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를 사랑합시다
본문- 요한일서 2: 7- 11
제목- 형제를 사랑합시다
먼저 옆사람들과 인사하면서 시작합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보다 저는 이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종종 확인합니다. ‘아빠 사랑하고 있니?’ 라고 물어보면 사랑하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사랑하니? 하고 재차 물으면 보통 손을 높이 들어 자기의 어깨 너머까지 벌리면서 ‘이 ~ 만큼’이라고 자기 마음을 표시하곤 합니다.
오늘 주제는 사랑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주님과의 교제,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를 통하여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할 수 있을까를 말씀을 통해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형제와의 코이노니아를 통하여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이미 선언하였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계명은 사실상 새 계명은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랑이라는 이 말씀의 주제는 독자들이 이미 요한복음을 통해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제 옛 계명, 즉 이미 알고 있는 계명이요 이제는 실천단계에 들어가야 할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7절 후반에 보면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제자들의 사역의 중심적 내용이요 특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아주 중요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종종 제가 성도님들 직장에 전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도들 간에 집사님, 권사님, 혹은 장로님 같은 표현에 익숙합니다. 제가 어제도 브라질 집회를 위하여 여행사에 전화를 하였는데, ‘김사장님 바꿔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김권사님 바꿔주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서는 그것이 더 편안하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호칭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직장에 전화가 왔을 때 두 가지 반응이 생긴답니다. 하나는 ‘아, 아무개가 권사였구나.... 그 분이 그래서 그렇게 온유하고 사랑이 많으셨구나’ 하고 잔잔한 감동을 줄 수가 있는가 하면, 전화를 받는 사람이 "아무개가 집사입니까? 라고 반문할 때 ‘아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하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살아가는 동안 교회안에서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거칠고 험한 세상이라는 삶의 자리를 우리는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기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속에 푹 빠져서는 안되겠기에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당부하기를 "너희가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한 자는 되지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요한이 권면한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좀 부담스러운 주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대상도 너무나 광범위합니다. 성경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야지요?" 아멘~. 좀 자신이 없는 대답이군요. 다시 한번 묻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야지요?" 아~멘. 톤이 좀 높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는 대답들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이니까 속으로 대답해 보세요....우리 크리스천들은 원수를 가질 수 있다. 혹은 없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원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수가 없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자체가 필요가 없는 거지요. 이 계명은 알고 보면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리고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우리에게 여전히 원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원수라고 생각되어지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세요. 흔히 원수 맺은 사람들에 대한 반응은 이런 것입니다. ‘그 인간은 죽지도 않나?’ 같은 아파트 살고 있다면 ‘그 인간 빨리 이사나 갔으면 좋겠는데.... 안 가면 나라도 이사 가야지’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사도요한의 마음 속에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왜냐하면 당시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나아가 원수를 맺고 사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들을 향해서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서 서로 사랑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대단히 추상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사람이 "사랑합니다"하면 조금 예민한 사람은 "당신이 날 언제 봤다고 사랑한다고 그러느냐?"며 반응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단어는 깊은 친밀감으로 이어질 때 비로서 어울리는 말인데 처음 보는 사람보고 안내위원이 대뜸 ‘형제님 사랑합니다. 자매님, 사랑합니다" 이러니까 속이 좀 미씩거리는 것입니다.
티디에 가면 생전 얼굴도 못 보던 사람들이 ‘사랑합니다’ 하고 허그를 하려고 하면 ‘이 사람들 위선자들 아니야?’ 하고 심한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사실은 그것이 정상적인 반응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보편적으로는 너무 쉽게 사랑을 말하곤 하는데, 사도요한의 눈 높이로 보니까 사랑의 실천이 원수 간에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도 먼저 실천되어야 함을 본 것입니다.
