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대인 디아스포라
AD 1세기의 그리스인 역사학자 스트라보(Strabo)는 '모든 나라로 유대인이 스며들어, 지상에 유대인이 없는 곳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이 본국인 팔레스타인 보다 디아스포라에 더 많이 살게 된 역사적인 정황이 있다. 우선 BC. 723년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이어서 주전 588년 남 왕국 유다가 멸망하여 많은 유대인이 메소포타미아 지역 도처로 강제 이주 당하였다. 그리고 이집트로도 이주하였다. 페르샤 시대에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졌지만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로 남았다. AD 1세기를 전후한 유대인 인구는 학자들에 따라 주장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방인에서 유대인으로 개종한 인구를 300만을 포함해서 전체를 대략 800만 정도로 추산한다.
100만 정도의 파르티아 왕국(바벨론)에 거주하던 유대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700만이 로마 제국내의 유대인이다. 이는 로마 제국 내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것이다. 700만 중 250만 명이 유대인의 본토인 팔레스타인에 살았고, 나머지는 이집트 100만, 소아시아와 시리아 100만, 이탈리아 반도 10만, 로마시 5만, 그리고 나머지는 지중해 해안가의 도시를 중심으로 흩어져 살았다. 로마 세계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중심지를 셋만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인구의 40%가 유대인이었던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 로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이방인과는 달리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이라고 불리는 이방인들이 있다(행 16:14; 18:7 등). 유대교의 율법을 배우고 유대인의 일부 의식은 준수하지만 결정적으로 유대 민족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이런 이방인의 수가 얼마인지는 가늠하기가 어렵지만 개종하여 유대인이 된 숫자를 감안하면 그 수가 그리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디아스포라'(diaspora)는 '분산'이란 뜻인데, 신앙적, 경재작 정치적 이유 등으로 고향에서 타지로 이주한 자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이들은 '흩어진 나그네'(벧전 1:1)로 부르는데, 이들은 영원한 고향인 천국을 사모하며 이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1. 디아스포라의 역사
디아스포라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각각 멸망 당했을 때 처음 발생했다. 이때 앗수르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도 있었지만 주변 나라로 도피한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디아스포라는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기가 끝나고 귀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디아스포라는 대개 아시아 지역에 국한되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디아스포라의 범위는 넓어졌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제(B.C 336-323년)는 BC. 332년경 애굽에 알렉산드리아 시를 건설하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그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 이주한 유대인들이 10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 유대인들을 박해하여 마카비 혁명을 촉발시켰던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44는 B.C. 170년경 유대인 2천 세대를 소아시아의 리디아, 브루기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또 1세기 후 예루살렘을 점령한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B.C. 63년경 수많은 유대인 포로들을 로마로 이주시켰다. 바울 당시 로마 교회의 구성원 중에는 이들 이주민의 자손들이 끼어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신약시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거주지와 숫자
사도행전 2장에는 흩어진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나라들이 소개된다.
① 메소보다미아 지방의 바대, 메대, 엘람. 이 지역 유대인들은 AD. 6세기경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편찬할 정도로 유대의 신앙 규범과 전통에 충실한 공동체를 형성했다.
② 소아시아 지방의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 지역에는 31개 유대인 공동체 부락이 있었다.
③ 애굽의 구레네
④ 로마
⑤ 지중해상의 섬 그레데
⑥ 아라비아 등이다.
