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영화에 이르는 두 가지 길. 첫번째 경로 : <아이다호>로 출발해서 <해피투게더>를 경유해서 <헤드윅...>과 프랑스와 오종의 영화들을 거쳐 이 영화에 이르는 길. 두번째 경로 : <삼포가는 길>로 출발해서 <고래 사냥>과 <삼인조> 그리고 <세상 밖으로>를 경유해서 이 영화에 이르는 길.
2. 첫번째 길로 영화 읽기-'퀴어 영화'로서의 <로드 무비>
1) 대식의 이야기 - 생리적 동성애자이자 정신적 이성애자의 자기 분열
세번에 걸친 파격적인 '정사씬'. 그 순간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불편해야만 했다. 마음을 열려고 애는 썼지만 끝내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대식의 오늘을 있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저 너머에 있지만, 그래도 그 결과로서 그가 감내해야 하는 슬픔은 충분히 전해져온다. 서울역 그 바닥에서 거칠 것 없이 '왕초' 노릇하는 그가 '인연'이 쌓이는 사람에게는 고개 숙이며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다는 것. 일주에게, 아내에게, 아들에게, 그는 그저 미안하다고만 한다.
영화내내 '동성애'에 대한 감독의 시선은 애매한 곳을 향하고 있다. 그 애매한 시선의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 바로 아름답기 그지 없는 풍경들이다. 그러나 그 풍경들은 한편으로는 그지 없이 '인습(convention)화'된 그런 것들이기도 하다. 수많은 한국 영화에서, 그리고 탈출을 꾀하는 수많은 젊은 영혼들의 내면 스크린 속에서 관습적으로 반복 영사되어 온, '낭만적 일상 탈출'의 공간으로서의 동해안, 삼척에서 부산에 이르는 7번 국도변의 그 익숙한 풍경들. 감독은 그 차창을 스치는 풍경들을 통해 주인공 대식의 내면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한다. 어떤 점에서는 그 인습화된 탈출 경로로서의 동해안 풍경들이 대식의 '애매한' 내면을 담아내기에는 가장 적절한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식 내면의 애매함이란, 그가 끝내 자신의 성적 정체성(동성애)에 대해서 자기 긍정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왕년에 알아주는 산악인이었고, '전향' 후에도 노숙자들의 왕초 노릇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상징적 위치를 발견하고 있는 그는, 결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한다(그런 점에서 그는 <아메리칸 뷰티>의 왕년에 해병대였던 늙은 동성애자와 비슷하다).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상대(레스토랑 종업원)가 먼저 알아서 접근해주어야 한다. 먼저 알아주지 못하는 상대(석원)에게는 가슴앓이만 하다가 결국 들키고서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의 내면은 지배 이데올로기(이성애)와 소수 이데올로기(동성애) 사이에서 철저하게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내적 분열의 귀결점은 당연하게도 죽음이다. 그러나 그 죽음조차 진정한 '전복'과 '해방'의 '은빛 선(silver lining)'을 약속하지는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화 내내 그 '분열'은 치열하게 대립하고 갈등하지 못하고, 그저 추상적인 낭만성으로 봉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왠지 슬픈 동해안의 풍경들, 그저 왠지 비장한 '질주'의 이미지(이 영화 속의 질주 이미지는 <비트>의 그 추상적 낭만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런 추상적인 이미지를 통해서만 표현해낼 수 있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간절함' 또는 '이루어 지지 않는 사랑의 애절함'. 보편성을 매개로 해서만 도달해 볼 수 있는 어떤 사랑의 감정.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이것이 감독으로서 '동성애'를 표현할 수 있는 도달점이자 한계이며, 관객인 나(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서동진씨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우리에게 뼈아픈 지적이 된다.
" 저는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쟁점을 놓고 볼 때, 위험한 슬로건이라 생각되는 게 하나 있어요. '우리는 하나다'라는 거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성정체성의 차이를 떠나서, 인간이고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소통하는 존재로서 보편적인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한 거거든요. 우리는 하나라고 했을 때, 그 '하나'는 알고 보면 나의 관점에 당신이 동화되어야 한다는 폭력으로서의 '하나'가 될 수 있어요. 제가 보기에 더 급진적인 것은 '우리 둘은 다르다'는 거예요. 그 다름에 눈을 떠야만 둘 사이의 소통 가능성이 있다고 보거든요.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편견 중에 그런 게 있잖습니까. '교양있는 중산층의 소시민인 나는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를 혐오해선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나에게 사랑하자고 말하는 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뭐 이런 식의. 과연 그게 하나가 된 거라 할 수 있을까요."
동성애에 대한 담론으로서의 이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위험(폭력)은 주인공 대식의 자기 분열 또는 애매한 내면 풍경인 듯하다. 자기가 다르다는 것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는, 또는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정치적 기회주의의 답답한 풍경. 오로지 추상적 낭만성을 빌미로 해서 상대의 인정과 사랑을 호소하는 비겁함. 어쩌면 이 비겁함 속에 그가 석원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었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식이 석원에게 끌리는 것은 석원의 '여성화된 위치' 때문은 아니었을까? 잘 나가는 여피족(펀드 매니저)라는 '상징적 위치'에서 자신의 자리를 상실한 석원은 동시에 자기가 남자임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아내의 이혼 요구). 이렇게 끈 떨어진 채 길거리에 버려진 석원의 모습은 마초로서의 자신의 정신적 정체성을 끝내 버릴 수 없었던 대식에게 접근 가능한, 다시 말해 타협 가능한 어떤 대상(여성적 대상)으로 비취었음에 틀림없다. 이후 대식은 석원으로하여금 자신의 '여성적 위치'를 끊임 없이 확인해야만 하는 '남성적 유대 공간'(노가다판, 시멘트 공장, 냉동 공장, 채석장 등 남성적 육체노동 공간)으로 데리고 다닌다.
