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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 시조 이야기
글 조석현(曺錫鉉)
창녕 조씨(昌寧曺氏) 시조(始祖) 탄생 설화를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상황과 창녕 조씨 족보와 다른 문헌들을 참고하여 창녕 조씨의 시조 조계룡(曺繼龍)의 행적을 사실에 가깝게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설화를 그대로만 믿는 것만이 조상을 존경하는 일일까? 문자 하나하나에 얽매여 폐쇄성에 끝까지 머문다면 진실은 계속 숨어버리고 말 것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정확한 역사적 사실[史實]을 바르게 알고 조상의 뜻도 제대로 알 때 더욱 더 조상을 존숭(尊崇)하는 정(情)도 나온다 믿는다.
단군신화, 해모수신화, 고주몽신화, 박혁거세신화, 김수로신화, 김알지신화 등 왕들의 탄생, 업적 들이 거의 신화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는 역사적 사실이 변형되어 전해진 것에 불과하다. 실제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면 신화로 표현된 부분의 의문도 풀리게 된다. 창녕 조씨 시조 탄생설화의 존재 자체도 위와 같이 시조공이 왕의 지위에 있음을 이야기하기도 하다. 시조 탄생과 득성(得姓) 유래에 대한 설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보자
1. 창녕 조씨 탄생설화
신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은 태어나면서부터 복질(服疾)이 있었다. 백약이 무효이던 차에 창녕 화왕산(火旺山) 용지(龍池)에서 기도하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용지에서 목욕하고 지성으로 기도하는데 갑자기 운무가 일어 주위가 캄캄해지면서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 몽롱한 지경에 정신을 잃었다.
얼마 후 운무가 걷히면서 못 한가운데서 솟구쳐 나왔는데 그로부터 복질(腹疾)이 씻은 듯 완쾌되고 태기가 있었다. 그 뒤 득남(得男)하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 무늬가 있었다.
하루는 꿈에 키가 훤칠한 한 장부가 나타나서 “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아는가? 나는 동해신룡(東海神龍)의 아들 옥결(玉玦)인데 이 아이의 아비다. 이 아이를 잘 기르면 크게는 공후(公侯)가 될 것이요 적어도 경상(卿相)은 틀림없을 것이다”하였다. 이 사실을 시조모 예향의 아버지 이광옥이 진평왕(眞平王 : 579-632)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왕이 이 아이를 접견하고 보니 풍모가 특이하고 겨드랑이의 “조(曺)”자 무늬를 보고 성을 “조(曺)”라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이라 지어 주었다. 그로부터 장성하여 진평왕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지니 곧 창녕 조씨 시조이시다.
또 왜구가 내주(萊州 : 동래)에 침범하자 왕께서 방어하라 명하였다. 이에 공은 단기(單騎)로 적진에 나아가 말고삐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타이르니 수많은 왜병들이 엎드려 절하며 “공은 천인(天人)이시다”하면서 물러갔다고 전해진다.
2. 시조공의 행장
삼국사기, 삼국유사, 각 문중의 족보 등을 참고로 시조공의 행장을 엮어본다.
시조공이 돌아가신 진덕여왕 5년 651년에 81세였다는 족보의 기록에 의해 역산(逆算)하면 시조휘 계룡은 571년경 탄생하였다. 외조부 이광옥이 약 17세 때인 587년경 진평왕에게 외손자인 용(龍)[동해신룡 조(曺)]의 아들 계룡을 추천한다. ‘인경(鱗卿)’ 이라는 자를 지어받고 등과(登科)한 것으로 보인다. 혼인 시기로 보면 25세 595년경 16세의 덕만공주와 결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5세인 615년까지 5남 2녀를 두었다. 승만부인 손 씨의 소생 태자가 628년 요절할 때까지 태자의 스승, 태사(太師)로 있었다. 628년 이후 성골(聖骨)의 남자가 없자 진평왕은 덕만공주를 왕위 계승 작업에 돌입한다. 진평왕 서거 1년 전 서기 631년 봄 2월에 덕만공주 남편 조계룡을 ‘음갈문왕(飮葛文王)’으로 봉한다. 이 때 61세인 조계룡은 숨겨왔던 성씨를 드러내어 ‘탄생설화’를 빌미로 조씨 성을 하사받아 조(曺)씨 시조로 탄생하셨다. 631년 5월엔 칠숙(柒宿)과 석품(石品)의 반란 모의를 사전 색출하여 처단한다. 632년 1월 진평왕이 붕어하니 덕만공주가 53세에 선덕여왕이 된다. 태자와 왕족의 스승이었고 갈문왕으로서 섭정하여 취약한 여왕을 실질적으로 보완하였다 생각된다. 또 당시 신라 왕실을 튼튼히 하는 데 비사벌 가야 세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신라 삼한벽상 좌명공신(三韓壁上 佐命功臣)이셨고, 공주의 남편으로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셨으며,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 武官), 상주국대도독(上柱國大都督)을 역임하셨고, 태자 태사(太師)이셨고, 문무왕(文武王)이 되셨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 文官)를 지내셨으며,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지셨다. 진덕여왕 5년 신해년인 서기 651년에 돌아가시니 연세가 81세(571-651)이셨고 시호는 문의(文懿)이시다. 묘는 경주군 안강읍(安康邑) 노당리(老堂里) 2리 자옥산(紫玉山) 아래 초제동(草提洞)의 신좌(辛坐)에 모셔져 있다.
