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불의 형식.
이 장에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예불을 살펴봅시다. 먼저 전통적인 예불입니다.
예불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부처님 당시에 처음 생겨난 것입니다.
물론 진리를 생활화하고 그것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처음 예불이 시작될 때는 단순한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예불에 그 원형을 알 수 있게 하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불의 뜻을 깊이 이해하면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오분향례(五焚香禮)입니다.
오분향례란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광명운대(光明雲臺) 주변법계(周徧法界) 공양시방(供養十方) 무량불법승(無量佛法僧)’
하고 하는 것입니다.
오분향례는 ‘다섯 가지 향을 피운다.’는 의미로 수행의 결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계향부터 해탈지견향’에 이르는 오분향의 부분은
‘계율을 잘 지키는 바른 행동을 하여 지혜로워지고,
모든 업장을 스스로 벗어 자유로워지며 그 경지에 머물지도 않고
더욱 진리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향에 비유하여 밝힌 것입니다.
후렴구로 나오는 ‘광명운대부터 무량불법승’까지는 ‘밝고 높은 하늘과,
두루 통하여 없는 곳이 없이 계시는 한량없는 부처님과 근본적 진리,
그리고 일체의 수행자들께 향기로운 삶을 살 것을 다짐합니다.’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후에 중국에서 삽입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바로 뒤에 헌향진언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사료됩니다.
이어지는 부분은 헌향진언(獻香眞言)입니다.
헌향진언은 향을 바치면서 드리는 진언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진언이라는 의미를 살펴봅시다. 진언의 의미는 주문(呪文)입니다.
진언은 범어 ‘다라니’의 의역(意譯)입니다.
참된 주문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주문의 순수한 우리말은 ‘씨불임’입니다.
쉴 새 없이 지껄일 때 흔히 ‘씨불인다.’고 하지요? 이 씨불임은
‘씨뿌림’ 즉, ‘씨를 뿌림’에서 나온 말입니다.
입으로 씨를 뿌리 듯 한다는 것이지요.
농부가 씨를 뿌릴 때 보면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쉴 새 없이 말을 할 때 ‘씨불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복의 씨를 뿌리면 복을 거두고 화(禍)의 씨를 뿌리면 화를 입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문을 씨부림이라고 할 까요?
그것은 쉴 새 없이 자기 암시를 건다는 말입니다.
끊임없이 반복하므로 써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문의 특성 때문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조로 주문 형태로 진리를 전하게 됩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주문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하는
반야심경의 주문이지요.
헌향진언은 ‘옴 바아라 도비야 훔’ 입니다.
진언은 일반적으로 세 번 외웁니다.
셋이라는 숫자는 앞에서 설명한바 있지요?
굳이 세 번 외우는 것은 온천하가 함께 외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전에서 진언을 번역하지 않고 그냥 음역(音譯)만 했습니다.
그 저변(低邊)에 있는 논리는 진언이 신(神)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진리와 부합하지 않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우선은 진언이 인간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점이고,
진언의 효과가 자기 암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잠재의식에 각인 시키는 방법이 진언이라는 것입니다.
내용을 모르는데 잠재의식이 그것을 인식할 까요?
두 번째는 진리가 보편적 구조라는 것입니다.
특별한데만 맞는 것은 무엇이든 진리가 아닙니다.
수학자들이 어떤 이치를 알아내면 가장 먼저 따지는 것이
‘보편타당한가?’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따지는 것이 ‘간단명료한가?’입니다.
진언이 신들의 언어라 번역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보편타당하지 않으므로 진리의 요건을 충족시키기 못합니다.
문학이나 예술이라면 진리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받아드리는 사람이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취사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진리가 아니면 안 됩니다.
취사선택의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언은 그 의미를 누구나 알 수 있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신들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진언이 신의 언어라 할지라도 신(神)쯤 되면서 인간의 언어도 모른다면
어디 신이라 할 수 있을까요?
