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B-1에서 심포지움이 열리는데 미국의 유명한 영박사가 노년의 생리적인 참조치에 끼치는 검사전의 영향, 미국의 나라야난에 의한 노인의 마커( 예를 들어 홀몬에 있어서) 덴마크의 피터슨에 의한 성과 연령에 의한 참조치의 계층화, 프랑스 아니에 의한 건강보험검사를 통한 노인 참조치의 설정 그리고 노인과 만성 질병에서의 개인내,개인간의 차이에 대해서 일본의 오까베가 발표했다.
한국도 이미 노인 연령층이 증가하는 구조로 진입을 했으므로 관심을 가지고 준비 연구를 해야 할 사안으로 본다. 11시 30분부터는 1시간 예정으로 미국의 로스가 알즈하이머에서 아포E 아이소폼 즉 스크린 타겟을 위한 진에 대해서 특강이 있었다. 오늘 부터는 9-17시까지 포스터 발표와 9-18시까지 전시회가 진행이 된다.
21일 포스터 발표는 16개 전공 분야에서 301개의 주제가 발표된다. 22일에는 21개 분야에서 313개의 연제가 발표, 23일에는 11개 분야에서 299개의 논문이 포스터로 발표가 된다. 전시는 중앙에는 전시를 하고 벽 쪽으로는 포스터를 붙여서 발표를 한다. 네 군데의 장소에서 약 65개의 부스가 만들어져서 자기 회사의 신제품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룸D에서는 42회 일본임상화학회의 학술발표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21일에는 9-9시 30분 까지 iodothyronine deiodinase 측정의 교육 프로그램을 필두로 9:30-10시까지 캐피라리 전기영동에 관한 강의가 계속되고 10-12시까지는 12개의 일반 연제가 발표된다.
13-13:30분까지 이상헤모그로빈 질환에 대해서 13:30-14:00시까지 펩타이드 칩,항원-항체 칩,마크로어레이에 관한 강의가 진행되고 14:00-15:00시까지 일반 연제가 여섯개 발표된다. 15:00-17:00시까지는 산화스트레스의 생물학적인 마커에 대한 5개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22일에는 9:00-11:00까지 심포지움,11:00-12:00시 까지 포스터발표(22개),1:30-14:00 학회장의 특강,14:00-14:30 대회장의 특강,14:30-15:00 교육프로그램 강의 15:00-17:00 순환기질환 진단검사에 관한 심포지움이 진행중이다.
ICCC의 22일에는 아침 강의가 이식면역억제제의 드럭모니터링에 대해서 있었고 동시에 B-2에서는 심장순환계질환의 진단과 1,2차 예방검사의 역할에 관한 강의가 있었다. 9-11시에는 애러지 질환의 병리, 응고검사연구의 현주소, 환경의학,EBM의 네 주제에 관한 심포지움이 있었다. 11:30-12:30분에는 메인 홀에서 영국의 캠브릿지대학의 카렐교수의 conformational 질병에서의 serpine이 말해주는 것에 대한 특강이 있었다.
점심을 들고 사쿠라홀에 가서 TSA-043에 CDV의 RT-PCR정량검사의 논문을 붙이고 13:45-14:45까지 임석하여 질의 응답 토의를 했다. 끝날 때쯤에 같은 사쿠라홀에서 전시발표를 하는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밸러 교수의 예측 진단의 개선을 위한 다변량해석의 이용에 관한 논문이 나의 관심을 끌어서 명함을 교환하고 서로 연락하여 돕기로 약속을 하였다.
이븐트홀의 이또박사의 발표를 보러 갔다. 요알부민 측정이 제조회사별 측정시스템이 달라서 결과의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확인 했는데 그 해결책으로 참조물질성립에 의한 연구를 기획하고 있었다.
학회는 23,24,25일까지이나 22일 저녁에 오사까로 나가야 한다.
VIII. 교 또
교또를 처음 방문한 것은 91년 1월말이었다. 방문한 곳은 고류지,긴까꾸지,미미쯔까,마츠오신사정도였다. 나의 기억에 지금까지도 남는 곳은 금각사경내의 초가집이었다. 한국의 시골 어느 한적한 마을의 흙벽을 치고 수수깡으로 뼈대를 한 것이 드러나 있는 그런 초가집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또 하나 영원히 충격으로 남아 잊을 수 없는 곳이 이총이다. 즉 귀무덤,아니 코무덤이다. 임진왜란의 승리의 증거 전리품으로 코를 베어 그것을 소금,석회로 처리 여기 교또까지 운반을 해 왔다니 도저히 인간으로서의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의 극치,엽기 바로 그것이다. 그것도 수길자신을 숭모하여 지은 신사의 바로 풍국신사 앞에 있는 것이다.
