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부를 지지리 못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자취생활하면서 영양 부족으로 남 보다 몸이 아주 작은 몸이 되였다. 몸이 작은 것도 성격과 큰 관계 가 있다
성격까지 바꾸게 되더라 성격이 소극적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홀로 있는 것이 편한 사람이 되었다.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들었다.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남보다 키가 작아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못해 나는 이 세상에 살 필요도 없는 사람이야. 염세주의에 빠져 죽을까? 산에 들어가. 스님이 될까 생각도 한 적도 있다.
키가 작으니 친구들에게 무시당하고 키 큰 친구들은 연애도 잘하고 여자친구도 많으나 나는 친구는 고사하고 친구들에게 구타를 당하며 살았다.
내 앞자리는 내 자리다. 늘 일번 아니면 이번 그 이상은 해본 적이 없다. 공부도 못하고 또 몸도 작고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다
참으로 지옥 같은 생활이다. 사람 만나기가 싫어졌으니 말이다
나는 결혼도 할 수도 없고 연애도 할 수도 없고 세상에 살 필요도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서 집안이 가난하여 도저히 등록금 준비를 할 수도 없고. 또 나도 공부를 잘하지 못하니 내가 졸업후 가족을 부양을 책임을 져야 하니 도저히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충남대학교 건축공학과 1년 만에 중퇴하고 말았다.
매일 집에서 부모님 따라다니면서 농촌에서. 농사일을 돕고 겨울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지개로 해으나 나는 나무도 잘 하지 못한다. 남이 해가지 않는 가시나무만 해가지고 집에 오니 불 때기가 불편하기도 했다.
지게로 조금 지고 올 수밖에 없다. 그저 까치집 작은. 땔감을 준비해 집에 왔다.
그 후 친구가 교회 한 번 가지? 친구 따라 교회를 가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 중에서 찬송를 잘하는 여자를 알게 되고 몇몇 여자들도 친구들이 생겼다. 마음속으로 많이 기뻤다
그러라 나는 그들에게 가까이 할 수 없었다. 키가 작다는 이유 때문이지. 그리고 그 중에 한 사람 여자를 택해 결혼도 내가 신청 못하고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결혼했다.
처갓집은 모두 키가 커서 나도 후손을 위해 키 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지.
그 집은 6 25 사변으로 불타 가난한 생활을 하고 남의 집에서 살았다.
그분이 가난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시집보낼 집이 아니다. 인물도 좋고 또 공부도 잘하는 여자였다.
꼴지하는 나를 어떻게 남편으로 맞이할 수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행히 나는 6 35 사변 때문 결혼을 하게 되었다. 23살에 결혼하고. 그해 11월 3일 날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다
군대 가기 전에 결혼한 셈이지요. 내가 논산 훈련소 마치고 부산 수송학교로 운전교졸업 28사단 80년대 3대대 인사과에. 병력계로 3년를 마치고 집에 와서 아내와 같이 살으니 직업도 없는 남편 늘 부모님부터 무시당하고 살았다. 그러니 남들은 얼마나 더 무시를 했겠습니까?
그리고 형님에게 나 서울로 이사 간다고 하니. 형님은 사촌형과 육촌형에게 말을해 6촌형이 나를 뼘까지 때려서 도망나와 서울에 나와 남의집 국수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
일년후 도저히 혼자 살 수가 없어. 집에 들어가 용서를 구하고. 다시 작은 방 하나 부엌도없는 세방을 얻어서 잘림을 시작했다. 참으로 지옥과 같은 생활이다
형님 방아간에서 일을 해 주지만 돈은 십원도 받지 않고 살았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서울에 밭 한 떼기를 팔아 청양리 철도부지 판자집으로 이사와 솜틀을 했다.
그리고 여름에는 장사가 안 돼. 길거리에서 냉차 장사까지 하고 마눌 한 두접을 사서 생선 상자에 올려놓고 길에서 팔기도 했다.
동사무소 취로사업 하수물(또랑)치는 일을 하면 4 일하면 밀가루 한 푸대를 주어 수제비 먹고 살고 그것도 모자라 강냉이 죽먹고 살고. 수도 없어 공동수도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고 살았다. 서울 사람이 등장불 키고 살았다
그때는 청량리역 서울역 용산역에는 자동차도 별로 없고 지계 리야카꾼만 있었다. 차는 군용 짚차 추력을 개조해. 택시와 버스를 만들었다.
모두들 가난해서 시절이었다. 그리고 나는 직업이 없기 때문에 남의 집 연탄 배달원도 사정 사정해 들어가 3년간 일해 저축 연탄장사를 시작했다 여름 연탄이 안 팔려 세멘트 벽돌 장사를 하고 작은 천물 가게도 겸 했다.
