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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군대라도 동원하여 올 줄 알았건만 단 두 사람뿐인가.”
끔찍한 소음이 잦아들고 먼지마저 가라앉았을 때,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어둠 속 정면에서 들려왔다. 레온은 전륜을 손가락에 걸었고 아벨은 구식 권총을 꺼내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자네는 스스로 함정에 빠져드는 기술이 정말 남다른 것 같군, 가르시아 신부.”
“함정에 빠진 건 그쪽이야. 엘더 양반.”
레온은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곳으로 우리들을 불러들였고, 단 둘 밖에 오지 않았다고 퍽 기뻐하고 있는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아 매우 즐거운데 말이야. 마살리아의 아름다운 태양 아래에서 살아가는 흡혈귀이니 모순 덩어리인 건 사실이지만 당신은 정말 특별해.
삶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당신이, 어째서 다른 길을 모두 포기하고 자살패에만 얽매인 거지?”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아벨이 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도 바르트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교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실루스 촉진 인자를 제조, 대량 생산할 수 있을 만한 장소가 있는지 단서를 찾거나 <없으면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라>’고. 방공호는, 이곳 투르펭 요새는 확실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오랜 시간 머무를 수 있고 제약 시설을 쉽게 갖춰 놓을 수 있는 곳이지. 마살리아 시 당국마저도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곳이니까. 그런데 당신도 알다시피 ‘교수’는 이곳에 두 번이나 들어온 적이 있어. 그러니까 그가 마살리아에 돌아온 것을 알고 붙잡으려 한 것 아닌가.”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었겠지. 듣고 싶은 말도 있었을 것이고.
“미약한 단서가 하나라도 더 있었다면 당신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이 늘어나는 셈이니까 우리의 전력은 분산되었을 테고 고전을 면치 못했겠지. 게다가 당신은 대낮에도 활동이 가능한 흡혈귀니까 추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테고.”
그러나 지키고 싶은 것에 얽매여서는,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서 아무런 단서도 없다는 말을 들은 ‘교수’는 안심하고 이 투르펭 요새에 대해서만 집중할 수 있었다. 유격전의 철칙이 뭔지 아나, 엘더 양반? 넓은 전선의 이곳저곳에 출몰하여 적을 교란시키는 거야. 함정이 왜 무서운 줄 아나,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야.”
히스파니아 군 사상 최고의 유격전 지휘관은 자신 있게 선언했다.
“이 곳이 당신이 선택한 전장인가? 맞아. 당신의 집과 같은 곳인가? 맞아. 그렇지만 당신에게만 유리한 곳이 아니야.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함정은 전혀 무섭지 않아. 출현 위치가 제한된 유격전 부대는 전멸하게 되어 있어. 우리는 당신이 이곳에 있을 줄 알고 있었으며,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다. 아까의 폭발에 전혀 휘말리지 않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을 거 아냐. 모두 예측한 범위였다.
엘더인 당신은 어느 시간, 어디에나 머무를 수 있음에도 다른 모든 선택지를 스스로 포기하고 이곳에만 얽매였기에, 우리는 당신을 이곳에 몰아넣을 수 있었던 거다. 모든 준비는 끝났어. 당신에게 승산은 없다.”
“레온 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필리프 씨. 당신을 불법 마약 제조 및 유포 혐의로 체포합니다. 아무리 당신이 엘더라도, 저항은 소용없습니다. 도망칠 곳도 없습니다!”
전등에 비춰진 것만 봐서는 바르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지극히 건조한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래, 그는 알비온 귀족 출신. 게토를 알고 있는 자. 단서는 충분했다. 쉽게 추리할 수 있었겠지. 역시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을 때에 죽였어야 했다. 그렇군, 그때 이미 나는 모든 선택지를 잃어버린 것이었어.”
분노가 정리되었다. 차가운 살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바르트의 모습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레온의 앞에 나타난 흡혈귀는 그대로 거한의 팔을 절단하려 했으나 레온은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1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착지하며 전륜을 날렸다.
“가속이다! 내 발목 잡지 마라, 어리버리!”
“흑, 그게 동료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말이라고 한 겁니까.”
짙은 어둠 속, 언제 어디서 흡혈귀가 공격해올지는 모른다.
혼자 들어갔으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레온 씨, 왼쪽입니다!”