다음은 칠정례입니다. 이 부분은 확실하게 나중에 추가된 부분입니다.
일부는 중국에서 그리고 일부는 우리나라에서 추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내용을 살펴봅시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삼계도사(三界導師)
사생자부(四生慈父)
시아본사(是我本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는
목숨이 다하는데 까지 마음이 이르도록 예를 갖추어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삼계도사(三界導師)의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합니다.
앞에서 수성(數性)을 말할 때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얘기한 바 있지요?
그 때도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모든 것을 대표하여 사람이라 했는데
삼계 역시 그런 개념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런 삼계에 도(道)를 전하는 스승이 삼계도사입니다.
사생자부(四生慈父)는
사생(四生). 즉,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의
‘네 가지 부류의 생명체의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오늘 날에 와서는 생명체의 구분을 중학교 과정만 배워도 잘 하지만
부처님 당시는 생명체의 구분이 앞에 말한 네 가지로 알고 있었습니다.
태생(胎生)이란 태(胎)로 나는 것을 말하는데 포유류를 말합니다.
난생(卵生)은 조류나 어류, 파충류, 양서류 같이 알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습생(濕生)은 모기나 잠자리 같이 물에 알을 낳아 태어나는 것으로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줄 알았던 것이지요.
마지막 화생(化生)의 경우는
아직까지 지구상에서 발견된바 없는 생명체의 형태로
자연적으로 그냥 생겨나는 존재를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꽃에서 화생할 때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돌이나 나무 같은 곳에서도 생겨난다고 합니다.
(과학적 견해는 분명 아닙니다.)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경우 아미타불의 눈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사생(四生)에 관한 부분은 문자에 국한된 의미로 보지 말고
모든 생명체를 말한다고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나아갑시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十方三世) 제망찰해(帝網刹海)
상주일체(常主一切) 불타야중(佛陀耶衆) 입니다.
시방이란
십방(十方)을 말하는데 동서남북 네 방향과 그 사이의 방향을 합해서
팔방이고 위와 아래를 합한 것이 시방(十方).
즉, 열 방향입니다. 빠진 곳 없이 모든 방향을 말하는 것이지요.
삼세란 전생(前生), 금생(今生), 내생(來生)을 말하니까
모든 생애라는 의미이지요. 따라서 시방삼세란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라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제망이란 제석천에 있다는 인드라의 망을 말합니다.
제석천의 하늘에는
보석으로 이루어진 망이 있다고 하는데 인드라의 망이라고 한답니다.
찰해는 3천대천세계의 20배에 해당하는 찰종(刹種)이
사방으로 무수히 많은 것을 말하고
찰해가 무진하게 많은 것을 법계(法界)라 합니다.
즉, 제망찰해란 무수히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상주일체란 ‘항상 있는 모든’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이 있을 까요? 바로 뒤에 나오는 불타야중입니다.
불타야중이란 불타의 무리. 즉, ‘부처님들의 모임’, ‘부처님들’입니다.
그러므로 시방삼세부터 불타야중까지는
언제 어디서나 계시는 무수히 많은 모든 부처님들께 라는 말입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이번에는 달마야중만 알면 되는군요! 달마야중이란
역시 ‘달마들의 모임’, ‘달마들’이지요.
달마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달마란 범어 ‘다르마’를 말합니다. 다르마란 변하지 않는 존재를 말합니다.
더 이상 이를 데가 없는 궁극에 다다른 존재라는 것이지요.
즉 깨달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불타도 범어로 ‘부타’. 즉,
깨달은 사람인데 왜 또 달마를 별도로 말 할까요?
불타와 달마. 즉, ‘부타와 다르마’가 다른 뜻인가요?
칠정례를 드릴 때는 굳이 그렇게 구분하는 것입니다!
불타는 인간에서 깨달았을 때로, 다르마는
인간 이외의 존재가 깨달은 것으로 이해하십시오.
다음으로 갑니다.
