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현재 유럽 다 쓸구 괴뢰국 놀이 하고 있어서 이미지를 찍어놓은게 없내요
난이도: 보통
속도: 최대한 느림
목차
7~9월 당시에 벌어진 최대의 격전
그로디노-슬로님을 중심으로 해서 펼치는 무한 기동 방어전
핀스크를 중심으로 부크강을 넘어온 병력들을 상대로 펼치는 기동방어전 핀스크 함락후 핀스크 공방전으로 바뀜
리보프와 키예프 사이에 있는 거대한 평야지대에서 펼친 지연전
드비나 강을 중심으로 펼처졌던 드비나강 공방전
7~9월 사이에 펼쳐진 소련군의 대대적인 작전
헬싱키 포위전
드비나 강을 향하여
콰니히스베르크를 향하여
역공세
파도공세
7~9월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
필란드의 항복
필란드 만 해전패배와 그로인한 독일군의 타린 상륙
드네스트르강 방어선 함락
겨울로 인한 독일군의 진격 저지
7~9월 당시에 벌어진 최대의 격전
그로드노-슬로님을 중심 축 으로 해서 펼친 무한 기동 방어전
대략 전 전선에서의 후퇴후 우연의 일치인지 정예라고 할수 있는 병력들이 모두 그로드노와 슬로닌으로 집결하였다.
원래 그로드노와 슬로닌에서 펼처진 기동방어의 목적은 전선을 재 구축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였다. 하지만 그로드노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스탈린은 깨달았다. 그로드노의 위치는 절묘해서 그로드노를 빼앗길시 민스크까지 아무런 장예가 없었다. 민스크와 그로드노 사이에 펼처진 평야지대를 독일군에게서 지킬 소련군의 병력이 없었다. 평야지대를 빼앗길경우 중부전선군이 포위당할 위험이 매우 컸다. 더구나 프리퍄티 강에서의 방어선은 꿈도 못꾸게 되며 더 나아가서는 키예프 포위의 위험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강과 숲이라는 지형들이 독일군으로 부터 시간을 벌어 주었다. 그로드노와 슬로님에 모여있던 소련군은 제정비를 할 귀중한 시간을 얻었다.
그로드노-슬로닌에 모여있던 병력들은 강을 건너 비아위스토크(평야지대)로 집결하는 독일군들에게 역공을 취해 15사단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소련군의 수는 적었고 독일군의 수는 많았다. 소련군은 적들을 후퇴시킨 지역의 점령을 포기하고 오로지 적 부대 격퇴에만 나섰다. 재배치가 끝나는 되로 소련군 부대들은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 어떤 부대도 하루이상을 쉬지 못했다. 그렇게 소련군은 적들을 격퇴해나아갔다. 하지만 적들의 숫자는 너무나 많았다. 그로드노-슬로닌에 주둔한 소련군은 만신창이가 된체로 겨울을 맞이했다.
핀스크 공방전
핀스크!!! 그로드노-슬로님에서의 기동방어전이 그로드노-슬로님에 주둔한 소련군에 의해서 펼처진 일방적인 역공이였다면 핀스크에서 펼쳐지는 기동방어전은 핀스크 방어와 기동방어전이 반반씩 섞인 형태였다. 최전선에서 독일의 기습을 받아 핀스크로 후퇴한 사단들은 2개군 20개 사단, 모두 군사령부를 갖추고 보병사단중 절반정도가 부속여단을 대리고 있는 소련군의 정예라면 정예였다. 문제는 상대하는 추축군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약50~80사단이 20개 사단이 기동 방어하는 브래스트리토프스크, 코벨 지역으로 밀려들어왔다. 20개 사단의 소련군들은 독일군이 부크강을 넘는 족족 역공을 통해 격퇴했다. 이들 소련군에게 있어 휴식은 사치였다. 추축군은 군(8~12사단)단위로 모이는 즉시 공격을 해 들어왔다. 재배치가 되는 대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핀스크의 함락은 그로디노-슬로님의 포위를 의미했으며 사실상 그로디노-슬로님을 포기할수 밖에 없었다. 덭붙어 핀스크가 함락될시 소련군은 남북으로 나누어질수 밖에 없었으며 스몰렌스크까지의 무한정 후퇴를 의미했다. 더구나 핀스크 함락시 핀스크에서 키예프 까지 독일군을 막을것은 3개 보병사단 밖에 없었다.
