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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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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흔들지는 않겠네
당신도 손을 흔들지는 마시게
나는 당신이 사다준 십자가에
평생 매달렸다 내려왔다 했다네
당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당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운명이 되었던 나는
늘 남이 먹다 남긴 밥을 먹으며 살아왔으나
인생은 사랑하기에도 너무 짧지만
분노하기에도 너무 짧다네
울지는 마시게
죽음보다 더 깊은 가을 산에 올라
무서리가 내리고 서릿바람이 불고
그 어디 국화 한송이 피지 않아도
강물이 깊어지면 어둠이 깊어지고
어둠이 깊어지면 이별도 깊어진다네
그럼 이만 안녕
오늘은 내가 타고 갈 장의차 하나
새들이 겨우내 먹을 열매가 발갛게 익어가는
산수유 그늘 아래로 느리게 지나간다네
나는 무덤이 없으니 부디
내 무덤 앞에서 울지는 마시게
― 〈그럼 이만 안녕〉 전문
사람이 인생의 어느 순간에 뜻밖의 사고로 ‘죽을 뻔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자칫 잘못됐으면 죽을 수도 있었던 일을 누구나 한두 가지씩 지니고 있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다. 다행히 그때 죽지 않고 살아 그때를 돌이켜보면 일흔이 된 지금도 간담이 서늘하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죽음이 찾아온 순간의 삶의 순간으로 전환된 기적의 결과다.
내가 열 살이 된 1960년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대구 상업은행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은행 건너편 도로를 지나갈 때였다. 당시 횡단보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차량이 많이 오가는 것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주로 무단횡단을 하고 다닐 때였다. 아마 내가 아버지 손을 놓고 빨리 건너가려고 혼자 뛰었던 것 같다. 갑자기 미군 지프차 한 대가 내 무릎 바로 앞에서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급정거했다. 나는 놀라 입을 딱 벌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덩치가 집채만 한 흑인 미군 병사가 차에서 급해 뛰어내리더니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막 소리를 질러대었다. 아마 나를 욕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너 이 새끼! 눈 똑바로 뜨고 다녀! 눈깔은 어디 갖다 둔 거야! 잘못했으면 너 죽을 뻔했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분명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어린아이가 아니고 어른이었다면 당장 멱살잡이를 당하거나 한 대 얻어터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그 미군은 위압적이었고 공격적이었다. 아버지가 놀라 급히 달려와 사과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고 뭐라고 하자 미군은 아버지한테 삿대질하며 더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재빨리 전속력으로 차를 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때 그 미군이 운전을 잘못했다면, 미처 나를 보지 못했다면, 그 지프차가 성능 좋은 미군 군용 지프차가 아니고 엉성하게 조립한 국산 자동차였다면 아마 나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또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아마 4학년 때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다니시던 은행에서 포항 송도해수욕장으로 여름 야유회를 갔는데 아버지가 중학생인 형과 나를 데리고 갔다. 바다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세상에! 저렇게 물이 많다니! 그런데 넘치지도 않고 출렁대다니!”
바다는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보아온 것과는 너무나 다른 경이로운 신비의 세계였다.
아버지가 형과 나의 수영복을 빌려 오셨다. 펑크 난 자동차 타이어 튜브를 때워서 만든 물놀이 튜브도 빌려 오셨다. 형과 내가 해수욕장에서 신나게 놀기를 바라신 어버지의 바람대로 나는 튜브를 타고 바다로 들어갔다(그때 형은 어디 가고 왜 나 혼자 튜브를 탔는지 알 수가 없다). 양팔과 다리를 밖으로 내어놓고 튜브에 눕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면서 바다에서 노는 일은 신나는 일이었다. 주변에는 나처럼 많은 아이들이 고무 튜브를 차고 바다에 둥둥 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해변의 경치가 나랑 좀 멀리 떨어져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파라솔 아래 앉은 아버지가 아까보다 더 멀리, 자그맣게 보였다. 주변에 많이 있던 아이들도 두세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퍼뜩 뭔가 다른 상황에 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 싶어 바다에 처음 뛰어들었을 때처럼 바닥이 얕은 줄 알고 튜브에서 내려와 발을 디뎠다. 순간,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몸이 파도에 붕 뜨는 것과 동시에 그만 잡고 있던 튜브를 놓치고 말았다.