“시끄러워! 너야말로 위에!”
“으아! 방금 놓친 것은 레온 씨 잘못이라고요~”
“닥쳐, 어리버리! 젠장, 왜 내가 이렇게 시끄러운 녀석과 함께 내려왔을까. 절세의 미녀인 세뇨리타나 용병술 뛰어난 아저씨랑 오는 건데!”
“제발, 레온 씨. 이렇게 드라마틱한 결전의 순간에는 좀더 긴장된 모습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최대의 경의를 갖고 적과 싸우면 안 될까요?”
“새가 긴장한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추락사하냐, 물고기가 긴장한다고 최대의 경의를 갖고 익사하냐. 그런 건 필요 없어!”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등 뒤를 지켜주는 동료가 있다.
그 사실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가속으로 아벨의 사격을 피해 벽에 착지한 바르트가 사각에서 아벨을 공격하려던 순간, 레온의 전륜이 바르트의 양손을 베어버린 것이다. 그 짧은 경직의 순간에 근접 거리에서 아벨이 발사한 탄환이 바르트의 두 무릎을 정확하게 관통했다.
“이제 끝났습니다. 필리프 씨.”
쓰러진 엘더를 응시하며 아벨은 어딘지 슬픈 듯 말하며 권총을 집어넣었다.
“당신을 금지마약 제조 및 유포 혐의와 일련의 흡혈 사건의 정범으로 체포합니다.”
“함부로 남의 삶을 평가하지 마라, 신부.”
여전히 조용하면서도 힘을 지닌 목소리로 엘더는 말을 이었다.
“아무 죄도 없던 부모님을 광신적인 사제가 멋대로 심판하여 살해한 후, 난 그런 녀석을 제일 증오한다. 나를 모든 선택지를 스스로 포기하고 복수에 얽매이는 녀석이라고 했나, 가르시아 신부?”
레온은 시거에 불을 붙이다 말고 엘더를 바라보았다.
“흡혈귀로 태어난 게 죄라면, 나를 죽였으면 끝날 일이다. 그러나 그 사제는 오히려 나만 살려두었지. ‘엘더’는 귀하니까 생체실험에 이용하기 위해 내 가족을 살해했던 거다. 지금에서야 알았지만 나는 그때 이미 모든 선택의 기로를 다 써버렸던 거야. 내겐 복수밖에 남은 게 없었다.”
<생체실험>, 그 단어가 들려온 순간 레온의 눈엔 선연한 분노가 떠올랐다. 그런 그를 진정시킨 것은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펜던트였다.
“장생종과 단생종, 흡혈귀와 인간, 나는 그딴 거 몰라.”
레온의 목소리는 여전히 굵고 거칠었다.
“내가 아는 구분 방법은 딱 한 가지야. 좋은 놈과 나쁜 놈. 조금만 자세히 말하자면 선을 넘은 녀석과 그렇지 않은 녀석.
당신은 선을 넘어 다른 사람의 삶을 무시했어. 멋대로 아이들에게 바실루스 촉진 인자를 집어넣었단 말이다. 정말 나쁜 놈이지. 당신이 단생종이었더라도 두들겨 패주었을 것이고 장생종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이렇게 슬픈 일을 당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그런 슬픔을 겪게 해주겠다고?”
레온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당신 거울이야? 무생물이야? 생물이잖아. 장생종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거잖아. 살아있으면, 살다 보면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기 마련이다. 나한테 잘해줘야만 상대방한테 잘해주고, 나한테 잘못하면 똑같이 잘못해주고, 그게 사는 건가? 아니, 그건 사는 게 아니라 무생물이다. 거울일 뿐이야. 거울은 혼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가 무엇이 주어진 다음에야 똑같은 상(像)을 되돌려주는 것밖에 못하지. 하지만 당신과 나는 살아 있어.”
‘댄디 라이언’의 어조는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공격했을 때 ‘교수’는 내 잘못으로 다쳤다. 그럼 그는 나에게, 혹은 당신에게 똑같이 상처를 입혀야 만족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 아무 것도 못해주는 아버지를 딸은 미워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선물했지. 나는 그 애의 삶을 방해하기만 했는데 말이야.”
레온은 바르트를, 바르트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받기 전에 무언가를 줄 수 있고, 주기 전에 무언가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것이 내 삶의 긍지이지.”
