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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한 블로그에서 최윤오씨의 주장을 소개하는 게시글이 올라왔습니다. 다른 것은 아니고 김용섭에 의해 주장된 경영형부농론을 재증명하고 부활시키려는 그의 연구에 대해서 여러모로 소개할 것도 있고 주의사항같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글은 리플로 썼던 것을 별다른 수정없이 올린 것이라 문맥이 안맞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 경영형부농설을 다시 언급하는 학계의 연구성과가 나왔습니다. 충북진천군 양안을 통하여 경영형부농의 존재를 다시금 실증하여 재증명한 최윤오씨의 연구성과가 그것인데, 사실 최윤오씨의 주장은 그리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국사학자로써 그런 연구성과를 발표했다는게 국사학계'내'에서는 특별한 일인데, 이미 낙성대에서 신흥지주라고 해서 밝혀놓은 것을 이름만 경영형 부농으로 바꿔서 내놨을 뿐입니다.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연구성과와는 좀 다른 것은 그는 자신의 연구성과에서 내리 임노동자층의 존재를 밝히려고 했다는 겁니다. 이는 그가 김용섭의 고전 "경영형부농"설을 다시금 재증명해보려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임노동/경영형부농 간의 관계를 밝혀서 농민층의 분화가 산업예비군을 축적시켰고 그것이 다시 사회적 노동/자본가 관계확립에 기여했다는 이론을 펼치려는 것이죠.
연구취지부터가 지금은 고전인 자본주의 맹아론의 그 비뚫어진 의의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을뿐더러, 연구방법면에서도 그는 선배학자인 김용섭과 똑같은 실수를 벌이고 있습니다. 시계열 자료를 구성하려면 보통 2개이상의 시계열 자료를 확보해놓고 어떻게 변화해나갔는지 살펴봐야합니다. 그런데 김용섭은 시계열 하나만 가져다 놓고 그 안에서 소수계층의 토지점유가 크다고 해서 경영형부농이 실증된다고 굳게 믿고 연구성과를 내놨지요. 그게 경영형부농론입니다. 최윤오가 내놓은 연구성과도 다른게 없습니다. 그 역시 진천군 광무양안에서 나오는 특정한 '딱 하나'의 시점에 토지소유현황을 보고 '경영형부농은 실증되었다 이로서 김용섭 선생의 주장은 증명되었다'는 식인데, 시계열을 두개이상 뽑아놓은 것도 아니고 하나만 뽑아놓고 이런소리를 하면 안되지요. 어떤 토지소유현황추이던, 그 중에 특정시기 하나만 꼽아다가 토지소유현황을 보면 어느 시기라도 소수상위계층의 다량토지점유 현상은 나타납니다.
애당초 토지소유값은 음수를 가질 수 없으므로 아무시기나 골라잡아다가 파악하면 소수계층의 대토지점유는 어디에서라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고..
http://cafe.naver.com/economicreview/103
또한, 기본적으로 알아야할 것이 그가 비판하는 소농사회론에서 '영세균질화'를 주장하는 것은 소유토지가 영세균질화된다는 것이 아니라 '경작'토지가 영세균질화된다는 것을 일컫는 겁니다. 소농사회론은 기본적으로 종래의 농장제 하에서 양반지주가 직접 농장을 경영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자신의 땅을 소작지로 임대하는 소작료 수취자로 변한다. 그래서 지주-소작관계로서 주호-협호관계가 보편화 된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둡니다. 여기서 소작농과 지주-소작 관계를 많이 맺은 지주. 즉,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는 소농사회론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없습니다. 조선후기의 지주는 소작료를 수취할뿐, 조선전기 대농장을 운영하던 양반지주처럼 노비들을 사역시켜서 자신의 농장을 직접경영을 하는 계층이 아닙니다. 임노동자를 고용해서 자신의 대농장을 광작경영하던 계층은 더더욱 아니구요.
최윤오의 취지대로, 소농사회론에 대한 반증으로써 경영형부농설을 증명하려거든, 소작농에게 소작료를 수취하는 지주의 성장을 증명해야될 것이 아니라, 대경작을 통해 경영규모를 지속적으로 확장해나가고 성장해나가던 계층이 있었는지 / 어떤지를 증명해야됩니다. 적어도 시계열을 2개이상 뽑아서 농경규모의 추이에서 광작이 진전되는지 소규모 경작이 점차 확대되는지 알아봐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나 최윤오의 연구는 광무양안에 나오는 특정 한시점의 농촌현황만 잡아둘 뿐입니다.
