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돌아온 직후였죠. 1956년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첫 패션 쇼를 열었는데, 어떤 사진작가가 그걸 자꾸 1957년이라고 주장해요. 내가 한 일, 내 기억이 가장 정확한 거예요. 당시 상공장관 金一煥씨의 배려로 高麗毛織(고려모직)의 옷감 샘플들을 얻었는데, 촉감이 뻣뻣하고 무거웠으나 국산 옷감들로 첫 컬렉션의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 큰 기쁨이었어요. 패션 쇼의 파이널 넘버로 당시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조미령씨에게 웨딩 드레스를 입혔었죠』
―문화계에선 파리를 제 집 드나들 듯하는 사람들이 많습디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이죠. 그래서 공부하기 위해서였죠. 나는 그후로도 30년 동안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파리에 다녀왔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최은희씨가 듀마 原作의 영화 「椿姬(춘희)」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는데, 사교계의 꽃 椿姬에겐 사치스런 의상을 입혀야 되지 않겠어요. 내가 니나 리치의 파리店에서 산 벨벳 모자, 팔목까지 올라오는 가죽 장갑 등을 빌려 주기도 했어요』
―미스 코리아의 샤프롱(Chaperon:사교계에 나가는 젊은 여성의 보호자)으로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도 참가하셨더군요.
『1957년 미스 코리아가 선발된 직후 한국일보 張基榮(장기영) 사장께서 저더러 좀 만나자고 해요. 한국일보사가 창사 초창기에 신문 홍보를 위해 매년 미스 코리아를 뽑아 그 다음 해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참가시키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었거든요. 사장실에 갔더니 비자를 내주고 경비도 절반을 대줄 터이니 샤프롱 李매리 여사를 보조하여 미스 코리아를 데리고 유니버스 대회에 다녀오라고 부탁하셨어요.
대번에 내가 「사장님, 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지 얼마 안 됩니다」라며 사양했어요. 미국 비자를 내 주는 것만 해도 상당한 혜택으로 알던 시절이어서 그런 조건이면 내가 「좋아라」 할 줄 생각하신 거죠. 한국일보 사옥을 빠져나오는데 업무부장이 뒤따라와 「사장님이 다시 보자고 하신다」고 해요. 다시 사장실에 들어가니까 張사장님이 「아까는 실례했다. 우리 社에서 盧여사를 정식 샤프롱으로 임명하고 모든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셔요.
나는 당황해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사장님의 호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올해 미스 코리아로는 준비부족으로 아무 성과도 낼 수 없으니까요」라고 다시 사양했습니다. 張사장이 「다음 대회를 위해서라도 이번에 가 주어야 한다」고 요청하셔서 샤프롱이 된 거예요』
―미스 코리아라면 제겐 吳賢珠(오현주)라는 이름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녀가 세계에 新生 한국을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죠.
『1958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리서치해 보니 요령이 생겨요. 지성적이면서 영어회화를 잘 하는 미인이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1958년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리기 전에 나는 吳賢珠양에게 참가를 간곡히 권유했죠』
―어떻게요.
『내 동생이 당시 이화여대에 재학중이던 오현주양과 잘 아는 사이라 우선 동생을 보내 「1958년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에 나오라」고 설득했죠. 오현주양은 영어회화가 능숙하고 무용을 잘했던 대단한 재원이었어요. 吳양은 하나를 가르치면 셋을 해낼 만큼 재치도 있었어요. 문제는 국내 선발대회였죠. 그래서 내가 심사위원이던 백철·정비석·모윤숙씨 등을 찾아가 吳양의 국제 경쟁력을 미리 설명해 드렸어요』
―아, 그거 부당한 청탁 아닙니까.