50살 기운이 소진해.삼화 부동산 개업을 했다.집을10년 만에 장만했다. 23평 25평 두집 구입 삼층 집을 짓고 지하실 일층 이발소 이층은 주택 살림집으로 만들어 살기도 했다.
나는 돈 생기는대로 산꼭대기 작은 집을 사 재개발로 돈을 벌 수가 있었다.
지금도 그 집이 아파트가되여서 현재 살고 있다. 그리고 임대주택 임대료를 받아 생활을 한 셈이지요. 부동산 중개업 25년 하고 나이가 들어 할 수 없어 폐업하고 집에서 쉬고 있어 하는 일이 없으니 YouTube 유기환 방송과 컴퓨터는 부동산 할 때 사놨기 때문에 집에는 컴퓨터와 또 노래방 기구 각종 운동 기구가 있다. 운동은 매일 하고 있다.
다음카페 다음 건강하게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가 카폐지기를 30년 하고 있다.
현미식 안 하고 운동하기 전에는 변비와 피부병으로 10년간 고생을 하고 살았다 .7분도 현미식 식생활 개선 과 운동으로 완치되었다.
아들 핸드카을 타고 병원에 간 적도 있었다. 지금은
튼튼한 몸으로 KBS123년 12월 29일 쌍쌍파티출연 11월 9일은 6시내고향 출연도했다
중복댐 양해
몸이 작은 것도 성격까지 바꾸게 되더라
성격이 소극적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홀로 있는 것이 편한 사람이 되었다.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들었다.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항상 남보다 기가 없어.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못해 나는 이 세상에 살 필요도 없는 사람이야. 염세주의에 빠져 죽을까 ? 산에 들어가. 스님이 될까 생각도 한 적도 있다. 지가 작으니 친구들은 무시당하고 키 큰 친구들은 연애도 잘하고 여자친구도 많으나 나는 친구는 고사고 친구들에게 매일 같이 구타를 당하며 살았다. 내 앞자리는 내자리다. 늘이 일본 아니면이 번 산본 그 이상은 해본 적이 없다. 공부도 못하고 또 몸도 작고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다.
참으로 지옥 같은 생활이다. 사람 만나기가 싫어졌으니 말이다.
나는 결혼도 할 수도 없고 연애도 할 수도 없고 세상에 살 필요도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서 나 집안이 가난하여 도저히 등록금 준비를 할 수도 없고. 또 나도 공부를 잘하지 못하니 내가 졸업후 가족을 부양을 책임을 져야 하니 도저히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충남대학교 건축공학과 1년 만에 중퇴하고 말았다.
매일 집에서 부모님 따라다니면서 농촌에서. 농사일을 돕고 겨울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찌개로 해 나는 나무도 자라지 못한다.
남이 해가지않는 가시나무만 해가지고 집에 오니 때기가 불편하기도 했다. 지게 찌개를 조금 지고 올 수밖에 없다.
그저 까치발 까치집까지 작은. 땔감을 준비해 집에와 잘왔다.
그 후 친구가 교회 한 몰까지 가지? 가수 아세어 친구 따라 교회를 가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 중에서 찬성과를 잘하는 여자를 알게 되고 몇몇 여자들도 친구들이 생겼다. 마음속으로 많이 기뻤다
그러라 나는 그들에게 가까이 할 수 없었다. 키가 작다는 이유 때문이지. 그리고 그 중에 한 사람 여자를 택해 결혼도 내가 신청 못하고 친구의 의도으로 겨우. 결혼했다.
처갓집은 모두 키가 커서 나도 후손을 위해 키 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지. 그 집은 6254 변으로 물이 모두 다 가난한 생활을 하고 남의 집에서 살았다. 구분이 가난하지 않았다니. 나에게 시집보낼 사람이 아니다.
인물도 좋고 또 공부도 잘하는 여자였다. 꼴지하는 나를 어떻게 남편으로 맞이할 수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행히 유교 사교로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23살에 결혼하고. 그해 11월 3일 날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다.
군대 가기 전에 결혼한 셈이지요. 내가 논산 훈련소 이따가 부산 서송학교로 갔어. 운전 휴고 28 80년대 3대 대 인사과에. 경력계로 경우 산유를 마치고 집에 와서 아내와 같이 살으니 직업도 없는 남편 늘 부모님부터 무시당하고 살았다. 그러니 남들은 얼마나 더 무시를 했겠습니까?