어찌 인간으로서 왜 조선의 민중이, 조선 사람이 그렇게 미웠으며, 무찔러 죽인 죽음의 확인을 하기위해 시신으로부터 그것을....아...아.... 수길은 아는가 모르는가. 교또의 시작은 바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신라, 고구려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개척을 하여 지금의 교또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을, 고대 일본 서부지역 전역이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조선이 바로 은혜의 나라인데도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그만 ! 그만 ! 해야 하겠다.
내가 어떻게 될 것 만 같다. 1711년(숙종 37년)에 일본에 파견되는 조선통신사의 정사는 조태억인데 이때 에도(지금의 동경)에서 쇼군을 만나고 한양으로의 귀국길에 교또에 머물 때 바로 수길의 혼을 숭배하는 곳이 대불사인지도 모르고 일본정부가 대불사(방광사,풍국신사)에서 객고를 풀게 한잔 대접을 한다고 해서 향응을 받은 적이 있다.
1719년(숙종 45년) 정사 홍치중,부사 황준,종사관 이명언,제술관 신유한때의 일이다. 8년전에도 대불사에서 향연을 베풀었으니 이번에도 조선에로의 귀국길에 한잔 내겠다고 하자 이제는 대불사가 수길을 기리는 절인 것을 알고 있는 조선통신사는 이번에는 거절을 하니 일본은 가짜로 수길과 관계가 없다는 책을 급조, 만들어서 보인 후 억지로 참석시켰는데 그때 종사관 이명언은 참석치 않고 오사까로 직행을 한 사건이 있었다.
속아서 참석해서 한잔먹은 사람들은 귀국 후에 지탄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 바로 앞에는 조선인 코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왜 그들은 고집을 해서 이곳에서 꼭 향응을 베풀고 한잔 먹이려고 했을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일간의 외교는 제삼국이 이해할 수 없는 난마로 얽혀 있고 또 그것은 역사적으로 풀며 이해를 하며 접근을 해야지 일차방정식처럼 간단한 하나의 해답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IX. 졸업생 재일교포 김부자
김부자씨는 임상병리과 13회 졸업생이다.50대 초반으로 재일교포로서 일본에서 고교졸업 후에 고대 보건대에 진학을 한 것이다. 재학 년도가 75,76년인데 군사정권 시절이다. 그 당시는 해외교포의 어마어마한 조작 간첩단 사건이 종 종 터저 나오던 시절이라 비밀이 많았고 또 알아 볼 수도 없었다.
그냥 77년도에 졸업을 하여 일본으로 다시 가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95년에 임상병리과로 엽서 한통이 배달됨으로써 다시 연결, 현재처럼 연락을 하고 만날 수 있게 되었다. 96년 일본임상화학회 하기세미나가 코베의 마이코빌라에서 개최되었는데 그때 코베에서 만날 수가 있었고 그 동안의 끊겼던 이야기가 연결될 수가 있었다.
당시에 오사까지역의 재일동포들도 2세들의 교육을 고국에서 시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오사까,교또지역은 조총련의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부자씨의 남자동생도 서울의 가톨릭의대에 유학을 와서 같이 자취를 해가며 공부를 했다. 미아리근방 사글세방에서 연탄을 때며 겨울을 난 것을 지금도 이야기를 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 할 길이 없으나 조작 간첩단사건에 연루가 되어 하루가 멀다하고 경찰서, 정보부 그리고 기관원의 알수 없는 미행의 연속으로, 공포의 분위기에서 서울생활을 마무리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남동생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를 않는다. 금방 눈물이 글썽해진다.
교또의 ICCC국제임상화학회 포스터 발표를 잘 마무리하고 이승관교수와 나는 오사까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22일 저녁 김부자씨가 경영하는 오따접골원으로 연락을 하여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기 때문이다.
서울서 예약한 숙소는 예비스쵸역의 서쪽 50미터 지점이다. 교또에서 오사까역, 다시 우메다역에서 남바역으로 거기서 택시로 숙소까지, 그리고 김부자씨에게 연락,나니와경찰서 앞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도돈보리, 신사이바시, 법선사 골목을 돌며 구경을 한 다음 20분 정도 대기하였다가 생선 초밥집엘 들어갔다. 9시가 다되어서 남편을 소개하고 커피를 대접한다고 자기집으로 가잔다. 남편과 접골원을 운영하는데 1층이 접골원,2-3층이 살림집이었다.그 남편은 15년형을 받았었다고 한다. 그들은 아직도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고 그녀는 고대졸업반지를 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