이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숫자는 로마 4만을 비롯, 로마 제국 전역에 400만(소아시아 100만, 아가야 마게도냐 지방 100만, 바벨론 지역 100만, 알렉산드리아 애굽 지역 100만 등) 명으로 추정된다.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의 상황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은 그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를 접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제 이 질문에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적용해 볼 시점이다. 나는 신약시대 헬라파 유대인과 19세기의 해방된 유대인 간에는 광범위한 정황적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개혁파 유대교 운동과 유사한 무언가가 헬라파 유대인에게 매력 있게 다가갔을 것이라도 짐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을 수적으로 크게 압도했음을 명심하는 것이다. 존슨(1976)은 팔레스타인에는 1백 만 명의 유대인이 살았고 국외에는 4백만 명이 살았다고 제시한다. 믹스(1983)는 디아스포라 인구를 5-6백만 명으로 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헬라파 유대인은 주로 도시인이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국외의 초기 기독교인들도 주로 도시인이었다(믹스 1983). 마지막으로 헬라파 유대인은 빈곤한 비주류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 세기에 걸쳐 경제적인 기회를 찾아 팔레스타인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1세기에는 알렉산드라아와 같은 주요 거점 도시에 대규모의 유대인 지역 사회가 있었고, 이들이 부유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였다. 유대인은 제국의 주요 거점지역 내에 부유하고 인구도 많은 도시 공동체를 세워 디아스포라의 삶에 적응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적응 방식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유대교에 대해 매우 주변적인 존재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이미 이들의 히브리어 구사 능력은 토라를 헬라어로 번역해야 할 정도로 형편 없었다(그린스푼 1989). 번역 과정에서 헬라어뿐 아니라 헬레니즘의 관점도 70인역 성서 속으로 잠입했다. 그 결과 출애굽기 22:28은 “너는 신들을(the gods) 모독하지 말지니라”(한글 개역개정에는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로 되어 있다)로 옮겨졌다. 뢰첼(1985)은 이것이 이교도와의 절충을 모색하는 제스처라고 해석한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 팔레스타인을 벗어난 유대인들은 헬라어로 쓰고 말하고 생각하고 예배했다. 로마의 유대인 카타콤에서 발견된 새김 문자 가운데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2퍼센트 미만이었던 반면, 헬라어는 74%였고 나머지는 라틴어였다(피네건 1992:325-326). 디아스포라의 많은 유대인이 헬라식 이름을 가졌고 헬라 계몽주의의 상당 부분을 문화적 관념 속으로 포용했다. 이것은 마치 해방된 유대인들이 18세기의 계몽주의에 반응한 것과 같은 형국이다. 더욱이 많은 헬라파 유대인은 이교 사상의 여러 요소를 부분적으로 포용했다. 간략히 말하자면, 헬라파 유대인 가운데 다수는 이미 민족적 의미에서는 유대인이 아니고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유대인인 상태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또 헬라인인 것도 아니었다. 유대교를 율법에 내재된 민족적 정체성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은 1세기나 19세기나 동일하게 유대인을 철저히 구별시켰고, 유대인이 일반 시민의 삶 속으로 온전히 녹아드는 것을 저해했다(헹겔 1975). 양(兩) 시대 모두에서 유대인은 사회적 주변성이라는 불안정하고 불편한 여건에 놓여 있었다. 체리코버가 피력했듯이, 헬라파 유대인은 헬라인들 속에 살며 헬라 문화를 포용했지만 동시에 “영적인 게토에 갇혀 ‘야만인’의 한 부류로 인식”되는 것에 모멸감을 느꼈다. 그는 “유대인이 유대인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헬라의 선택받은 사회”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도록 “어떤 절충과 통합”이 시급히 요구됐다고 지적했다.
‘하나님 경외자들’(God-Fearers)을 보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민족적 정체성 강요로 인해 겪는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유대교는 오랜 세월 동안 이방인 ‘길동무’를 끌어들였는데, 그들은 유대인의 도덕적 가르침과 유일신 사상에서 많은 지적(知的) 만족을 얻으면서도 율법을 준수하는 최종 단계까지는 가지 않으려 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 경외자’라고 칭했다. 율법에 대해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불만이 있던 헬라파 유대인에게 ‘하나님 경외자들’은 매우 매력적인 모델로 다가왔을 공산이 크다. 이것은 완전히 헬라화 된 유대교였으며, 랍비 홀드하임은 아마도 ‘하나님 경외자들’이 추구한 유대교가 변화된 삶의 상황과 여건에 적합한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경외자들’은 운동은 아니었던 반면 기독교는 운동이었다.