3. 시조의 본향 비사벌 이야기
비사벌(比斯伐), 비자벌(比子伐)은 일반적으로 ‘비ㅅ+벌’로 하여 ‘빛벌’로 새긴다. 그러나 삼한의 진한 중 ‘불’사국(不斯國), 비‘화’가야(非火伽倻)에서 비사벌로 지명이 바뀐 것을 볼 때 ‘빛’보다는 원래 ‘불’의 뜻으로 볼 수 있다. 신라 진흥왕 때 비자화군(比自火郡), 신라 문무왕 때(661년) 하주(下州)로, 경덕왕 때(757년) 화왕군(火王郡)이었다. 창녕의 옛 지명들은 하나같이 ‘불’과 관련된 ‘화(火)’의 이름을 쓰고 있다. 당연히 이 ‘불’의 명칭은 비사벌의 진산이며 화산(火山)인 화왕산(火旺山 : 큰불뫼)에서 비롯된다. 특히 ‘비자화군(比自火郡)’에서 ‘스스로 불이 나는 것[自火]’은 ‘화산활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시 화왕산에 성을 쌓았으니 창성(昌城), 하성(夏城)이라 부르고 현재는 창녕(昌寧)이다. 해[日]가 두 개나 겹치는 창(昌)자나 여름[夏]도 모두 ‘불’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리고 ‘사벌’(斯伐)은 ‘서울’의 당시 발음 ‘셔블’을 한자로 표시한 것으로 본다. 서울의 옛 발음 셔블을 ‘서라벌’(徐羅伐 : 현 경주)로 쓴 것과 같다. 또한 비사벌의 유물 등을 볼 때 비사벌은 당시 제2의 경주[서울]라 불리울 정도로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비사벌은 ‘빛벌’보다도 ‘비(불의 변음)+사벌(셔블 → 서울)’로 ‘불의 서울’로 본다.
역사적으로 비사벌 가야는 진한(辰韓)이며 지리적으로 사로국(斯盧國)과 가까웠다. 그러나 사로국 중심의 신라권에 가담하지 않았다. 변한(弁韓)의 여러 나라와 가야연맹(伽倻聯盟)을 맺고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창녕 계성(桂城) 고분군의 토기의 명문(銘文)에는 대간(大干)이 새겨져 있다. 자체적으로 ‘대간(大干)’ 칭호를 사용한 것을 볼 때 신라복속 이후에도 독자적인 지위와 문화를 갖춘 소국(小國)으로 면모를 갖추었다고 추정된다. 또 창녕진흥왕척경비(昌寧眞興王拓境碑)의 내용을 보면 신라 조정에서는 촌주(村主)로 대간(大干)에 해당하는 지위로 술간(述干)의 외위(外位)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시조의 태생지 화왕산 용지 이야기
시조 득성지(得姓地)인 화왕산(火旺山)은 아름 그대로 ‘화기가 왕성한 산’이다. ‘불뫼’ ‘큰불뫼’로 불린다. 선사시대의 용암 분출로 된 화산(火山)이었다. 화산 분출구로 용지의 큰 연못을 비롯, 3개의 연못이 있고 9개의 샘[九泉三池]이 있다. 숫자로 보면 3, 9 또는 3+9=12 모두 단수화하면 3이라는 숫자에 걸린다. 3은 ‘사람’의 지위이며,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용(龍)은 양(陽)의 극이며, 숫자로는 9이다. 이 또한 3의 배수다. 그래서 용은 대부분 ‘구룡(九龍)’이라 한다. 이 삼지(三池)에는 창녕 조씨 득성설화 이외에 화왕산 아래에 있는 관룡사(觀龍寺) 유래 설화가 있다. 원효 스님의 제자 승파스님이 기도 중 화왕산 삼지(三池)에서 구용(九龍)이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해서 관룡사(觀龍寺)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전하여 진다.