그리고 형님에게 나 서울로 이사 간다고 하니. 형님은 사촌형과 육촌형에게 그말을해 나를 뼘까지 때리면서 도망나와 서울에 나와 남의집 국수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
일년후 도저히 혼자 살 수가 없어. 집에 들어가 영서를 구하고. 다시 작은 방 하나를 부엌도는 방어를 얻어서 잘림을 시작했다. 참으로 지옥과 같은 생활계 형님 파악하는 거한테 일을 해주지만 돈은 십원도 받지 않고 살았기 그 후 몇 년이 지나 서울에 밭 떼기를 팔아 청양리 철도부지 반지으로 이사와 솜털을 했다 숨 드는 기계를 있는 집이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장사가 안 돼. 길거리에서 내 차 장사까지 하고 마눌 한두접을 사전 생선 길에다 올려놓고 팔아이기도 했다. 동사무소 치료 사업 또랑 동물 치는 일을 화면 사이에는 밀가루 한 무대를 대구 바다 먹고 살고 그것도 모자라 강냉이 바보래 먹고 살아. 경기도 수소도 없어 공동수도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고 살았다.
서울 사람이 등장불 키고 살았다니 그때는 청량리역 서울역 용산역에는 자동차도 별로 없고 지혜 군악 같군만 있었다. 잘하는 곳이라고는 군용집차전화 추력을 개조해. 택시와 버스를 만들었다. 모두들 가난해서 기절이었다.
그리고 라는 직업이 없기 때문에 남의 이제 위탄 배달도 사정사정해 들어가 싼 보호 자기 배 연탄장사를 시작해 열흘 연탄이 안 팔려 세멘트 물에 벽돌 장사를 하고 작은 천물 가게도 겸소했다.,
50살이 되어 기운이 소진해. 3화 부동산 개업을 했다. 지원 10년 만에 장문했다. 23평 25평 두지볼 때 삼척 집을 짓고 GRN 이발소 주택 2층 점포를 꾸리고 2층 살림집으로 만들어 살기도 했다. 나는 돈 생기는대로 산꼭대기 작은 집을 사러와 제가 브리오다는 돈을 벌 수가 있었다.
지금도 그 집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임대주택 임대료를 받아 생활을 하고 있다 아빠 두 알제 1번 가구 셋째를 가지고 살고 있다 여우 생활을 한 셈이지요. 부동산 중개업 25년 하고 난 후. 나이가 들어 할 수 없어 개업하고 집에서 쉬고 있어 하는 일이 없으니 YouTube 방송과 컴퓨터는 부동산 쇼크 할 때 사놨기 때문에 집에는 컴퓨터와 또 노래방 기구 각종 운동 기어가 있다. 운동은 매일 전원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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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기 전에는 변비와 피부병으로 10년간 고생을 하고 산지도 있다. 실생활 개선 현미식과 운동으로 완치되었다. 아들 핸드폰
을 따고 병원에 가지 적도 있었다.
지금은 튼튼한 몸으로 작년 12월 29일 상상파트에 나가고 TV 1월 2몸이 작은 것도 성격과 큰.
성격까지 바꾸게 되더라 성격이 소극적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홀로 있는 것이 편한 사람이 일이었다.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들었다.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항상 남보다 기가 있어.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못해 나는이 세상에 살 필요도 없는 사람이야. 염세주의에 빠져 죽을까 산에 들어가. 스님이 될까 생각도 한 적도 있다. 지가 작으니 친구들은 무시당하고 키 큰 친구들은 연애도 잘하고 여자친구도 많으나 나는 친구는 고사고 친구들에게 매일 같이 구타를 당하며 살았다.
내 앞자리는 내자리다. 늘이 일본 아니면이 번 산본 그 이상은 해본 적이 없다. 공부도 못하고 또 몸도 작고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다
참으로 지옥 같은 생활이다. 사람 만나기가 싫어졌으니 말이다
나는 결혼도 할 수도 없고 연애도 할 수도 없고 세상에 살 필요도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서 나 집안이 가난하여 도저히 등록금 준비를 할 수도 없고. 또 나도 공부를 잘하지 못하니 내가 졸업후 가족을 부양을 책임을 져야 하니 도저히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충남대학교 건축공학과 1년 만에 중퇴하고 말았다. 매일 집에서 부모님 따라다니면서 농촌에서. 농사일을 돕고 겨울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찌개로 해 나는 나무도 자라지 못한다. 남이 해가지않는 가시나무만 해가지고 집에 오니 때기가 불편하기도 했다.