사도들이 공의회에서 개종자에게 율법 준수를 강요하지 않기로 결의했을 때, 그들은 민족 정체성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종교를 창출했다. 전승에 의하면 율법과 분리한 후 거둔 첫 결실은 이방인 선교가 급속도로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리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 분리 결정으로부터 누가 가장 큰 최초의 유익을 얻었을까? 실제로 어떤 집단이 앞에서 개괄한 사회학적 명제들을 가장 잘 충족시키는 이들일까?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의 관계
종교적인 관계
팔레스타인은 유대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예루살렘의 성전은 그들의 심장과도 같다.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예루살렘의 관계는 일년 세 차례의 성전순례와 성전에 바치는 제물을 가져오는 것에서 알 수있다. 제1 성전시대와 제2 성전시대 초기만 해도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성전순례와 반 세켈의 성전세에 대한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초의 증거는 로마시대 초기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성전이 파괴되기 전 그리고 파괴된 후 얼마동안도 이집트에는 오니아스가 세운 성전이 있었으나 오니아스의 성전은 주변의 지역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고 이집트 전체 유대인을 위한 종교 중심지의 역할조차 하지 못하였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회당이 있었지만 모든 희생 제사는 예루살렘에서만 드릴 수 있었다. 아켈라오 통치시에 이스라엘 밖에서 많은 유대인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였다고 요세푸스는 말하고 있다(고대사 17.214). 이러한 종교 절기에 많은 유대인이 모이면 자연히 헤롯 가문이나 로마 통치자에 대한 반감 때문에 소요가 일어나곤 했다.
요세푸스는 많은 바벨론 유대인의 순례와 헌물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대사 18. 311-313). 바벨론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은 네아르다와 니시비스라고 하는 두 도시에서 헌물을 모은 다음 정해진 때에 예루살렘으로 가져온다. 노상 강도의 위험에서 이 헌물을 안전하게 예루살렘으로 수송하기 위해서는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다.
안전하게 헌물을 예루살렘까지 운반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였다. 헤롯 대왕은 골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강도들 때문에 이 지역에 지키기 위해 그곳에 유대인 거주지를 만들었다(고대사 17.26-27).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을 뿐만 아니라 헤롯 대왕의 요청에 따라 이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집과 생업을 지켜야 했는데 헤롯 대왕이 그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했기에 바벨론의 유대인은 안전하게 예루살렘으로 올 수가 있었다.
요세푸스는 소아시아 지역에서도 유대인 공동체가 헌물을 예루살렘으로 가져 왔다고 증거하고 있다. 코스(Cos)에는 유대인 소유의 800 달란트가 있었으나,미트리다테스(Mithridathes)는 코스(Cos)로 사람을 보내어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모아 놓은 돈과 유대인 소유의 800 달란트를 빼앗았다. 이 돈은 미트리다테스를 두려워하여 아시아의 유대인이 코스로 옮긴 돈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강한 요새와 성전이 있는 유대의 유대인이 돈을 코스로 보낼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은 미트리다테스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들이 보냈을 리도 없다(고대사 14.112-3). 이상은 요세푸스가 스트라보(Strabo)를 인용한 말로 소아시아에는 유대인이 성전에 보내기 위해 모은 거룩한 돈이 있었다. 주전 62 년 소아시아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내는 돈을 탈취했다는 혐의로 로마의 총독 플라쿠스(Lucius Valerius Flaccus)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플라쿠스의 변호를 맡은 키케로(Cicero)의 '플라쿠스를 위하여'라는 그의 연설은 상당한 액수의 돈이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보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소아시아와 키레네에 있던 헬라인은 그 지역의 돈이 예루살렘에 유출되는 것을 반대했다(고대사 16.160). 그러나 유대인은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 황제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호소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유대인의 편을 들어주어 예루살렘으로 돈이 운반되는데 어려움이 없게 하라는 칙령을 내렸다(고대사 16.163).
