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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伍子胥)
楚나라 사람 오자서(伍子胥)는 한바탕 치열하고 시원한 인생을 살은 인물이다. 3년 不蜚不鳴(불비불명)의 故事로 초장왕(楚莊王)에게 간한 사람이 그의 先祖이고, 충언을 받아들인 초장왕은 春秋5覇(춘추5패)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오자서의 집안은 초나라에서 대대로 名門이고 역대로 충신으로서 오자서의 아버지인 오사(伍奢)는 초평왕(楚平王) 시절에 벼슬이 태부(太傅) 즉, 太子의 스승이었다. 태자의 작은 스승(少傅소부)이 비무기(費无忌)란 자였는데, 태자를 모심에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
어느날, 초평왕이 비무기에게 진(秦)나라에 가서 태자의 부인을 청해오라고 시켰다. 비무기가 진나라로 가서 장래 태자빈이 될 진나라 공주를 보니 마침 천하의 절색이라, 미리 달려와 초평왕에게 고하고 그를 꼬드겨, 며느리 될 여인을 시아버지 될 자가 가로채게 만들었다.
비무기는 태자가 장래에 왕으로 등극한 후 닥쳐올 자신의 운명을 두려워하여 초평왕에게 태자를 讒訴(참소)하였다. 초평왕은 자신이 한 짓도 있고 비무기의 말도 그럴 듯한 지라, 먼저 태자의 사부 오사를 잡아 가둔 후, 변방에 내쳐져 있던 태자를 잡아들이려 하였다. 다행히 태자는 국외로 도망쳤다.
오사는 결국 죽게 되었는데, 오사에게 두 아들 오상(伍尙)과 오원(伍員=오자서)이 있음을 비무기와 초평왕이 알고 훗날의 화근을 뿌리째 뽑기 위하여 아버지 오사의 이름을 사칭하여 먼 곳에 있는 두 아들을 왕궁으로 불렀다.
가면 죽을 판국에서 큰 아들 오상은, ‘도망쳐서 훗날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데 외면하고 목숨을 구한 아들이란 汚名(오명)을 얻을 뿐이다’며 ‘너는 능히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도망쳐라. 나는 아버지의 곁으로 가서 같이 죽겠다’
이리하여 아버지와 형은 죽고 오자서는 도망쳤다.
오자서는 태자가 있는 정(鄭)나라로 갔다. 그런데 태자는 그곳에서 일을 획책하다 정나라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오자서는 태자의 아들을 모시고 오(吳)나라로 넘어갔는데, 국경의 관문에서 지내던 하룻밤 사이에 눈썹과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오나라에 들어가서 피리를 불며 걸식을 하는 등 고생 끝에 오나라 公子인 광(光)의 사람인 피리(被離)의 눈에 띄어 드디어 오나라에 出仕(출사;벼슬길에 나아감)하게 된다.
한편 오나라의 왕위는 그 승계의 과정에 모순이 있었고 그 당사자인 公子광은 왕위를 뺏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오자서의 능력을 알아본 公子광은 은밀히 오자서를 포섭하게 되고, 오자서는 효자 자객 전저(專諸)를 公子광에게 천거한다. 이 무렵 초평왕이 죽는다. 오자서는 초평왕을 직접 죽이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가슴을 치며 하루종일 울고 사흘밤낮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오자서는 智謀(지모)를 짜내어 자객 전저가 오나라 왕을 살해하고 公子광이 왕위를 강탈하여 오왕 합려(闔閭)로 등극하도록 성공시키고 그 제1공신이 된다. 그리고 병법의 대가 손무(孫武)를 천거하여 군사를 훈련시킨다.
마침내 오자서는 손무와 함께 정벌전쟁을 일으켜, 자신이 초나라에서 도망친 지 16년 만에 초나라의 수도를 함락한다. 초왕은 도망쳤고, 비무기는 이미 죗값을 받고 초나라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오자서는 이미 죽은 원수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체를 꺼내어 채찍으로 3백회 내려쳐 복수한다.일찍이 오자서가 도망길에 오를 때 ‘반드시 초나라를 멸망시키겠다’고 맹세하였다. 오자서와 교분이 있던 신포서(申包胥)는 벗인 오자서의 도망을 묵인하면서,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보존시키겠다’고 말한다.
이 신포서가 초나라 서울에서 도망쳐 산중에 있다가 사람을 시켜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 아들이 비록 그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고는 하나 그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는가? 나는 ‘사람이 많으면 일시적으로 하늘을 이길 수 있다고 하나 일단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물리칠 수가 있다’고 알고 있네! 지금 그대는 옛날 평왕의 신하로써 北面(북면)하여 받들었으면서 지금에 와서는 그 시신까지 욕보이니 어찌 이보다 더 天道(천도)에 어긋날 일을 행할 수 있단 말인가? ”
오자서가 신포서의 말에 대답하며 전하게 했다.
“ 나를 위하여 신포서에게 사죄하는 말을 전하라! ‘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日暮途遠) 내가 어쩔 수 없이 일을 거꾸로 행하며 하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네!”
여기까지가 영웅 오자서의 삶 전반부이다. 옛사람들은 君臣간의 관계를 ‘철칙’으로 여겨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명분을 어길 수 없다 여긴 모양이다. 신포서가 天道 운운한 것을 보면 그들이 생각한 군신관계의 엄중함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인 나의 눈에는 오자서의 행위가 그 무슨 ‘天道에 어긋나는 행위’라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평왕의 죽음에 원통해하며 하루 내내 울고 사흘 밤낮을 뜬 눈으로 세웠던 오자서가 고작 시체에 3백대 매질을 한 것으로 분이 풀렸을까 그것이 더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오자서의 이 ‘시체매질’은 그 진위에 의문이 있으며 이에 대해 일찍이 쟁론이 있다 한다. (이하 중국 百度백과) 즉,
하나, 시체매질 긍정說. 사마천의 史記 중 吳太伯世家(오태백세가)에 ‘오자서와 백비(伯嚭)가 시체에 3백대 매질을 하여 부친 살해에 대한 앙갚음을 했다’는 記述(기술)이 있고, 오자서列傳에 ‘평왕의 묘를 파서 그 시체를 꺼내어 매질 3백대를 친 후에 그쳤다’는 기술이 있다. 즉, 사마천이 그렇게 썼잖아 이런 주장이다.
하나, 무덤매질 긍정說, 呂氏春秋(여씨춘추) 등에 ‘무덤에 대고 매질 3백회를 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하나, 부정설, 春秋시대를 기록한 책 春秋 등은 그 시대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책이고 가장 권위 있는 책이다. 이 책들에는 시체매질에 대한 기술이 없다. 게다가 孔子는 오자서와 동시대의 인물인데, 공자는 亂臣賊子(난신적자)를 가장 용납하지 않을 인물이다. 오자서가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시체매질을 한 행위는 난신적자 행위 중에 가장 악독한 짓이라 할 것인데, 동시대 인물인 공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사람들은 시체매질說을 뒷사람들의 오자서에 대한 中傷(중상)이라 본다. 즉, 오자서의 복수 자체를 君臣이라는 名分에 어긋나는 행위로 보아 그에게 더 ‘악독’이라는 딱지를 붙이려 했고 그게 시체매질이라는 거짓 딱지를 굳이 붙인 이유이다, 이런 말이다. 나 원 참, 그럼 왕이 날 죽이면 불문곡직 네 하고 그냥 죽어야 하나. 아버지와 형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게 王이라서 복수도 못하나.