지하 50m의 방공호 안은 어둡다. 사실 어둠은 차별적이지 않다. 모든 것을 같은 색깔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고요하고 깊은 검은색.
지금 어둠에 둘러싸인 침묵 또한 세 사람에게 동질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어라, 벌써 점심때가 됐네. 배고파요, 레온 씨. 우리 나가요. 우우, 아침부터 계속 중노동만 했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해요. 게다가 여기,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몰라 무섭다고요오~”
“그러지 뭐. ‘교수’가 부자라고 했지?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해야겠다. 어이, 사장님. 여기 토박이라면 마살리아 특산 요리를 가장 잘 하는 식당 아시겠지? 추천 받습니다.”
그때 들려온 소리는, 설계 도면을 펼쳐 탈출 가능 지역을 확인하던 레온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다.
천지창조 당시에나 있을 법한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벽에 균열이 새겨져 나갔다.
천장에서 함몰된 시멘트 잔해들이 쏟아져 내려갔다.
“제길, 아까의 폭발로 인한 2차 붕괴가 시작 됐다. 저 사장님 폭탄을 도대체 얼마나 터뜨렸던 거야?! 너무 빨리 진행되는데! 이런, 아벨!”
폭약 전문가답게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마친 레온은 천장에서 떨어진 큼지막한 잔해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쓰러진 아벨을 얼른 부축했다. 그리고 도면에 체크해놓은 2차 붕괴 시 안전 예상 지역을 향해 달렸다. 그 와중에도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잔해들을 주먹으로 쳐내며.
겨우 안전 지역에 도착해 한숨을 내쉴 때였다.
“레, 레온 씨.”
아벨이 정신을 겨우 차린 듯 비명을 질렀다.
“필리프 씨가, 필리프 씨가 아직 저 곳에 있잖습니까!!”
“뭐라고?!”
레온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붕괴가 시작되어 시야 확보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두 무릎이 부서진 흡혈귀가 아직 저 곳에 살아 있을지나 의심스러웠다. 잔해에 깔려 이미 압사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레온은 몸을 돌려 왔던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마치 아홉 번째 지옥(Cocytus)처럼, 산 자는 다시는 돌아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이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곳으로 ‘댄디 라이언’은 달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난 걸까.
아니, 시작되고 있었다. 영겁만큼이나 길게 느껴진 시간이 흐른 후에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듯했던 소음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먼지들이 모두 가라앉았는지 시야도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
정신을 되찾은 필리프 바르트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제복을 입은 거한이 자신을 감싸듯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르시아 신부…?”
레온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의 등에는 시멘트 파편에 의한 무수한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붕괴 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자신의 오른손은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두 무릎도, 짧은 시간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일단 손을 뻗어 레온의 어깨에 착용된 전등을 떼어낸 다음, 그의 안주머니에서 방공호 설계 도면을 꺼내 살펴보았다.
1차 폭파시 붕괴 예상 지역, 안전 지역, 자신과의 조우 예상 지역, 바실루스 촉진 인자 제조 공정 예상 지역 등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들어왔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눈에 들어 왔다.
<2차 붕괴 발생 시 안전 예상 지역>
“……!”
이곳은 자신이 두 파견집행관에게 제압당했던, 2차 붕괴가 시작될 당시 자신이 쓰러져 있던 곳이 아니었다.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2차 붕괴가 처음 일어났을 때, 레온은 부상당한 아벨을 데리고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두 무릎이 부서진 자신은 쓰러진 채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이 안전한 곳에 올 수 있었던 이유. 붕괴에 의한 상처를 입지 않았던 이유. 처음 정신을 차릴 때 레온이 자신을 감싼 채 쓰러져 있던 이유.
“다시 구하러 왔던 것인가, 나를.”
지독한 슬픔이 몰려 왔다. 46년 만에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리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복수는 항상 세상 끝에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지만 용서는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이 남자를 보니 아버지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제게 남은 선택은 없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쓰러진 레온을 바라보던 바르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에서 손톱을 길게 뻗어 거한의 심장을 겨냥했다.
“…안 됩니다, 필리프 씨.”
등 뒤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슬프게 들려왔다.
은발은 피로 물들어 예전의 색깔을 알아볼 수 없었고, 상처가 심한 듯 여전히 쓰러져 있는 채였다.
