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의 시절로 되돌아가 보자.
“대일본 제국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 일본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국이 8월 6일과 8월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소련이 8월 8일 일본과 싸우겠다고 선전포고를 하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해방은 제주 사람에게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가혹한 착취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을 뜻했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제주도 도민을 강제 동원하여 비행장을 만들고, 곳곳의 해안과 오름마다 굴을 팠다. 미국과 최후 결전을 치를 것에 대비해 제주를 요새화하던 일본이 쫓겨 간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다고 제주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1948년 4.3항쟁, 1950년 한국전쟁……. 숨 가쁜 혼란이, 제주의 바람보다 더 가혹한 광란의 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45년 9월 7일 미국 육군 대장 맥아더는 “조선인민에게 포고한다. ……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하여 서명한 항복 문서의 조항에 따라 본관이 지휘하는 전승군은 금일 북위 38도 이남 조선 지역을 점령했다” 라는 포고문을 발표한다. 한국인이 세운 어떤 주권 행사 기관도 인정하지 않고 미국이 직접 38도 이남을 통치할 것임을 밝힌 것이다.
이에 따라 제주도에도 9월 28일 미군이 상륙했다. 제주에 입성한 미군의 첫 과제는 일본군으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고, 일본군의 무기와 무장을 해제하는 일이었다. 섬 전체가 일본이 미군을 상대로 하는 최후 결전에 대비해 구축한 요새였던지라 철수시켜야 할 일본군 병력과 해제해야 할 무기의 규모가 엄청났다.
1945년 1월까지만 해도 제주도에 주둔한 일본군은 1천 명을 넘지 않았는데, 그해 8월에는 7만여 명에 달했다. 종전 직전까지 결7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58군 사령부를 새로이 편성하고 병력을 대규모로 늘렸던 것이다. 7만 병력은 당시 한반도에 배치된 일본군 병력 약 36만 명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일본군에게서 회수한 각종 무기는 현장에서 대부분 폭파되거나 불태워졌고, 일부는 제주 바다로 내던져졌다. 무장 해제된 일본군 4만 8천 524명은 10월 23일부터 11월 12일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모두 일본으로 철수했다고 한다.
모슬포 지역에 있던 일본 군사시설도 미군정에 파괴되었으나 병사와 참호, 포 진지, 탄약고 등 몇몇 시설은 미군정과 국군이 재사용했다. 한 예로 일본 해군 항공대인 오무라 부대가 병사로 사용했던 건물이 한국전쟁 당시에는 육군 제1훈련소 본부 건물로 사용된 바 있고, 최근까지도 해군 제9506부대가 사용했다.
일본군 무장해제와 무기 제거 과정은 그동안 구체적인 실상이 파악되지 않았는데, 미군 무장해제 팀이 제주도에서 1945년 9월 30일부터 10월 5일까지 촬영한 사진이 최근 미국 메릴랜드 주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되어 당시 제주의 전쟁 위기를 생생히 전해준다. 일본에게서 회수한 총과 대포, 전ㄴ차 같은 각종 병기, 고사포 진지와 격납고, 탄약고, 미군의 감시를 받으며 탱크와 비행기를 파괴하는 일본군, 배를 타고 철수하는 일본군까지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사진들이다.
일본군 무기의 제거와 파괴는 제주항과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일대에서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만큼 이 지역의 무장해제가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 가운데 일본군의 초대 탄약 창고이며, 알뜨르비행장과 셋알오름 진지굴과 연계된 군사시설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섯알오름 탄약고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진 한 장이 있다. 미군정이 탄약고 속에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폭파시키기 이전 모습이다.
현재 섯알오름 남쪽 기슭에는 움푹 팬 아주 큰 웅덩이가 있다. 사진에 드러난 바로 그 최대 탄약고가 있던 자리이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예비검소가’ 252명이 집단 학살된 현장이다. 일본군의 탄약고 턴가 한국전쟁 직후 학살 터가 된 내력을 알기 위해서는 해방 직후 제주도를 할퀴고 간 4.3항쟁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4.3’이라는 숫자는 제주 현대사를 한마디로 축약한 핵심 단어다. 사건이 일어난 지 50년이 다 되도록 쉬쉬해 오다 2003년 10월 31일 대통령이 국가 권력을 대표해 공식 사과했지만 4.3항쟁에 대한 상처를 안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제주 사람이 숱하고, 아직까지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는 이도 있다.
4.3이란 숫자는 남한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를 반대하고 극우 세력의 탄압과 저항하며 조국의 자주 통일을 주장하는 제주도 청년들로 구성된 500여 명의 무장 유격대가 미군정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 극우 세력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던 1948년 4월 3일을 말한다.
여기에 도화선이 된 것은 1947년 3월 1일 발포 사건이었다. 관덕정 앞에서 3.1절 기념행사와 함께 ‘3.1정신으로 통일 독립을 쟁취하자’ 라는 시위가 벌어졌는데, 경찰이 무차별 발포하여 6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생긴 것이다. 이에 항의하여 3월 10일에 전도민이 대규모 총파업에 참여하자, 미군정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아예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마구잡이로 제주도 도민을 잡아들였다. 1년 상이에 무려 2천 500명이 체포되었고, 육지에서 파견된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며 온갖 갈취와 테러를 자행하여 민심을 크게 자극했다. 제주에 감도는 긴장감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때마침 이승만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 실시가 결정되자, 4월 3일 새벽 1시 제주 청년들이 들고 일어났다. 한라산 오름 봉우리마다 피어오른 봉화를 신호로 유격대가 경찰서와 서북청년단 등 우익 단체의 집을 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초기에는 유격대와 경찰이 평화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미군정의 태도는 완강했다. 육지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더 많이 불러들여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이를 피해 산속으로 피신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들의 가족도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집단 학살했고, 사태가 커지자 미군정은 군대까지 불러들여 토벌 작전을 강화했다.