사실상 화왕산 용지에서 승천하는 구룡(九龍)은 후일 조씨 문중의 용(뛰어난 인물)이 아닐까? 실제로 창녕 조씨 문중에서는 용(龍)을 이름으로 쓴 이가 많다. 조문(曺門)을 연 동해신룡(東海神龍), 청룡(靑龍), 조계룡(曺繼龍)이 대표다. 일세를 풍미했던 조씨 오룡(曺氏五龍) 형제들과 최근세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독립운동에 일생을 투신한 길룡(吉龍) 등이 있다. 용은 ‘임금’을 상징하고 또한 ‘물’이다. ‘불’의 기운이 강한 화왕산에 ‘용지’가 있어야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음양의 조화로 생명이 탄생한다. 생명은 오행상 목(木)기운이고 청색(靑色)으로 대표된다. 따라서 화왕산 용지(龍池)에서 ‘청룡(靑龍 : 시조의 아버지 옥결)을 이을 용’[繼龍]인 시조가 탄생하는 것은 필연이 아닐까?
또 화왕산은 창녕의 진산(鎭山)으로 군사 요충지다. 정상 부근엔 가야시대에 쌓은 옛 성이 2.6km에 걸쳐 있다. 임진왜란 때는 조식(曺植)의 제자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정유재란에 깎아지른 절벽을 전략 전술의 요충지로 활용하여 싸웠다. “이 성이 함락되면 우리는 억새 불 속으로 들어간다.”며 배화진(背火陣)을 치고 싸운 곳엔 의병승전비(사적 64호)가 있다. 비사벌 가야 당시에도 화왕산은 군사의 요충지였고 신라가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서 반드시 확보할 지역이었다.
5. 조(曺)씨 1획의 깊은 뜻
조(曹)씨로 보면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가 된다. 만약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가정해도 조(曺)씨를 굳이 쓴다는 것은 한국적인 독자성을 갖는다 볼 수 있다. 또한 창녕 토박이거나 정착하여 중국의 조(曹)씨와는 전혀 다른 조(曺)씨를 쓴 것으로 본다.
조문(曺門)에서도 조(曹)로 2획을 쓴 예가 있다. 정조 때 조정에서 논의되어 조(曺)의 1획으로 통일한 바가 있다. 시조공 당시 신라에서도 2획으로 쓰인 예가 있다. 시조의 성(姓)을 ‘마실’ 조(曹)로 보고 ‘음(飮,마실)갈문왕’을 봉한 것이나 비사벌 촌주 ‘조(曹 : 마실)술간’을 ‘마질지술간’(麻叱智述干>‘마실’술간)으로 작위를 부여한 것이 그 예다. 그러나 득성 설화는 시조공이 1획인 본래의 조(曺)를 당당히 되찾은 것을 보여준다. 실제 비사벌의 왕 가문을 회복시킨 것이나 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설화적으로 꾸며진 것으로 본다.
그러면 1획인 조(曺)는 과연 무슨 뜻인가? 자전(字典)에도 그냥 ‘성(姓) 조(曺)’라고만 하고 있고 그 뜻이 없다. ‘가로 왈(曰)부’에 넣고 있을 뿐이다. 실제 글을 쓸 때도 가로 왈(曰)로 옆으로 길게 쓰지 않고 날 일(日)로 세로로 길게 쓰고 있기도 하다. 필자는 조(曺)를 ‘동일(東日)’의 뜻으로 해석한다. ‘말하다’[曰]의 뜻이 아니라 ‘해’[日]의 뜻이다.