헤엄도 칠 줄 모르면서 팔다리를 마구 놀렸다. 필사적이었다. 한순간 엄습해온 죽음의 공포에 있는 힘을 다해 해변 쪽으로 헤엄을 쳤다. 실제로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아주 긴 시간 동안 헤엄을 친 것 같았다.
‘이제 발이 닿겠지!’
다시 바닥을 디뎠다. 여전히 발이 닿지 않았다. 가슴이 또 쿵 내려앉았다. 팔다리를 마구 놀렸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힘이 빠져 더 이상 헤엄을 칠 수 없었다.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순간, 발끝이 바닥에 닿았다. 바닥을 딛고 겨우 일어서자 턱까지 물이 닿았다. ‘아, 살았다!’ 싶었다. 기진맥진한 채로 천천히 모래밭으로 걸어 나와 아버지 곁에 앉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파도에 의해 튜브가 바다 안쪽으로 차츰차츰 밀려들어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때 조금만 더 깊은 데로 밀려갔더라면, 팔과 다리를 마구잡이로 놀리는 엉터리 개헤엄으로라도 내 힘으로 헤엄쳐 나오지 못했더라면, 발에 쥐라도 나거나 파도가 덮쳐 물을 많이 먹었더라면 나는 어쩌면 익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내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치는 줄 몰랐을 것이다. 그저 온 힘을 다해 헤엄치는 연습을 하며 재미있게 노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죽을 뻔한 일은 군에 입대해서 사격장에서도 일어났다. 1970년 1월에 입대한 나는 강원도 춘천 야전공병단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공병(工兵)들은 도로나 교량 건설 등에 투입되기 때문에 군인으로서 받아야 할 기본적인 훈련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격훈련도 하루 날을 잡아 한꺼번에 몰아서 하곤 했다.
사격 훈련 시에는 만일의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다른 때보다 군기가 아주 세다. 사격장 통제관의 명령에 엄격하게 따라야 한다. 통제관의 명령은 ‘전 사선 사격준비 끝, 자물쇠 풀고, 거총(擧銃), 전방의 목표물을 향해 조준, 사격개시’의 순서로 진행되며, 사격개시 명령이 내리면 각자 표적판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하게 된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들이 쓰던 M1소총으로 ‘엎드려 쏴’ 자세를 취하고 통제관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물쇠 풀고……, 애인의 젖가슴을 만지듯 서서히 숨을 죽이고…….”
통제관이 단호한 목소리로 총의 잠금장치를 풀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였다. 느닷없이 누거 거총을 하고 엎드려 있는 내 다리를 군홧발로 힘껏 걷어찼다.
“자세 똑바로 해!”
깜짝 몰라 나도 모르게 총구를 돌리며 뒤를 돌아봤다. 누가 나를 발로 찼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소대장이었다.
“뭘 봐! 자세 똑바로!”
소대장이 이번에는 내 엉덩이를 걷어찼다. 순간, 나는 소대장을 향해 총을 쏴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면서 총구는 이미 소대장을 향해 있었다. 자물쇠를 풀고 있었기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면 그만이었다. 눈에서 불이 번쩍 일었다. 그렇지만 서서히 충동을 억누르고 총구를 표적판을 향해 돌리고 사격을 개시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철없고 겁 없는 소대장이었다. ROTC 출신 장교 중위로 워낙 성미가 고약해서 소대원들을 괴롭혔다. 툭하면 취침 전에 어깨를 내밀고 내게 안마를 시키는가 하면, 한번은 나처럼 키 작고 맷집 없는 병장과 덩치가 크고 주먹도 센 일병을 불러내 내무반 통로에서 권투시합을 시킨 적도 있었다.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일병이 감히 병장에게 주먹을 날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일병에게 “제대로 시합하지 않으면 빳다를 치겠다”고 방망이를 들고 엄포를 놓았다. 또 내가 국문과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펜팔을 한답시고 툭하면 알지도 못하는 여성에게 대신 편지를 쓰게 했다.
그런 소대장이 사격장에서 나를 두 번이나 걷어찼으니 사격 자세를 수정하기는커녕 평소 지니고 있던 악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한 것이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그 한순간을 참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겼다면 소대장은 죽었을 것이다. 나 또한 군법 절차에 따라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머리가 핑 돌고 몸이 떨린다.
