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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상제님께서 임원들에게 엄숙히 하교하시기를 "배를 타고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면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방향을 바꾸지 말고 그대로 항해하여야 하느니라. 만약 위험을 피하려고 항해를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려 하면 항해를 못 함은 고사하고 배까지 전복시키느니 도를 믿고 닦는 일도 또한 그러하니라." 하시고 지난 신유(辛酉 : 도기 13, 서기 1921)년 2월에 안면도에서 부안으로 항해 중에 겪으신 풍랑사(風浪事)를 말씀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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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청주에서 안상익 포감방면 임원들의 옥사(獄事)가 일어나니라. 당초에 지난 몇 년간 충주방면 안상익 · 박한경 · 유철규 등 임원들은 관하 도인들을 경쟁하듯 매월 수십 호씩 중부로 이주시키니라. 이로써 조치원역(鳥致院驛)은 도인들의 이삿짐 수송에 몹시 바빠 다른 일을 처리 못 할 정도였으며, 도인들이 많이 살던 동네에서는 그들의 재산정리에 따른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니라. 개중에는 도인들이 "부산에 가야만 도를 믿을 수 있다."느니 "도만 믿으면 되지 재산은 무엇하느냐?" 하더라는 등 사실무근한 소문이 유포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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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문이 와전(訛傳)되어 마침내는 도인들이 재산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이주하는 행위가 휴전 직후 불안한 시국에 혹세무민하는 유언비어 또는 용공분자의 소행과 비슷하다는 혐의를 받게 되니라. 충북도경에서는 소문의 근거를 찾으려고 형사들이 수개월 간 임원들을 미행하며 내사(內査)하였으나 지목된 안상익 · 박한경 · 유철규 · 김영하와 이갑성(李甲性) · 오득표(吳得杓) · 안영국(安永國) 등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니라. 이달 정기집회일인 18일 밤에 청주 서운동(瑞雲洞) 소재 포덕연락소에 모여 회의하고 영하가 상제님께서 하교하신 풍랑시(風浪時)의 항해법을 교화하던 중 한경 · 철규 · 영하 · 갑성 등 임원들이 도인 20여 명과 함께 형사들에게 체포 압송되어 도경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고문 · 취조를 당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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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갑성은 혹독한 고문으로 장시간 기절하였다가 다음 날 겨우 깨어나 기동을 못하면서도 그러한 사실이 없음을 극구 주장하여 3일 만에 다른 도인들과 함께 석방되니라. 그러나 한경 등은 고문에 못 이겨 자신들의 혐의를 시인하고 상제님의 행재까지 진술함으로써 도경의 형사주임(刑事主任) 송달헌(宋達憲)과 형사 여러 명이 부산도장에 급파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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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아침에 상제님께서 평일처럼 산정 공부실에서 도수를 보시고 잠시 쉬실 때 형사들이 급습하여 방자하게 추궁하였으나 상제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며칠간 수십 명의 중부도인이 진술한 바로는 아무런 혐의사실이 없으니라. 다만, 이미 입건 구속된 한경 철규 등의 혐의를 소명하자면 상제님께서 친히 충북도경 근처 사관까지라도 거둥하셔야 함을 말씀드리니 윤허하시고 청봉 등 세 자제분과 도인 정운교(鄭雲敎) 등의 시위를 받으시며 25일 청주 북문로(北門路) 북일여관(北一旅館)에 임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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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에서 한경 등이 고문에 못이겨 분별없이 시인한 내용은 개인적인 사기 · 횡령 등 혐의와 함께 유언비어 유포, 용공단체 조직 등 국가보안법 위반의 혐의이며 또 이 모두가 상제님의 명으로 범행한 사실처럼 인정되어 있었으나 조사 결과 그 실제가 아님을 판명되니라. 그러나 한경 등의 개별적인 혐의가 완결되지 않아 상제님께서는 환어하지 않으시고 1개월간을 북일여관에 설석하시고 공부하시며 간간이 수사에 응하시니라. 이때 도경 사찰분실장(査察分室長) 김두길(金斗吉)의 집요한 추궁에도 사건은 더 확대되지 않았으나 한경 등 3인은 법원에 구속 · 기소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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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 양력 4월 29일에 상제님께서 도장으로 환어하시는 길에 청주 화양동(華陽洞)으로 행행하셔서 도수를 보기로 하시니라. 