명백한 남부 전선의 붕괴를 의미했다. 소련군은 핀스크를 지킬수 밖에 없었다. 핀스크의 소련군은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이 추축군 1개 사단을 격퇴하면 곧바로 주축군 2개사단이 강을 건너왔다. 핀스크의 소련군은 점점더 한계에 부디치고 있었다. 하지만 핀스크 함락에 결정적인 역활을 한것은 리보프를 통해 쏟아지는 추축군이였다.
추축군의 리보프 함락후핀스크 인근지역으로 쏟아지는 추축군들이 더욱 늘었다. 남부전선군의 지토미르-빈니치-모길예프포돌스키방어선이 무너진뒤 추축군은 라우네로 몰려들어왔다. 남부전선군의 방어선 붕괴로 핀스크에 가해지는 추축군의 압박은 더욱 커졌다. 핀스크 주둔 소련군의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들어갔다. 핀스크 인근지역 3군대에서 가해지는 독일군의 대 공세에 결국 핀스크가 함락되었다.
중부전선 사령관은 방어선 붕괴로 남부전선에서 후퇴해온 1개 보병군을 차출 핀스크 공방전에 투입했다. 대략 40개 사단의 소련군이 핀스크를 되찾기 위한 전투에 들어갔다. 독일군의 핀스크 집결과 소련군의 공격으로 인한 독일군의 후퇴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결국 소련군은 핀스크를 빼앗긴채로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리보프와 키예프 사이에 있는 거대한 평야지대에서 펼친 지연전
개전 하루만에 리보프 함락, 적 기갑부대의 리보프 진출, 대규모 부대의 리보트 이동 남부전선군은 전쟁발발 당시8 개의 사단만을 보유했다. (3개사단으로 이루어진 보병군단 2개 -보병 1개 사단만 부속여단을 보유함- , 2개중전차사단으로 이루어진 기갑군단1개 -아무런 부속여단 없음- ) 이 8개 사단만으로 소련남쪽의 평야지대를 지켜내야 했다.
불가리아를 막고 있던 소련군 2개 보병군단이 땅을 포기하고 방어를 위해 드네스트르강을 넘었다. 후퇴도중 주축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는 패주로 변했다. 당시 막 키예프에 기갑군단이 배치된 터라 기갑군단은 4일 정도의 휴식시간이 필요하였다.
남부 전선 사령관은 중부전선으로 부터 타르노플과 스타니슬라우로 후퇴한 중주전선 소속 2개보병군 21개 사단을 강제로 차출 남부 전선 방어에 투입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어 부대가 만들어지자마자 남부전선으로 보내줄것임을 약속받았다. 흑해 보병군단에게서 2개 보병사단을 빼내어 남부방어선에 투입시켰다. 공군으로 부터 3개 중폭격기사단을 지원받아 적들의 공격에 사용했다.
남부 전선 사령관은 그로드노-슬로님을 주축으로 하는 기동방어를 본받아 타르노플 - 스타니슬라우를 주축으로 하는 방어선을 계획했다. 그러나 평야에서의 전차부대는 빠르고 강했다. 스타니슬라우로 후퇴한 보병군이 휴식을 하기도 전에 독일군 기갑 군단이 스타니슬라우로 들이닥첬다. 순식간에 소련 보병군이 격퇴당하고 기갑군들이 진군해왔다. 타르노플에서 휴식을 취한 보병군의 도움으로 스타니 슬라우에서 적 기갑부대를 격퇴하고 남부에서 온 소련보병군으로 스타니슬라우를 되찾았다. 타르노플에 위치한 1개 보병 군으로 기동방어에 들어갔다. 그러나 리보프에 집결한 추축군의 공격에 타르노플은 순식간에 함락되고 보병군은 라우네로 후퇴하였다.
다행히 지토미르-빈니치-모길예프포돌스키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하고 남부전선은 기동방어에 들어갔다. 남부전선군의 상황은 최악이였다. 대략 20개 사단도 되지 않는 병력이 4개 지역에 걸처서 넓게 퍼져있었다. 기동방어를 해야 하는 지역은 3군대였으며 적들의 숫자는 압도적이였다. 3개 사단을 후퇴시키면 3개 사단이 들어왔다. 특히 간간히 몰려오는 독일군의 기갑군단은 소련보병군에게 있어서 가희 악몽이였다. 결국 남부전선군에 가해진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방어선은 무너지고 소련군들은 후퇴할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중동전선군 소속 5개 산악병사단과 2개 보병사단
흑해군단 소속 2개 보병사단 모스크바에서 지원된 보병군단의 도움으로 간신히 키예프-체르카시-발타에 방어선을 구축 기동방어에 들어갔다. 기감군단은 독일군의 빠른 진격에 차마 후퇴하지 못하고 섬멸당했다.
