉴 때 이용하는 곳이다."
주유성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거적을 둘둘 말
았다.
'곤란하다. 엄청나 보이는 실력이나 이런 장소를 따로 쓰
는 특혜로 볼 때 이 할아버지는 대단한 신분이다. 아주 할아
버지는 아닌 것 같으니 무림맹주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무림
맹의 장로나 호법이다. 취걸개 할아버지보다 훨씬 고수야. 이
런 사람과 엮이면 골치 아파지지.'
그 머리 굴리는 모습을 본 독고진천이 의아한 얼굴로 말
했다.
"왜? 가려고?"
주유성이 씩 웃었다.
"젊은 녀석이 너무 오래 놀면 안 되죠. 가서 일해야죠. 일."
자리를 모면하려고 하니 마음에도 없는 말도 술술 잘 나왔
다.
"그래?"
독고진천이 주유성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오른
손을 쓱 내밀었다.
주유성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 즉시 몸을 뒤로 휙 젖혔다.
곧바로 발을 빠르게 놀려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할아버지. 내가 여기 오면 안 되는 곳인 줄 모르고 왔거든
요? 그냥 용서해 주시죠?"
독고진천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서렸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내가 삼 성의 수준으로 펼친 삼음용조수를 피해? 단지 옷
을 잡으려 한 것뿐이지만 저 나이에 이걸 피할 수 있는 녀석
이 있을 줄은 몰랐군.'
독고진천이 주유성을 자세히 살폈다.
'얼굴이 귀티가 흐르는 것을 보니 명가의 제자인가보다.
피하는 동작도 괜찮았고 특히 반응이 아주 빨랐어. 어느 문파
인지 물건을 키웠군. 무림맹에 팔자 좋게 드러누워 있는 배짱
을 보니 꽤나 명가 출신이겠지. 이야. 이거 우리 무림맹에 복
이 되는 일이구나.'
독고진천은 장래성이 아주 많이 있어 보이는 젊은이를 보
니 기분이 좋아졌다.
"녀석.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다. 무림맹에는 처음인가 보
지?"
'이런 쓸만한 녀석이 예전에도 왔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
지.'
주유성이 독고진천의 아래쪽에 있는 거적을 힐끗거렸다.
저걸 챙기고 싶은데 독고진천의 무공이 무섭다.
"네. 온지 얼마 안돼요."
독고진천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그렇군. 내 예상이 맞았어.'
"그래, 무림맹에 대한 소감은 어떻더냐?"
"그리 좋은 대접은 못 받아서요.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니네
요."
독고진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출신이 아니
란 뜻이군. 오히려 잘됐다. 내가 좀 가르쳐 볼 수 있겠구나.'
내심 만족한 독고진천이 주유성에게 다가갔다.
"내 너에게 선물을 하나 주마."
갑자기 독고진천이 삼음용조수를 오성의 경지로 펼쳤다.
그의 손가락들이 용의 발톱이라도 된 마냥 매섭게 일어서서
주유성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그는 이 한 수의 공격이 성공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유성의 몸이 옆으로 비틀거리며 넘어갔다. 독고진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피하려고? 정말 제법이다만 그것으로는 부족하지.'
날아가던 삼음용조수가 방향을 옆으로 틀었다. 그러나 주
유성의 몸은 여전히 그 손과 떨어져 있었다.
독고진천은 순간 조금 당황했다.
'오성의 삼음용조수도 통하지 않아?'
그는 검성이다. 본인은 부인하지만 세간에는 검의 끝을 봤
다고 알려졌다. 하나가 경지를 이루면 다른 무공들도 그에 맞
춰 수준이 제법 많이 올라간다. 검술만큼은 안 되더라도 그가
펼치는 삼음용조수는 정말 무섭다. 십성으로 제대로 펼치면
무림을 다 뒤져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독고진천의 한 손은 삼음용조수를 펼치며 여전히 주유성
을 향해 날아갔다.
주유성의 몸이 삼음용조수에서 더욱 멀어졌다. 그는 그대
로 달려가서 자기가 말아놓은 거적을 집었다. 필요한 것을 챙
기자 후다닥 물러섰다.
'거적은 식당 아줌마한테 빌려온 건데 잃어버리고 갈 순
없지.'
독고진천이 한 손을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이 녀석. 보법으로 내 공격을 피할 생각이 아니었군. 처음
부터 달아날 생각으로 멀리 도망가 버린 건 현명한 판단이야.
당연히 오성의 삼음용조수가 쫓아가지 못하지.'
조금 전에 보법을 같이 펼쳐 잡고자 했으면 못 잡을 것도
없었다. 그러나 무림맹주라는 지엄한 자리와 검성이라는 명
성이 그의 가벼운 성격을 누른지 오래다. 무림맹주가 겨우
스물도 안 됐을 남자를 잡기 위해서 심하게 움직이면 체통이
손상된다고 생각했다.
비록 놓쳤지만 기분이 더 좋아진 독고진천이 빙그레 웃었
다.
'그렇게 생각해도 실력이 대단하군. 빠져나간 것은 분명히
저 아이의 능력이니까. 이거 정말 앞날이 기대되는데?'
주유성이 거리를 충분히 뗀 상태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할아버지. 저 그만 갈게요. 귀찮게 해드려서 미안해요. 사
람이 사람을 귀찮게 하면 안 되는 건데."
주유성이 나름대로 항의했다. 하지만 독고진천은 못 알아
들었다.
독고진천이 호탕하게 웃었다.
"아하하. 하나도 귀찮지 않았단다. 녀석. 내일 다시 나를
다시 찾아오너라. 그때 이야기하자꾸나."
'오늘 가르쳐주려던 삼음용조수의 초식 하나를 그 때 선물
로 주어야겠다.'
내일 오라는 말에 주유성이 반색을 하고 꾸벅 인사했다. 그
리고는 꽁지가 빠져라 달아났다.
그 모습을 뿌듯한 얼굴로 보던 독고진천이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보기에는 어떻더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숲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튀어
나왔다. 그 중 한 명이 독고진천의 앞으로 걸어와서 공손히 대
답했다.
"저 젊은이는 여기 오자마자 매복한 곳을 한번 훑어보더니
돗자리를 펴고 드러누워 잠들었습니다. 나이에 비해 실력이
지나치게 높습니다. 혹시 적의 첩자가 아닐지 의심스럽습니
다."
독고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네 녀석들이 방심해서 제대로 숨지 못한 거다. 그렇게 대
놓고 기척을 드러내는데 어찌 모르겠냐? 저 아이 정도의 실력
이면 얼마든지 감지하겠지."
"명령만 내리시면 누구인지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명색이 무림맹주인데 그래서는 안 된다. 저
아이는 내일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냥 가면 어찌하시려고."
"저 실력이 되려면 무공 수련에 얼마나 힘든 노력을 기울
였겠느냐? 그만큼 더 강한 무공에 대한 욕심이 많겠지. 내 무
공을 보여줬고 내가 내일 찾아오라고 이야기까지 했다. 저 아
이는 내일 반드시 이곳으로 찾아온다. 너희들이 기다리다가
나에게 안내를 하여라."
매복을 선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존명."
그들은 같은 생각을 했다.
'그 녀석이 정말 부럽군. 맹주님의 무공은 일초 반식만 배
워도 엄청난 기연인데.'
무림맹주가 주유성이 사라진 방향을 보면서 흐뭇하게 생
각했다.
'기특한 녀석.'
착각은 자유다.
1권 끝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히 잘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아여.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