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기 위해, 후쿠오카 야메시로 떠났다.
우오타카 술집에 들어가기 전. 뉘엿하게 지는 해가 거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지금이다! 술 마시기 좋은 시간 *거창하고 대단한 맛을 찾아 나서는 여정은 아니다. 작은 선술집을 찾아 술 한 잔 나누며 인생을 이야기한다. 첫 탐식도시는 후쿠오카현 야메시. 얼큰하게 취했다.
● 즐거우면 좋은 인생입니다 3년 만의 여행이다. 여권이 만료된 지도 몰랐다. 서둘러 여권을 갱신하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그 사이 세월이 많이 흘렀나 보다. 혼자만 볼펜으로 입국에 필요한 서류를 끄적이고 있었다. 다들 핸드폰 QR코드인가, 하여튼 뭔가를 준비해 온 모양이다. 후쿠오카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할 때는 약간 겁이 났다. 아무리 비행기를 많이 탔어도, 이 무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차는 산등성이를 따라 난 위태로운 도로를 비틀비틀 달렸다. 첫 여행지는 후쿠오카현 남서부에 위치한 ‘야메시(八女市)’다. 오늘 묵을 곳은 ‘스카이 티 하우스(Sky Tea House, 天空の茶屋敷)’라는 민박집이다. 차창 밖, 산골짜기 아래 드문드문 서 있는 집 담벼락에는 홍매화가 붉은 점처럼 피어 있었다. ● 네, 이거면 충분합니다 ‘스카이 티 하우스’라는 이름의 민박집은 일본 남자와 필리핀 여자 부부가 운영한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사내아이 하나를 키우고 있는 부부다. 마당을 돌아다니며 모이를 쪼아먹는 커다란 닭도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여자 대학생 6명이 머물고 있었다. 나흘째 머물고 있단다. 아무것도 없는 이 산골짜기 민박집에 말이다. 뭐랄까, 조금은 신기한 광경이었다.
야메 중앙 대다원. 야메시에서는 규슈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녹차가 생산된다 민박집 주변으로는 녹차밭이 펼쳐져 있다. 야메시는 일본에서 가장 좋은 녹차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가고시마의 ‘지현차(知賢茶)’와 함께 규슈 지역의 명차로 꼽힌다. 야메의 차는 녹차 중 최고로 꼽히는 ‘옥로(玉露)’다. 전국 옥로 생산량 중 50%가 이곳에서 난다고 한다. ‘이누오성터(犬尾城跡)’ 부근에 ‘야메 중앙 대다원’이 있는데, 이 차밭 사이로 규슈올레길이 나 있다.
민박집으로 향하기 전, 저녁으로 먹을 술과 안주를 잔뜩 샀다 민박에 짐을 풀고 있으니, 여행을 온 여대생들이 저녁을 준비하느라 바쁜 모양이다. 그들이 우리 저녁도 준비해 주기로 했다. 이런 행운이. 뭔가 거들고 싶어 부엌으로 가 보지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 같아 방으로 돌아와 앉을 자리에 방석을 놓았다.
스카이 티 하우스 외관 저녁은 푸짐했다. 밥과 미소된장국, 채소 절임, 고기볶음, 샐러드 등이 상에 놓였다. 그야말로 일본 가정식.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다. 상 위에 식사가 차려지자, 못 보던 할아버지며 청년이 와서는 우리와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 사라졌다. 아무도 그들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이곳에선 그냥 이런 식으로 먹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밥과 국을 안주 삼아 마트에서 사 온 사케를 나눠 마셨다.
녹차밭 사이에 자리한 민숙집 ‘스카이 티 하우스’
저녁을 먹고 민박집 마당에서 불을 피웠다. 후쿠오카의 어느 산골짜기에서 모닥불을 피우다니. 일주일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쌀알을 뿌려놓은 듯 떠 있었다. 카시오페아, 오리온,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서 반짝인다. 고개가 아프도록 오래오래 그 별들을 바라보았는데, 저 어느 별에서도 우리와 같은 이가 지구를 바라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 한쪽이 찡해졌다. 서쪽 하늘 낮은 곳에 유난히 밝은 별 하나가 있었는데, 인공위성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스카이 티 하우스의 부엌. 일본 재래식이다 “10년 뒤에 어떤 모습일 거 같아요?” 모닥불을 쬐며 물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았으면 해요.” 내가 대답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더 좋은 인생일 수도 있어요.” 이렇게 말하며 모닥불 앞으로 당겨 앉았다. “저는 이제 별다른 욕심 없어요. 그냥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여행하고, 적당히 즐겼으면 좋겠어요. 이런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이겠지요. 아, 어쩌면 이게 큰 욕심이려나?”
