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시각장애 피아니스트 유예은 씨와 어머니 박정순 씨
- “이야기를 담은 선율로 모든 장벽을 넘는 연주자가 될 거예요”
6살 나이로 SBS 예능 프로그램 ‘스타킹’에 출연해 피아노 연주를 선보였던 시각장애인 유예은 씨.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된 예은 씨는 재능을 살려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어머니 박정순 씨가 운영하는 장애인생활센터 두리한마음에서 거주 중인 그는 밀알복지재단 홍보대사로서 최근 KBS ‘사랑의 가족’에도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인터뷰에 응한 그는 “어머니의 사랑과 더불어 많은 분들의 응원과 지지가 있기에 꿈을 펼칠 수 있다”면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Q. 만나서 반갑습니다.
A. (유예은) 안녕하세요? 한세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는 유예은입니다. 피아노 연습과 시험, 대학 내 기독교 동아리 히어아이엠의 반주자 활동을 하면서 바쁜 날을 보내고 있어요. 활동보조 지원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2시간 남짓 통학하는 일은 조금 버거워요. 때로는 곡 해석 문제로 지칠 때도 있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제게 힘이 되어주는 엄마가 계시기에 이겨낼 수 있어요. 현재 여름방학 기간에 개최되는 음악 캠프 ‘프랑스 2024 Musicalta Academy & Festival’에 참여하고자 준비 중입니다. 음악적인 교류를 나눌 수 있는 마스터 클래스 과정에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길 기대하고 있어요.
A. (어머니) 만나서 반갑습니다. 경기도 포천에서 장애인생활센터를 운영 중인 박정순입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의 뒤를 이어 복지와 문화 혜택, 장애인의 사회 참여 등을 지원하는 사단법인 두리한마음 장애인문화예술협회 회장도 겸하고 있어요.
Q. 모녀 사이가 참 보기 좋습니다.
A. (어머니) 감사합니다. 장애인 재활 분야를 공부하고 나누는 삶을 실천해서 그런가 봐요. 중증 지체장애를 가진 남편과는 봉사활동 중 만났어요. 재활과 복지에 관해 여러 의견을 나누면서 가까워졌죠. 남편과 저는 가족처럼 지지해주는 공간, 장애인이 문화예술 향유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돕는 단체를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장애인생활센터 운영을 시작했어요. 그러다 2002년 예은이를 만났어요. 안구 없이 태어난 선천성 시각장애인이었으나 예은이와 사랑에 빠지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어요. 딸로 입양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죠. 예은이에게 세상의 온갖 귀한 것을 다 줄 순 없지만, 좋은 세상을 경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먹었죠.
Q. 학교 생활이 궁금합니다.
A. (유예은) 즐거워요. 전공 수업 중 음악 창작에 필요한 지식을 배우는 피아노 즉흥 연주법이 특히 재미있어요. 작곡에 관심이 있기도 해서 더 흥미로워요. 곡의 음악적 표현에 관해서도 배우고 있는데,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유롭게, 별이 쏟아지는 듯 아름답고 웅장하게 등 곡을 표현하는 데는 다양한 기법과 지시어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시각적 표현이나 지시어가 추상적으로 다가올 때도 있지만, 그네를 타고 높이 올라가 바람을 맞았을 때의 느낌, 아름다운 합창이 끝나고 관객이 치는 박수 등 저만의 경험과 감각으로 치환해요. 교수님과도 이러한 제 느낌이 지시어와 부합하는지 자주 묻고 답해요. 정말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때는 엄마와 의논합니다. 엄마는 미처 떠올리지 못한 제 감각적인 기억을 꺼내주시곤 해요. 소프라노를 감싸주고 뒷받침해 주는 알토처럼요. 언제나 저를 지지하고 사랑해 주시는 엄마께 감사드려요.
Q. 피아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A. (어머니) 센터 운영을 하면서 교회 성가대 활동을 했어요. 예은이 역시 함께 했는데, 시각의 부재 때문인지 소리 자극을 유독 좋아하고 피아노 근처에서만 놀더군요. 건반을 누르며 노나 보다 했는데 어느 날 예은이가 피아노로 선율을 만드는 게 아니겠어요. 음계를 모르는 상태에서 자주 듣는 선율을 그대로 외워 피아노 건반에 대입해 친 거죠. 예은이의 재능이 놀라우면서도 음악에는 경제적인 뒷받침이 필요하기에 걱정이 됐어요. 어릴 때는 피아노보다 키보드가 더 좋다는 주변의 말에 중고 키보드를 마련했고, 레슨을 받는 대신 동요나 찬송, 클래식 등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며 예은이가 마음껏 치도록 했어요. 남편이 예은이의 연주 동영상을 SNS에 공유했는데, 예기치 않게 화제가 되면서 ‘스타킹’에 출연하게 됐고,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방정환재단의 후원도 받았습니다.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각 재단 관계자분들께 다시금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요.