사랑은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나면 배우자가 생겨서,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도 만족할 만한 사랑의 관계가 안 되는 가정들이 있어요. 한걸음 나아가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도 이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파트의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도 이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가는 직장의 동료들도 이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웃을 사랑하는 문제, 그 다음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싫은 사람이지요, 나하고 의견이 안 남는 사람이지요. 나는 해코지 안했는데, 그는 나에게 계속 어려움을 주고, 부담을 주고, 피해를 주는 사람이지요. 안 만나면 좋고, 없으면 더 좋은 사람입니다. 원수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원수를 사랑하라. 본문 말씀은 그 사랑에 대한 단계를 쭈욱 말씀하면서 먼저 사도요한은 원수 거기까지 갈 거 없고, 이웃 거기까지 갈 거 없고, 형제와 자매부터 먼저 사랑합시다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옆 사람과 인사합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조금 느낌이 달리 오면 지금까지 드린 말씀이 조금 도움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교회는 풍금만 사용하다가 피아노를 샀어요. 우리 교회도 개척할 때 피아노 살 형편이 안 되어서 풍금을, 그것도 할부로 드려놨어요. 그것도 예배에 풍금이 있어서 찬송소리에 반주가 되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런 교회들이 피아노를 사면 얼마나 행복한지 아십니까? 우리 저 그랜드피아노는 뉴질랜드로 이민간 김장로님의 딸 김민경집사 부부가 헌신한 것입니다. 10년도 넘었어요. 그걸 이렇게 볼 때마다 그 김집사 부부 생각이 납니다. 강대상을 볼 때마다 이건 아무개 장로님 부부가 했지. 하나하나 생각이 납니다.
그 교회는 피아노를 사는 기쁨을 가지고 피아노를 드려왔는데, 가지고 와서 문제가 생겼어요. 피아노를 성전의 오른쪽에 놓아야 하느냐, 왼쪽에 놓아야 하느냐 문제로 다투다가 교회가 싸우게 되고, 결국은 갈라졌어요. 교회가 갈라졌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일인데, 너무나 작은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오른쪽에 놓으면 어떻고, 왼쪽에 놓으면 어때요? 그 교회의 구조에 어울리게 놓으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성가대가 오른쪽에 있으면 오른쪽에 놓으면 좋을 것이고, 성가대가 왼쪽에 있으면 왼쪽에 놓으면 좋을 것이고, 위에 놓은 형편이 안 되면 아래 놓으면 되는 것이고, 아래 놓은 형편이 안 되면 어디는 저 사회석 같은 위에다가 놓아서 반주자가 늘 돋보이는 교회도 있어요. 어쨌든 형편에 따라 하는 거예요.
우리는 모든 도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지, 그리고 배치는 좀 더 모든 사람이 볼 때 편안하고, 편리하면 좋은 거예요. 결국 그들은 그 것 때문에 싸우다가 갈라진 거예요.
지난 번 샤론의 밤에서 우리 학생들에게 한 이야기를 한 번 더 드리고 싶습니다. 서울 총각과 경상도 처녀가 결혼을 했어요. 신혼에 얼마나 달콤하고 재미가 있습니까? 어느 날 남편이 출출해서 아내보고 말합니다. ‘여보, 우리 국수나 끓여먹자’ 그랬더니 아내가 그 말을 받고 ‘국수가 아니라 국시지요’ 이 부부는 갑자기 국수가 맞냐, 국시가 맞냐 가지고 싸우다가 결론을 못 얻고 우리 이장님한테 가서 물어봅시다.
이장님을 찾아갔습니다. ‘이장님, 이 양반이요 국시라고 우기는데, 국수가 맞지 않습니까?’ ‘아니 이장님이요, 국시가 맞지, 국수가 맞습니까?’ 그리고 싸웁니다. 그 얘기를 들은 이장님이 말합니다. ‘국수하고 국시는 재료가 틀려요’ 그래서 눈이 번쩍 트였어요. ‘아니, 재료가 틀리다니요’ ‘국수는요. 밀가루로 만든 거구요. 국시는 밀가리로 만든 것입니다’ 이 부부가 궁금해 졌어요. ‘밀가루는 뭐고, 밀가리는 뭡니까?’ ‘밀가루는 봉투에 넣은 거구요. 밀가리는 봉다리에 넣은 것입니다’ 내친김에 한 번 더 물었습니다. ‘봉투는 뭐고, 봉다리는 뭡니까?’ ‘봉투는 기계로 만든 것이고, 봉다리는 손으로 풀칠해 만든 것입니다’ 그냥 두 부부는 웃고 말았어요.