어쨌거나 사람 간의 관계를 틀에 가두려는 유교적 명분론은 역사가 흐를수록 강화되었고 明末 淸初 사람인 풍몽룡((馮夢龍)이 기존의 역사책을 각색하여 역사소설인 列國誌(열국지)를 지으면서 오자서에게는 몇 개의 ‘딱지’가 더 붙게 되는데,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다음은 사마천의 史記와 풍몽룡 판 열국지를 비교하였을 때, 史記에는 없는 내용들이다.
얘기 처음으로 돌아가서, 오자서가 도망치는 순간에 그에게 아내가 있었다. 오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제 부인을 돌볼 수가 없게 되었소.”즉 父兄의 복수를 위해 도망쳐야 하는데 당신까지 데리고 다닐 수 없다는 얘기다. 부인 가(賈)씨는 조금도 원망 않고,“첩은 신경 쓰지 마시고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한마디 하고 방으로 들어가 목을 매어 죽었다. 오자서는 통곡하고 시체를 묻고 길을 떠났다. 이리하여 오자서 어깨에 非倫(비륜) 하나가 얹히게 되었다.
정나라로 갔다가 오나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초나라 군사의 추격을 받게 되는데, 어느 강변에서 거의 잡힐 위기에 처했다. 이때 어느 어부가 강을 건네주는데 오자서가 감사의 뜻으로 갖고 있던 寶劍(보검)을 주려고 하였으나 어부는 받지 않았다, 헤어질 때 오자서는 어부에게 초나라 병사에게 이 일을 발설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보검조차 거절한 어부인데,.. 어부는 모욕감에 마음속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배를 뒤집어 물에 빠져 자살한다. 이리하여 오자서의 어깨에 非倫 하나가 더 얹히게 된다.
오나라로 들어간 오자서는 배가 고파 구걸을 하게 되는데, 어느 물가에 빨래를 하던 처녀를 만나 밥을 얻을 수 있겠냐고 청한다. 이슥한 나이의 이 처녀는 남녀 간의 예의를 과감히 넘어 생면부지의 오자서에게 밥을 준다. 근데 밥 잘 먹고 헤어지는 순간에 또 오자서의 병이 도진다. “은혜에 감사하오며, 저는 망명객이니 다른 사람에게 절대 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여인은 오자서의 박절함을 탄식하며 돌을 껴안고 물에 빠져 죽는다. 이리하여 오자서의 어깨에 非倫 보따리가 또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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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부를 죽인 것도 모자라 멀쩡한 처녀 하나를 또 죽이기에 이르니, 어부와 처녀가 오자서가 말하지 말라 하면 말고 그런 말 안 하고 떠나면 말할 사람이더란 말인가. 오자서는 그럼, 아무리 복수에 눈이 어두워 이성이 마비됐기로서니, 실수로 이미 하나 죽게 만들었는데 똑같은 방법으로 또 죽이는 백치 짓을 한단 말인가.
오나라에서 오자서는 우연히 孝子(효자) 전저를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오자서는 결국 이 의동생을 公子광에게 바쳤음(소개)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후세 사람들 누구는 이를 두고 '오자서가 의동생을 바쳐 公子광에게 아첨했다'고 평했다. 그리고 전저가 자객 일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효자’전저의 老母가 자살한다. 오자서의 어깨에 보따리가 하나 늘었다.
公子광이 王 합려가 되었으나 자객 전저에게 죽은 이전 왕의 아들 천하장사 경기(慶忌)가 나라 밖에서 힘을 기르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왕 합려는 오자서에게 ‘내가 음식을 먹어도 맛있는 줄을 모른다’며 또 한번의 ‘수고’를 부탁한다. 오자서는 전 왕의 아들까지 죽이는 데 대해 가책을 느끼고 거절하였으나 거듭된 합려의 요구에 결국 자객 요리(要離)를 추천한다.
요리는 거짓으로 합려에게 죄를 받아 팔 하나를 잘리고 온 가족이 몰살당하고 그 시체를 거리에서 불태우는 고육지계를 동원하여 경기에게 접근할 명분을 만들고, 경기는 이에 속아 넘어가 요리를 심복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요리는 천하장사 경기를 암습하여 간단히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목적을 위해서 自身은 그렇다 치고, 가족까지 해하는 수단을 동원하는 비정한 자객이 받아야 할 힐난은 또한 오자서의 몫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보따리가 하나 더 는다.
영웅 오자서의 운명은 그의 삶 후반부에 드러나게 되는데, 그의 운명은 그 스스로 뿌린 씨에 의해 결정된다. 그가 뿌린 씨란 간신 백비(伯嚭), 그리고 합려를 이어 오나라 왕이 되는 부차(夫差)이다. 백비는 오자서의 나라였던 초나라 사람으로 그 역시 간신 비무기의 해침을 당해 아버지를 잃고 오나라로 온다. 동병상련이라, 오자서는 그를 합려에게 추천하는데, 이전에 오자서를 公子광 시절의 합려에게 소개했던 ‘관상가’ 피리가 백비를 보고 이렇게 평한다.
“그 성격이 원래 탐욕스럽고 아첨을 잘하며 공은 혼자서 가로채고 사람을 가볍게 죽이니 가까이 지내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그를 중용했다가는 후에 공에게 필시 큰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러나 오원은 피리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후세의 사람이 피리가 오원의 현명함을 알아보고 다시 백비의 사람됨을 갈파한 것은, 그가 진실로 귀신 같이 관상을 보았다고 논했다. 오원이 피리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어찌 하늘의 뜻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뒤의 말은 열국지 저자 풍몽룡의 평이다. 풍몽룡이 말하는 ‘하늘의 뜻’은 내게는 명백히 오자서를 두고 한 힐난이라 여겨진다. 운명이긴 하지만 즉,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오나라는 훗날 월(越)나라와 생사를 건 다툼을 벌이게 되고 오자서의 삶 후반부는 그가 새롭게 충성한 對象(대상)인 오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합려의 아들 부차는 분명히 월나라를 멸망시킬 기회가 있었음에도 뇌물에 넘어간 백비의 꼬드김에 빠져 仁慈(인자)라는 허명만 좇아 월왕 구천(句踐)을 죽일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 과정에 오자서가 기회 있을 때마다 간해도 소용이 없었다.