그러나 겨울 호수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에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었다.
“레온 씨는 목숨을 걸고 당신을 구했습니다. 그런 그를 죽이면, 당신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신 자신을 위해서… 제발 그러지 말아주세요.”
“나이트로드 신부. 46년 전, 나의 부모님은 흡혈귀로 몰려 현장에서 사살 당했습니다. 그 신부는 부모님에게 아들을 교회에 넘기지 않은 것이 죄라고 구형했지요. 내가 그분들의 곁에 머물지만 않았더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엘더인 나는 실험체로서 붙잡혀 바티칸으로 이송 중 사고로 차가 절벽으로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죽었을 때 운 좋게 살아남았습니다. 가족을 잃고, 모든 것을 잃은 내가 처음 발견한 곳이 이 방공호였습니다.”
평소와 같은 예의바른 존댓말에는 짙은 그리움과 후회가 담겨져 있었다.
“이 곳을 알고 있는 이상, 그리고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아는 이상 살려둘 수는 없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46년 전 모든 선택지를 박탈당했습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엘더로서의 능력 뿐.
여기서 당신들을 죽이고, 어떻게든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아서 워즈워스 박사와 시스터 노엘도 죽이겠습니다. 그것의 나의 삶입니다. 포기할 수 없습니다.”
46년 전, 당신들과 만났다면 나에게는 많은 것들이 남아 있었을지도. 하지만 이미 흘러간 과거였다.
이제는, 이 아름다운 도시의 눈부신 태양 아래 살아갈 수 없겠지.
회한과 후회를 함께 죽이려는 것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레온의 심장을 찔러 들어갔다.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아니?!”
엘더 필리프 바르트는 경악했다. 분명히 그의 손톱은 심장을 꿰뚫었지만, 그것은 레온의 것이 아니었다.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레온의 앞을 가로막아, 자신의 몸으로 바르트의 공격을 받아낸 것은 움직일 수 없어 보였던 은발의 신부였다.
더욱 무서운 장면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바르트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아벨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지독한 공포가 느껴졌다. 어떻게든 오른손을 빼내 도망가고 싶었지만 아벨의 가슴에 박힌 손은 도저히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필리프 씨. 당신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없습니까?”
푸른 눈동자가 선연한 핏빛으로 변해 가며 읊조렸다.
“인간은 소나 닭을 먹는다. 흡혈귀는 그런 인간의 피를 먹는다…, 그렇다면 흡혈귀의 피를 먹고 사는 <무언가>가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핏빛 눈동자는 쓰러져 있는 동료를 잠시 바라보았다. 의식을 잃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레온은 아벨과 고작 일주일 전에 처음 만났고, 아직 아벨의 능력에 대해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동료>의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당사자인 아벨 자신조차 미쳐버릴 것만 같이 두려운데.
[나노머신 ‘크레스니크 02’ 40퍼센트 한정 가동- 승인]
“나는 크레스니크. 흡혈귀의 피를 빠는 흡혈귀입니다.”
질퍽한 소리와 함께 아벨의 오른팔이 어깨까지 찢어졌다. 아까와는 달리 피는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그곳에서 흘러나온 것은 끈적끈적하고 검게 빛나는 액체였다. 그것은 곧 아벨의 손 안에서 단단하게 굳어 양끝에 날이 달린 거대한 낫으로 변했다.
“당신은, 왠지 흡혈귀로 태어난 것을 슬퍼하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바르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이런 힘을 갖게 된 것, 너무도 저주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핏빛 낫이 바르트를 겨냥했다. 바르트는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었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동료를 지키겠습니다. 설령 저주 받은 힘이라도 레온 씨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노엘 씨와 ‘교수’와 재회하기 위해, 밀라노에 있는 파나 양과 만나기 위해 나는 그 힘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것은 저의 또 다른 긍지입니다.”
어딘가 슬픔을 머금은 채, 그러나 새로운 의지를 담고 핏빛 낫은 바르트를 향해 휘둘러졌다.
쓰러져 있는 ‘엘더’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던 아벨은 조용히 설계 도면을 펼쳐 보았다.
‘교수’가 정해 준 탈출 가능 지역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다. 3차 붕괴가 발생할 위험이 있는 이상 한시라도 빨리 두 사람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야했다.