자기들이 심각하게 싸우고, 해결이 안 되어서 다른 사람한테까지 가져간 문제가 별게 아니예요. 국수를 끓여먹으면 어떻고, 국시를 끓여먹으면 어때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먹으면서 만드는 과정에서 부부가 사랑과 은혜가 하나가 되어지는 친교의 자리가 되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 이야기는 아주 작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를 심각하게 만들고, 다투게 만들고, 헤어지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는 일이예요.
제가 상담사례를 보았는데, 어떤 부부는 치약을 짜는 문제 때문에 이혼을 했어요. 남편은 가운데 쿡 눌러 짭니다. 좀 편하긴 하지요. 저도 치약을 보면 아이들이 가끔씩 가운데를 눌러 짤 때가 있나봐요. 그러면 제가 뒤에서 눌러가지고 반듯하게 해 놓고 짜는데, 어느 날은 저도 좀 심술이 나가지고, 가운데 짜면 기분이 어떨까? 저도 확 가운데 눌러보면 기분이 괜찮아요. 자, 문제는 쿡 눌러 짰을 때 그 사람은 기분이 편한데, 다음 사람이 쓸 때가 불편합니다. 아내가 이야기 합니다. ‘여보, 다음부터 치약을 쓸 때 뒤에서부터 눌러서 쓰세요’ ‘알았어’ 다음날 보니까 여전히 가운데가 푹 들어가 있어요. 그 다음날도 여전해요. 결국 그들 부부는 치약을 짜는 방법 때문에 갈라서고 말았어요. 갈라선 이혼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지만, 이혼의 동기는 너무나 작은 거였어요.
사랑한다고 상대방을 말하지만,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사랑을 위해서 아내가 요청하는 뒤에서 치약을 짜주는 그 정도의 수고와 배려가 없이 아내를 하늘만큼 사랑한다고, 머리가 파뿌리가 될 만큼 사랑한다고 그 표현은 얼마나 허황된 것입니까?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냐 그 말입니다. 사랑은 그래서 추상적이지 않아요. 사랑은 동사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생활에서 되어지는 것들 속에서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은 사랑합니다 이런 얘기를 잘 안 했습니다. 어떤 분은 결혼 생활 4- 50년을 해도 한번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안 했대요. 그래도 그 분들은 이혼하지 않고 4- 50년을 잘 살고, 아들 딸 잘 낳고 잘 살아요. 그들은 사랑이란 표현을 했으면 더 좋았지만 그들은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거기서 더 해서 표현을 하자고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바뀌어서 말로만 사랑한다는 말은 많지만, 실제적으로 우리의 몸과 생각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옛사람들보다도 못 한 것이 되는 거예요.
사도요한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안다라고 하는 표현을 요한은 많이 쓰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 중에 우선적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를 사랑하지 못 한다면, 어떻게 여러분 그 다음 단계를 사랑하시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은 그 교회 식당이 많아요. 제가 늘 부러워하는 목사님입니다. 거기는 무슨 교회 행사하면 어느 단체 회장이신데, 오늘은 무슨 식당, 오늘은 무슨 식당 계속 달라요. ‘목사님은 참 행복하겠습니다’ ‘왜요?’ ‘그 식당이 그렇게 많아서 다니시니까 참 좋네요’ ‘그렇지. 그런데 신경이 쓰여’ ‘왜냐하면 한 번씩 다 가주어야 하니까. 무슨 모임이면 이번에는 아무개식당, 또 무슨 모임이면 이번에는 어느 식당’ 다 한 번씩 가야 하는데, 메모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느 때 한 두 번 거르면 섭섭하다고 얘기가 들려 들어와서 굉장히 쉽지 않다는 거예요. 제가 그 얘기를 듣고, 저희는 식당을 하는 분들이 별로 없는데 참 식당 하나 제대로 된 분이 왔으면 좋겠다고 그랬더니, 온누리부페가 왔어요. 부천에서 제일 큰 식당을 주셨어요. 할렐루야!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고백합니다. ‘언제나 우리가 사랑하되 정말 우리 안에 그 사랑이 다른 사람들로 인하여 알게 하라’ 그리고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 어떻게 사랑했는지 알지 않습니까? 3년을 눈물로 섬기고, 매 맞으며, 헐벗으며, 굶주리며, 멸시당하며, 조롱당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견뎌왔고 지금까지 사랑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끝납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나를 본받는 자들이 되십시오’ 뭘 본받으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거 본받으라는 이야기예요.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 세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가 사랑해야할 이유는 하나님께 속해있기 때문인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하면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에게 속해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해있다고 하는 말은 그 사랑의 특징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보아도 적어도 평안의 교회를 출석하는 성도들은 그 분이 한 달이 되었든, 1년이 되었든, 10년이 되었든 사랑이라고 하는 흔적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꿀병 속에 젓가락을 가지고‘ 혹은 숟가락을 가지고 푹 담갔다가 꺼내던지, 살짝 댔다 꺼내던지, 거기에는 꿀이 묻지 않겠습니까? 많던 적던 우리는 주님의 속성인 사랑이 이제는 주님 안에 있는 우리라면 그 사랑이 조금이라도 맛배기라도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사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보면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 사도는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는 뭐예요? 