부차에게 간하고 간하다 미움을 산 오자서는, 결국 부차에게 죽음을 당하고 오나라는 월나라에 멸망당하고 마는데, 이 허영심에 찬 부차라는 인물을 君主(군주)로 만든 인물이 바로 오자서였다. 합려가 후계자 문제로 고심할 때 바로 오자서가 합려에게 힘껏 간하여 부차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후계자 문제에 대한 언급은 史記에도 있다)
후세 사람들은 오자서의 '天道를 거스른 죄'를 이런 식으로 힐난했는데,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오자서가 살아간 인생은 비록 그의 말년이 불운하였다 하나 한바탕 통쾌하게 산 삶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왕에게 살해당하는 순간에 오자서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그는 주어진 운명이 규정한 삶을 살다 죽었다. 천지를 한순간 환하게 밝히고 스러지는 불꽃같은 삶이었다. 인간이 지닌 情, 감정, 복수라는 인간적 감정에 가장 충실한 삶이었다.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능력이 못 미쳐서 그렇게 못함을 탄식할 뿐, 기회가 닿지 않아 고작 시체를 때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오자서의 운명을 탄식할 뿐, 이를 두고 그 누가 그를 비난하겠는가.
이 얘기의 시작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오사에게 하필 아들이 둘이라, 하나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죽음을 택했고 하나는 복수를 위해 삶의 길을 택했다. 큰아들 오상의 효심을 그의 아버지가 아닌 이상 탓할 수는 없지만, 나약한 우리는 강인한 오원의 선택 쪽으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기운다.
사마천은 오자서열전 말미에 오자서를 이렇게 평했다.
“사람에게 악랄한 짓을 하여 그로 인하여 맺힌 원한은 참으로 뿌리가 깊도다! 왕이라 한들 어찌 그 신하된 자에게 원한을 사면 안 되거늘 하물며 동열의 사람들에게는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옛날 오자서가 그 부친 오사(伍奢)의 부름에 응하여 같이 죽었더라면 그것은 한낱 땅강아지나 개미에 불과했을 것이다. 小義(소의)를 버리고 커다란 치욕을 갚아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졌다. 슬프도다! 오자서가 長江을 건널 때나 걸식을 하며 길을 갈 때나 어찌 잠시라도 초나라의 서울을 잊었겠는가? 그는 온갖 어려움을 참고 견뎌 결국은 功名(공명)을 이룰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은 열혈장부가 아니었다면 그 누가 그와 같은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겠는가?”
사마천의 학문을 儒家(유가) 쪽이라 보아야겠지만, 사마천은 결코 儒家의 도덕 명분에 얽매인 인물은 아니었다.
‘小義를 버리고 커다란 치욕을 갚았다’참으로 통쾌하다.
손자병법에 관련해 아주 재미있게 엮어진 만화책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손자병법'이라는 만화책인데 밑의 자료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도 많고 만화 중간중간에 손자병법에 관한 짤막한 지식도 소개하고 있습니다.매우 깔금한 그림체와 내용또한 매우 충실해서 아주 볼만합니다.
빠른 샛길로 가든 바른길로 가든 원하는 목적지 까지 간다면 여러분은 어떤 길을 택하겠습니까..?
저는 샛길을 택하겠습니다.재미있는 만화책 읽고 손자병법에 대해 이해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있겠습니까..?
춘추시대 말기의 인물 오자서(伍子胥)는 실로 놀라운 생존력을 보여주었다.
결국에는 개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시신이 담겨져 강물에 던져짐으로써 일생을 마쳤으나, 그는 오늘날 야심에 찬 화교들의 우상이며 동시에 손자(孫子,孫武)에게는 세상이 진짜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모든 인력과 자원을 제후국들간의 전쟁 속으로 무한정 쏟아 부었던 춘추시대 말기, 오자서와 손자는 이 격변의 시대를 동시에 살다간 인물들이다.
오자서, 그는 부친과 형이 초(楚)나라 왕(平王-역주-)에게 살해당함으로 복수의 한을 가슴에 품고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때로 거지와 같이 먹을 것을 구걸하는 우여곡절 끝에 기원전 519년, 양자강 하류의 오(吳) 나라에 닿았다.
오의 수도는 지금의 소주(蘇州) 지방이며, 당시에도 양잠업의 중심지였다.
탑 모양의 궁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수많은 수로와 연못, 울창한 나무들이 사방에 펼쳐져 있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도시다.
오늘날 상해 지방에서 들을 수 있는, 치찰음이 유독 심한 방언을 이 나라 이름을 따서 오(吳) 방언이라 한다.
오에 도착한 오자서는 곧장 요왕(僚王)에게 달려가 부친과 형의 복수를 위해 초나라를 징벌할 수 있도록 도움을 간청했다. 오왕(吳王)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왕자 光(오나라 합려,闔閭)은 도망자 신분인 오자서를 빈객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光은 사촌 동생인 요왕을 암살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는 계획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으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묘책을 찾고있었다. (일찍이, 오나라의 왕 수몽(壽夢)은 네 명의 왕자 -제번(諸樊), 여제(餘祭), 여매(餘昧), 계찰(季札)-를 두었다. 수몽이 죽은 후 장자인 제번은 인격과 능력이 뛰어난 막내 동생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본인이 끝내 반대함에 따라 자신이 왕위를 이어받았고, 자기가 죽을 때 바로 밑의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이는 왕위를 형제 상속할 경우 결국 막내 동생 계찰에게까지 왕위가 돌아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위는 세째 왕자 여매까지 이어져왔다. 그런데, 여매가 죽었을 때 계찰은 끝내 왕위를 사양하고 잠시 몸을 숨겼다.
결국, 왕위는 첫째 왕자 제번의 장자인 광(光)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세째 왕자 여매의 아들인 요(僚)에게 계승됐다. 이후, 왕위가 당연히 장자인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리라 믿었던 광(光)은 굴욕의 날들을 보내면서 사촌 동생인 요왕으로부터 왕위를 되찾을 계획을 가슴에 품었다.-역주-)
오자서는 광에게 묘책을 일러주었고, 광은 그의 계책에 따라 연회석을 마련하고 요왕을 초대했다. 이날 연회에는 생강과 레몬 즙을 뿌리고 알맞게 구운 농어 요리가 나왔다. 그리고, 농어의 뱃속에는 숨겨져 있었던 비수는 요왕의 위장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이날 요리사는 오자서가 광에게 소개시켜준 전저(專藷)라는 인물이었다. 전저는 농어 구이를 만들었고, 이를 받치는 척하며 고기 뱃속에서 비수(어장검)를 꺼내어 요왕을 찔러 살해했다. 전저는 왕을 살해한 직후 왕의 호위병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역주-)
이날 연회의 주연배우인 정신병자 요리사를 찾아내고, 그리고 연회석에 국왕을 초대하기까지는 모두 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한편, 오자서는 이 음모의 가담자로 드러나는 것을 피해 일찌감치 농사꾼으로 가장하여 벽촌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기원전 514년, 비수를 뱃속에 품은 농어 덕분으로 광은 왕위에 올랐고 이름을 합려(闔閭)로 개명했다. 드디어 가슴 속의 야심을 실현했던 것이다. 농부로 위장했던 오자서는 합려의 부름을 받아 수상에 임명되었다. 오자서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빈틈없는 계획에 고마움을 갖고있었고 또한 이를 강력하게 실행에 옮긴, 활동적이면서도 지적인 오왕 합려와의 동반 관계는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실행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오자서가 합려에게 권고한 첫번째 제안 중 하나는 손자(孫子)가 쓴 병법서를 읽는 것과 간첩 활동에 관한 새로운 손자의 이론을 직접 들어보도록 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손자의 과거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고대 중국인들은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 종종 자신들의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개명의 사유 중에는 사회적으로 이미지를 높이고 존귀함을 더한다는 목적이 있었던 반면에 나쁜 일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경우도 많았다.