지게 찌개를 조금 지고 올 수밖에 없다. 그저 까치발 까치집까지 작은. 땔감을 준비해 집에와 잘왔다. 그 후 친구가 교회 한 몰까지 가지? 가수 아세어 친구 따라 교회를 가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 중에서 찬성과를 잘하는 여자를 알게 되고 몇몇 여자들도 친구들이 생겼다. 마음속으로 많이 기뻤다 그러라 나는 그들에게 가까이 할 수 없었다. 키가 작다는 이유 때문이지. 그리고 그 중에 한 사람 여자를 택해 결혼도 내가 신청 못하고 친구의 의도으로 겨우. 결혼했다처갓
처갓집은 모두 키가 커서 나도 후손을 위해 키 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지. 그 집은 6254 변으로 물이 모두 다 가난한 생활을 하고 남의 집에서 살았다. 구분이 가난하지 않았다니. 나에게 시집보낼 사람이 아니다.
인물도 좋고 또 공부도 잘하는 여자였다. 꼴지하는 나를 어떻게 남편으로 맞이할 수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행히 6 25교로변으로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23살에 결혼하고. 그해 11월 3일 날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다
군대 가기 전에 결혼한 셈이지요. 내가 논산 훈련소 이따가 부산 서송학교로 갔어. 운전 휴고 28 80년대 3대 대 인사과에. 경력계로 경우 산유를 마치고 집에 와서 아내와 같이 살으니 직업도 없는 남편 늘 부모님부터 무시당하고 살았다. 그러니 남들은 얼마나 더 무시를 했겠습니까
그리고 형님에게 나 서울로 이사 간다고 하니. 형님은 사촌형과 육촌형에게 그만하라고 6000명이 나의 나를 뼘까지 때리면서 부탁을 해서 도망나와 서울에 나와 남의집 국수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 이연희랑 도저히 혼자 살 수가 없어. 집에 들어가 영서를 구하고. 다시 작은 방 하나를 부엌도는 방어를 얻어서 잘림을 시작했다.
참으로 지옥과 같은 생활계 형님 파악하는 거한테 일을 해주지만 돈은 십원도 받지 않고 살았기 그 후 몇 년이 지나 서울에 밭 떼기를 팔아 청양리 철도부지 반지으로 이사와 솜털을 했다 숨 드는 기계를 있는 집이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장사가 안 돼. 길거리에서 내 차 장사까지 하고 마눌 한두접을 사전 생선 길에다 올려놓고 팔아이기도 했다.
동사무소 치료 사업 또랑 동물 치는 일을 화면 사이에는 밀가루 한 무대를 대구 바다 먹고 살고 그것도 모자라 강냉이 바보래 먹고 살아. 경기도 수소도 없어 공동수도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고 살았다. 서울 사람이 등장불 키고 살았다니 그때는 청량리역 서울역 용산역에는 자동차도 별로 없고 지혜 군악 같군만 있었다. 잘하는 곳이라고는 군용집차전화 추력을 개조해. 택시와 버스를 만들었다.
모두들 가난해서 기절이었다. 그리고 라는 직업이 없기 때문에 남의 이제 위탄 배달도 사정사정해 들어가 싼 보호 자기 배 연탄장사를 시작해 열흘 연탄이 안 팔려 세멘트 물에 벽돌 장사를 하고 작은 천물 가게도 겸소했다. 50살이 되어 기운이 소진해. 3화 부동산 개업을 했다. 집을 10년 만에 장만 했다
두 번째는 2년에 한 채씩 10년간 5채 매수 했다.
. 23평 25평 두 집을 매입 삼층 집을 짓고 이발소 주택 2층 점포를 2층 살림집으로 만들어 살기도 했다.
나는 돈생기는 대로 산꼭대기 작은 집을 사 수리해 돈을 벌 수가 있었다. 지금도 그 집이 재 개발로 아파트가 되여서 살고 있다. 그리고 임대주택 임대료를 받아 생활을 하고 있다
아파트 한 채 단독주택 셋채 임대로를 받아 살고 여우 있는 생활을 한 셈이지요. 부동산 중개업 25년 하고 난 후. 나이가 들어 할 수 없어 폐업하고 집에서 쉬고 있어 하는 일이 없으니 YouTube 방송과 컴퓨터는 부동산 할 때 사놨기 때문에 집에는 컴퓨터와 또 노래방 기구 각종 운동 기어가 있다.
운동은 매일 하고 있다 운동하기 전에는 변비와 피부병으로 10년간 고생을 하고 산지도 있다.
실생활 개선 현미식과 운동으로 완치되었다 아들 핸드카을 타고 병원에 간 적도 있었다. 지금은 튼튼한 몸으로 작년 12월 29일 쌍쌍파티에 나가고 11월 29일은 11월 9일 날은 6시 내 고향에 출0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