“죽인 건 아니지?”
“예, 움직임을 봉쇄한 것뿐입니다… 허억!”
대답하던 아벨은 기겁을 하며 돌아보았다. 상처가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레온은 일어서고 있었다.
“레, 레온 씨. 어떻게 벌써 깨어나신 겁니까?”
언제부터 정신이 들었던 걸까. 자신의 ‘크레스니크’로서의 모습을 보았을까.
보았다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해야 할까.
“뭐냐, 어리버리. 꼭 내가 죽기를 바란 것 같이 들린다만. 큭, 상처가 아프니까 저 사장님은 네가 데리고 가라. 너 의외로 세던데. 파견집행관 ‘크레스니크’.”
앞서 걸어가는 레온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지만 아벨은 제 자리에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설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 뭐라고 말을 걸 자격이 없었다.
자신은 그와 같은 인간이 아니니까.
그때, 레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댄디 라이언’은 우두커니 서 있는 동료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아까 말했잖아. 난 인간이건 흡혈귀이건 흡혈귀의 피를 빠는 흡혈귀이건 그런 거 모른다고.”
레온은 아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이해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가는 데 그런 자격은 필요 없어. 가져야 할 것은 긍지뿐이다.”
다시 큼지막한 보폭으로 걷는 레온의 등을 바라보며 아벨은 미소 지었다. 다시금 무사태평하고 낙천적인 표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재빨리 바르트를 부축하며 아벨은 동료의 등을 향해 외쳤다.
“기다려요, 레온 씨. 저는 길치이자 방향치라고요. 멋대로 먼저 가버리면 저는 어쩌라고요오~”
“알아서 죽어.”
계속된 폭발, 붕괴, 핏빛 분노, 어둠 속에서 장생종과의 혈투, 끝나버린 싸움, 2차 붕괴, 그리고 가장 두려웠던 것은 기어이 발현하고 만 새까만 어둠의 그림자- 크레스니크의 발동.
지하 50m 안에서 색깔로 나타난 감정의 궤적을 읽어가며 동료들의 자취를 찾던 노엘은 마침내 ‘제3의 눈’을 감으며 외쳤다.
“해냈어요, ‘교수’! 세 사람 다 탈출 가능 지역으로 들어왔어요!”
“역시, 가르시아 신부로군! 그와 같은 탁월한 폭약 전문가가 이번 작전에 참여한 것은 밀라노 공의 혜안일세.”
보기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며 ‘교수’는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살리아가 자랑하는 정오의 태양은 찬란한 빛으로 세상을 축복하고 있었다. 푸른 하늘은 저만치 보이는 항구의 바다와 닮았지만 보다 경쾌하고 즐거워 보였다.
이제 다시 만나서 영원한 헤어짐이 기약된 재회에 가장 어울리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럼, 지하에 있는 세 사람이 올라오기 위한 <천국으로의 계단>을 만들 차례인가.”
결국,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아벨은 큰맘 먹고 이렇게 말해 보기로 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만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필리프 씨?”
“혹시 제 부모님 중에 인간이셨던 분이 계시는지 알고 싶은 건가요, 나이트로드 신부.”
“아, 네. 저, 그게, 저는…”
“궁금하셨겠지요. ‘엘더’는 흔한 예가 아니니까. 예, 인간이셨습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엘더는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두 분 모두.”
앞서가던 레온이 깜짝 놀란 듯 우뚝 멈춰 섰다. 바르트를 부축하며 걷던 아벨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 설마-”
“예. 저는 친자식이 아니었습니다. 한 살 때 고아원에서 입양되었지요.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고아원에서는 제가 흡혈귀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물론, 저도 몰랐었지요. 하지만 부모님께선 저를 친자식보다 더 사랑해주셨고 제가 열두 살 때부터 흡혈귀로 각성한 후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제 자신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괴물인 저를 그토록 사랑해주셨지요. 제 본명은 필리프 레니에 2세입니다.”
인간인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장생종은 사랑스러운 기억이 떠오른 듯 그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프게 눈물을 흘렸던 나날조차도 따스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온화함이었다.
한참을 걸어 마침내 세 사람은 <탈출 가능 지역>에 도착했다. 일단 도착하니 안심이었다.