말쿠스 아그립바는 에베소시의 행정관에게 편지를 보내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돈을 보낼수 있도록 안전하게 지켜 줄 것과 누구든지 이 돈을 훔친 후에 신전으로 도망하는 자는 잡아서 유대인에게 넘겨 줄 것을 분명하게 알렸다(고대사 16. 167-168).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헌물을 예루살렘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로마의 중재가 필요했다(고대사 16.169-170). 이스라엘밖에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팔레스타인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른 것으로 보인다. 주변의 이웃들과 냉담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였다.
수리아의 경건한 유대인은 이방인의 기름을 사용하기보다는 유대에서 생산되는 순결한 기름을 사용하고 싶어했다(전쟁사 2.591-2). 율법을 지키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열심은 이스라엘과 기름, 포도주 등의 무역 거래를 발전시켰다.
또 다른 관계성은 디아스포라 제사장을 통해 유지되었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가계(家系)가 정통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제사장 부인의 가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예루살렘에 알렸다(반박문 1.33). 이것은 제사장 가문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한 증거이다. 그러나 헤롯 대왕은 적격 여부를 따지지 않은 채 디아스포라의 보잘것없는 제사장 가문에서 대제사장을 임명하였다(고대사 15.22).
정치적인 관계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유대인은 긴밀한 정치 관계를 맺고 있기도 했다. 야나이 대왕 때에 좋은 예가 있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3세는 켈키아스와 아나니아라는 유대인을 사령관으로 한 군대를 거느리고 그녀의 아들과 패권 싸움을 했다. 아나니아는 클레오파트라의 측근이 야나이를 공격하자고 부추길 때 만일 야나이를 공격하면 모든 유대인이 그들의 적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여 야나이와 클레오파트라간의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전쟁사 13.354).
이집트 유대인의 유대에 대한 충성은 힐카누스 2세 때에도 볼 수 있다. 힐카누스 2세는 가비니우스와 율리우스 황제 통치 중에 이집트 유대인이 로마군을 돕도록 부탁했으며 이때에 각각 이집트 유대인은 이 부탁을 받아들여 로마군이 이집트에 진군하는 것을 도왔다(전쟁사 1.175, 고대사 14.99, 전쟁사 1.190, 고대사 14.131). 율리우스 황제가 이집트 원정을 하려 하자 그 길을 가로막은 이집트 유대인에게 안티파테르는 이들을 설득하여 로마군을 돕도록 했는데, 대제사장 힐카누스 2세가 이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설득력을 발휘하였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비록 팔레스타인밖에 살고 있었으나 때때로 팔레스타인의 정치 상황을 간섭하기도 했다. 헤롯 아켈라오가 로마 황제의 인가를 받기 위해 로마로 건너갔을 때에 유대인의 대표 50 여명이 로마로 가서 아켈라오의 잔인성을 폭로하며 황제에게 그를 고소하였다. 유대의 대표들은 헤롯 가문의 통치보다는 차라리 수리아의 속국이 되는 것을 택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때에 로마에 거주하던 8천 명 이상의 유대인들은 이 대표단을 지지하였다(전쟁사 2.80).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어려움에 처할 때에는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들을 도우려는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대제사장 힐카누스 2세는 아시아의 총독인 돌라벨라에게 사신을 보내 유대인을 병역의 의무에서 면제해 줄 것과 조상의 율법대로 살게 해 달라는 청을 하였으며 이 부탁은 곧 받아들여졌다(고대사 14.223-224).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유대의 지도자를 존경했다. 비록 힐카누스 2세가 포로의 몸으로 바벨론에 갔으나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를 대제사장과 왕으로 받들고 극진하게 대우하였다(고대사 15.15-17). 아버지 헤롯 대왕의 손에 죽임을 당한 알렉산더가 사실은 살아 있다며 알렉산더를 자처하는 거짓 알렉산더가 나타났을 때에 크레테와 멜로스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그를 진짜로 믿고 환대 하였다(전쟁사 2.101-105). 물론 알렉산더의 어머니가 하스몬가의 마지막 왕녀인 미리암이었기에 알렉산더가 헤롯의 아들이라는 이유보다는 하스몬 가문에 대한 존경 때문에 더욱 그를 따랐다.
