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퓌비 드 샤반
(Pierre Puvis de Chavannes, 1824~1898)
• 주요작품
- 바닷가의 젊은 여자들 (Jeunes filles au bord de la mer, 1879년)
- 가난한 어부 (Le pauvre pêcheur, 1881년)
- 예술과 뮤즈들에게 소중한 신성한 나무 (Le Bois sacré cher aux arts et aux muses, 1884년)
- 성녀 주느비에브의 어린 시절 (L'Enfance de sainte Geneviève, 1877년)
- 희망의 여신 (L'Espérance, 19세기경)
생애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부르고뉴 출신 가족의 아들로 1824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마리 줄리앙 세자르 조제프 퓌비(Marie-Julien-César-Joseph Puvis)는 광산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으며 그는 총 네 명의 형제 중 막내였다.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어린 시절 리옹에 위치한 생 랑베르 중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840년에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1841년과 1842년에는 파리에 있는 앙리 4세 고교(Lycée Henri IV)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했다고 알려진다. 1843년에 니스에서 사망한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이공과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했지만 당시 질병으로 인해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결국 이를 실현시키기 못했으며 부르고뉴 지역에 위치한 마콩(Mâcon)에서 2년 동안 체류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법학부에 몇 달 동안 등록되어 있던 것으로 알려진다.
1846년에 이탈리아로의 첫 여행을 떠났던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프랑스로 다시 돌아오면서 화가 에밀 시뇰(Emile Signol)에 제자로 추천되었지만 결국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앙리 셰페르(Henri Scheffer)의 제자로 보내져 예술 훈련을 받았다. 1847년에 이 작업실을 떠난 그는 다시 마콩에서 잠시 체류하며 시인 라마르틴(Lamartine)과 여러 번 만났다고 전해진다. 이후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1848년에 이탈리아로 두 번째 여행을 떠났으며 화가 보드롱 드 베르메롱(ouis Bauderon de Vermeron)과 함께 당시 거의 모든 이탈리아 도시를 방문했다고 알려진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업실에 들어가 약 2주 정도 머물렀으며 이후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의 작업실에서 약 3개월간 머물며 심화된 예술 훈련을 받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테오로드 샤세리오(Téodore Chassériau)의 작품들로부터 주요한 영향들을 받았으며 파리 생 라자르 거리에 위치한 작업실을 얻어 3년 간 실제 모델들을 바탕으로 그림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1850년대초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지만 1852년부터 1859년까지 그가 살롱 전시를 위해 제출한 작품들이 매년 거절 당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1861년에 드디어 살롱에서 2등 메달을 수상하였고 또한 파리를 비롯하여 리옹과 아미앵(Amiens), 푸아티에(Poitiers) 등 프랑스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장식 작업을 수행하면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는 1867년에 레지옹 도뇌르의 기사(Chevalier de la Légion d'Honneur)로 임명되었으며 1870년에는 프랑스 국민위병에서 복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1871년에는 당시 파리 코뮌 상황 속에서 베르사유로 피난하기도 했던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1880년대 초부터 프랑스 예술가 살롱(Salon des Artistes Français) 위원회의 멤버가 되어 살롱 전시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887년에 그는 리옹 예술 협회의 명예 회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1889년에는 프랑스 예술 100주년 전시회의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그는 레지옹 도뇌르의 3등 훈장 수훈자가 되는 명예를 얻었다.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1890년에 오귀스트 로댕 및 에르네스트 메소니에(Ernest Meissonier)와 함께 국립 보자르 협회(Société nationale des Beaux-Arts)를 설립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891년에는 메소니에를 대신하여 회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1894년 브뤼셀에서 자유 미학(La Libre Esthétique)의 첫 번째 살롱에 참여하였으며 1897년에는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근대 미술 잡지를 발간하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지속하였다. 1897년에 루마니아 공주 캉타퀴젠(Princesse Cantacuzène)과 결혼했던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1898년 10월에 파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작품 활동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1861년 살롱에서 첫 2등 메달을 수상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전시를 거절당하며 매우 어려운 초기 작품활동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프랑스 여러 도시에 위치한 시청 및 기타 공공 건축물들을 위해 제작한 대규모 장식 벽화 작품들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특히 이탈리아에서의 체류 기간 동안 프레스코화에 대한 영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테오도르 샤세리오의 작품들을 통해 벽화라는 표현 수단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그의 경력 전반에 이를 지속적으로 사용하였다. 그의 벽화 작품들은 고대로부터 가져온 주제들을 바탕으로 우화적인 구성 및 이상화를 실현시키기 위해 단순화된 형태와 리드미컬한 선 그리고 마치 프레스코화 같은 평평하고 엷은 색상으로 특징 지어지는 고유한 스타일을 개발해냈다.
대표적으로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1861년에 아미앵 미술관의 장식 계획을 위해 일련의 주요 그림 제작을 시작하여 1882년에 완성시켰으며 1867년부터 1869년까지는 마르세유에 위치한 롱샹 궁전(Palais Longchamp)을 위한 장식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1874년부터 1898년까지 파리 판테온을 위해 그가 제작한 성녀 주느비에브의 생애를 보여주는 일련의 대규모 작품들은 그의 주요 작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87년부터 그는 마찬가지로 파리 소르본을 위해 우화적인 장면의 장식화를 그리기 시작하였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에 그의 제자들에 의해 완성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1884년부터 1886년까지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리옹 박물관의 웅장한 계단을 위해 ‘예술과 뮤즈들에게 소중한 신성한 나무’(Le Bois sacré cher aux arts et aux muses, 1884년)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1887년부터 1894년까지는 파리 시청 계단을 위한 장식 작업을 맡아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 외에도 그는 푸아티에 시청과 레옹 보나 저택, 루앙 미술관 등을 비롯하여 보스턴에 위치한 공공 도서관 계단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장식 벽화 작품들과 동시에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의 캔버스 회화 작품들은 그의 작품활동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희망의 여신’(L'Espérance, 19세기경)과 ‘가난한 어부’(Le pauvre pêcheur, 1881년)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피에르 퓌비 드 샤반 특유의 상징주의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평가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의 작품은 당대 파리 예술계의 주요 흐름으로부터 독립적인 양상을 보이며 날카로운 비판 및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상징과 능숙한 구성 및 정교한 주제를 통해 표현된 고전적이면서도 이상주의적인 그의 작품들은 폴 고갱부터 조르주 쇠라에 이르는 아방가르드 화가들에 의해 많은 찬사를 받았다. 이 외에도 샤를 보들레르, 테오도르 고티에 등을 포함한 다양한 비평가들에 의해 호평을 받은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이후 20세기까지 다양한 화가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쳤으며 상징주의 예술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동시에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장식 벽화 부문에 있어 선두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주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ㅡ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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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서양미술관에서... /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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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어부 / 피에르 퓌비 드 샤반
((Pierre Puvis de Chavannes, 1824~1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