드네스트르강 남쪽과 리보프 쪽에서 방어선으로 가해진 협공에 키예프를 제외한 방어지역이 무녀졌다.. 덕분에 남부전선군중 일부만이 크리보이보크-헤르손 에 남아 저항하고 대부분 키예프를 중심으로 하는 드네프르강 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드비나 강을 중심으로 펼처졌던 드비나강 공방전
드비나강은 소련군에게 있어서 눈물의 강이다. 스탈린의 전략적 오판으로 인해 보병 4개군단 12개 사단이 개전 1시간만에 드비나 강 이북을 향해서 패주를 거듭했다.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원래 드비나강을 사수하기로 되어있는 12개 사단중 3개 사단이 독일군의 포위망에 갖혀서 전멸하였고. 3개 사단은 길이 막혀 민스크 방향으로 후퇴할수 밖에 없었다. 만신창이가된 6개 보병사단으로 드비나 강을 사수해야했다. 그로드노에서 펼처진 기동방어는 드비나강에 대한 추축군의 집결을 방해하여 드비나강의 소련군이 전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소련군은 1개 지역에 1개 보병군단 (3개보병사단)밖에 없었다. 드비나강 방어선은 조용했다. 소련군은 병력이 없어서 공격을 하지 못하였고, 독일군은 그로드노의 기동방어로 인해 계속해서 공격할 시기를 놓처버렸다. 더구나 모스크바에서 증원온 부대와 민스크방향에서 지원온 부대로 인해, 드비나강 방어선에 집결한 부대수는 13개 사단으로 늘어나 버리고 오히려 스뷔에시아니에서 추축군은 격퇴당하고 소련군은 스뷔에시아니를 되찾았다.
추축군이 그로드노의 소련군을 격퇴하고 드비나 강 방어선을 돌파할 병력을 갖추었을때 추축군은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이미 필란드에게서 항복을 받아낸 소련군이 드디어 드비나강 방어선에 지원을 왔고 그뒤를 따라 필란드 군이 내려오고 있었다. 드비나강 남쪽에 집결한 독일군의 공세에 드비나강 방어선의 일부가 함락되었으나 소련군의 증원에 곧 격퇴당했다.
증원된 필란드 군과 소련군이 기동방어에 들어감에 따라 독일군의 전격전이라는 날카로운 칼은 그 날카로움을 잃어버렸다. 추축군은 메멜과 리투아니아지방에서 같혀버리고 말았다. 독일군이 드비나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집결하는 족족 드비나강 너머의 소련군과 벨롤루시 지방에 있는 소련군들의 합격에 격퇴당했다. 독일군은 기동방어 전술에 면역이 있는지 9~12개 사단씩 몰려 다녔다. 드비나강남쪽에서 벌어진 소련군의 기동방어는 대규모 회전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렇게 막아내다가 결국 겨울이 오고 서로는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7~9월에 펼처진 소련군의 대대적인 작전
헬싱키 포위전
중앙필란드 돌파
소련군은 필란드의 요새지역을 우회해서 헬싱키를 고립시킬 작전을 세웠다. 독일의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중앙 필란드를 침공 필란드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다. 대다수의 필란드군은 보급의 지원 없이 북쪽에 포위되고 소련군은 최후의 일격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결국 필란드가 항복을 하고 소련&필란드 연합군 3개 사단만을 남겨둔체 남쪽을 향해 달려갔다.
드비나 강을 향하여
북쪽 전선 12개 사단의 후퇴기
스탈린은 겨우 12개 보병사단만으로 독일군의 예봉을 꺽을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고 무한정 후퇴하기에는 주력군이 포위당해 전멸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드비나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다. 드비나 강으로 향하는 길은 지옥같았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춘다면 뒤딸아 오는 독일군에게 포위당해 전멸할 위험이 있었다. 소련군들은 뒤달아 오는 독일군을 피해 모든 장비는 나뚠체 드비나강에 뛰어들었다 겨우 6개 사단만이 드비나강을 넘을수 있었다. 3개 사단은 독일군의 공세에 치여 민스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3개사단은 독일군에게 포위당해 포로로 잡혔다. 소련군의 '드비나 강을 향하여' 작전은 3개사단 민스크지역으로 흩어짐 3개사단 포위전멸 6개사단 드비나강 이북으로 패주라는 결과를 남긴체 막을 내렸다.