『한국에서 통하는 미인이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통하는 미인이 뽑혀야 했던 거예요. 南美 등지의 늘씬한 혼혈 미인들이 나오는 대회에서 동양계 미인이 주목을 받는 게 그리 쉽진 않아요. 그런데도 작은 체구의 오현주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1959년 미국 롱비치에서 개최된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인기상, 포토제닉상, 스피치상을 휩쓸었고, 15명이 뽑히는 최종 결선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선택이 옳았던 거죠』
미스 코리아 吳賢珠의 大활약
―최근엔 미스 코리아 대회가 性을 상품화한다는 일부의 비난도 있는데요.
『당시 한국이라면 전쟁을 치러 폐허화한 나라, 심지어는 어디 붙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던 시절이었어요. 吳양과 저는 6·25전쟁으로 얼룩진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했습니다. 세계 각국의 미인들은 개회식에서 텔레비전 중계로 全미국의 많은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선물을 롱비치 시장에게 증정하고, 시장이 주는 행운의 열쇠를 받게 되어 있었죠.
오현주는 남색의 선을 두른 장삼형의 玉色 양단 드레스에 빨간색 장구를 메고 두둥둥 두드리면서 무대 위로 올랐어요. 관중들이 장구소리에 놀라 일제히 시선이 집중됐을 때 미스 코리아는 장구를 벗어 시장에게 주고 행운의 열쇠를 받은 후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는 이렇게 큰 선물을 드렸는데, 이렇게 작은 걸 주세요?」라고 반문했어요. 이런 유머에 10만 관중은 그라운드가 떠나갈 듯한 박수 갈채를 보냈어요』
―그래서 吳양이 스피치賞을 받은 거군요.
『아니, 대회 참가 각국 미인들의 스피치 때 吳양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 찾아오시는 외국손님들을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많이 부흥되었으니 마음 편하게 한국문화를 만나러 오십시오」라고 했는데, 영어도 유창했고 의미도 있었거든요』
녹차 한 모금을 마신 노라노 여사의 말이 다시 계속된다.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오현주를 스카우트하려고 발벗고 나섰죠. 한 영화사가 「스지웡의 세계」란 영화에서 당시 인기 남우 윌리엄 홀덴을 상대할 여주인공 「스지웡」 役을 찾고 있었는데, 오현주가 적격이라며 출연 계약을 서두르는 거예요. 무용과 연기에 소질이 있으니까 빅 스타로 만들겠대요. 나보고는 매니저로 계약하재요. 오현주의 아버지와 오빠가 적극 반대하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죠』
―오현주씨의 부친이라면 당시 제1야당 민주당의 실력자 오위영(4·19 혁명 후 민주당 정권에서 무임소장관 역임)씨였는데, 왜 반대합디까.
『스지웡은 舞姬(무희)로서 우연히 만난 홀덴과 사랑하다가 헤어진 후 창녀가 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良家의 딸로서 못할 짓」이라는 것이었죠』
―지금 오현주씨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연극계에서 연출 활동도 하다가 이젠 가정에서 알뜰하게 잘 살고 있죠. 지금도 참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때 선생님께서는 오현주씨에게 「아리랑 드레스」를 만들어 입혔다죠. 그걸 「국적불명의 옷」이라고 비판한 사람들도 있었는데요.
『그걸 개량한복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소매 없는 롱 드레스와 저고리를 본뜬 짧은 재킷으로 된 완전한 서양식 드레스예요. 미스 월드 대회에 나가는 미스 코리아를 위해 내가 디자인했어요. 그 후 「아리랑 드레스」는 아직 서구 야회복에 익숙지 않은 1950∼60년대의 우리나라 외교관 부인들이 파티 드레스로 많이 입었죠. 한복감으로 만든 데다 어딘지 분위기가 치마 저고리와 비슷하여 우리 여성들을 안심시켰던가 봐요』
―미스 유니버스 대회 이후 선생님은 더욱 有名勢를 타셨죠.
『1962년인가, 제8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참가했던 배우 열 명의 옷을 모두 내가 한잠도 못 자고 만들어줬죠. 아, 그랬더니 당대 최고의 육체파 배우 金惠貞씨가 화를 내며 찾아와서 「선생님, 내 돈은 돈이 아닙니까. 내 옷도 해 줘요, 예」라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