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염 속에 순례
전국적으로 폭염경보가 내려진 날에 경남의 백의종군로 노량-옥종 구간을 순례했다. 노량은 본토와 남해도 사이의 해협이다. 문리대 동기 4명과 상대 선배가 승용차를 이용해 남해까지 갔다. 멀리 남해에 간 김에 금산 보리암을 답사하려고 했지만 혼잡하여 오를 수가 없었다. 휴가철이라 상주 해수욕장을 이용하는 피서객들이 금산에도 많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남해에 가면 답사할 곳이 많겠지만 우리는 충무공 관련 유적인 이락사와 충렬사를 답사했다. 이락사(李落祠)는 노량 관음포에서 순국한 충무공의 유해를 뭍으로 옯긴 곳에 지은 사당이다.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짐을 후세가 기리기 위해 조성한 이충무공 전몰유허지(사적 제232호)에 있다. 대성운해(大星隕海)라는 박정희 대통령이 내린 액자가 걸려 있다. 이락사 전망대 정자에는 공을 기리는 한시 액자가 몇 개 걸려 있다. 번역문이 있기에 한 수만 옮겨 본다.
우리 이공 생각하며 수루에로 오르나니, 일찍이도 이곳에서 큰 공훈을 거두었네. 공을 찾고 바다구경 여러 사람 모였었고 창 만지며 시를 읊은 장사들이 노니누나. 폭죽으로 그런대로 강한 왜적 몰아내고 거북선은 몇 번이나 저 바다를 오갔는가. 심묘하다 작전계획 오랜 역사 전해지고 남긴 공적 요즈음도 육대주에 펼쳐지네.
(이락사 전망대에 안내하고 있는 노량해전도)
유허지에 있는 이순신영상관은 거북선 모양의 건물인데 2008년 이순신 순국 410주년을 기념해 세웠다. 일행 중 4명이 4시에 상영하는 입장권을 사고 유공자 한명은 그냥 들어갔다. 영상관 내부는 벽면과 지붕 전체가 영상 스크린이다. 3D 안경을 끼고 노량해협의 격전 장면을 입체 영상으로 20분 동안 감상했다. 포탄과 화살이 얼굴로 날아오면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피했다. 전시관에는 임진왜란 역사와 이순신 장군의 삶, 거북선에 얽힌 이야기, 조선 수군과 일본군의 갑옷이 전시되어 있다.
이락사에서 승용차로 10분 쯤 가면 남해대교의 남단에 있는 충렬사에 이른다. 1632년에 지역 선비들이 세웠는데 30년 후에 나라에서 충렬사란 이름을 내렸고 유래를 적은 송시열의 글이 있다. 충렬사에서 내려와 바닷가에 가면 노량대교가 멀리 서쪽에 보이고 가까이에는 거북선이 떠 있다. 거북선 내부에 들어가 보았다. 육중한 닻과 키를 볼 수 있다. 2층 구조인데 격군들이 노를 저어서 이런 배를 빠르게 이동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껴졌다.
바닷가에는 정자가 있다. 우리는 낙조를 구경하기 위해 정자에 앉았다.
“근처 슈퍼에서 막걸리를 사오면 좋겠다.”
슈퍼 옆에는 건어물 가게도 있기에 안주로 쥐치포를 샀다.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다.
“막걸리 한잔 하시지요.”
“어디예, 술 잘 못합니더.”
어두워지자 할머니가 추천한 횟집에 들어갔는데 바로 그 할머니가 주인이 아닌가? 식사 후 친구가 근처의 다른 식당을 알아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 안쪽에 있는 식당들은 같은 메뉴가 모두 만원씩인데 이 집만 만 삼천 원이네.”
“목 좋고 전망 좋은 값을 지불한 거라고 생각하자.”
(충렬사에서 보는 남해대교의 야경)
2. 무술년(1598)의 노량: 징비록 마지막 회를 보면서
모텔 주인이 살림방을 보여 주었다. 너른 온돌인데 에어컨, 욕실, 대형 평면 tv가 구비되어 있었다. 성수기이므로 1인당 3만원을 받겠다고 한다.
“성수기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일요일, 내일 출근하므로 갈 사람 다 갔고 이 시간에 오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니 싸게 합시다.”
숙박업소는 예약 없는 방을 묵히는 것 보다는 손님을 들이는 것이 낫다. 비행기도 빈자리로 가는 것 보다는 할인해서라도 승객을 태우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늦은 시간에 찾아가 교섭하면 저렴하게 방을 구할 수 있다.