그 뒤,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예순넷이 된 2014년 12월에 ‘죽을 뻔한 일’이 또 일어나고 말았다.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국제도서전이 열렸을 때였다. 한국문학번역원이 과달라하라국제도서전에서 시 낭송을 겸한 ‘독자와의 만남’ 행사 등을 주최해 내가 참여하게 되었다. 내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가 멕시코 출판사에 의해 스페인어로 변역 출판된 게 그 계기였다. 일주일 일정 중 마지막 일정은 테픽이라는 도시에 있는 나야리트대학교 주최 ‘한국문학의 밤’ 행사였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숙소인 호텔에 도착하자 밤 11시경이었다. 나는 평소 습관대로 반신욕을 하려고 욕조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시차가 바뀐 채 강행군한 일정에서 온 피곤함을 반신욕으로 풀어볼 작정이었다. 반신욕은 욕조에 물을 미리 받아놓고 하는 것보다 욕조에 들어가 물을 틀어놓고 하는 게 보다 효과적이었다. 물이 배꼽 위쯤 차오르면 수도쪽지를 잠그면 되었다.
그날 나는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고 욕조 속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몰랐다. 어느 순간 불현 듯 눈을 뜨자 내가 물이 찬 욕조 속에 있었고, 욕조 밖으로 물이 찰랑찰랑 넘치고 있었다. 화장실 바닥엔 물이 흥건했다. 이미 물은 화장실을 지나 내실 양탄자를 반쯤 적셔놓고 있었다. 급히 욕조의 물을 빼냈다. 욕실 수건 몇 개로 신속하게 물을 적셨다가 짜고 하는 방법으로 응급 처리를 하고 나자 시간은 밤 1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팔을 벌리고 양손을 욕조 밖으로 내놓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양손이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면, 마치 술에 취한 듯 깊은 잠에 취해 내 키보다 훨씬 크고 넓은 욕조 속으로 스르르 빠져들어 익사했을 것이다. 너무 깊이 잠들었기 때문에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얼굴이 잠겨도 당장 깨어나긴 어려웠을 것이다. 숨이 막힌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얼른 깨어나지 못하고 버둥대다가 한순간에 호흡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곰곰 생각할수록 아찔하고 멍멍했다.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계속 가슴만 쓸어내렸다. 아침에 일행들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도 반신욕을 하다가 잠이 들어 욕조에 빠져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예정대로 푸에르토 바야르타 공항으로 이동하는 동안 창피함과 두려움과 안도감에 휩싸여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LA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감사기도만 드렸다. 만일 내가 멕시코 테픽 호텔 욕조에서 반신용을 하다가 익사했다면 그다음 일은 어떻게 전개되었겠는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저리고 머리끝이 쭈뼛해지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외에도 죽을 뻔한 일은 몇 가지 더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평택에 살 때 형이 장난삼아 냇물에 내 머리를 쑥 눌러 집어넣고는 꺼내주지 않았다. 다행히 형이 내가 발버둥치는 줄 알고 늦게나마 꺼내주어 살긴 살았지만, 얼굴 전체가 물속에 잠겨 버둥대던 그 숨막힌 억압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또 오십 대 중반에 서울 신사동 네거리에서 친구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와 그대로 정면충돌한 적이 있다. 다행히 내가 탄 차가 마침 정지신호를 받고 멈추어 있어서 충돌의 충격이 적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 어” 소리를 지르다가 앞 유리에 그대로 머리를 박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또 몇 해 전, 통영 앞바다 죽도에 있는 재기중소기업개발원에 강연을 하러 갔다가 통영유람선터미널 가는 여객선이 일찍 끊기는 바람에 세 사람이 겨우 탈 수 있는 모터 달린 이동선을 탔는데 파도에 휩쓸릴 뻔한 참으로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인생의 기적은 무엇일까. 돈을 많이 벌고 뜻하지 않은 행운이 거듭 찾아오는 것일까. 아니다. 지금 내가 살아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그 외에 다른 기적은 있을 수 없다. 내 존재의 삶이라는 기적이 끝나는 날, 그때는 또 자연스럽게 죽음이라는 기적이 찾아오리라. 그때는 더욱 두 손을 모아 무릎 끓고 감사하리라. <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시인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정호승, 비채, 2020.)에서 옮겨 적음. (2023. 3.16. 화룡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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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호승 시인은 젊은 날 부터 시인입니다
해설이 더 멋집니다
얼마전에 정호승 시인의 시집 한 권 선물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선물 받은 시인의 시집' 속에서
삶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날이시면 좋겠습니다.
제 경우엔
'선물 받은 시집'을
제때 한 번 읽어보지도 않고 묵히는 일이 더러 생기더라고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