결국 5.10 단독 선거는 실시되었고, 제주도만 5.10단독 선거 거부 지역이 되었다. 총선 이후 제주도에 군대와 경찰 병력이 더욱 증가하고, 5월 중순에는 미군 사령관이 제주 현지 작전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직접 군대와 경찰 병력을 통솔하기에 이르렀다.
10월 19일에 제주에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14연대가 이를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 ‘여순사건’도 일파만파로 번져 제주에 참혹한 양민 학살의 유혈극을 몰고 왔다. 제주에 계엄령이 내려진 것이다. 11월 17일이었다. 해안에서 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중산간지대는 ‘빨갱이 소굴’로 간주되어, 민가가 모두 불타고 주민들은 사살되었다. 군경의 이른바 ‘초토화 작전’으로 더욱 쫓기게 된 유격대는 때때로 해변 마을에 보복 기습전을 시도하며 저항을 계속했다.
이듬해 막바지 소탕 작전으로 유격대가 현저히 약화되자 1949년 6월말 미군은 철수했다. 이로써 4.3항쟁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꺼지지 않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고 아물지 않은 상처는 덧나기 시작했다.
정부는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전장에서 계속 밀리자 제주에 4.3항쟁 연루자 가운데 이미 훈방됐거나 석방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비검속’을 하고, 이에 해당하는 사람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는 ‘예비검속자’ 357명이 구금되어 있었는데, 그중 252명이 8월 20일 몇 차례에 걸쳐 섯알오름의 일본군 탄약고 터에서 집단 학살된 것이다.
현재 이곳은 2001년 2월 유족들이 희생자 시신과 유물을 재발굴하면서 그 전에 일부 메워졌던 현장ㅇㄹ 모두 파헤쳐 놓아 큰 구덩이가 생긴 상태이다. 일본군의 탄약고였기에 바닥에는 아직도 콘크리트 덩어리와 녹슬고 휜 철근 따위기 간혹 눈에 띈다.
‘예비검속자’ 학살 터 현장에는 이곳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세워져있고, 발굴한 뼛조각 등의 유물을 보관하는 컨테이너가 있다.
백조일손(白祖一孫)은 ‘100명의 조상을 모시는 한 자손들’ 이라는 뜻을 가진 유족 모임이다.
1956년 5월 18일, 유족들은 학살 터 현장에서 뼈를 수습했으나 누구의 머리이고 다리 뼈인지, 누구의 팔이고 엉치 뼈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와 척추, 팔, 다리 형상으로 간신히 132구의 시신을 만들어 사계리의 공동묘지 한편에 묻고, ‘백조일손지묘(백할아버지 한무덤)’ 라 붙였다. 132구의 무덤을 만들었으나 누구의 무덤이라고 밝힐 수 없었던 까닭이다.
유족들이 백할아버지 한무덤을 만들고, 그 앞에 원혼을 위로하는 비석도 만들어 세웠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평화로워진 것도, 용서된 것도 아니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4.19 혁명 때 도주했던 경찰들이 복직되면서 백할아버지 한무덤에 세운 비석이 산산조각 나 버린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경찰의 사주를 받은 경찰서 급사가 술을 마신 후 망치로 비석을 깨뜨린 것이다.
1992년 4.3 민간인유족회에서 다시 위령비를 세우고, 산산조각 난 비석은 한데 모아 무덤 옆에 두었다. 얼추 사람 형상으로 얼개만 맞추어 봉분을 만들었다는 사실도, ‘백조일손지료’ 라는 묘지 이름을 붙인 사연도 형언할 수 없는 서글픔을 안겨주는데, 산산조각 난 비석 파편은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Tip
찾아가는 길
알뜨르비행장 활주로 입구에서 격납고로 가는 길을 1km 따라가면 시멘트로 된 농로 오거리에서 왼쪽 앞으로 난 길을 따라 200m 가면 길이 다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오른쪽 섯알오름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200m 가면 탄약고 터에 이른다. 주차장은 따로 없다. 탄약고 터 옆 발굴유물보관소로 쓰이는 컨테이너 한편에 주차해야 한다. 탄약고 터에서 다시 농로 오거리로 나와 오른쪽 비행장 격납고로 난 길을 따라 1.4km 가면 송악산·마라도행 유람선 선착장에서 모슬포로 이어지는 길이 지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 모슬포로 난 길을 따라 700m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 삼거리에서 오른쪽 사계리로 난 길을 따라 1km 가면 길 오른쪽에 백조일손지묘 표지석과 함께 사계리 공동묘지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900m 가면 백할아버지 한무덤에 이른다. 묘지 앞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다.
주소
탄약고 터(섯알오름)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1592-2, 1597-2 일대
백할아버지 한무덤(사계리 공동묘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사계리 공동묘지’ 내
* 글.사진제공 : 지방자치단체, DMZ관광청, 인천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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