콰니히스베르크를 향하여
기갑 제1군의 포위섬멸전
스탈린은 그로드노에서의 기갑 제 1군의 선전에 힘입어 콰니히스베르크를 점령 독일군을 메멜과 리투아니아 지방에 가둘 작전을 짰다. 1기갑군이 돌파를 하고 보병 2개군 16개 사단이 기갑군을 따라 점령지에서 버티기로 하였다. 알리투스에 집결한 독일군 격퇴한 제1기갑군을 기다리고 있는것은 46개의 주축군사단들의 일제 공세였다. 알리투스를 점령한 기갑군은 격퇴당하고 알리투스는 독일군이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콰니히스베르크 점령을 위해 기동방어를 중단한 사이 상당한 병력들이 그로드노 주변지역으로 집결하였고 그것은 곧 그로드노의 위험으로 이어졌다. 결국 그로드노가 함락되고 방어선은 그로드노-슬로님의 기동방어선은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역공세
추축군의 공세에 대한 맞공세
'콰니히스베르크를 향하여'작전이 실패한후 그로드노-슬로님의 방어선은 붕괴하였다. 스탈린은 부대를 후퇴하여 전선을 재구축하기 보다는 역공세를 통해 오히려 독일군 공세를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소련군의 역공세에 그로드노에서 약 10사단 비아위스토크에서 약 20사단 핀스크에서 약 10사단 제카필스 빌노에서 각각 약 5개 사단의 주축군이 후퇴할수 밖에 없었다. 약 50개 사단의 독일군이 일시에 패퇴함에 따라 추축군은 공세를 중단할수 밖에 없었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기갑 1군이 다시 그로드노를 되찾고 그로드노-슬로님의 기동방어선을 만들었다.
파도공세
북쪽 소련군 전술의 꽃
계속되는 전투를 통해 각 사령관은 나름대로의 전술을 발전해나아갔다. 북쪽사령관은 공세를 취한후 조직력이 없는 부대를 골라내어 쉬게하고 조직력이 차는대로 공격에 투입된 부대와 교대하게 하는 방식으로 끊임없는 공격을 만들어냈다. 6~12개 사단들의 파도같이 계속되는 공격에 북부독일군은 끊임없는 전투를 강요당했고 북부 추축군들의 조직력은 바닥을 기었다. 독일군들은 휴식을 위해서는 전방에서 벗어날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곧 최전방 독일군들의 압박의 증대를 의미했다. 결국 조금씩 조금씩 땅을 소련군에게 내어줄수 밖에 없었다.
7~9월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
필란드의 항복
7월중반 헬싱키기 포위된 필란드는 항복을 하고 말았다.
필란드 만 해전패배와 그로인한 독일군의 타린 상륙
독일군의 필란드지원을 막기위해 레닌그라드에서 소련군 함대가 출동했으나 오히려 독일군함대에 패하여 재해권을 독일에게 넘겨주었다. 독일은 그틈을 타 독일군 1개 사단을 타린에 상륙시켰고 그것을 막기 위해 소련군 함대가 다시 출동했으나 독일해군의 과의 해전에서 완벽하게 패배하여 대다수의 배가 격침당한다. 독일군은 2개 사단을 타린에 더 상륙시키지만 드비나 강 방어선에서 지원온 2개사단과 막 배치되 기계화사단에 밀려 타린헤안에서 포위전멸당하고 만다.
드네스트르강 방어선 함락
불가리아의 대대적인 공세에 드네스트르강 방어선이 함락되고 오데샤가 함락되었다. 다행히 곧 겨울이 와서 적 부대의 진격이멈추었다. 하지만 드네스트르강을 통해 넘어오는 추축군들 덕분에 남부전선에서의 압박은 더더욱 심해졌다.
겨울로 인한 독일군의 진격 저지
겨울이 오고 독일군은 진격을 포기하고 봄공세를 위한 병력집중에 들어갔다. 소련군은 다행히 한숨 돌렸고 남쪽의 몇군대를 제외한 전 소련군은 기동방어를 멈추고 휴식에 들어갔다.
첫댓글 스오미.... 핀란드.... 우웅.....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