지심귀명례
대지(大智)문수사리보살
대행(大行)보현보살
대비(大悲)관세음보살
대원(大願)본존(本尊)지장보살마하살입니다.
이 구절은 일부만 한자를 병행했지요?
이유가 있습니다. 대지(大智)는 말 그대로 큰 지혜입니다.
문수사리보살은 지혜의 화신입니다.
이 보살님은 모든 부처님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지혜에서 화생하여 세상에 지혜의 가르침을 베푸는 보살이 문수사리입니다.
그러므로 문수사리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대행 보현보살이란 이름이 보현인 보살을 말하는데
이 보살님은 실천의 상징입니다.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지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신 법당에 가면 좌우보처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는 지혜와 실천의 의미이지요.
대비 관세음보살의 부분입니다.
대비란 큰 슬픔이라는 말입니다.
큰 슬픔이 어떻다는 것일까요?
또 무엇이 그렇게도 크게 슬프다는 것일까요?
중생들의 고통 받는 것이 크게 슬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자상하게 이끈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이 지니는 의미를 알고 갑시다.
관세음이란 산크리스트어인 ‘아바로키떼스바라’의 의역입니다.
관(觀)이란 보는 것을 말하는데 견(見)과 다릅니다.
견은 ‘드러남만 보고 생각한다.’는 말이고,
관은 ‘드러나지 않은 부분까지 상세하게 살핀다.’는 말입니다.
어떤 것을 보고 아하! 그렇게 생긴 것이구나! 할 때는 견(堅)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구나! 할 때는 관(觀)이 됩니다.
관은 마음을 동원해서 상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면 견은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세음은 세음(世音)으로 세상의 소리를 말합니다.
관세음이란 결국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여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가상(嘉祥)한 아름다움입니다.
관세음보살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아봅시다.
관세음보살을 말할 때 흔히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손과 눈이 각각 천 개씩 있는 자유자재로 보는 보살을 말하지요.
실재로 손과 눈이 꼭 천개씩 있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보지 않는 곳이 없고, 살피지 않는 데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천하를 두루 보고, 모든 중생을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관세음보살에 대해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이라고 표현 할 때도
얼굴이 십 일 면이라는 말이 아니라 시방(十方)과
그 안쪽까지 살피는 보살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관세음보살은 한없이 자상한 성품을 지닌 보살입니다.
그래서 큰 자비의 상징입니다.
다음 구절로 갑시다.
대원본존 지장보살 마하살입니다. 대원(大願)이란 가장 큰 소원을 말합니다.
지장보살님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기 전에는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분이십니다.
모두 다 구제하고 자신이 가장 마지막에 성불하겠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거룩한 뜻입니다.
본존(本尊)이라는 말처럼 본래부터 존귀한 분이 그런 뜻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원본존인 것입니다.
끝에 있는 마하살이란 보살의 앞에 ‘마하’라는 말이 붙은 것입니다.
‘마하’란 범어로 ‘크다’는 뜻입니다. 보살이 범어 ‘보리살타’의 줄임이고 보리살타.
즉, 보살이란 ‘깨달은 중생’이라는 말로 보살 중에
큰 분을 일컬어 보살마하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살과 부처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앞에 잠시 말한 것처럼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이고
부처는 붓다의 한역(漢譯)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먼저 부처에 대해 정확하게 살펴봅시다.
부처란 깨달음을 얻은 존재인데 정확하게는 두 부류입니다.
한 부류는 ‘가서 다시 한 번 오는 존재’입니다. 즉, 여래(如來)입니다.
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많이 들어 보셨지요?
여래는 부처님의 십대명호(十代名號: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여거(如去)입니다.
‘가서 다시 오지 않는’존재이지요. 인간 세상을 포함한 삼계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여열반(無如涅槃)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지요.
반면 보살은 계속 오는 존재입니다.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 자주 오는 것입니다.