화양동은 본시 백두대간에 속한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중간 산골인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리의 계곡으로서 사적과 명소가 많고, 중국 무이구곡(武夷九曲)과 흡사한 절경지지(絶景之地)라 하여 예로부터 화양구곡(華陽九曲)으로 유명하니라. 그 제3곡에 송우암(宋尤庵)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 · 의종(毅宗)에 대한 보은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만동묘(萬東廟)를 짓게 제향을 드리게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철폐한 것을 유생들이 중창하였더니, 왜가 다시 철거하여 훼손한 묘지(廟趾)와 묘비(廟碑)만 남아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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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곡에는 우암이 은거하며 학구(學究)와 교도(敎導)에 힘쓰던 암서재(岩棲齋)가 있고, 제5곡에는 우암이 문인(門人)들을 시켜 명나라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큰 문자를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이라는 작은 문자와 함께 첨성대(瞻星臺) 아래 석벽에 새기니라. 그 좌측에 "배신 민정중(陪臣閔鼎重) 봉지(奉至) 여송시열등(與宋時烈等) 근배수계수(謹拜手稽首) 모륵(摸勒) 시사십칠년(時四十七年) 갑인 사월 일야(甲寅 四月 日也)"라는 작은 문자를 새겼으며, 우측에는 암벽에 세로로 석함(石函)을 파서 석개(石蓋)를 하고 이를 "석문(石門)"이라 이름하니라. 석문 아래에는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는 큰 문자와 "차팔자(此八字) 배신 송시열(陪臣宋時烈) 상서(嘗書) 여인자야(與人者也) 정의어차산중(正宜於此山中) 근모이륵(謹摸以勒)"이라는 작은 문자를 새겨 놓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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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하오에 상제님께서 청봉과 정운교 · 안상익 · 윤금현 등 시종을 거느리시고 승용차로 화양동에 거둥하셔서 만동묘(萬東廟)의 묘지와 묘비를 친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곳 청주 화양동은 명·청 양국(明淸 兩國)이 공존하는 곳이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황극신도수(皇極神度數)'와 '대신문도수(大神門度數)'를 보려 함이니라." 하시니라. 다시 암서재(岩棲齋)를 친감하시는 동안 해가 저물므로 "화양구곡을 다 볼 것은 없지마는 온 김에 제5곡까지 보고 가려 하였으나 해가 저물었으니 신도(神道)로써 공사하리라." 하시고 환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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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행 중로인 청천(靑川) · 미원(米院) · 주성(朱城) 등지는 해가 지면 공비(共匪)의 출몰이 잦은 곳으로서 야간 통행금지와 군경의 경비가 삼엄하고 검문 · 검색도 심할뿐더러 도로 사정 또한 불편하기 그지없으니라. 시종들이 야간행행을 만류하였으나 계속 차를 타시고 보은 남일여관(南一旅館)에 임어하시니 자정(子正)이 가까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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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이 고향인 금현은 상제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싶었으나 감히 상고하지 못하고 시종만 하면서 행로의 검문 대응에 많은 시간을 지체하였을 뿐 아니라, 여관을 잡고 때늦은 수라 준비 등에 애를 쓰니라. 자정이 되어서야 수라상을 올리고 시좌하였는데 상제님께서 수저를 상머리에 한번 정저(整箸)하시자 그 순간 갑자기 뇌우전벽(雷雨電霹)이 천지를 진동하므로 시종들과 여관 사람들이 모두 무섭고 두려워서 몸 둘 바를 모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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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태연히 수라를 진어하시므로 금현과 운교는 물러날 수도 없어 묵묵히 시측(侍側)하고 있으니라. 뇌전은 한동안 계속되다가 마침내 벼락 치는 소리가 그 부근 일대를 때려 부수듯 한번 진동하더니 이내 그치고 소나기만 내리는데 상제님께서 상을 물리시며 혼자 말씀으로 "이제야 신문공사(神門公事)를 마쳤으니 다시 오지 않아도 되겠구나. 과시 보은지지(報恩之地)로다." 