2) 석원의 이야기 - '상징적 부채 상환'으로서의 어떤 '행위'
철저한 이성애자 석원이 마지막 순간 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새로운 출발(원래 자신의 상징적 위치가 있는 증권회사 직원으로의 복귀)을 앞두고 행하는 '상징적 부채 상환 행위'일 뿐이다. 석원의 이야기로 이 영화를 읽는 한, 영화는 독특한 '로드 무비'일 뿐이다. 독특하다는 것은 적어도 한국의 로드 무비 전통 속에는 '삼류 인생'들의 지난한 길 찾기(<삼포 가는 길>에서 <세상 밖으로>까지)가 있을 뿐,잘 나가던 '이류'의 일상 탈출기로서의 그것은 드물었기 때문이다(홍상수의 <강원도의 힘>이나 <생활의 발견>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정말 너무 다르다). 영화의 스타일리쉬한 분위기와 낭만적 풍경은 이 '이류'의 '일상탈출기'에 어울리는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3) 일주 또는 대식의 아내의 이야기 - 남자의 동성애에 대한 열린 시선 또는 표정
아이러니칼하게도 영화 속에서 대식의 동성애를 가장 적극적(?)으로 긍정해주고 있는 것은 그로 인해 배신당한 두 여자들이다. 자기 분열 속에 괴로워하는 대식의 육체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는 것은 일주이고, 고개숙인 그에게 '잘 살아!'라고 격려해주는 것은 그의 아내이다. 여성 특유의 모성 본능 탓일까? 아니면 그녀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 성적 소수자로서의 연대의식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까? 어찌됐건 영화 속에서 대식이 잠시 몸과 마음의 안정과 휴식을 찾는 듯이 보이는 것은 그녀들 앞에서 였다.
3. 두번째 길로 영화 읽기- '로드 무비'로서의 <로드 무비>
'로드 무비'로서의 <로드 무비> 속에는 일정한 불균질성이 존재한다. 부랑적 삶의 공간으로서의 길과 낭만적 탈출의 공간으로서의 길. 전자에 대한 다큐멘타리적 박진성과 후자에 대한 스타일리쉬한 추상성. 영화는 그 둘 사이의 불균질성을 끝내 통합시키지 못함으로써 하나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 두가지 길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것. 석원은 잠시 신세졌던 그 삶의 공간에 '상징적 부채 상환'을 함으로써 자신의 원래 공간으로 홀가분하게 복귀하게 되리라는 것. 하지만 그 진실을 드러내는 태도는 역시 애매하고 모호하다.(이에 비하면 <이투마마>의 그것은 얼마나 명징하고 그래서 새삼스러운 충격이었던가!)
4. 하나의 과제 - '퀴어적 로드 무비'로서 <로드 무비> 읽기
1) <아이다호>, <해피 투게더> 그리고 <로드 무비>
: 일상 탈출을 통해서, 길 위에서 '동성애' 사유하기 - 그 추상성에 대하여
(솔직히 <아이다호>는 아직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샵에 빌리러 갔더니 '분실'되었단다.)
2) <헤드윅...>, '오종' 그리고 <로드 무비>
: 일상의 공간 안에서, 집 안에서 '동성애' 사유하기 - 그 구체성에 대하여
<헤드윅...>은 인습적 서사 양식(멜로적 뮤지컬) 안에 자신있게 '동성애' 담론을 담아낸다.(헤드윅이 미완성 트랜젠더라는 점에서 보면 '동성애'가 아닐 수도 있나? 헷갈린다!) 그리고 또 하나의 외부(미국의 피점령지로서의 독일)에 대한 거대 담론과 솜씨 있게 이야기를 결합시키고 있다.
'오종'이 그려내는 '동성애'에는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슬픔 따위는 전혀 없다. 그것은 그가 주로 '동성애'의 결과가 아니라 그 출발점과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점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동성애 안에서 동성애 사유하기. 그의 동성애 이야기는 때로는 그 귀여움에 미소짓게 되고, 때로는 그 섬찟함에 충격을 받게도 되지만, 어쨌든 여유로운 객관적 거리두기가 있다. 동성애적 자각의 과정은 보편적인 사춘기적 성적 자각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동성애적 관계 내에서도 성적 지배-종속이라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 있다는 것. 어찌됐든 그 두가지 모습 모두 철저한 '자기 긍정'으로 다가온다. (부정으로서의 '풍자'가 아니라 긍정으로서의 '해학'. 과장된 비탄으로서가 아니라 담담한 긍정으로 숙명 받아들이기) 오종의 이 자기 긍정은 너무나 철저해서 하나의 역설을 만들어 낸다. 그가 묘사하는 동성애의 과정과 관계는 지극히 '정상적'임에 반하여, 모든 이성애는 지극히 '비정상적'으로 그려진다(적어도 내가 보았던 범위 내에서는 그렇다).
하나의 가설, 또는 역설. 동성애 안에서 동성애를 사유하는 오종의 영화적 시선은 지극히 객관적이다. 하지만 그 외부에서 동성애를 사유하는 <로드 무비>에는 추상적인 감정의 과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