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포늪에서/정 숙
어느 날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흐르는 물은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을,
푸우욱 썩어 늪이 되어 깊이 깨달아야 겨우
작은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으리라
퍼뜩 생각났던 것이다
사오천 만 년 전 낙동강 한 줄기가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분명히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제 속에 썩혀서 어느 세월엔가
연꽃 한 송이 꽃피울 꿈을 꾸었던 것이다
조상의, 조상의 뿌리를 간직하려고
원시의 빗방울은 물이 되고
그 물 다시 빗방울 되어 떨어져 물결 따라
흘러가기를 거부한 늪은, 말없이
흘러가기를 재촉하는 쌀쌀맞은 세월에
한 번 오지게 맞서 볼 작정을 했던 것이다
때론 갈마바람 따라 훨훨 세상과 어울리고저
깊이 가라앉아 안슬픈 긴긴 밤이었지만
세월을 가두고
마음을 오직 한 곳으로 모아
끈질긴 가시들을 뿌리치고, 기어이 뚫어
오바사바 세월들이 썩은 진흙 구덩이에서 기어이
사랑홉는 가시연꽃 한 송이 피워내고 만 것이다
<해설> 2002년 시집 [위기의 꽃]에 수록된 시이다.
* 왜?/정 숙, 한국낭송문학회 - 작가의 글이다.
친정 가는 길 자인 계정 숲 앞 새못엔 연꽃들이 한 여름 대낮의 관능경을 펼치고 있다. 실한 연밥을 얻기 위한 연蓮들이 처용무를 추는 한 귀퉁이 한 장군의 말 무덤은 여전히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침묵한다. 초등시절 옥란이와 화해하던 못 둑엔 수줍은 편지 사연들이 사금파리처럼 빛나고 있다.
저 아름다운 꽃들을 두고 하필 왜 가시연꽃을 찾는가? 올해도 우포늪은 가시투성이 몸, 류관순 언니 같은 가시연을 잘 꽃피우고 있을까? 시인이 된 뒤 처음 가 본 우포늪엔 대지의 여신인가? 치마폭 한 없이 넓은 여자가 버티고 앉아 있었다. 잘 흘러가던 낙동강 한 줄기가 왜 늪이 되었을까?
아하! 흐르는 물은 꽃을 피울 수 없으니까 꽃 한 송이 피워보자고 넓고 넓은 바다로 가는 꿈을 멈춘 것이다. 무릎을 치면서 “어느 날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생각 없이/아무 생각 없이 그저 흐르는 물은/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을/” ‘우포늪에서’란 초고 몇 줄 쓰고는 좋아했던 그 시절 사십대, 모든 감각이 다 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펄펄 뛰고 있으니.
어쨌거나 그 당시 늪에서 바람 따라 흘러 다니기보다 오로지 감동적인 시 한편을 얻기 위해 몸과 마음을 집중하겠다는 시인의 각오와 자세를 보았던 것이다. 사대가, 삼대가 한 집에서 살아야하는 필자의 운명을 변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련한 맏며느리를 시인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신 시어머님께 늘 감사드린다. 딸이 소설가 되길 비는 아버지의 기대가 무거워 현모양처가 되겠다며 시집이란 늪에 안주하려했으니, 아버지 생전에 시인의 모습 보여드리지 못하고 그 생속 많이 썩혀드린 것 날마다 죄송스럽다.
다시 새못을 바라보니 진흙탕 속에서 고운 꽃송이 받쳐 들고 있는 연들이 보살님으로 보인다. 왜? 저렇게 서 있을까? 곧 사라질 목숨 햇살에 한 번 더 빛나게 하려고? 이 세상을 이어가는 힘인 그런 자비와 사랑을 밟히는 풀꽃에서도 찾아내는 일이 시인의 일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순수 서정시인 소월도 ‘밥과 자유’란 시로 사회 어둠을 따지기도 했다. 이육사나 이상화처럼 나라를 위한 지사시인의 길을 생각하는데 그가 잘못된 성형에 우는 뉴스를 얘기한다. ‘예쁜 쌍꺼풀은 물 튀는 변소가 있는 시골과 모기와 며칠 씨름하면 생기는데’ 다시 때밀이 근성이 날을 세운다. 정치도 종북도 아닌 때밀이저울이 돋보기를 든다. 바람이 이슬 안은 연잎을 흔들자 눈이 부셔서 정신을 찾는다. 까막새 늙은 소나무가 이 더위 잘 견디시겠지?