손자의 조상은 한때 진(陳)나라의 군주였다고 한다. 궁전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의 조상은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산동반도의 제(齊)나라로 도망쳤다. 제나라 사람들이 망명 귀족들의 출신 성분을 궁금해 하자 손자의 조상은 진(陳)의 발음을 따서 전(田)이라 개명했다. 전씨 일족은 두드러지게 출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제나라의 권력과 군사력을 쥐었고, 일가 중 한 계파는 5 대째 장군을 배출했다. 기원전 547년, 제나라의 조그마한 이웃 나라이며 공자의 출생지에 있었던 거나라를 점령한 제나라 전서(田書) 장군이 손자의 조상이다.
전서 장군은 제왕(齊王-景公-역주-)으로부터 손(孫)이라는 성씨와 낙안(樂安) 지방을 영지로 하사 받아 그 곳에서 세입을 걷게 되었다. 성씨를 하사 받은 장군은 손서(孫書)라고 개명했으며, 풍(馮)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이가 무(武)라는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훗날 그 유명한 손자다. (손자의 조상에 대해서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음-역주-)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손 장군의 길운도 다했으며, 변덕이 심한 제나라 군주의 미움을 사자 할 수 없이 가족들을 대동하여 오나라로 도망쳤다. 손씨 일가는 양자강을 건너, 오나라 수도로부터 서쪽으로 5 km 떨어진 조그마한 마을에 자리 잡았다. 그 곳은 흑토로 뒤덮인 곡창지대로서, 운하를 따라 오리와 거위를 키우는 마을이었다. 오나라 땅에서, 손자는 정치적 수단, 군사적 전술, 전략, 음모, 그리고 첩보 활동 등에 대해 부친으로부터 사사 받았다.
손자는 이 모든 기술과 기교에 통달했으며, 수세기에 걸친 전쟁과 음모를 연구하며 얻어진 지혜를 저술했다. 그는 자신의 지혜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경구의 형식을 빌어, 다람쥐 털로 만든 붓으로 죽간(竹簡)에 기록한 후 명주실로 죽간을 엮어서 책자로 만들었다. 이책은 손자 자신이 연구 활동을 계속하기 위한 비밀 자료로 사용했고, 후세 사람들은 그 책을 통해 그의 뛰어난 사상과 지혜를 알게 되었다.
기원전 5세기경, 제후국들 사이의 전쟁은 대체적으로, 짐꾼을 포함하여 수십만의 대군들이 수주간 혹은 수개월간 교전을 지속하는 양상을 보였다. 출전을 위해서는 사전에 빈틈없이 작전을 수립해야 한다. 전쟁은 대부분 복잡한 상황으로 전개됨에 따라서 논리적인 용병술뿐 아니라 조직적인 첩보 활동과 치열한 두뇌 싸움 그리고 병참술을 포함하여 말단 병사까지 관리할 수 있는 행정력 등 광범위한 분야에 있어서 뛰어난 전략을 사용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 손자는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전쟁과 음모를 연구하면서 논리 정연한 지혜를 갖추게 됐고 이를 지극히 평범한 어귀를 사용하여 기록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전략과 전술을 최초의 집대성했다.
도망자의 신분으로서, 정권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수상 직에 오른 오자서는 기원전 512년, 손자와 그의 부친을 만났다. 실전 경험이 없이 이론에만 치중했던 손자는 자기를 발탁해줄 것을 기대하며 그 자리에서 손자병법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이를 읽은 오자서는 급기야 손자를 합려에게 천거했다. 오왕 합려는 왕의 빈객으로서 손자를 초빙했다. “네가 쓴 병법서는 모두 읽어 보았네. 혹시 군사 훈련을 시범해 줄 수 있겠나?” 오왕 합려가 손자를 만난 자리에서 요청했다. “예.” 손자가 대답했다.
“여자들만으로도 군사 훈련이 가능하겠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왕은 궁녀 180명을 뽑아 궁정의 연병장에 집결시켰다. 손자는 궁녀들을 두 개 조직으로 나누고 왕이 아끼는 빈(嬪) 2명 선정하여 각 조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왕이 궁전의 망운대(望雲臺)에서 내려다 보니 궁녀들은 창 잡는 방법부터 배우고있었다.
손자가 궁녀들에 물었다.
“모두들 앞, 뒤, 좌, 우는 알고 있느냐?” 궁녀들은 “예” 라고 대답했다.
“나의 하명에 따라 ‘전진’을 알리는 북소리가 나면 너희는 앞으로 나간다. ‘좌로’돌라는 북소리가 나면 너희는 왼쪽으로 돌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로’의 북소리가 날 때에는 오른쪽으로 돌고, ‘후퇴’를 알리는 북소리가 나면 뒤로 물러선다.”
궁녀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손자와 궁녀들 사이에 규칙이 정해진 후, 손자는 형리(刑吏)를 불려 자기의 칼을 주고 옆에 서있도록 했다.
손자는 몇 차례 더 궁녀들에게 꼼꼼히 규칙을 설명했다.
이윽고, 손자의 명에 따라 고수가 ‘전진’을 알리는 북소리를 울리자 궁녀들은 한꺼번에 웃음을 터트렸다.
손자가 말했다. “규칙이 불분명하고 명령이 명확하지 않으면 이는 사령관의 잘못이다.”
손자는 두 차례 더 규칙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제, ‘우로’라는 북소리가 울리고 궁녀들은 또 한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손자가 말했다. “명령이 명확함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관리의 잘못이다.”
손자는 망나니에게 각 조의 지휘관 목을 벨 것을 명령했다. 두 빈(嬪)은 끌려 나와 무릎을 꿇었다.