하셨으나 시종들은 어의를 깨닫지 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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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에서 유어하시고 시종들에게 "내가 이번 길에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를 보고 가려 하였으나 다음으로 미루고 그대로 돌아가니 금현은 다음 치성에 올라오되, 그전에 이곳 일을 살펴서 포감을 통하여 나에게 자세히 고하라." 하시며 청봉과 운교를 승용차에 동승시키시고 부산도장으로 환궁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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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청주 일대에 "화양동 제5곡의 석문이 열렸다."라는 소문이 자자하니라. 금현도 소문을 듣고 그 사실을 확인하고자 인근 도인 윤석현(尹錫鉉) · 오병하(吳炳夏) · 박동한(朴東漢) · 김진협(金鎭協) 등과 화양동으로 가니 마침 상제님께서 파견하신 박종순을 만나 함께 그곳에 사는 빈재로(賓在老)를 만나니라. 재로는 본래 만동묘 창건 시에 청국에서 파송된 묘지기의 9대손으로서 대대로 봉직하다가 묘가 철거된 후에는 묘지 옆에서 농사와 주점으로 생계하는 사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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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로가 일행에게 말하기를 "우암이 석문을 만들며 그 속에 무엇을 어찌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르나, 그 후 비전(秘傳)되는 전설로는 '석문이 열리면 천지가 개벽되고 진인(眞人)이 세상을 구제하리라.' 하더이다. 만동묘를 철거한 왜경이 그러한 전설을 말살하려고 석수를 시켜 석문을 정으로 쪼아 열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갑자기 청천벽력이 일어나므로 혼비백산하여 중지하고 그 흔적을 양회로 때우는 것을 내가 직접 목격하였나이다. 또 지난 3월 27일 밤 자정에는 번개와 함께 뇌성이 울리며 비가 쏟아지더니 석문 쪽에서 벽력이 크게 일어 첨성대가 무너지듯 진동하므로 전율경악(戰慄驚愕)하고 이튿날 아침에 가 보니 석개가 열려 암벽 아래에 깨진 채 떨어져 있고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석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나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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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현 일행이 신기하게 여기며 그곳에 가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이 세로 3척 1촌, 가로 1척 9촌, 두께 5촌쯤의 석개가 두 동강으로 갈라져서 떨어져 있으므로 맞추어 보니 "옥조빙호(玉藻氷壺)"라는 큰 문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이라는 작은 문자의 음각(陰刻)이 완연하니라. 금현 등은 그제야 이 일이 증산 상제님께서 청도원에서 대신문(大神門)을 여시는 도수를 짜신 공사와 부합되며, 또 상제님께서 "신도로써 공사하리라." 하시고 석문이 열릴 그 시각에는 "이제 신문공사를 마쳤으니 다시 오지 않아도 되리로다." 하신 비의(秘意)를 깨달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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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에 임규오가 도장에 올라가 상제님께 배알하고 금현으로부터 들은 "화양동 석문 열린 일"을 상고하니 용안에 미소를 띄우시고 침묵하시니라. 규오가 다시 "이는 필시 증산 상제님께서 청도원(淸道院)에서 짜 놓으신 황극신도수와 대신문도수가 풀림이 아니오니까?" 하고 아뢰니 "오직 결자(結者)와 해자(解者)는 동체니라." 하시고 더 말씀이 없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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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5일 조회시에 상제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대들도 이런 일은 알아 두라. 불교의 교리가 좋다 하여도 현실에는 모순이 많으니, 남의 자식을 데려다가 제 자식을 만들고 농사도 짓지 않다가 남이 지은 양곡을 얻어먹으며 사는 걸사도(乞士道)에 불과하니라. 또 공자가 유교를 펴서 그 경서가 오늘까지 전하여 왔으나 그 많은 글들이 현실 생활에 그다지 유용하지 못하니, 이런 교들이 후천에 무용함은 증산 상제님께서 이미 도수로 짜 놓으신 바니라. 공자가 일세의 사부(師傅)로서 인의의 도리를 세상에 펴고도 죽어서는 천상의 제이문방신장(第二門方神將)밖에 되지 못하였으나, 자공(子貢)은 그 제자로되 오히려 제일문방신장(第一門方神將)이 되었느니라. 