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북역에 내려서
소설 절기가 지난 십일월 넷째 목요일이다. 그새 반짝 추위와 예상하지 못한 때 이른 첫눈이 내리기도 했다. 그러함에도 어제는 봄날같이 포근한 날씨였고 날이 바뀐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밥을 일찍 해결하고 날이 밝아오는 여명에 현관을 나섰다. 행선지는 근교 함안으로 가려고 창원중앙역으로 나가 열차를 탈 셈이다. 퇴촌삼거리에서 창원대학 앞을 거쳐 도청 뒤를 지났다.
창원중앙역에 이르니 날은 완전히 밝아왔다. 부산 부전역을 출발해 목포로 가는 무궁화호는 일곱 시 반에 잠시 정차했다. 이른 시간 하행선을 타려는 몇몇 승객이 고객 대기실에서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길 기다렸다. 한 아주머닌 이곳 억양이 아니라 어디 사는지 궁금했는데 대방동에 살면서 목포로 가는 길이었다. 친정은 담양인데 목포에는 집안일을 보러 가는 걸음인 듯했다.
정한 시간에 도착해 출발한 열차는 창원역과 마산역을 거처 중리에서 꽤 긴 터널을 통과한 함안역 다음이 군북역이었다. 군북은 한적한 시골인데 향토사단이 옮겨가 내왕하는 이들이 예전보다 늘어난 듯했다. 내가 함안 가야나 군북을 찾아간 경우는 여항산 미산령이나 서북산 감재를 넘어 북쪽으로 갔을 경우였다. 며칠 전에는 서북동에서 감재를 넘어 함안역에서 창원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군북역에서 명관리를 거쳐 원북 일대를 둘러보는 여정을 정했다. 군북역에 가까운 백이산과 숙제봉으로는 몇 차례 등정해서 소나무 숲길의 운치와 공룡 발자국 화석의 신비로움은 익히 알고 있다. 무릎에 와 닿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낮은 산일지라도 등산은 자제하고 있다. 아스팔트로 포장이 된 시골길을 걸어도 자동차가 적게 다녀 소음과 매연은 걱정하지 않고 안전했다.
명관리로 가는 길섶에서 철을 당겨 핀 광대나물꽃과 늦가을을 장식한 감국을 봤다. 산자락이나 둔치에서 산국은 흔하게 볼 수 있었으나 꽃잎이 조금 더 큰 감국은 개체수가 적어 보기가 쉽지 않았다. 산국은 향기가 진한 쓴맛이나 감국은 향이 부드러워 꽃잎은 차를 달여 먹고 건강 베개로 인기 있다. 한 달 전 다녀온 의령 지정면 의병의 숲 댑싸리 꽃밭에 지천으로 핀 감국꽃을 만났다.
감국과 늦게까지 꽃잎이 시들지 않은 쑥부쟁이꽃도 볼 수 있어 청초함이 더 돋보였다. 백이산과 숙제봉을 돌아간 마을은 명관리로 인천 이씨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운 이휴복의 후손들이 모여 살았다. 근현대에 와서 독립운동가이며 몽골에서 의술로 숭앙받았던 이태준 선생과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우환 화백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명관리에 딸린 평광마을 숲을 지나 이 화백의 재종 동생 욱환 씨 집을 찾아가니 부재중이고 골동품만 널브러져 있었다. 명관저수지 둘레길을 걸으면서 저수지 건설로 물에 잠긴 이태준 생가를 가늠해 봤다. 저수지 둘레길에는 낙엽이 진 활엽수 가랑잎은 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서걱거렸다. 선발대로 내려왔을 오리 떼는 수면 가장자리 몸을 숨겨 놀다가 인기척에 퍼드덕 날아올랐다.
좁은 골짜기를 빠져나가 조선 초기 계유정난을 피해 낙향한 생육신 조려가 은둔한 원북리로 향했다. 마을 어귀 선생이 머문 채미정과 청풍루에서 고결한 지조가 드러났다. 곁에는 조려를 향사한 서산서원은 백이산과 숙제봉을 바라봤다. 마을 안길을 걸어 함안 조씨 입향조 열(悅)과 생육신 여(旅)가 살았던 어계 고택을 찾아가니 통영에서 온 중년 여성 방문객들과 동선이 잠시 겹쳤다.
인천 이씨 명관리와 함안 조씨 원북리를 둘러보는 중 창원 두 지기로부터 함안 작은 영화관으로 개봉작을 관람하러 온다는 연락이 닿았다. 셋은 옛 군북역 이태준 기념관 근처 엄니 밥집에서 맛깔스러운 점심상을 받고 가야로 이동해 시골 영화관에서 대도시에서와 같이 동시 개봉된 ‘서울의 봄’을 관람했다. 객석의 관객은 참된 직업군인과 일그러진 정치군인 식별이 어렵지 않았다. 23.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