이때, 자기가 아끼는 빈들이 망나니 앞에 무릎 꿇고 처형을 기다리는 광경을 본 합려는 허겁지겁 사신을 보냈다. “내 이미 손 장군의 명석함을 알고 있고, 두 빈이 죽으면 식욕을 잃을 것인 즉 부디 그들을 용서해주게.” 손자는 사자와 전갈을 왕에게 되돌려 보냈다. “난 이미 사령관으로 임명을 받아 전장에 나온 것과 같으며, 전장의 장수들은 군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젊은 빈들의 머리는 몸에서 떨어졌다. 이제 새로운 두 명의 빈이 선정되어 각 조의 지휘관으로 임명됐다. 이번에는 궁녀들이 북소리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였고,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앉아, 일어서, 부동 자세를 취했다. 손자가 왕에게 전갈을 보냈다. “이제 군사들은 열병을 받을 준비가 됐습니다. 왕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물과 불을 가리지 않고 따를 것입니다.”
“군사들을 검열할 의사가 없으니 그만 숙소로 돌아가 쉬게.”
그러자, 손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왕께서는 이론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손자의 진지함과 역량을 확신한 합려는 손자를 오군(吳軍)의 군사로 임명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손자에 관한 일화는 기원전 1세기의 뛰어난 역사가 사마천의 저술 속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던 것 뿐이었다.
손자의 뛰어난 병법이 오직 13편 뿐이었는지, 그리고 손자병법의 진짜 저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 학계에서는 많은 추측이 있었다.
사마천의 저술을 비롯하여 손자에 대한 역사 문헌들이 너무도 기담적인 내용이 많고, 고증이 없는 내용이라 심지어는 손자가 실존 인물이었는가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되었었다. 1950년대, 중국의 한 역사학자는 손자병법의 실제 저자는 손자가 사망한 후100여년이 지난 시대에 태어난 손자의 후손 손빈이라고 주장했다. 고증할 만한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역사가들은 손빈 저작설을 인정하기도 했으며, 혹은 손자와 손빈을 동일 인물이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2,000 여년 된 산동성의 한 분묘에서 고대 군사학에 대한 놀라운 저술 (손자병법 13편 이외에 유실되었던 나머지 부분)과 이와는 완전히 틀린 체계의 병법서 (손빈의 병법서)가 출토됐다.(1972년 산동성 임기(臨沂)현 은작산(銀雀山) 분묘에서 출토됨-역자-) 이로써, 손자와 손빈은 모두 실존 인물이었고, 각각 서로 다른 병법서를 저술했음을 알게 됐다. 또한 손자의 삶에 대해서 더욱 확실하고 상세한 추론이 가능해졌다.
군사가 된 손자는 수상인 오자서, 그리고 행실이 간교한 각료인 백비(부친 백비완은 원래 초나라 장수였으나 초왕에 의해 살해당하자 백비는 오나라로 도망쳤다.-역주-)와 긴밀히 협조하며 국정에 참여했다.
손자는 전면적인 전쟁을 사전에 피하기 위해 주변 국가에 첩자와 밀통자들을 심어놓았다. 그의 수중에는 적국의 동태를 감시하는 정보망이 있었던 것이다. 정세의 변화를 예측해본 결과 도저히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됐을 때, 손자는 초나라를 침공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오나라는 초나라 영토 한 지역을 점령했고 이와 더불어 오나라를 배신하고 초나라로 도망쳤던 배신자 2명도 생포했다. 이 승리로 자신이 만만해진 합려는 파죽지세 공격하여 초나라 전체를 점령하자고 주장했으나 손자는 “백성과 군사가 모두 피곤하고, 아직은 초나라가 명을 다하지 않은 바, 때가 아닙니다.”라고 간했다.
다음 해인 기원전 510년, 손자는 오군(吳軍)을 이끌고 다시 초나라를 침공하여 초나라 영토 두 지역을 탈취했다.
이듬 해에는 방향을 바꾸어 오나라 남쪽의 월(越)나라를 대패 시켰다. 일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낭와(囊瓦) 장군이 지휘하는 초나라 군사가 오나라를 침범했다. 이때 오자서 수상이 이끈 오군은 초나라에게 대승을 거두었고, 합려는 제후국 중 패자의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승리를 만끽하며 오왕 합려는 초왕(楚王)에게 최후의 따끔한 맛을 보여 주고 싶었다.
3년이 지난 어느날, 합려는 손자에게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졌다. “이전에 군사는 아직 초나라의 수도를 침공할 때가 아니라 했던 바, 지금은 시기가 어떤가?”
“초의 대장 낭와는 극히 탐욕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손자가 대답했다. “당(唐)나라와 채(蔡)나라는 모두 그를 혐오하고 있습니다. 만약 왕께서 초나라를 강하게 징벌하시기 원한다면, 먼저 이들 두 나라를 포섭해야 합니다.” 이 전략은 호수에 불을 놓는 전략이라 불리는데 이는 불과 물처럼 상극의 두 나라가 공통의 적을 징벌하기 위해 잠시 한편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합려는 이 계략을 받아들이고 손자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여 당과 채나라가 비밀리에 오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게 했다. 이렇게 하여, 오나라는 당과 채나라와 합세하여 초나라를 공격했다.
오나라의 주력 부대가 한수(漢水)를 사이에 두고 초군(楚軍)과 대치할 때, 다소 무분별하고 성질이 급한 합려의 동생(부개,夫槪 -역주-)이 휘하의 군사 5,000명을 이끌고 독단적인 판단하에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초군의 측면 부대를 공격했다. 비록 이 전투에서는 오군이 승리했으나, 이는 손자의 기습 공격 계획을 망쳐놓았고 결국 주력 부대가 초나라 수도를 함락하기까지는 다섯 차례의 대규모 전투를 승리해야 했다. 초나라 수도에 입성했을 때 초왕은 이미 도망친 후였다. 초왕을 좇아간 오군은 수(隨)나라를 포위했다.
이때 손자는 악의가 가득찬 소문을 퍼뜨렸다:
“도망친 초왕은 일찍이 그의 영토에 살고 있던 모든 주나라 후손을 죽였다.”
당시 주나라 왕손은 종교적으로 상징적인 인물이었으며, 전통의 수호자인 동시에 모든 제후국의 정신적인 지주였기에 만일 소문이 진짜라면 이는 대역죄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주의 왕손과 그 일가를 해친다는 것은 감히 생각 조차 못했던 시대였다. 수나라 사람들은 이 소문에 충격을 받고 도망쳐온 초왕을 죽이든지 또는 추격자인 오나라에 잡아 넘길지를 의논했다. 그러나, 길흉을 점친 결과 결국에는 초왕을 넘겨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러는 사이, 초나라 수도에서는 오자서가 부친과 형을 살해한,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된 평왕의 무덤을 파내어 그 시신을 300번 채찍질하여 치욕을 주었다. 이 같은 행위는 오자서의 복수에 불타는 욕구를 만족시켰겠지만, 교양과 예의 범절을 아는 사람들의 판단으로는 결코 해서는 안될 만행이었고, 따라서 정신적인 문화를 아끼는 사람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킨 행위였다.
이러한 인륜에 벗어난 행위에 대해, 오나라의 경쟁국인 진(秦)나라는 “비록 초 평왕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지만, 오나라 수상 오자서의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초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선언하고 거마(車馬) 500승과 병사들을 파견했다.