시조공의 조부 동해신룡(東海神龍), 아버지 청룡(靑龍)에 이어 조계룡(曺繼龍)의 성명(姓名)에서 앞의 동해(東海) = 청(靑)은 성씨의 뜻을 가지고 조(曺)씨 성으로 귀착된다. 그 공통의 뜻이 목(木)이며 동(東)이다. 또 이름은 신룡(神龍) = 룡(龍) = 계룡(繼龍)과 같이 3대로 이어진다. 조부는 ‘가장 뛰어난 신룡’이며 아들은 ‘용(또는 龍子)’이고 손자는 ‘이은 용[繼龍]’이다. 용은 왕이며 해[日]이다. 따라서 필자는 조(曺)의 뜻을 동룡(東龍) = 동일(東日)로 본다. ‘동쪽용’ 조(曺)이다. 또 ‘동녘해’ 조(曺)이다. 용이든 해든 사실상 왕을 상징하므로 조(曺)성은 “동쪽왕”을 상징하고 있다. 이렇듯 조(曺)씨 성 자체에 왕의 뜻을 지니고 있다. 조(曺)씨 1획은 왕족의 후손임을 강력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1획 조(曺)를 동일(東日)로 보는 견해는 조씨 선조(先祖) 중에 또 계셨다. 정조 때 창녕조씨지선록(昌寧曺氏知先錄)을 쓴 이조참판 조석중(曺錫中)이시다. 1800년 4월 13일 조(曺)자 일획으로 통일하여 공이 문중에 보낸 통고문(通告文)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曹)자는 서일(西日)의 형상이다. 이미 기운 해다. 조(曺)자는 동일(東日)로 떠오르는 해다. 한창 떠 오르는 의미이니 유구하고 무궁하기 때문에 시인이 그 임금을 칭송할 때 “해가 떠오르는 것 같다”고 한다.’ 여기서도 ‘해’는 임금을 상징하고 있다.
신라 조정에서는 조(曺)를 조(曹)로 혼동하여 ‘마실’조(曹)로 잘못 보았다. 그러나 시조는 1획인 조(曺)로 사성(賜姓)을 받아 이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용[왕]의 후손으로 ‘창녕의 동쪽 해’를 뜻하는 1획의 조(曺)씨 성(姓)을 지켜왔다. 단순히 2획의 뜻인 ‘마실’이나 ‘관청’ 정도가 아닌 ‘비사벌 가야의 왕’의 후손이기에 1획을 고집하여 쓴다.
6. 비사벌 왕자와 신라 한림학사 딸의 로맨스
시조의 아버지 옥결공(玉玦公)은 신라의 한림학사의 딸 예향을 만나 시조를 낳는다. 경주이씨 족보[松卨公派, 菊堂公派]에서는 ‘20세에 청룡병을 얻었다’한다. 예향은 옥결을 만나고 청룡병(靑龍病 : 옥결을 그리워하는 상사병)을 얻은 것이 아닌 지. 청룡(靑龍) ‘동쪽의 용’으로 ‘동해신룡’의 아들 옥결이다. 예향은 옥결의 고향인 비사벌 화왕산 용지에 가 청룡(靑龍)을 만난다. 아마도 부모님 몰래 결혼하여 상사병(相思病)이 낫고 시조를 잉태한 듯하다.
예향과 결혼하는 모습은 용지의 목욕과 운무 등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적나라하기도 하다. 목욕 중 운무에 싸이고 황홀경에 정신을 잃는 등의 표현은 극적인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옥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이 보인다. 이는 부모님의 정식 허가가 없었거나 드러내기 어려운 어떤 형편이 있었을 것이다.
아이를 낳은 뒤 예향은 꿈을 이용해 아버지의 정체를 밝힌다. 꿈에서 잘 키우라 하는 것을 보면 옥결은 계룡과 함께 있지 않는 것 같다. 비사벌에 남은 것인 지. 아들을 처와 외조부 이광옥에게 맡긴다. 아버지 옥결은 경상은 틀림없이 될 시조의 면모를 보고 시조공이 서라벌에서 큰 인물로 크기를 바란다. 그리고 분명하게 자신은 비사벌의 동해신룡의 아들 곧 왕자(용의 아들)임을 밝히고 비사벌의 정신과 자부심을 심어준 것 같다. ‘동쪽 해’의 비사벌 조(曺)씨의 맥을 잇도록 하였다 볼 수 있다.
7. 신라의 진골(眞骨)로 부마도위, 태사공
외조부 이광옥은 아이를 경주로 데리고 가서 진흥왕에게 알린다. 시조는 외조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서라벌에서 자란다. 시조는 김씨 성을 받은 김인평(金仁平)으로 경주에서 진골(眞骨)로 자라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 조정에서는 비사벌의 세력을 등에 업거나 이를 견제하는 데에 시조공이 필요했을 것이다.