과거 성인에 대한 이런 말은 함부로 입 밖에 내기가 어려우나 다만, 그러한 교들로서는 세상을 구제할 수 없음을 이미 수천 년 역사와 오늘의 현실이 증명하고 있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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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교하시기를 "도덕이란 도의 꽃을 말함이니 예수교인들이 2천 년 동안 하느님 아버지만 믿어 왔으나 하느님도 그 근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예수는 인자(人子)로서 인덕(人德)을 펴라는 인(人)의 꽃이요, 불타는 각자(覺者)로서 불덕(佛德)을 펴라는 불의 꽃이니라. 그러나 오도는 도의 열매를 맺는 진인 (眞人) · 진신(眞神) · 진실(眞實) · 진법(眞法)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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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도에는 덕이 따라야 하느니 예수나 수운이 어떠하였던가를 보면 아느니라. 두 사람 모두 성인은 성인이나 대성인은 아니니, 대성인은 비명횡사(非命橫死)하지 않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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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3일에 상제님께서 재차 청주에 행행하시니 이는 검찰이 박한경 · 유철규 · 김영하 등을 기소하면서, 그 도의적인 책임이 상제님께도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기소하였으므로 26일에 개정되는 공판에 임어하시기 위함이며, 사건의 변호는 최병길(崔秉吉) 변호사에게 맡기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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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판의 재판장은 청주지방법원장인 문기선(文夔善)이 직접 담당하니, 그는 젊은 시절에 주역을 천독하여 신구학(新舊學)을 겸해서 수학하였다고 호언장담하며 자긍심과 아집이 강할뿐더러, 기독교 독신자로서 민족종교(民族宗敎)라면 사교(邪敎)로 보아 말살하려는 고집이 완강한 위인이니라. 그는 10여 년 전 백백교사건(白白敎事件)을 재판한 경력이 있어 이번에는 태극도를 말살할 강인한 의지로 임하니, 이날 공판에서도 개정벽두(開廷劈頭)부터 우선 상제님의 기백을 꺾으려고 "태극도는 혹세무민하는 사교가 아니오?" 하며 신문(訊問)하기 시작하니라. 상제님께서 "태극도는 천지의 대도요. 그대가 묻는 사교라는 용어가 도시 어느 법 어느 조문에 있는가를 알고 싶소." 하고 반문하시니 그는 흥분하며 "귀도(貴道)의 교리가 좋다 하여도 이를 빙자하여 '신도들의 금품을 수탈하고 재산을 탕진하게 하였다'하니 사교가 아니겠소?" 하고 힐문(詰問)하므로 "그것은 사실무근한 일로서 수사기록에도 명기되어 있으니 내가 굳이 답할 필요가 없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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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이 다시 격앙된 어조로 "피고인은 도통하였다고 하는데 도통한 도사가 어찌 피고인이 되어 법정에 출석까지 하였소?" 하며, 자신이 가져온 주역을 펴서 그중 몇 구절의 해석을 요구하니라. 상제님께서 의연히 해석하여 주신 다음, "공자는 진채지액(陳蔡之厄)을 당하고 예수는 십자가의 혹형을 당하였다 하는데 성인군자일수록 천기를 거역하지 않는 법이니 범인이 감히 언설로 논할 수 있으리오? 더구나 그대가 주역까지 꺼내어 나의 도통 여부를 물었으나, 이는 인간의 문자로 운위(云謂)할 일이 아니며 이 법정의 일과는 관계가 없지 않소. 그대가 주역을 안다고 하나 팔괘생십이(八卦生十二)와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이치를 아느뇨?" 하시니 그는 좌불안석하다가 차기 공판기일도 정하지 않은 채 폐정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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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1차 공판이 이와 같이 폐정되어 2차 기일이 미정일뿐더러, 한경 등의 공판 기간도 무한정 연장될 전망이므로 여관에 설석하시고 공부하시며, 최변호사로 하여금 보석을 신청하게 하셔서 5월 19일에 석방되게 하시니라. 그들이 출감 즉시 상제님께 배알하고 저희들의 잘못으로 욕급지존(辱及至尊)함이 황공무지하여 부복(俯伏)하고 사죄하니 상제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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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금현이 가물치회를 진상하니 상제님께서 진어하시며 "증산 상제님께서 이 회를 진어하시매 하늘에 가물치 형상이 나타났다 하는데 너희도 보아라." 하시고 문을 여시므로 우러러보니 과연 하늘에 가물치 형상의 구름이 떠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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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현이 상제님께 "후천에도 반상의 구별이 있나이까?" 하고 여쭈니 옆에 있던 정운교가 보다 못하여 "여기가 어느 존전이라고 당돌하게 그런 일을 여쭈느냐?" 하며 책망하니라. 상제님께서 운교에게 "관계없으니 그대로 두라." 