헤롯가문과 디아스포라
헤롯 대왕은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에게는 선정을 베풀지 못하였으나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권익을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종교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맺은 친분 관계를 십분 이용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하곤 했다. 헤롯 대왕이 소아시아를 방문중인 말쿠스 아그립바와 함께 이오니아에 있을 때에 주변 헬라인에게 시달림을 당하던 유대인들이 헤롯에게 찾아와 그들의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헤롯은 말쿠스 아그립바에게 유대인들의 처지를 알리고 헤롯에 대한 말쿠스 아그립바의 우정 덕분으로 유대인들은 권익을 보장받게 되었다(고대사 16.27-29). 헤롯은 귀국 후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에게 이오니아 유대인의 유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고대사 16.62-65).
도리스 사람이 유대인의 회당 안에 황제의 상을 만들어서 유대인의 종교적인 감정을 상하게 하자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수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Publius Petronius)를 찾아가 도리스 사람을 고소함으로 사건을 진정시켰다(고대사 19. 300-310). 잠시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분쟁이 생겨 황제에게 고소하는 일이 발생하자 황후 아그리피나에게 호소하여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의 편을 들어주도록 노력하였다(고대사 20.134-136).
결혼을 통한 관계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개인적인 관계는 결혼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결혼은 상류층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 성전 순례는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이 만날 수 있는 아주 자연스러운 기회를 제공해 준다. 결혼을 목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다른 지역을 방문하기도 한다. 톨레미 시대에 세금 징수원 요셉 벤 토비야의 이야기가 이에 해당한다. 요셉 벤 토비아의 형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귀족 청년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요셉과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고대사 12.187-189). 연회석에서 미모의 무희에게 반한 요셉은 형에게 그녀를 취할 수 있는 길을 좀 알려 달라고 부탁하고, 요셉의 형은 이방 여인 대신 자신의 딸을 들여보냄으로 결국 그 딸은 알렉산드리아 청년이 아닌 요셉과 결혼을 하게 된다.
헤롯가문과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의 결혼은 빈번하게 발생했다. 헤롯 대왕 자신이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제사장 비투스의 딸 미리암과 결혼을 한다(고대사 15.320-322). 이 결혼 후에 헤롯은 비투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는데 인척 관계 때문에 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는 구실을 댈 수도 있겠지만 다른 제사장을 견제하기 위한 헤롯의 계략이었다. 헤롯 대왕은 또한 카프리스의 귀족 출신 유대인과도 관계를 발전시켰다. 헤롯의 형제인 파사엘의 딸 알렉산드라는 카프리스 유대인인 티마이우스에게 시집을 갔다(고대사 18.131). 헤롯 가문의 후손들은 좋은 가문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결혼을 했다. 아그립바 왕의 두 딸 베르니키(버니게)와 미리암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존경받는 유대인과 결혼을 했다(고대사 19.276). 베르니키는 알렉산드라의 유대인 행정관인 알렉산더의 아들인 말쿠스에게, 미리암은 가문으로 보다 재산으로 보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중에서 으뜸가는 데메트리우스(고대사 20.147)와 결혼을 했다. 요세푸스 자신도 디아스포라 출신의 두 여인과 결혼했는데, 한 여인은 알레산드리아 출신이며 다른 여인은 크레테출신이었다(자서전 75-76). 결혼을 통한 관계는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지속적인 것이다. 랍비 문헌을 통해 볼 때에 이러한 현상은 아주 널리 퍼져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종교 생활과 주변에 미친 영향
안식일과 명절의 준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종교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로마는 유대인들이 고유한 조상들의 법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특별한 허락을 내리곤 했다(고대사 14.241,258,263). 안식일에 유대인이 법정에 출두할 필요가 있을 때에 유대인들은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에 출두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별한 허락이 내려졌다(고대사 16.163,168). 유대인이 사는 도시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바울은 소아시아의 전도 여행 중에 여러 곳에 있는 회당을 방문했다(비시디아 안디옥 -행 13:14, 이고니온 -행 14:1, 빌립보 - 행 16:13, 데살로니가 - 행 17:1, 베뢰아 - 행 17:10, 아덴 - 행 17:17 ).