최윤오는 자신의 글에서 궁방전을 통하여 농촌의 경작규모 영세화를 밝힌 이영훈의 연구성과에 대해서 그 한계점을 비판했는데, 내용인즉슨.. 궁방전은 왕실의 권위를 빌릴 수 있었기 때문에 아주 작은 규모라도 얻어서 경작하려고 했다 즉 경작경쟁율이 높아서 영세균질화가 다른 토지에 비해 과다하게 진행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다시말해, 궁방전을 통해 밝혀진 소농사회론은 조선농촌사회의 영세균질화를 너무 과장적으로 묘사했다는게 그의 지적입니다. 쉽게 말하면, 궁방전을 통한 이영훈의 소농사회론은 과장되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작지는 그런식으로 영세균질화가 되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농촌의 영세균질화는 비단 이영훈씨가 연구사례로 삼은 궁방전에서만 일어나던 현상이 아닙니다. 종래 김용섭씨가 경영형부농론을 실증해보이겠다고 표본으로 삼던 대구조암방의 농작경영사례에서조차 두개이상의 시계열을 잡고 분석해보면 영세균질화가 확인됨이 미야지마 히로시씨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 http://sunho1007.egloos.com/2012413 )
게다가 이영훈씨 박사학위논문에서 나오는 연구사례조차도 용동궁과 같은 궁방전 뿐만이 아니라 민유지가 포함된 다른 경작지까지 포함해서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농경의 소농화가 궁방전에만 국한된다는 최윤오씨의 지적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범위를 좀 넓게 잡아볼까요.? 조선과 동일한 동아시아 집약농업지역인 일본 역시 하야미 아키라 선생이 지적하듯 소를 이용한 축력을 인력이 대체할 정도로 농경의 집약화가 심화되었고, 임마뉴엘 월레스타인이 지적하듯 중국역시 마찬가지로 농경이 집약화되었습니다. 즉 집약농업의 발달과 이로인한 경작토지의 영세균질화는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추세입니다. 서구사회조차 다르지 않아서 프랑스사회도 영주의 장원경작이 해체되고 지주-소작관계가 보편화되어 소농사회로 진전되고, 경영형부농이 대두했던 영국조차 (김용섭이 원래 참고모델로 삼았던 그 영국) 19세기에 이르면 기업형 농경이 쇠퇴하고 농촌이 가족농업화 즉 소농사회화됩니다. 따라서 영세균질화가 궁방전의 경작에만 국한되어 나타난다는 현상이라는 최윤오씨의 주장과 달리 오히려 기업형농경 및 경영형부농의 등장과 성장이야 말로 전세계적으로 봤을때 특수사례(그것도 점차 사라져가던 현상)에 불과할 뿐이죠.
세계적으로 제조업분야에서 독점화가 진행되는 것과 달리 전세계의 농업은 영세균질화되었습니다. 농경규모의 영세균질화 및 가족적 소농화는 세계적 추세입니다.(비록 경작방법에 따라 규모에선 차이가 있겠지만) 아래는 식민지기 농업경제 연구자인 장시원씨의 글입니다.
http://cafe.naver.com/economicreview/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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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다입니다.
많은 땅을 경영하는 부자농민이 등장했고, 이들과의 차지경쟁에서 도퇴된 농민이 유랑하여 임노동자가 되었다. 이게 경영형부농론의 핵심이죠. 예전에 한번 언급한 것입니다만, 인클로저로 인한 농민의 임노동화는 실증적 근거가 빈약합니다. 실제로 영국에서 도시수공업의 노동력은 농촌이 아니라 도시 자체적으로 모집하거나 아주 근접한 농촌에서 구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중국과 다르게 폭넓게 나타나지는 않았는데 약간의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조선에서도 경영형부농이 나타났다고 주장을 하는 것인가요? 그러면 자본주의맹아라고 하기에는 힘들군요. 중국도 청대로 가면 갈수록 중소지주나 대지주가 약간 혹은 수많은 임노동자를 고용해서 농업을 하는 현상이 많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요새는 그러한 것을 가지고 과연 자본주의맹아가 전체적으로 나타났냐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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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노동층이 있냐, 없냐보다 중요한건 양극분해로 인한 산업예비군 축적 및 농민의 임노동자화가 있었냐입니다. 저번에 그쪽이 언급하신대로 영국사회에서조차 유랑농민이 대량의 산업예비군들로 축적되거나, 대다수가 노동자가 되는 현상은 없었습니다.
최윤오가 증명하려는 양극분해이론에서의 임노동자라면 분해의 추세로 임노동층과 산업예비군이 생성 및 증가했음을 주장해야되기 때문에 단순히 존재만 증명하는것 뿐만 아니라 분화추이도 증명해야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