“그러고 보니 필리프 씨는 ‘교수’를 알고 계셨지요? 두 번이나 만나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아, 저는 필리프 바르트로 지내면서도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물며 제 피를 재료로 바실루스 촉진 인자 개발을… 하고 있었지요. 정확하게 17년 전의 여름 밤, 대재앙 이후 수백년 동안 멈추어 있던 초대형 화물 승강기가 갑자기 움직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자리에 앉으며 엘더 필리프 레니에 2세가 대답했다. 레온도 흥미있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네 명의 알비온 인 청년이 들어온 것이었죠. 대화를 들어보니 그 중 한 명이 승강기를 직접 고쳐서 가동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이 워즈워스 박사였습니다. 나중에 가보니 화물승강기는 엄중히 봉인해 놓았더군요.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워즈워스 박사는 한 소년을 데리고 다시 방공호 안으로 들어왔었습니다. 그렇게 먼발치에서 두 번 본 적이 있는 겁니다.”
레니에는 굳이 그 당시에 ‘교수’를 죽일 수 없었던 이유를 털어놓지 않았다. 레온도 아벨도 알고 있을 테니까. 워즈워스는 자신의 집에 두 번이나 방문한 <손님>이었으며 자신만이 좋아하는 장소라고 생각한 이 방공호에서 같은 유쾌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었다. 몇 번인가 공격을 결심하기도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야, 어리버리. 그렇다면 ‘교수’는…, 엥? 아벨?”
레온은 의아한 목소리로 아벨을 불렀다. 왜냐하면 아벨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 배고파서 기어이 저혈당성 쇼크라도 일어났냐?”
“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레온 씨?”
아벨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교수’는 이곳이 탈출 가능 지역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는 계단도 통로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레온과 레니에는 주위를 둘러보곤 ‘과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뿐만이 아닙니다. 도면을 보니 이곳은 바로 그 초대형 화물승강기랑 가까운 지역입니다. 물론 폭발과 계속된 붕괴로 지금 승강기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17년 전에 왜 ‘교수’는 굳이 <초대형> 화물승강기를 고친 다음 가동시켜 내려와야 했을까요?”
차츰, 아벨이 느끼는 불안감이 두 사람에게도 전염되었다.
“며칠 전에 ‘교수’가 젊었을 적 발명한 로스트 테크놀러지 병기가 폭주하여 피해를 입힌 적이 있냐고 물어보았을 때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기억나시죠? ‘17년 전에 실험 도중 <아주 약간> 실수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 피해자는 단 세 명뿐이었다.’라고 하셨죠. 방금 필리프 씨는 17년 전에, 당시 18살이었던 ‘교수’가 세 명의 친구들과 이곳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노엘 씨는 어제 저녁에 문제의 그 별장에서 ‘교수’의 작업을 도왔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그렇다면!”
레온은 경악했고, 엘더 레니에마저 장생종과 별 인연이 없는 감정- 공포에 사로잡혔다.
“잠깐만, 아벨. ‘교수’가 17년 전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지?”
“예에! 저 엄중히 봉인된 화물승강기 안에 있는 것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위험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레온 씨~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탈출할 수 있다는 것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입니까아~~”
아벨이 통곡하는 것과 동시에, 17년 동안 잠들어 있던 <그것>이 마침내 눈을 떴다.
(6장에서 계속)
My Sacrifice (Sung By Creed)
Dedicated to "Leon Garcia De Asturias-DANDY LION"
Hello my friend we meet again
It's been a while where should we begin… feels like forever
Within my heart are memories of perfect love that you gave to me
Oh, I remember
When you are with me
I'm free… I'm careless… I believe
Above all the others we'll fly
This brings tears to my eyes
My sacrifice
We've seen our shares of up's and down's
Oh, how quickly life can turn around in an instant
It feels so good to reunite
Within yourself and within your mind
Let's find peace there
When you are with me
I'm free… I'm careless… I believe
Above all the others we'll fly
This brings tears to my eyes
My sacrifice
I just want to say hello again
I just want to say hello again
When you are with me
I'm Free… I'm Careless… I believe
Above all the others we'll fly
This brings tears to my eyes
When you are with me
I'm Free… I'm Careless… I believe
Above all the others we'll fly
This brings tears to my eyes
My sacrifice
My sacrifice
I just want to say hello again
I just want to say hello again
My sacrifice
*.Creed의 곡은 한글로 번역하면 도저히 그 맛이 살아나지가 않아 알비온어(!) 가사 그대로 올립니다. 쉽게 다가오는 가사이기도 하고요.