이날은 드라마 징비록의 마지막 방영일이다. 노량해전 장면을 노량에서 보게 되었다. 류성룡은 선조에게 '재조산하'(再造山河) 네 글자를 드리고 안동으로 간다. 그는 후에 '징비록'을 집필하고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드라마가 끝나자 우리는 막걸리를 따르며 서로의 견해를 나눴다.
“재조산하는 나라를 다시 만들라는 말이잖아. 당시는 전후 복구를 재조라고 했나봐.”
“그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라는 책이 있어. 신경(申炅)이 임란전후 30년 동안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를 쓴 책.”
“명나라 은혜로 나라가 다시 만들어 졌다면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했어. 조선의 사대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설도 있지. 우리를 번방(藩邦)이라면서 중국의 울타리에 있는 봉토, 즉 제후국 수준으로 스스로를 비하하는 거야. 중국이 볼 때는 기특한 거지.”
“중국에 잘 보이면 중국은 말 잘 듣는 조선을 병탐할 필요가 없으므로 조선은 안전하다고 본 거야. 더욱이 조선이 위태하면 중국은 자기의 팔 하나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조선이 망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조선은 생각한 것이지.”
“그래, 이런 전략으로 조선은 국방비를 적게 지출하면서 500년을 견뎠어. 구한말에도 일본은 조선을 중국에서 떼어낸 후에 합방을 한 거잖아. 조선도 독립국이고 중국과 대등한 황제의 나라라고 추켜세우면서...”
난중일기에 근거하여 노량해전 당시를 고찰하자.
11월18일 18시, 경상도 쪽에서 수많은 전선이 남해도와 노량의 해협을 통과하려고 밀려온다는 첩보가 도착했다. 순천 광양만 예교 앞바다를 봉쇄하고 있던 이순신은 22시에 격군을 재촉해 함대를 동진시켰다. 노량을 막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24시, 이순신은 손을 씻고 갑판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則無憾)”하고 하늘에 빌었다.
진린은 이순신 함대의 뒤를 따랐다. 진린이 늑장을 부렸다기보다는 이순신이 서둘러 앞장을 섰다. 11월19일 02시, 이순신은 노량 해협에 이르렀다. 격군들은 8시간의 항해로 피로했다.
관음포 북쪽에 전선을 배치한 이순신은 노량해협을 빠져나오는 일본 전선을 공격했다. 양군은 격렬한 접전을 전개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관음포 쪽으로 선단을 이끌었다. 그는 그쪽이 외해로 가는 길인 줄 착각했다. 막다른 포구에 갇힌 일본 수군은 뱃머리를 돌리어 이판사판으로 달려들었다. 일본 수군은 무작정 이순신 함대로 달려 들어갔다. 왜냐하면 그쪽으로 나가야 외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기서 전투를 잘하는 것보다는 빨리 귀국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들을 살려 보낼 수 없었다. 철저히 격멸해야 한다. 양군이 온 밤을 격렬히 싸웠다. 이순신은 적선 500여척과 밤새워 싸우고 아침이 될 때까지 1대5의 비율로 계속 싸웠다. 어둠 속에 피아가 뒤섞였다. 이순신의 주위는 모두 적선이고 적선의 주위에는 고립된 조선 수군이 있었다.
일본 전선 200여척이 격파되고 수천 명이 고기밥으로 되었다. 혼전은 이순신이 가장 피하고 싶은 전투다. 총탄이 날아오는 방향도 없다. 모든 곳에서 날아오고 모든 곳으로 날아갔다. 이순신은 원수를 보았고 원수도 이순신을 보았다. 송희립이 이순신을 방패로 가로 막은 것은 이순신이 더 이상 활을 들어 쏠 수 없게 된 다음이었다. 원수들의 시체가 피로 물든 바다를 덮었다.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이순신이 칼에 새긴 소망이 이루어졌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수군이 어쩔 수 없이 힘든 싸움을 하는 사이에 코니시 유키나가의 지상군을 태운 함대는 예교성을 빠져나와 외해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통제사 이순신 외에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 조선 수군장수 10여명, 명 수군장수 등자룡, 도명재 2명이 전사했다. 노량 해전은 이순신이 완전한 복수를 위해 앞장서서 사력을 다해 싸운 복수의 전투였다.