비사벌 가야의 왕 옥결의 아버지 동해신룡은 신라 진흥왕 때 551년에 신라에게 합병되고 만다. 이 때 비사벌 왕 동해신룡은 신라의 진골(眞骨)로 편입되고 김씨 성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가락국의 출신인 김유신의 조부도 진골에 편입된다. 비사벌 가야의 왕족도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진흥왕 때부터 왕실에서도 김씨를 사용한 것에 비추어 보면 신라의 성인 김씨를 하사했으리라. 신라 조정이 정벌지역의 옛 왕에게 내리는 최대한의 예우라 할 수 있다. 신라 초기에 정벌 지역을 직접 다스릴 힘이 없었다. 또 반발을 줄이고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도 간접 지배 방식을 썼다. 신라의 작위(爵位)를 주어 신라의 신하가 되게하고 이들을 통해 지배력을 유지하였다 볼 수 있다.
여러 문헌을 참고로 보면 시조공은 외조부 이광옥에 의해 약 17세가 되는 587년경 진평왕에게 추천되어 등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받은‘인경(鱗卿)’이라는 자(字)는 ‘용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이 또한 용(동해신룡)의 후손을 높이 부르는 이름이 된다. 가장 자연스러운 연대로 추론해 보면 25세인 595년경 장녀 16세의 덕만공주와 혼인시켜 부마로 삼는다. 시조공이 부마도위까지 이른 것은 대를 이을 장녀 덕만과 결혼하였다는 증거다. 628년 승만부인의 아들 왕자가 요절할 때까지 태자의 스승이었다. 태사로 왕자, 공주는 물론 왕족인 김유신, 김춘추도 지도한 것으로 본다.
김해김씨 족보에서는 선덕여왕의 남편이 김인평(金仁平)이라 해서 조씨 시조 조계룡과 헷갈리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살폈듯 김인평이 곧 조계룡이라 하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 시조가 환갑에 진평왕으로부터 성과 이름을 하사받기 전에는 김씨를 하사받아 김인평으로 불리웠던 것 같다.
8. 조갈문왕(曺葛文王)
첫째인 덕만공주를 비사벌의 왕손인 시조와 결혼시킨 것은 당시 비사벌의 세력이 얼마나 컸던 것인 지를 알 수 있게 한다. 가야의 동쪽인 비사벌은 신라가 옛 가야를 지배하는 길목에 해당된다. 시조는 문무를 겸비하여 진흥왕때 왜병을 물리치기도 하고 태자를 가르치는 태사(太師)가 된다. 또한 옛 비사벌의 세력의 중심이기도 한다.
마침 성골 후사가 없는 26대 진평왕은 631년에 덕만공주를 여왕으로 원만하게 삼기 위해 시조를 ‘음갈문왕’으로 봉하게 된다. 이 때 진평왕은 비사벌 가야의 왕손에게 조(曺)씨 성을 회복시킨다. 동해신룡의 아들 청룡을 잇는 뜻으로 ‘계룡(繼龍)’의 이름을 내린다. 이때 시조공의 나이 61세다. 3개월 뒤에는 반란 모의자 칠숙과 석품을 처단한다. 한 해 뒤인 632년 진평왕의 붕어로 27대 선덕여왕이 등극한다.
634년에는 3년상을 마치고 남편의 옛 이름인 인평(仁平)을 연호로 삼는다. 이 대목도 선덕여왕이 남편의 힘을 이용하여 여왕으로서 어려움을 해결하였음을 보여준다. 실제 조갈문왕인 조씨 시조는 선덕여왕의 정신적 지주로서 나라의 스승이다. 태사공이었으며 선덕여왕 즉위시 62세인 원로로서 선덕여왕의 정치를 도왔을 것이다. 실제 선덕여왕은 633년까지 대신(大臣) 을제(乙際)에게 정사(政事)를 보게 한다. 공식적인 선덕여왕의 치세를 인평(仁平)이란 연호를 쓴 634년부터 잡고 있다. 이것은 초기 섭정의 시대를 말해주고 있다.