진군(秦軍)은 6개월 간의 전투 끝에 손자가 이끄는 오군을 무찔렀다.
한편, 합려는 승리감에 도취된 채 초나라의 수도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이 동안, 충동적인 성격의 동생(부개-역주-)은 비밀리에 귀국하여, 국왕의 부재를 틈타 왕위를 찬탈했다. 오왕 합려는 부랴부랴 회군하여 집안 단속에 들어갔고, 형에게 쫓긴 동생은 국외(초나라-역주-)로 도망쳤다.
수나라로 도망쳤던 초왕은 오나라 왕실의 내분을 틈타 자신의 영토로 돌아온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왕권을 회복했다. 2년이 지난 후, 손자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고 이 전략에 따라 오자서가 다시 한번 초나라를 공격했다. 오나라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역사가 사마천은 이렇게 요약했다. “손자와 오자서의 계책으로, 오(吳)나라는 서쪽으로 초(楚)를 물리치고, 북쪽으로는 제(齊)와 진(晋)을 위압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군주들은 그 속 마음을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인물들이다.
이중 특히 월왕(越王)은 예측이 전혀 불가능한 위험스러운 인물이었다. 당시의 월나라는 오늘날의 절강성과 광동성에 소재한 “야만인”들의 국가였다. 월인(越人)은 조상 대대로 온몸에 요란하게 문신을 새기고, 머리는 패션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이 아주 짧았으며, 가시나무 숲과 갈대 수풀 속에서 거칠게 살아가는 것을 좋아했다.
한마디로 미개인이라는 명성이 온 대륙에 자자했다. 월은 구천(句踐)이 왕위에 오르자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했다.
손자는 나날이 강성해지는 월을 제압하기 위해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초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이은 승전에 기고만장해진 오왕 합려는 손자의 계책을 무시했다. 합려는 신중을 기하지 않고 단지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은 서로가 미워하는 앙숙이므로 그 승패를 예측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특별한 전략도 없이 스스로 군사를 이끌어 월을 침공했다.
월나라의 최고 전략가는 범려라는 자로서 손자에게는 최고의 경쟁자였다.
사실, 범려는 가식적인 태도와 삐뚤어진 인간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오군(吳軍)이 침공하자 그는 토굴 감옥의 사형수들로 자살 부대를 편성할 것을 구상했다.
사형수들은 유가족들에게 큰 상금으로 보상한다는 범려의 제의를 받자, 어차피 죽을 목숨, 기꺼이 자살 부대에 지원했다. 오군이 공격 진열을 다듬고 있을 때 월나라의 자살 부대(敢死隊)가 나타났다.
그들은 상체를 알몸으로 들어낸 채 칼을 스스로의 목에 대고 3열 횡대로 열을 맞추어 오군 진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오군 진영 바로 앞까지 도착하자, 자살 부대의 맨 앞 열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스스로 목을 베었다.
(소리 친 내용은 ‘우리 월나라가 귀국 오나라에 큰 죄를 지었으며 나는 목숨을 버려 귀국의 용서를 구한다’는 내용임-역주-) 이어서 2열, 그리고 3 열이 차례로, 오군의 진영 앞에서 스스로 목을 베고 쓰러져갔다. 눈앞에 펼쳐진 기괴한 광경에 오군이 넋을 잃었을 때, 범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군의 측면 부대를 기습 공격하기 시작하여 결국 적군을 대파했다.
이때 오왕 합려는 월군(越軍)의 독이 묻은 화살에 손이 찔렀다. 상처는 악화되었고 결국 합려는 죽게 됐다. 임종의 침상에서 합려는 아들 부차(夫差)에게 물었다. “너는 이 아비를 죽인 구천을 잊겠느냐?”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태자는 맹세했다.
그날 밤, 합려가 사망하고 부차가 왕위를 이었다. 부차는 선왕의 수상이었던 오자서에게 그간의 공로와 자기의 왕위 계승을 도와준 대가로 오나라 영토의 절반을 하사할 뜻을 밝혔다.
오자서는 이를 대단히 감사히 여기면서 상냥하게 거절했다. 자신의 호의를 거절 당한 젊은 국왕은 감정이 상했다. 결국 오자서는 수상 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탐욕스럽고 야심에 찬 백비가 수상으로 임명됐다.
한편, 힘들었던 승리를 거둔 범려는 월왕(越王) 구천에게 이후 전쟁을 삼가할 것을 간했다. “무기는 불행을 몰고 오는 수단이며, 전쟁은 사악한 행위입니다. 지금 오(吳)와의 반목은 지극히 사소한 일입니다. 사소한 일 때문에 불행을 가져 오는 무기를 들고 사악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왕실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고 하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급하고 젊은 월왕은 이를 무시했고 결국 복수를 노리고 있었던 오나라에게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패 당했고 오히려 오군에게 쫓겨 월나라로 돌아와 포위당한 신세가 됐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구천은 범려에게 말했다. “신의 충언을 들었어야 했는데!”
훌륭한 전략가 범려는 이렇게 대답했다. “허영심을 내세우지 않는 자는 하늘이 돕고, 재난을 이겨 낸 자는 사람들이 돕고, 겸손한 자는 땅이 돕는다 했습니다. 부디 몸을 낮추시어 오나라에 공물을 보내십시오. 만약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에는 왕께서 스스로 인질이 되심이 어떠할까 합니다.” 구천은 범려의 충언에 따랐다.
이때부터 겉으로 복종하고 속으로는 치욕을 씻기 위한 복수를 준비하는 월왕의 위장 전술이 시작됐다.
공물을 가득 실은 마차가 오나라 왕실에 도착했고, 이와 동시에 월왕이 비밀리에 보낸, 특별히 귀한 선물이 백비에게 도착했다. 오나라 수상 백비는 눈이 부신 뇌물에 현혹됐고 국왕에게 월나라와의 강화를 주장했다.
이때 오자서는 오왕에게 경고했다. “월왕은 단지 시간을 벌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완전히 쳐부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경고를 무시하고 백비의 의견을 받아드려 월과 강화를 맺었다.
이후 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부차는 건방져졌고, 어리석게도 북방의 제(齊)나라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오자서는 또 다시 부차에게 경고했다.
“월왕 구천의 얼굴은 복종을 나타내고 있으나, 뒤로는 오나라에 대한 복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구천은 한 끼에 한 그릇만 먹으며 절약하고,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백성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이상한 행동은 그가 틀림없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구천은 뱃속의 병과 같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오나라는 극히 위험합니다. 이에 비해 제나라는 단지 피부병일 따름입니다. 월을 멸망시키지 않은 채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오왕이 이 말을 무시하자 오자서는 다시 한번 간했다. “다루기 어렵고 무례한 종족은 그 씨를 말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것이 상왕조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이었습니다. 부디 월나라부터 공격하시기 바랍니다.”
오자서의 계속되는 반대와 간섭에 짜증이 난 부차는 그에게 사소한 임무를 주어 궁정 밖으로 멀리 쫓아버렸다.