민숙집에 묵은 대학생들이 저녁을 지었다
민숙집에 놀러 온 일본 대학생들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여행은 우리에게 ‘이런 인생(여행)을 조금 더 살(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해주는 것 같다. 여행을 하며 자주 이렇게 생각한다. ‘네, 이거면 충분합니다.’
● 낮 12시인데 벌써 2차입니다 다음날 일찍, 민박집을 나와 ‘키타야 양조장(喜多屋)’으로 향했다. 다시 한 번, 이 여행의 목적은 일본 전역의 사케를 마시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양조장으로 주섬주섬 찾아들었다. ‘야메’는 규슈 제일의 곡창지대인 만큼, 좋은 양조장이 없을 리가 없다. 키타야 양조장은 창업한 지 200년이 되는 유서 깊은 양조장이다. 한국에서 이 양조장에서 만든 ‘고구마 소주’인 ‘진쿠(尽空)’와 보리소주인 ‘고쿠(吾空)’를 마셔 본 적이 있다. ‘키타야 고쿠조 다이긴조’도 한국의 이자카야에서 맛볼 수 있는 사케다. 키타야 양조장의 대표 선수 격이다. 앳된 얼굴의 여사장은 2013년 IWC(인터내셔널 와인 챌린지)에서 사케 부문 최우수상이자 세계 챔피언을 차지했단다. 맛만큼 자랑이 대단했다.
“맛이 투명합니다. 우아한 향이 코끝을 감싸는 것이 계속 마셔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균형감이 특히 좋은 것 같아요. 아! 맛있네요.” 김의성 배우의 품평. ‘키타야 고쿠조 다이긴조’는 ‘시즈쿠 시보리’라고 하는 기법으로 만드는데, 이는 압력을 가하지 않고, 자연의 중력에 의해 술주머니에서 흘러내리는 만큼만 술로 사용하는 기법이다.
양조장을 나와 ‘사카구치(坂口)’라는 ‘가쿠우치’로 향했다. 가쿠우치는 서서 후다닥 마시는 ‘타치노미야’와 비슷한데, 주류도매상이라는 점에서 구분이 된다. 아마 일본에서 가장 가성비가 좋은 술집이라면 가쿠우치일 것이다. 가쿠우치에서는 즉석 안주를 파는데, 캔 제품이 흔하다. 그냥 뜯어서 먹기도 하고, 더러 주인이 가볍게 요리를 해 주기도 한다.
사카구치에서 주인장의 설명을 들으며 사케를 시음이다 “낮 12시인데 벌써 2차에요. 양조장에서 사케랑 소주를 제법 마신 거 같아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김의성 배우가 답했다. “아, 모르겠다. 일단 마시고 보자고.” 포렴(점포의 처마끝이나 출입구에 간판처럼 늘인 천 장식)을 좌우로 젖히고 가게로 들어섰다.
사카구치는 키타야 양조장의 둘째 아들이 운영하는 가쿠우치다. 우리가 들어서자 대뜸 가발부터 쓴다. 캐릭터가 독특한 친구다. 일본의 유명 개그맨을 흉내 낸 것이라고 한다. 냉장고에서 대뜸 커다란 사케 두 병을 꺼내더니 잔에 그득 따라 준다. 그리고는 간장과 소금이 각각 담긴 조그만 종지를 내어 주었다.
“사케 한 잔을 마시고 간장과 소금을 약간씩 찍어 맛보세요. 이 사케가 간장과 어울린다면 회와 함께 마시기 좋은 사케고, 소금을 찍어 먹었을 때 맛이 더 좋다면 고기 요리에 어울리는 사케라는 뜻입니다.” 와, 과연. 이 사케는 간장이 맛있고, 저 사케는 소금이 어울렸다. 지금까지 일본을 여행하며 수도 없이 사케를 마셔 왔지만 이 사실은 몰랐다. “사케라면 전부 회에 어울린다고만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김의성 배우도 이렇게 말하며 사케잔을 비웠다. 소금 한 꼬집에 사케 한 잔, 간장 2~3방울에 사케 한 모금. 취기가 약간 오른다. 관자놀이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관자놀이가 붉어질수록 용감해지고 무모해지는 것. 술꾼들의 특징이다.
● 어울리지 않는 차 한 잔이 필요할 때입니다 간의 휴식을 위해 찾은 곳은 ‘마루야 사보우(まる舎茶房)’라는 찻집이다. 녹차로 유명한 ‘야메’인데, 이왕 온 거 녹차 맛은 봐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말차 한 잔씩을 주문했다. 기모노를 입은 여주인은 물을 끓이고 다완(茶碗, 차를 마시는 그릇)을 준비했다. 동작 하나가 자로 금을 그어 놓은 듯 딱딱 끊어진다. 마치 사관생도의 제식동작을 보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