계속 참여하는 것입니다.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무슨 할 일 일까요? 자신이 세운 서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일을 이루어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수립하였기 때문에 계속 오는 것입니다.
보살이 부처보다 실력이 부족하거나 경계가 얕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 일을 마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일이 워낙 원대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앞에 등장하는 네 분의 보살님의 경우가 특히 그렇습니다.
온 천하에 지혜를 전하겠다는 것이 문수보살의 서원이고,
오로지 실천을 보이겠다는 것이 보현보살의 서원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돕겠다는 것이 관세음보살의 서원이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성불하겠다는 것이 지장보살의 서원입니다.
이 네 분은 모든 중생이 성불을 해야 그 서원이 이루어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들은 부처님 당시도 보살이고 그 이전에도 보살이었으며 지금도 보살입니다.
우리 모든 중생들이 성불을 해야 이분들도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참 대단한 서원이지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예불문의 여기까지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문맥의 흐름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데도 표현이 변했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계속 살펴봅시다.
지심귀명례
영산당시(靈山當時) 수불부촉(受佛咐囑) 십대제자(十大弟子)
십육성(十六聖) 오백성(五百聖) 독수성(獨修聖) 내지(乃至)
천이백(千二白) 제대아라한(諸大阿羅漢) 무량자비성중(無量慈悲聖衆)입니다.
영산당시란 영산에 계실 때라는 말입니다.
영산이란 영축산으로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던 산의 이름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전해지지 않지만 히말라야에 있는 산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수불부촉이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너는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을 말합니다.
십대제자부터 천이백까지는 부처님의 제자들 숫자입니다.
중간의 독수성이란 홀로 수행을 하여 깨달은 성인을 말하며
노자(老子)나 공자(孔子)같은 성인(聖人)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혹간의 사찰에서 독성각(獨聖閣)이라는 전각(殿閣)을 볼 수 있는데
그곳에 모셔진 분이 대표적인 독수성으로 ‘나반존자’라는 분입니다.
뒤의 ‘제대아라한’이란 ‘이런 모든 큰 아라한’의 표현으로
아라한은 ‘열반에 이른 자’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열반’이란 범어 ‘니르바나’의 음역(音譯)으로 ‘불어서 끈다.’라는 말인데
불을 불어서 끄듯 ‘모든 번뇌를 여위었다.’는 말입니다.
‘무량자비성중’이란 무수히 많은 자비로운 성인(聖人)의 무리를 뜻합니다.
이 부분부터 표현이 우리말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추가된 부분이라 한 것입니다.
중국식 표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넘어 갑시다.
지심귀명례 서건동진(西乾東晋) 급아해동(及我海東) 역대전등(歷代傳燈)
제대조사(諸大祖師) 천하종사(天下宗師) 일체미진수(一切微塵數) 제대선지식(諸大善知識).
서건동진 급아해동은 ‘서쪽하늘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나아가
우리 해동지방까지 이른’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역대전등이란 부처님으로부터 진리가 전해진 것을
등불이 전해진 것으로 표현하여 대를 이어 진리를 전한 분들을 나타냅니다.
제대조사의 ‘조사’는 종파를 창시한 시조가 되시는 분들을 말하니까
제대조사란 종파를 연 모든 큰 스님들이라고 해야겠네요.
천하종사란 ‘천하의 종사’인데 종사는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알아봅시다.
부처님 가르침을 둘로 구분하면 선(禪) 과 교(敎)로 구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두루 갖춘 스님을 종사라 합니다.
조금 더 살펴보고 가지요. 교를 다시 세분하면
경전(經典), 과 율법(律法)으로 구분합니다.
경전은 진리 자체를 설한 내용이고 율법은 수행자가 경계하고 지켜야하는 도리를 말합니다.
거기에 스님들이 수행을 하면서 ‘이렇게 하니까 수행이 잘 되더라’ 해서
후대에 논(論)이라 이름하여 전해지는 것을 보태어 교(敎)의 삼장(三藏)이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삼장이란 경, 율, 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 유명한 서유기에 삼장법사가 나오지요?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을 데리고 천축국에 가서 경전을 가지고 온다는
중국 고대소설의 주인공이요!