Q. 피아노 치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나요.
A. (유예은) 제게 피아노는 다양한 소리가 나는 장난감이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제가 피아노를 칠 때마다 좋아했기에 더 흥미를 가졌지요. 사춘기를 지나면서 피아노는 제 마음을 받아주는 유일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바다 여행의 설렘, 외할머니 댁에서의 추억 등 즐겁고 행복한 감정뿐 아니라 시각장애로 인한 답답함, 교우 관계에서의 어색함 등 모든 내면의 감정을 피아노로 쏟아냈거든요. 제게 피아노는 악기 그 이상의 존재라 ‘민우’라는 이름도 지어줬고요. 지금 민우는 다른 곳에 보내졌지만, 피아노라고 하면 가장 먼저 민우가 떠올라요.
Q. 악보 구하는 일이 어렵다고 들었어요.
A. (유예은) 맞아요. 저는 악보를 보면서 피아노를 칠 수 없기 때문에 곡을 암기해야 해요. 인터넷을 통해 음원을 구하고 계속 들으면서 암기해요. 급할 때는 오른손 연주와 왼손 연주를 따로 녹음하고 반복해서 들어요. 물론 점자 악보도 활용합니다. 곡의 어느 부분에 쉼표가 있는지, 어느 부분을 강하게 혹은 여리게 연주해야 하는지 확인할 때 점자 악보가 꼭 필요하거든요. 국립장애인도서관 출력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음악재활센터를 통해 원하는 악보를 신청해요. 점자 악보를 만드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렇다 보니 원하는 악보가 없을 때도 많아요. 좀 더 많은 악보가 점자로 제작되면 좋겠어요.
Q. 가장 기억에 남은 순간이 있다면요.
A. (유예은) 첫 협연이었던 밀알복지재단의 밀알콘서트를 잊을 수 없어요. 협연에서 가장 중요한 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조화예요. 호흡을 잘 맞추면서 대등하게 곡을 이끌어야 했는데, 긴장을 과하게 한 탓에 리허설 때 실수를 했어요. 다행히도 공연 때는 실수하지 않았고, 많은 호응을 얻었어요. 희망을 전하기 위한 공연에서 되레 큰 용기를 받았지요. 덕분에 쏠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등 다른 기회도 얻었고요. 함께 연주하면서 감정을 교류하는 것, 이게 피아니스트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A. (어머니) 예은이는 일반학교 통합교육 과정으로 학업을 이수했어요. 시각장애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생활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 한 거죠. 장애학생을 지원하는 특수반에서 점자 교재 등 필요한 교구를 신청했고, 장애학생의 학교 생활을 지원하는 실무사 선생님이 체육 수업 등을 도와주셨지요. 하지만 친구 관계는 정해진 게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어떤 주제로 대화하면 좋은지 상담해 주었어요. 어느 순간 예은이가 스스로 친구를 사귀면서 장애·비장애의 경계를 허물더라고요. 대학교 수시 전형에 합격해 어엿한 대학생이 된 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Q.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요.
A. (어머니) 예은이는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딸이에요. 체구가 작고 잔병치레도 잦아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 당당한 성인이 되어 연주를 하다니 꿈만 같아요. 부모이기에 염려를 놓을 순 없겠지만, 피아니스트로서 당당하게 활동하길 바랍니다.
A. (유예은) 저는 베토벤을 좋아해요. 청각장애가 있음에도 음악을 놓지 않았고, 그가 작곡하고 연주한 곡에서는 그만의 이야기가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저 또한 피아노 곡 ‘바다의 숨결’, 찬송가 ‘나의 하나님’을 작곡한 경험이 있는데요, 앞으로도 베토벤처럼 저의 삶을 녹여낸 피아노 곡을 만들고 싶어요.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희망을 나누며 살고 싶어요. 음악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공감과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어요. 장애·비장애의 장벽도 음악의 힘으로 넘어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시각장애 피아니스트로서 앞으로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수정·신혜령 기자
* 월간 간행물 <손끝으로 읽는 국정> 제200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