![](https://t1.daumcdn.net/cfile/cafe/274244395553639207)
<정 숙(鄭 淑) : 1948 - >
* 1948년 경산 자인 출생, 본명은 정인숙(鄭仁淑).
* 1970년 경북대 문리대 국어 국문학과 졸업, 경주 월성중학교 국어교사 근무.
* 1991년 계간지 [우리문학]에서 등단
* 1993년 계간지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재등단.
* 시집으로 [신처용가](1996), [위기의 꽃](2002), [불의 눈빛](2006), [바람다비제](2009),
[유배시편](2011) 출간. 2012년 시선집 [돛대도 아니 달고], 시극 극본 [봄날은 간다]가 있다.
* 2010년 1월 현대시 박물관에서 제정한 제1회 만해 ‘님’ 시인 작품상 수상
* 현대불교 문인협회 대구 경북 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시와시학 신인회 회장.
대구문학아카데미 현대시 창작반 강의, 인터넷 포엠토피아 '포엠스쿨 정 숙반' 강의.
◈ 웬 생트집? -처용아내 1
가라히 네히라꼬예?
생사람 잡지 마이소예.
달이 휘영청 청승떨고 있지예.
밤이 '어서! 어서!' 다구치미 깊어가지예.
임카 마시려던 동동주 홀짝홀짝
술삥이 혼자 다 비았지예.
용광로 부글부글 끓는데 임이 안오시지예.
긴 밤 지쳐 살풋 든 잠, 찔레꽃 꺾어 든
귀공자를 잠시 반긴 거 뿌인데예.
웬 생트집예?
셔블 밝은 달 아래서
밤 깊도록 기집 끼고 노닥거린 취기,
의처증 된기라예?
사철 봄바람인 싸나아는 간음 아이고,
외로움에 속 골빙 든 여편네
꿈 한번 살짝 꾼 기 죈가예?
예?
* 처용: 신라 제 49대 헌강왕 때 처용가라는 향가를 지었다는 사람. 용왕의 아들이라함. 역신이 처용의 아내를 탐내어 침입한 것을 노래로 퇴치하는 내용임.
* 가라히: 다리, 가랑이
* 임카: 임과
* 셔블: 신라의 서울, 경주
<해설> 1996년 정 숙 시인의 첫시집인 [신처용가] 44편 중에서 첫번째 시이다. 첫 시집이라서인지 겁없이 쏟아내는 글 솜씨가 청산유수다. 시도 이렇게 솔직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층층시하의 시집살이에 쌓인 한도 많았던가보다. 이제 첫시집으로 알을 깨고 고개를 내밀었다. 1천여년 전의 처용이 현신하는 순간이다. 본능에 눈을 떤 욕망이 드러나는 삶을 쏟아내고 있지만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온다. 일탈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닌 듯하다. 이러한 삶은 시집 [위기의 꽃]에서 [유배시편]까지 계속 이어지면서 삶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 꼬냑 여자/ 정 숙
꼬냑 같은 여자가 되고 싶다
장미빛 살결
세월이 더할수록 톡! 쏘면서
화악! 달아오르는 고 맛깔
긴 시간 내성으로 빚어
단내나지 않는 향그러움으로
목석같은 그 가슴속 불, 질러 버리고
확, 불 질러 버리고
저마다 활활 태우는 한잔의
꼬냑!
비록 일순간일지라도
<해설> 2002년 두번째 시집 [위기의 꽃] 에 실린 시이다.