이때 오자서는 사신으로 제나라에 파견됐다.
오자서가 궁중을 비운 사이 백비는 그를 비방했다. “오자서는 성질이 급하고, 고집이 세며, 의심이 많은 인물로서 혹시 모반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이즈음, 적국에 파견 되었던 간첩 중 한명이 불길한 소식을 전해왔다. 오자서가 적국에 있는 친구에게 그의 아들을 맡겼으며,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보고였다.
사실, 제나라에 파견될 때 오자서는 이미 吳가 망할 것을 예상했고, 아들이 오의 멸망과 함께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귀국하기 전에 아들을 제나라의 친구 포씨(鮑氏)일가에 맡겼었다. 간첩의 보고를 들은 부차는 자신의 칼을 오자서에게 보냈다: “이 칼로 자결할 것을 명한다.”
눈앞에 닥칠 오나라의 비참한 재난을 예상하면서, 오자서는 어명에 따라 자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내 무덤에 어린 묘목을 심어라. 어린 나무가 자란 후에 기둥을 만들어 나의 해골을 걸어놓고, 그 기둥은 성벽 위에 세워라. 나는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어떻게 멸망 당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이러한 모욕을 들은 부차는 격노하여 그의 시신을 개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강물에 던지게 했다. 이후 오자서의 넋은 강물에 떠다니며 큰 풍랑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을 익사시킴으로써 부차에게 복수를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지켜본 범려는 월나라에 대한 오왕의 의심이 완전히 소멸되기까지 3년을 더 기다릴 것을 월왕에게 간했다. 이로부터 꼭 3 년째가 되는 해, 오왕이 출정 중인 틈을 이용해 월나라는 기습 공격으로 오군을 대파하고 오나라 태자를 죽였다. 이 전쟁의 결과, 부차는 월나라에게 간절하게 요청하여 양국은 다시 강화를 맺었다. 그러나 9년 후 월군(越軍)은 재차 오를 침공하여 전 영토를 정복했다. 이때 오왕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끓었다.
오· 월의 싸움은 37 년간 지속 되었다.
길고 길었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투쟁에서 최후 승리의 주역은 손자의 경쟁자인 범려였다.
그는 인간 본연의 사악한 심성을 깊이 꿰뚫어봤다. 또한 위대한 영웅이라는 칭호가 그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도 깨닫고 있었다. 승리에 따른 보상과 명예를 초연이 벗어 던지고 그는 아무도 모르게 오(吳)를 떠났다. 친구에게 남긴 편지에 그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설명했다.
“새가 잡히면 명궁도 버려진다. 꾀 많은 산토끼가 잡히면 사냥개는 탕(湯)이 된다. 야망과 욕심이 가득찬 월왕은 난세에는 좋은 반려자이나, 평안한 시대에는 같이할 인물이 아니다. 친구여, 자네도 떠나는 것이 좋겠네.”
보석과 그 밖의 재물을 꾸리고, 범려는 거룻배에 아이들과 몇몇 추종자들을 싣고 강을 건너 북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월나라에 돌아 오지 않았다. 산동반도의 제나라에 도착한 그는 무한한 적응성을 가졌다는 의미로서, 자신의 이름을 치이자피라 개명하고 해변에서 아들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의 농사법은 뛰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금과 재산을 많이 모았다.
제나라 사람들은 그의 지혜에 감동을 받아 수상으로 추대하였으나 그는 제의를 사양했다. “고귀한 신분과 위대한 명성으로 얻을 수 있는 좋은 것은 한가지도 없다.”고 말하며 축재한 재산을 친구와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몇 가지 보석만을 몸에 지니고 또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돈이 많아도 몸을 숨기기 좋은 곳을 택하여 대도시인 도(陶)에 정착했다. 이름도 주공(朱公)이라 개명하고, 일용품 매매와 가축을 사육했다.
그는 또 다시 성공하여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었다. 이제 그는, 시기 당하거나 부러움을 얻기에는 너무 연로한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평화롭게 이승을 하직할 수 있었다.
오늘날, 전세계 화교들이 운영하고 있는 상점에 들어가보면 범려의 초상화 내지는 그의 교훈이 게시되어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범려의 끝없는 적응성과 경제적인 성공을 바라는 상점 주인의 염원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범려(陶朱公)는 商人之寶라는 저술에서 상인이 지켜야 할 12개 덕목과 삼가해야 할 12개 계명을 기술했고, 화교들은 이 교훈을 집과 회사에 걸어놓는다.-역주-)
손자는 어떻게 됐을까?
사마천은 그의 일화를 더 이상 기술하지 않았으며, 또 다른 자세한 문헌도 없음으로 단지 추측만 가능할 따름이다. 오자서가 부차에 의해 자결한 것을 본 손자는 일찍 은퇴하는 것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는 아마 오나라 수도 서쪽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와 불후의 명저 손자병법 82편을 저술하고 보완하는데 남은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경쟁자 범려처럼 손자 역시 항상 베일에 싸인 신비한 인물이다. 자신을 숨겨야 한다는 철학이 손자병법 전편에 깔려있다. 자기를 드러낸다는 것은 언제든지 공격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처신인 반면에 자기를 숨기면 자기 역량의 10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한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손자는 오왕(吳王)의 허영심에 감정이 상했을 것이다. 손자병법의 내용으로 판단컨대, 손자는 오왕을 비롯하여 모든 장군들이 최후의 승리를 추구하며 전쟁을 지속하자는 주장에 반대했을 것이다. “하루의 승리가 수년의 적의를 낳는다. 그러한 장군들은 지휘관의 자격이 없으며 군주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결국 진정한 승리를 얻지 못한다.”
손자는 또한 군주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그러한 군주는 백성들의 부담이 될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했다.
최근 산동성에서 발견된 손자병법 “오문편(吳問篇)”에서, 향후 어느 제후가 진(秦)나라를 정복할 수 있겠느냐는 오왕의 질문에 대해 손자는 풍부한 인간미가 짙게 깔려있는 대답을 했다. 세금을 부당하게 징수하고, 부가 편중되었으며, 과도한 군사력을 지속하는 나라는 아니다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도에 넘치게 부유하며, 군주는 너무 거만하고, 장군들은 큰 소리만 치는, 그러면서도 모든 전쟁에서 승리 하기만을 바라는 나라는 가장 먼저 멸망할 것이다.” 이어서 손자는 부(富)와 거만 그리고 허풍을 예를 들면서 제후국들을 하나씩 설명해갔다. 이윽고 조나라 제후를 거론하면서 “태도가 겸손하며, 군사를 거의 양성하지 않고, 자신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모든 주민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통치한다. 그들은 승리를 거두고 생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손자는 이기주의적이고 소견이 좁은 제후들간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잔인한 무력 충돌은 가급적 피할 것을 권고함과 동시에 음모와 위장 전술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그는 인관 관계에 있어서의 알력을 자기의 전술로 이용해야 한다는 상식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손자의 지혜는 단지 전쟁 뿐이 아니라 외교와 사업을 포함하여 자기가 추구하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모든 노력에 적용될 수 있다. 그의 지혜대로, 고난과 손해를 가능한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음모, 예지, 그리고 각종의 권모술수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빈틈없이 짜여진 전략이 무위로 돌아 갔을 때, 그때서야 비로서 무력을 동원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때에는, 가능한 기습적으로, 아주 교묘하게 동시에 최대한 강력하게 무력을 사용하여 단시간에 완전한 승리를 낚아채야 한다.