R.A.M.에서 레온을 처음 본 순간부터, 강력하면서도 가슴이 확 트이는 록 사운드와 굵직한 보컬, 그리고 나의 삶을 지켜주며 완전한 사랑을 선사한 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의 희생을 다짐하는 가사를 지닌 이 My Sacrifice를 테마곡으로 정해버렸습니다. 레온 가르시아, 단연 최고입니다!
*.<CLOUD 9>을 완결한 후, CANON의 <R.O.M. 7권 극광의 송곳니> 설정을 보고 무척 놀랐는데, 원작 R.O.M 7권에도 ‘단생종인 가족과 함께 사는 장생종’이 등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제가 요시다 선생님과 같은 우주를 체감했다는 사실에 감격했습니다!
*.12월 2일 오전에 <WALK ON>의 연재가 시작될 때, 저는 그저 소탈한 마음가짐으로 꿈을 털어 놓는 것처럼 [R.A.M. Side], [R.O.M. Side], [R.O.M. Nexus]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WALK ON> 1장에, 감상에 도움이 될 만한 설정과 연대표의 일부가 함께 올라갈 예정입니다.
*.원작의 <GUNMETAL HOUND>에서 ‘교수’가 제출한 “신부 트레스의 대규모 제압전용 추가 장비에 대한 구체안- 전고 18m, 중량 43.4t에 변형 합체 모드” 기억하시는 분 계실 겁니다.
다행히도(?!) 이 기획은 그저 기획으로 끝나버렸지만 교수님을 너무도 사랑하는 제가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지요. 건타쿠이신 요시다 선생님과, 역시 건타쿠이신 THORES 화백님, 또 다른 건타쿠인 저, 현이 노력하면 이러한 교수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런고로,
파견집행관 ‘프로페서’, 당신의 소원은 제가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첫댓글 <CLOUD 9> 마지막 장인 6장은, 항상 하던 대로 하루 쉬고 수요일 오전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매일 연재하는 것과 격일 연재 중 어느게 편하신지 궁금합니다. 글의 길이가 결코 짧지 않은 만큼, 저는 격일이 편할 것 같은데..
매일 연재하시는 것은 무리지요. 격일도 읽는 입장에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납득하실때까지 충분히 다듬으시면서 천천히 올리셔도 좋아요. 다음편 정말 기대되네요. 연재 기다리면서 챙겨보는 건 요즘 이거 하나뿐이에요. 행복합니다. 정말 공들여서 설정 치밀하게 짜고 쓰시는것 같아서 읽으면서도
감동 받고 있어요. Walk On도, 뒤이어 더 쓰실지 모르는 이야기들도 기대하겠습니다^^
우와우와 진짜 스나오님보다 더 잘쓰시는것 같아요! 진짜 너무 감사하게 읽고 있어요!
이제야 왜 제목이 '클라우드 나인'인지 나온 셈이군요.>.< 이번 편에서 레온씨의 대사가 너무 멋졌어요. 덧붙여 '레온씨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끝에 겨우 한마디 하는 아벨이라니(...) 주인공 맞냐고 찔러주고 싶군요 ㅠㅠd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너무 잘쓰시는 거 아닙니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칭찬들에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글구 요시다 선생보다 제가 '교수'를 많이 등장시키긴 했지만, 글솜씨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ㅠ_ㅠ 게다가 요시다 선생께서 살아계셨다면 '교수' 정말 많이 멋지게 등장시켜주셨을 거예요. Ax결성 당시 이야기를 쓰실 예정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다들 글 잘 쓰시는 분들이십니다아~ 손을 부러뜨리신다니요, 그렇게들 좌절하시면 안되요오! 저는 여러분들의 글이 있었기에 기어이 완결에 도달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CLOUD 9>에 함께 참여해주신 겁니다. 혼자서 읽고 있던 것보다 더욱 생기 발랄한 내용으로 연재되었으니까요. 그저 감사드릴 뿐!
오랜만에 들어와서 글을 읽는데,,,,너무 재밌네요,,,앞으로도 좋은 소설 많이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