정 숙 시인의 말이다. " 코냑 같은 여자란 어떤 여자일까? 이 시의 분위기로 봐서는 진하게 끈적이며 착 달라붙는 여자, 물론 아무에게나 던질 몸은 아니겠으나 저돌적이면서 강열한 자력을 가진 여자, 그래서 일순 타오르는 불길로 곧장 완전연소에 이르는 여자쯤 될 것 같다.
그러나 코냑은 비싼 여자이다. 비싼 만큼 그 값을 하는 여자다. 제대로 된 코냑은 오랜 숙성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단번에 불 질러 버릴 물건은 아니다. 한 입에 톡 털어 넣는 원 샷의 술이 아니란 뜻이다. 그렇다고 얼음물에 타서 흔들어가며 싱겁게 마실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은 코냑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모욕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딱 한 잔이면 충분하다.
자 그렇다면 이 까다로운 ‘꼬냑 여자’를 어찌 다룰 것인가. 우선 빛깔을 감상하자. 암갈색 장미 빛깔을 눈에 힘 빼고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자.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 피조물에 경탄하고 찬미하자. 바로 이것이 ‘꼬냑 여자’를 마시는 첫째 관문이자 즐거움이다.
다음으로 가장 부드러운 손짓으로 잔을 쥔다. 잔은 아침 이슬에 막 피어나는 장미 꽃송이 모양이다. 뽀얀 처녀의 가슴곡선을 조심스럽게 애무하듯 살포시 감싸 쥐어 자신의 체온이 잔에 전달되고 그로인해 ‘꼬냑 여자’가 따뜻하게 데워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래야만 향기와 온기를 고스란히 느끼며 깊고 풍부한 맛에 도달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 얼음으로 희석하여 순하고 부드럽게 길들여서 마실 수도 있겠지만 당연히 진한 '여인의 향기'는 포기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가 살짝 한 모금을 혀끝으로 받아 혀로 하여금 입안 전체를 희롱케 한다. 성급하게 기도를 열기 전에 입술 위로 그 향기를 올려놓고 오감의 조화를 즐긴다. 기도를 타고 조금씩 넘어가는 진한 엑스타시. 그 후 섬세한 날숨의 호흡을 통해 다시 올라오는 짜릿한 향. 비창의 바이올린 선율위에 긴 여운으로 남는 일순 방화는 그렇게 완성된다. "
◈ 연꽃/정 숙
바람에 쉴 새 없이 몸 흔들리면서도
시린 발 견디며 진흙을 밟고 서서
곧 사라질
목숨,
이슬방울을
잠시라도 햇살에 한 번 더 빛나도록
소중히 떠받들고 있다
<해설> 2006년 세번째 시집 [불의 눈빛]에 수록된 시이다.
시집 [신처용가], [위기의 꽃]과 [불의 눈빛]에 대한 작가의 말이다.
" <신처용가>는 좀 거친 말투로 꾸짖는 풍이었다면, 『위기의 꽃』은 현대시적 형식에 향가나 고려가요, 가사문학을 접목시켜 국문학과 출신으로서의 제 특성을 살려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불의 눈빛』은 ‘깨달음’, ‘참여성’, ‘묘사 위주’, ‘나의 가정사’ 등을 주제를 다루고 잇는데 여성 평등이란 명목이 사실 여성에겐 고단한 삶이지요. 가정생활을 돌보는 것은 여자의 몫이고 또한 사회적 지위나 차별을 받으면서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이중적 잣대가 아직 여성 권리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런 여성의 여러 모습을 『불의 눈빛』에서 다루었습니다. "
♣ Perhaps Love/인치엘로
http://youtu.be/9C8vJTkUK-Y
*동영상 하단의 뉴스 자막은 옛날 이야기 입니다. 관심끄세요.
첫댓글 정 숙 시인은 대구에서 사업을 하는 고교동창생 김광태 사장의 부인이다.
시인은 1971년 등단한 이후 지금도 활발한 문학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