우리가 사랑 받을만 해서 받은 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게 아니예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인 줄 믿습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독생자의 주심을 통해서 확인됐어요. 그 사랑이 너무 크다. 너무 커서 그 사랑이 헤아릴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고, 그러면 사랑을 받고나서 그저 감격만 하고, 감사만 하면 되겠습니까? 그 사랑을 우리가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그 사랑을 증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알려야 하고,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할 의무와 사명이 생기는 것입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사랑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한 번 들어 보실래요? 저 한번 보세요. 제 얼굴을 보세요. 제가 예수 믿게 생긴 얼굴입니까? 조직폭력배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깡패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어떤 분들은 봐도 정말 무시무시하게 생기셨어요. 그런데 그런 분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그래요. 그런 분들은 참 산증거지요. 친구들이 그런답니다. ‘니가 예수 믿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성직자가 되고, 평신도지도자들이 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당신이 봐도 그런 내가 주님의 사랑을 이런 경우에 이렇게 입고 나서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게 전도예요.
무슨 전도를 신학적으로 전도하는 것이 전도가 아니예요. 그럴 때 ‘야,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역사하는구나.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체험되어지고, 이렇게 남아있구나.’ 하면서 옆 사람이 한 번 맛보는 거예요. 고추장 한번 담갔다고 해서 다 마실 필요가 있나요? 새끼손가락으로 한 번 맛보면 전체 간이 됐는지 안 됐는지 알 수 있잖아요. ‘아,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그걸 통해서 맛보는 거지요.
하지만 형제를 사랑하고, 자매를 사랑한다는 기본적인 사랑에 대상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조금 더 나아가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우리가 하는 그 일에도 때때로 어려움이 올 수가 있어요. 인도에 선교하고 있던 어떤 여선교사님이 선교사역을 하면서 너무나 힘이 들고 지쳐서 절망과 비통 가운데 몸부림치다가 이제 더 이상은 선교사역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을 하고, 절망 가운데 있다가 하루는 산 위로 올라갔어요. 그 산 높은 곳에 올라가서 소리를 치고 싶었답니다. 그리고 이 선교사는 하늘을 향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대요. ‘My love, I need you- 하나님,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절규하듯이 그렇게 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이야기 했답니다. 조금 있다가 이런 응답이 오더랍니다. ‘My children, I need you, too- 나도 역시 필요로 하고 있어’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존감이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신다, 할렐루야!
이 황목사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나를 필요로 하신다. 여러분들이 늘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필요로 하신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을 원하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형제에게, 우리 이웃에게 나아가서는 없으면 좋고, 안 보면 좋은 원수에게까지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내게 필요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의 필요에 기꺼이 하나님께 응답한 하나님의 일꾼이신 줄로 믿습니다.
2004년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부족했지만 별 열매도 없이 시간만 보낸 그런 부족한 종이었지만, 내가 다시 한 번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지만, 아버지는 방탕하고 있는 아들을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돌아왔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방탕하고 있는 중에도 사랑하고 있었어요. 한 해도 충성된 사람이 있어요. 충성도 아니고, 불충성도 아니고 그저 애매모호하게 한 해를 보낸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각하게 불충성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분들까지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필요로 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 사랑에 붙잡혀서 오늘도 주님과 함께 새 힘으로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작은 사랑일지라도 사랑을 표현하고 나누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이제 형제를 사랑하며 자매를 사랑하다가 이웃도 사랑하게 하시고, 이웃 사랑하다가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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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