9. 조(曺)씨 시조(始祖)로 조문(曺門)을 열다
유물로 보면 신라의 술간(述干)의 지위를 받은 비사벌 수장은 지배자 간(干)보다 더 높은 대간(大干)으로 상당부분 자치권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도 지방관을 직접 파견치 못하고 그들을 활용할 수 밖에 없는 한계적 상황이었다. 비사벌 세력은 자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대신 신라 중앙정부에게는 정치적으로 충성하고 공납을 한 것으로 본다.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시조의 아버지 옥결은 비사벌 가야의 동해신룡의 아들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설화에서 보면 옥결은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다. 이는 신라에게 편입된 비사벌 왕자의 운명이 아닌 지. 아들을 결혼시켜 외조부의 안내로 경주로 보내지만 스스로는 끝까지 비사벌의 왕자로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 부분은 실제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신라 조정의 이해와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시조공이 궁에 있는 상황에서 신라 왕궁과 비사벌 왕족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라의 유화책에도 비사벌 왕족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 정신은 신라궁의 시조공까지 이어진다. 시조공은 근본인 비사벌 가야 왕족 조(曺)씨를 결코 잊지 않는다. 환갑이 지난 이후 완전히 득세를 하면서 드디어 비사벌의 왕가(王家) 조문(曺門)을 부활시킨다.
‘아이의 겨드랑이밑에서 조씨 무늬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는 것은 설화적 표현이다. ‘겨드랑이밑’이라는 것은 ‘숨겼다’는 뜻이다.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함은 조상 대대로 혈통이라는 이야기다. 시조공이 비사벌 왕손이지만 신라의 왕족 진골로 살면서 출사(出仕)했으니 그 신분을 공공연히 내세워서는 안될 처지였다. 원래 비사벌 가야의 성씨를 갖겠다고 직접 말하는 것은 껄끄러웠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겨드랑이에 조(曺)무늬가 있었다.’고 하여 조(曺)씨 성을 하사받는 것이 부드러웠으리라 생각된다.
설화에서는 태어날 때 외조부 이광옥이 진평왕에게 아뢴 것으로 되어있는 것은 시간상 잘못 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조공은 진평왕 때 태어난 것이 아니고 571년 진흥왕 때 탄생한다. 그래서 631년의 탄생이란 육체적인 탄생이 아닌 조씨의 시조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당시 비사벌 가야에서 성(姓)을 썼는 지는 불확실하다. 신라도 진흥왕 때부터 김씨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을 보면 조(曺)를 썼더라도 해당 지역인 본(本)과 같은 의미로 썼을 수도 있다. 조(曺)는 곧 창성(昌城), 창산(昌山), 하성(夏城), 하산(夏山), 창녕(昌寧)이기도 하다. 조씨 선조들이 봉군(封君)을 받을 때 본관의 이름으로 위와 같은 이름을 즐겨 쓴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적어도 그토록 조(曺)씨 성을 되찾으려 하여 3대에 걸쳐 시조공이 80여년 만에 뜻을 이룬 것을 보면 조(曺)씨 성은 이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조공은 비사벌가야의 왕손이며 조문은 왕족의 후손이다. 비사벌 왕족 성씨인 조(曺)씨를 살려 영원히 세세손손 이어지게 하였다. 화합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흡수되지 않는 꼿꼿한 조문의 기상과 정신은 시조로부터 면면이 이어졌다. 이러한 기상은 왕조가 바뀌거나 불의가 득세할 땐 의를 실천하며 드러난다.
신라말 명신 아간시중(阿干侍中) 조흠(曺欽)은 왕조가 바뀌자 토함산으로 숨고, 여말 조민수(曺敏修)는 고려의 충신으로 이성계에 대항하였다. 정재 조상치(曺尙治)와 조변륭(曺變隆)은 단종에 대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보였다. 의를 실천한 대학자 조식(曺植)의 제자들은 의병장으로 활약한다. 근세엔 한국의 간디 독립운동가 조만식(曺晩植), 독재에 대항한 조봉암(曺奉巖)이 있다. 또 조병로(曺秉魯), 조성환(曺成煥), 조도선(曺道先), 조준환(曺俊煥), 조갑환(曺甲煥), 조길룡(曺吉龍), 조계현(曺繼鉉)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나왔다.
앞으로도 창녕 조씨 시조의 정신은 계속 이어져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시조의 이야기가 단순히 재미있는 또는 기이한 설화가 아니라 모든 설화가 그렇듯 역사적 사실이 숨겨 있다. 감춰져 있거나 암시하고 은유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여러 기록과 그 시대상황을 파악하여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좀 더 사실에 가깝게 파악하여 진실한 선조의 뜻을 파악하고 또 이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끝
[출처] 창녕 조씨 시조 이야기|작성자 뜻대로
[출처] 창녕조씨 시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