하시며 금현에게 "후천에는 선천의 반상과는 다르나 그 한계는 더욱 명확하되 도통의 높고 낮음으로써 이루어지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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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에 상제님께서 부산도장으로 환어하시며, 박한경 등에게 하명하시기를 "너희들이 지방사업에 공로가 크고 또 이번에 고초도 많았으나 아무리 공(功)과 고(苦)가 많고 크더라도 그로써 죄가 소멸되지는 않는 법이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더욱 조심하라. 욕속(欲速)은 부달(不達)이고 과(過)는 불여불급(不如不及)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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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어느 날 임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각(覺)과 미(迷), 통(通)과 색(塞)은 초지(草紙) 한 장 사이니 허령(虛靈) · 허각(虛覺)에 빠질까 경계하되, 도통 또한 지나치게 탐내지 말라. 도통이 아닌 도색(道塞)에 빠질까 저어하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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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도인 이건우(李建雨)가 해삼을 사서 상제님께 진상하니 맛있게 진어하시므로, 다음날도 또 진상하매 진어하지 않으시고 "너는 웬 돈이 그리 많아서 이런 값비싼 것을 매일 사 오느냐? 돈을 허비하지 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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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에 제2차 공판기일이 지정되어 상제님께서 다시 청주로 행행하셔서 여관에 행재하시며 그 2층에 공부설석하시니라. 이때 늦더위가 기승하여 거둥하시기조차 곤란하셨으나 한시도 공부를 중단하지 않으시므로 시종한 청봉과 금현 등은 더욱 황공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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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공판도 도인들의 방청으로 법정이 초만원인데, 재판장은 전번의 미흡을 생각하여 더욱 준비한 듯 피고인에 대한 심리에 앞서, 또 주역을 가지고 나와 계사전(繫辭傳)의 귀신설(鬼神說) · 변화설(變化說)로부터 도덕론(道德論) · 길흉론(吉凶論) 등을 의기양양 집요하게 따져 물으니라. 상제님께서 "우주의 진리가 도요. 인간의 법이 또한 도인데 그 도주인 나에게 그런 진리와 법을 가지고 시험하려 하느뇨?" 하시며 그가 미처 묻지 못한 천지현기(天地玄機)와 인사규범(人事規範)의 모든 도리를 설파(說破)하시고, "나에게 위법이 있다면 그대가 재판장으로서 법에 따라 판결함이 당연한 소임이거늘 어찌 도를 거론하여 언책(言責)을 취하려 하느뇨?" 하시니라. 재판장이 그제야 몸을 가다듬고 "그러하시면 이 자리를 법정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듯이 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므로 "그대가 굳이 도를 알고 싶으면 정식으로 나에게 예를 갖추고 배우도록 하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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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이 다시 검사와 변호사의 개별신문과 증거제출 등으로 공판을 진행하게 하니 검사가 "피고인은 남북한 관계를 수극화(水剋火)의 원리에 비유하여 '수(水)방인 북한이 화(火)방인 남한을 이긴다는 논리를 주장하였다' 하는데 사실이뇨?" 하고 신문하자 재판장이 "그러한 이론은 동양철학의 상식이니 논할 것이 못 되오." 하고 문답을 중지시키니라. 이때 도인 중에서 윤금현(尹金鉉) · 권오근(權五根) · 연동흠(延東欽) 등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증언하였는데 이날도 공판이 무기 연기된 채 폐정되므로 상제님께서는 다음날 도장으로 환행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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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8월 하순에 청주법원에서는 태극도 사건이 반년이 넘도록 종결되지 않은 채 그 재판장 문기선이 대전지법 원장으로 원장으로 전임되고, 부장판사 김동수(金東秀)가 담당하게 되었으나 공판은 그대로 연기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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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선은 이임 직후 폐백을 갖추어 부산도장으로 와서 상제님께 알현하고 전날의 무언함을 사죄하며 "정식으로 배우도록 하라 하신 하교에 따라 배알하오니 도리를 가르쳐 주옵소서." 