결코 어중간한 수단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손자의 교훈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수많은 장군들, 황제를 옹립한 사람들 그리고 첩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산업과 물류의 발전 그리고 근대화된 무기를 앞세우고 단순하게 전면적인 파괴를 주창하는 군사 전략가들,
예를 들어 클라우제비츠(1780-1831,프로이센의 장군 -역자-), 몰트케(1800-1891,프로이센 군의 참모총장 -역자-) 그리고 비스마르크 장군 등에 의해서 손자의 교훈은 빛을 잃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이 준(準)군사적인 조직들과 첩자들을 많아 활용했던 것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어쩌면 나폴레옹은 젊은 장교 시절에 아미오트가 번역했던 손자병법을 읽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프랑스 예수교단이 중국에 파견했던 아미오트 수도사는 서양에서는 최초로 손자병법을 번역했고, 번역본은 나폴레옹이 청년이었던 시절에 파리에서 발행됐었다.
손자병법은 외교관, 장군, 기업가 그리고 기업체의 기획 부서에 근무하고있는 사람들의 서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이들에게 무력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한다. 손자병법은 영감을 줄 수 있는 격언들이 간교한 문체로 쓰여져 있다. 일찍이, 모택동, 호지명, 보뉴엔집과 같은 인물들도 손자병법을 공부했으며, 오늘날 아시아의 투자가들과 기업인들도 손자를 깊이 연구하고있다. 일본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사업이며, 사업은 전쟁이다.” 만약 이들의 말대로 국제 시장이 전선이라면 이에 따른 전략과 용병술이 필요할 것이다. 손자는 이에 대해 손자병법을 통해 불후의 명언을 남겼다.
이익을 주어 유인하라(利而誘之), 성나게 하여 동요시켜라.(怒而擾之)
어지럽게 하여 이득을 취해라(亂而取之), 편하면 고생스럽게 만들라(佚而勞之).
방비가 없는 곳을 공격해라(攻其無備), 알아차리지 못할 때 손을 써라(出其不意).
상대방은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되 나의 모습은 감추어라.(故形人而我無形)
그러면 너는 적의 운명을 다스릴 수 있으리다.
(저자는 Griffith and Wing의 번역본에서 발취했음-역주-)
우리는 손자병법을 통해 아시아의 정치가들과 투자가들이 국제시장에서 어떻게 서양인 경쟁자들을 혼란에 빠트리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기업체는 첩보 활동을 수행하고,
자신을 신비롭게 하여 보호하라.
인생의 모든 것이 속임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손자의 말에 따르면, 첩보 활동과 속임수 그리고 적을 당혹 시키는 모든 활동이 유연하게 운영될 때 이는 바로 음양 오행의 조화와도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손자의 주옥과도 같은 교훈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이는 손자병법이 전쟁을 주제로 한 것이며, 동양의 신비주의에 대한 서양인들의 거부감일 것이다.
손자병법은 일찍이 군사학 전문가들에 의해 번역됨에 따라서 주로 군사 용어들이 사용됐으며 이로 인해 일반인들은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만약 쉽고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된 것을 접한다면 모두들 그 내용에 깜짝 놀랄 것이다. 어쩌면 군사학의 전문가조차 손자병법의 진정한 의미를 소화하기 힘들지 모른다. 물론, 승리는 최고로 중요하다.
그러나 손자는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결코 “전장에서의 전투”가 가장 중요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백전백승하는 자는 가장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자가 가장 잘하는 사람이다.(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성을 공략하는 것은 최고의 방법이 아니며, (其下攻城)
이는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攻城之法, 爲不得已)
손자의 교훈에 따라, 만약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전에 가능한 모든 속임수와 계략을 동원하여 적의 오판을 유도하고, 적을 자극하여 화나게 만들며, 혼란에 빠지게 하라. 동시에, 우회 전략과 교섭의 방법을 비롯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손자에 대해 가장 열렬한 추종자들은 일본인이다.
그들은 대대로 손자의 교훈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우등생이었으나, 19세기 들어와서는 산업혁명에 완전히 매료됐고 이어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프로이센의 군사력에 반했다.
그 후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됨과 동시에 일본인은 클라우제비츠와 몰트케를 버리고 다시 손자를 찾았다.
한때 일본인들은 손자의 교훈을 따라서, 한방의 총알도 필요 없는, 대동아공영론을 내세웠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손자의 가르침을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들은 화교들이다. 동양과 서양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틈바구니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는 손자의 가르침이 사업 전략인 동시에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 화교들의 성공을 뒤돌아보면, 성공의 대부분은 거대한 조직과 조직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틈새로부터 이끌어낸 것이다. 거류지 국가의 반복되는 박해와 냉대 속에서 화교들은 자연적으로 몸을 숨겼고, 온갖 종류의 베일로 자기를 감싸서 외부로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했다. 이들은 몸을 숨기고 자기를 보호하는데는 전문가가 됐다. 화교들에게 있어서 주공 단(周公 旦)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원수이며 반면에 손자와 범려는 선천적인 동맹자다.
최근 들어 아시아와 서양에서는 손자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고 있다. 중국, 일본, 타이완에서는 손자에 관한 기사와 논설이 수백 편씩 쏟아지는 가운데 북경에서는 손자를 주제로 학술 세미나가 개최되고 있다. 서양에서는 5종류의 손자병법 번역본이 새로 출간됐고, 이와 함께 손자의 격언과 교훈을 사업 분야에 적용하기 위한 지침서도 쏟아지고 있다.
특히, 새롭게 급부상하고 있는 아시아 시장을 둘러싸고 서양인들은 지금까지 아시아인 경쟁자들에게 “불공정”하게 당해왔으나 이제는 손자를 통해 경쟁자들의 신비적인 행동과 이해하기 힘들었던 사업 수완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했다.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움직임, 항상 베일에 싸인 듯한 불투명성, 예술적 경지까지 도달한 카멜레온식 변신술 등, 이 모든 신비스러움이 지금까지의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문화적 장벽이었다.
그러나 이제 서양인들은 신비한 아시아에 접근하기 위한 첫발을 손자의 교훈에서 찾아냈다.
신비스러움을 더하기 위해서인지, 고대 중국의 한 문헌에는 이렇게 덧붙였다. "소주(蘇州)의 성문 밖 10리 떨어진 곳에 커다란 분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손자의 무덤이다."
[출처] 오자서(伍子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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