“이 원수를 갚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則無憾) 입니다라고 하늘에 빈대로
“잘 (준비해) 나아가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호부대설국욕(好赴大雪國辱) 하라는 노모의 타이름대로
“한칼 휘둘러 소탕하여 (원수의) 피로 산과 바다를 물들이겠다.”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라고 칼에 새긴 대로
이순신은 소망을 이루고 차가운 노량의 겨울 바다에서 순절했다.
이순신은 "어찌됐나.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계속 싸워야 한다. 내가 죽었단 말을 입 밖에 내지 말고"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끝내 숨을 거뒀다. 선조는 끝내 류성룡을 파직했고, 류성룡은 "전란은 언제든지 찾아온다"며 "이 나라 이 백성이 두 번 당시 그런 일을 겪게 하지 말라"고 전한 뒤 떠났다.
3. 정유년(1597)의 노량
정유년 7월16일, 원균의 조선 수군이 괴멸된 소식을 들은 권율은 18일 오전 10시까지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 난 뒤에 결정하면 어떻겠는가?”라고 건의해 9명의 군관들과 함께 초계를 출발했다. 우리는 이 길 중에 7월20일부터 27일까지 공이 간 길을 걷거나 승용차를 타고 답사할 예정이다. 충무공이 여드레 동안 간 길을 하루에 다 걸을 수는 없다. 우리는 노량에서 걷기 시작해서 진교면까지 2시간 쯤 걷고 곤양에서 곤명까지 2시간 정도 걸었다.
(진교면의 지방도를 걷는 모습)
승용차는 친구 둘이서 번갈아 가며 전진 시켰다. 승용차로 5분 거리면 5 km이다. 이 거리를 걸어가려면 1시간 반이 걸린다. 보리암에 못 가서 서운한 친구는 승용차로 곤명면사무소에 가까운 다솔사에 갔다. 우리가 곤양천변을 걷는 동안 그는 홀로 여러 시간을 절에서 보냈다.
네 사람은 땡볕이 내려 쬐는 곤양천 너른 들에서 양산 대용으로 우산을 쓰고 걸었다. 학교 건물이 보였다. 교정을 통과해 가면 지름길이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방학이라 교문이 닫혀 있는 것이 아닌가. 온 길을 몇 백 미터 되돌아갔다. 우회하여 학교 뒷문이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다.
“저기 좀 봐. 학교 담을 따라 길이 있잖아. 저 길로 왔어야 하는데...”
아쉽지만 어쩔 것인가. 처음 가는 길이면 헤매는 경우가 없지 않은 법이다. 그렇지만 땀이 흥건한 상태로 몇 백 미터를 더 걸었다는 생각을 하니 기운이 더 빠졌다.
“저기 나무그늘에서 좀 쉬어 가자.”
어제 충렬사 슈퍼에서 산 막걸리가 한 병 남아 있어 나누어 마셨다. 땀이 많은 친구는 이온음료(포카리스웨터)를 4리터나 챙겨왔다. 운동을 심하게 하면 근육이 마비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온음료가 예방약이다. 물은 갈증이 나기 전에 마셔야 한다. 갈증이 난 후에 마시면 이미 늦은 것이라고 신경외과 친구가 알려 준 기억이 있다.
둑길을 한 시간 정도 걸으니 마을이 나타났다. 큰 느티나무 아래 마을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저, 여기서 도솔사까지 걸어가려면 어디로 가면 되나요?”
“이 둑길을 한 시간 쯤 따라 가다가 두 번째 다리를 건너면 됩니데이.”
다솔사 입구에 도착해 승용차로 먼저 온 친구와 합류했다. 이제부터는 승용차로 옥종면사무소까지 가면 된다. 옥종면사무소는 3년 전에 검암과 함께 간 적이 있다. 그 때는 고교 동창 4명이 경남이 개발한 백의종군로를 답사하는 여행이었다. 당시에 부면장하던 사람이 자기 차에 우리를 태우고 백의종군로를 친절히 안내해 준 기억이 있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 면사무소에 들어갔다.
“저, 여기 사람 좀 만나러 왔는데요.”
“누구를 만나고 싶은가요?”
“몇 년 전에 여기 부면장 하시던 분인데... 이름은 기억이 잘 안 나네요.”“네, 그분 정년 퇴임하셨습니다. 전화번호 알려 드릴까요?”
“네, 고맙습니다. 그 때 저희가 백의종군로를 순례하면서 여기를 방문했는데 부면장님이 저희를 잘 안내 해 주었습니다.”