하고 집지(執贄)하기를 간청하니라. 상제님께서 도리를 훈교하시니 감복하고 돌아간 후에 수차 와서 배알하고 봉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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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상제님께서 구천 상제님 강세일 치성에 중부와 지방의 유공도인(有功道人)들을 참례시키시니, 도장이 협소하므로 중부의 일반 도인들은 그 시각에 각자의 집에서 도장을 향하여 배례하며 봉행하게 하시고, 음복은 빠짐없이 고루 나누도록 하시며 "음복은 상제님께서 내리시는 청복(淸福) · 성배(聖杯)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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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인이 상제님께 여쭈기를 "우리 도와 도리가 세계 어느 종교나 철학사상(哲學思想)보다도 더 훌륭하오나 저는 우선 현실적으로 생업의 기반을 닦아 놓고 수도공부에 전념하려 하나이다." 하니 하교하시기를 "인간이 먹고산다는 일은 생명을 지탱하는 본능일뿐더러 또 인류의 문명이 그런 욕망으로 발전하기도 하느니라. 육체를 위하여 먹고살고 부모와 처자를 봉솔하는 생업에 충실함은 그것이 바로 생의 도리이며 직업의 신성성(神聖性)이니라.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탐(貪)이 되느니 명심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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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육체현실(肉體現實)과 심령이상(心靈理想)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음양의 도리니 육체만 위주하여 심령을 버리거나 이상만 앞세워 현실을 외면함도 음양합덕이 아니니 육체와 심령의 조절(調節)이 곧 합덕이니라. 돈을 벌기 위하여 공부를 버리면 그것은 금수의 일이요, 이상만 찾고 현실을 버리면 아표신(餓莩神)이 될 뿐이니 도는 합덕이라야 이루어지리라. 또 도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농사에도, 장사에도 있으니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심적기도(心的祈禱)와 아울러 도를 함께 닦아야 함이 합덕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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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에 상제님께서 규오, 중하 등을 거느리시고 양산 영취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에 행행하셔서 경내를 순행하시고 환어하시니라. 절 문을 출어하실 때 한 개안승(開眼僧)이 보니 사내의 모든 불 · 보살이 상제님을 수종하여 떠나가므로 황급히 존전에 부복하고 사뢰기를 "저희 절에 녹(祿)줄이나 남겨 주고 가시옵소서." 하니 "나의 과차(過次)에 어찌 녹줄이 끊어지리오, 안심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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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상제님께서 내수들에게 이렇게 하교하시니라. "증산 상제님께서 정음정양(正陰正陽)을 설파(說破)하셨거니와 태극에서도 음을 양에 앞서 말하느니라. 그러므로 인류를 위시한 만유군생의 모태(母胎)가 음이며 여성이니 생명의 바탕이 실로 정음의 자리니라. 무극이 태극으로 기동함에 선음 · 후양(先陰 後陽)으로 합덕함을 알면 천하만사가 먼저 여성의 덕에 기인함도 알리라. 내수들은 도를 위하여 분발하라. 도의 기동, 생명력이 그대들에게 있느니 도자(道子) · 도손(道孫)을 낳고 기르는 포덕 · 합덕의 명(命)과 임(任)을 다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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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청소년 · 아동들에게 하교하시기를 "너희들은 마음이 때 묻지 않은 백지장과 같으니 거기에 좋은 그림이나 바른 글씨를 기록하여야 하느니라. 그런 생각으로 마음 닦는 공부를 할지어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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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이 상머리를 정저하신 수저가 숟가락을 의미하는 것인지 , 아니면 <숟가락과 젓가락> 을 의미하는 것인지 계속 생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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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점심 저녁 때로는 야식 젖가락이 필요할땐 젖가락 쓰고 숟가락 필요할때는 숟가락 쓰고 지금 각자 음식을 않먹으면 배프고 기운이 없스므로~ 조정산 옥황상제님께서의 공사에 너무 심취하신다
숫가락 젓가락인가에 집중하기보다 수저가 음식을 먹는 도구라는 점을 주목해보길 바랍니다.