유대인들은 주변의 헬라인에 동화되지 않고 그들 조상의 율법에 따라 사는 생활을 지켜 나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의 종교 생활은 주변에 있던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도록 큰 영향력을 미쳤다.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팔레스타인과 지역적으로 인접해 있던 수리아에는 많은 헬라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였다. 이들은 유대인 단체의 일부분이 되기도 했다. (전쟁사 2.463, 7.45)
수리아의 다메섹 주민들이 유대인을 살해할 계획을 꾸밀 때에 그들은 이 사실을 부인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인들 중에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전쟁사 2.560-1).
로마에는 귀족 중에도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대교를 믿는 로마의 귀부인 풀비아는 자주색 옷감과 금을 예루살렘 성전에 보내려고 했는데 이것을 이용해 네명의 유대인이 헌물을 받아서 가로채는 사기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고대사 18.3.5)
이방인 중에는 유대인과 결혼하기 위해 개종을 하기도 했다. 에메사의 왕 아시수스는 아그립바 2세의 누이 드루실라와 결혼하기 위하여 할례를 받았고, 길리기아의 왕 폴레모는 아그립바 2세의 다른 누이 베르니키와 결혼하기 위하여 할례를 받았다(고대사 20.139-141,145-146).
요세푸스가 기록한 가장 극적이고 영향력 있는 이방인의 개종은 이자테스와 헬라나 여왕에 관한 것이다(고대사 20.17-53). 아디아베네(Adiabene)의 왕 모노바주스는 그의 누이 헬레나와 결혼하여 이자테스라는 아들을 낳는다. 이자테스는 이복형제들의 미움을 피하여 페르시안 만의 카락크 스파시누라는 곳으로 보내져서 부왕이 죽을 때까지(주후 36년)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이자테스는 그곳에서 유대 상인인 하나니아에 의해 유대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바로 이때에 헬레나도 유대교로 개종을 한다. 아디아베네에 돌아와 왕이 된 이자테스는 유대교를 지킬 뿐만 아니라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감사제를 드리려할 즈음에 예루살렘 주민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예루살렘에 식량을 공급했다. 예루살렘에는 헬레나의 왕궁이 있었으며(전쟁사 5.253) 그녀의 유골은 예루살렘에 묻혔다(고대사 20.95).
예루살렘에는 이자테스 왕의 친척인 그라프테가 세운 왕궁도 있었다(전쟁사 4.568). 이자테스 가문의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는 이후에도 지속되어 대 반란 중에는 모노바주스왕(이자테스의 형)의 친척이었던 모노바주스와 케네데우스가 유대인의 편에서 로마와 전쟁을 하다가 전사하였다(전쟁사 2.520).
아디아베네 왕의 개종이 순수한 종교적 열성 때문이었을까? 메소포타미아에는 확고한 기반을 가진 나라가 존속하지 못했다. 주변의 불안한 정세 속에서 비록 유대인이 소수 민족이기는 하지만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의 영향력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어서 상호 협력을 얻기 위한 정치적 요인도 개종의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이방인 통치자가 개종할 정도로 유대인은 영향력이 있었으며 이 사실을 로마의 독자들에게 알리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