받은 전화번호를 스마트폰에 찍으니 이미 저장된 번호로서 이름까지 나오는 것이다.
‘맞아, 양재승, 이 분이지.’
우리는 면사무소 앞 식당에 들어갔다. 부 면장은 전화를 받고 달려 왔다. 그는 식사가 나오기 전에 잠시 밖으로 나가더니 생 막걸리를 2리터 패트 병에 가득 채워 4개나 가져왔다. 땀 많이 흘리고 나서 마시는 막걸리는 수분 공급은 물론이요 요기도 되니 길 걷는 사람에게는 최적의 음료이다.
“좋은 일 하십니다. 옥종에 오시면 꼭 제게 연락 주십시오. 막걸리는 얼마든지 대접하겠습니다.”
(옥종면 사무소 앞)
식사 후 손경례가를 찾아 나섰다. 충무공이 통제사 직무를 재 수임한 곳이다. 갈 길이 멀고 날씨도 더워 더 이상 걷기는 안 된다. 덕천강 변 강정이란 곳에 이르렀다. 충무공이 초계의 권율 진영을 떠나 7월20일에 진주목사를 만나 회의한 곳이다. 강정(江亭)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와 백의종군로 안내 표지석이 있었다. 경남은 순례자들을 위해 중요한 지점에 이렇게 안내를 하고 있다. 다른 지자체가 본받으면 좋겠다. 안내하는 화살표를 따라 10여분 달리니 손경례가 입구라는 표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보탐방로 도장받는 곳’이란 안내가 벽돌 벽에 그려져 있었다. 경남은 백의종군로 중 도보로 탐방하면 좋은 곳을 별도로 추천해서 안내하고 있다.
(덕천강변 강정)
(손경례가 입구의 답사인증 도장 받는 곳)
4. 목면을 처음 재배한 곳
우리는 템플스테이를 하기로 한 약천사를 향했다. 도중에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목면시배유지를 들렀다.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부민각이 있었다. 고려말 공민왕 때 원나라에 사신으로 간 문익점이 목화씨를 숨겨와 처음으로 재배했다는 곳이다.
“저기 문기둥에 보니 면자가 두 가지네. 어떻게 다른가?”
“실사변의 면(綿)은 무명실면이고 나무목변의 면(棉)은 목화면자라네.”
친구의 답변이다. 목화재배와 무명짜기의 수고를 노래한 여러 수의 시를 채집해 전시하고 있었다. 산청군 시천면 천평리에 전해오는 <목화 따는 저 처녀야>라는 노래 한 구절을 보자.
진주 큰들 너린 들에 목화 따는 저 처녀야. 뉘들 간장 녹히자꼬 그리곱기나 생겼느냐. 나를 보고 잘났담은 우리 집에 우리언니 내카마도 참 잘나서 우리언니 몬보거든 한들 복송에 꽃을 보소
여기서 통영대전고속도로(35번)에 곧 진입할 수 있다. 약천사는 지곡IC에서 나가 안의로 들어가야 한다. 26번 국도(육십령로)를 따르면 정자가 많기로 유명한 화림동 계곡이다. 황석산 청소년수련관, 동호정 유원지를 지나 거연정에 잠시 내렸다.
“남강에 내려가 발 좀 담가보자.”
더위를 피해 마을 사람들이 그늘에 자리를 펴고 있었다. 서하면 사무소 들어가기 전에 북쪽으로 서하초교가 있다. 그 담장을 끼고 우회전하여 북북동쪽으로 2킬로미터 쯤 오르면 고도 500m쯤 되는 고개 마루이다. 거기서 예각으로 우 회전해 동남쪽으로 1킬로미터를 다시 내려가면 약천사이다. 약천사는 서하초교에서 직선거리로 동북쪽 1킬로미터에 있는 데 문리대 동기가 지은 절이다. 그는 물리학 박사이지만 지금은 여기서 불교과학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1박을 하면서 다양한 주제를 토론하고 상경했다.
첫댓글 참석도 못했으면서 후기를 잘 써 주어 동행한 기분으로 후기 잘일ㄴ었읍니다.,감사합니다.
8/2~8/3일이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데...
애 많이 쓰셨습니다.
두루두루 공부 잘 했습니다.
더운날씨에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일부 구간은 얼마전 저희 하동지부도 걸은 데라 사진보니 새롭습니다. 뜻깊은 시간 되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