타인에게 육체적인 음식을 주는 것이 복록일 수 있듯이, 마음적인 먹거리를 주는 것, 나아가 영적인 양식을 주는 것도 또한 복록이 되는 겁니다.
물론 제대로 된 진실이라는 양식이 도움되지만, 알다시피 신인이라는 말보다 광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불편한 진실이 진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으로...
특히 제대로 된 예언은 오해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전번 주에 만동묘에 우연히 다녀왔네요...
그리고 덕택에 8월 30일 경신월 경신일을(마침 백종일이더군요) 출판일자로 잡았고, 지금 인쇄 중입니다.
"인생사전계약"이라는 책입니다.
어쩌면 님이 예견한 (복서와 관련된) 대보책인 마패입니다. 윤석열의 폭정에 대한 것 말이죠...
@담마 주우 윤석열 대통령의 폭정이라~정치 얘기하면 싸움나는데 저는 검사출신에 대통령이 앞 전권의 무너져 버린 5년 사회 교육 경제 안보 외교 특희 법이 바로서야 되거늘 앞으로 검사 대통령이 잘 할거라 믿습니다
^^도주님의 <수저> 이야기에서 일부러 빼놓은 것이 딱 한 구절이 있었는데..참 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개해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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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령을 내리신 후에 임원들로 하여금 엄히 감독하게 하시고 동네에서도 술을 팔지 못하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술이 수도인에게는 사약(死藥)임을 알아야 하느니 단주(斷酒)은 있되 절주(節酒)는 없는 도수니라. 또 너희들은 혹 술에 취하고 싶을 것이나 실로 도에 취하여야 하느니라." 하시고 음복주(飮福酒)도 수저로 떠먹게 하시니라. (태극진경7장)
(참고)
10. 이 때에 경학의 형이 아우를 오라고 사람을 보내온지라. 상제께서 그를 보낸 후에 발을 당기고 가라사대 “속담에 발복이라 하나니 모르고 가는 길에 잘 가면 행이요. 잘못가면 곤란이라” 하시고 곧 그 곳을 떠나 최 창조의 집에 독행하셨도다. 그 곳에 머무시다가 다시 혼자 그 앞 솔밭을 지나서 최창겸에게 이르러 잠시 몸을 두시니 상제께서 계시는 곳을 아는 사람이 없었도다.
@far-reaching spirit 부끄럽게도 대순진리회에 있을 시 술에 중독된 경력이 있습니다. (100번은 끊었던 전력이 있네요)
그만 두고 나서 술담배를 끊었고, 신세계를 맛보았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이겨내지 못하면서 도통은 어렵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다른 건 잘 이용하고 따르면서 금주금연 이런 건 무시하면서 말이죠)
참 몇번 수저로 술 먹기는 시도해보았는데, 빨리 취하는 데 도움되더군요.
술 대신 도술을 좋아해야 하는데....
담마주유님께 질문을 해도 될련지~ 상도에서 밝힌 박성 미륵세존 하감지위로 하는것이 맞다고 보시는지요? 저는 이것이 박우당께서의 원신에 신위는 아니라고 봅니다 만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단지 논의 방식의 문제라고 봅니다.
박성구님은 자신이 선점권을 행사하려고 욕심을 낸 거죠.(박성구님은 우당의 뜻을 이어받으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무시했습니다. 실제로 인간적인 자신이 독재적인 우당보다 더 도를 잘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면 우당이 자신의 소유라고 여기는 식인 거죠.
이를테면 프로이트가 최초로 무의식을 언급했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식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