거기 나오는 삼장법사가 경, 율, 론 삼장을 다 통달했다고 해서 삼장법사인 것입니다.
특별히 율에 밝은 스님은 율사(律師)라 합니다.
신라시대의 자장율사, 진표율사 등 많이 들어보셨지요?
다음 부분으로 갑시다.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입니다.
일체미진수라는 말은 ‘모든 티끌이나 먼지처럼 많아 헤아릴 수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숫자의 모든 선지식(善知識)께 귀의한다는 내용이지요.
여기서 선지식(善知識)이지 선지식(禪知識)이 아니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참선을 하는 승려만 얘기 한 것이 아니라 비록 재가(在家)불자라 할지라도
모범이 되는 그런 분들을 다 포함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갑시다.
마지막 구절이네요.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僧家耶衆)
유원무진삼보(唯願無盡三寶) 대자대비(大慈大悲) 수아정례(受我頂禮)
명훈가피력(冥熏加被力)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입니다.
승가야중은 스님들이고, 유원무진삼보 대자대비는
‘아아! 사라지지 않는 삼보님의 대자대비하심이여!’ 라는 말입니다.
수아정례 명훈가피력이라는 말은 『어둠의 이불을 덮고 향내음을 맡을 때』.
즉 ‘죽기로 힘을 써서 저의 이 머리를 조아려 바치오니…….’라는 말로
지극한 정성과 결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원공법계제중생은 ‘원컨대 모든 법계의 중생들이 함께’이며
자타일시성불도란 ‘너나없이 동시에 부처가 됩시다.’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불경의 대부분이
시적(詩的) 운율(韻律)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불경을 한자로 번역하면서 암기하기 쉽게 운율을 맞추어 번역한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처음 부처님이 진리를 설하실 때 대중이 기억하기 좋게
시적 운율을 맞추어 설하신 점도 있고, 중국의 문자 구성이
운율을 맞추기 쉬운 구조로 된 까닭도 있습니다.
처음 부처님이 운율을 맞춘 까닭은 대중이 기억하기 좋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발전하여 특유의 곡조를 띄게 됩니다.
그것이 염불이나 독경의 음조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우리말로 번역된 불경은 운율이 잘 맞질 않아서
대부분의 사찰에서 한자로 된 경전을 그냥 읽는 실정입니다.
그 부작용은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염불(독경을 말함)을 해 보면 운율과 박자를 맞추다 보면
의미를 잊기 쉽고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운율과 박자를 놓치게 됩니다.
글자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까닭이지요.
그래도 신도들은 염불을 잘하는 스님을 좋아합니다.
그런 신도들을 붙들고 물어보았습니다.
“스님의 염불소리가 참 좋지요?”
“예! 아주 좋아요!”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그럼 그 뜻은 아세요?”
묵묵부답입니다. 아무도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얼중얼 따라하기 까지 해놓고 그 뜻을 모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저 유명한 소프라노가수 ‘마리아 칼라스’, 노래 아주 잘합니다!
이미자씨, 조용필씨도 기가 막힙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노래는 예술입니다.
염불은 예술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한 것이 운율을 갖춘 염불입니다.
당연히 염불만 듣고도 누구나 그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공염불입니다. 모든 나라,
모든 언어로 불경과 진언은 명백하게 번역되고 누구나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진리입니다.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다음에 나오는 부분이 행선축원(行禪祝願)입니다.
이 부분은 명백히 뒤에 우리나라에서 추가된 부분입니다.
행선축원에 대한 부분은 뒤에 다시 다루고 그 다음으로 넘어 갑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이 반야심경(般若心經).
즉,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입니다.
이 반야심경은 가장 많이 암송되는 경전입니다.
모름지기 불자라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경전이고
모든 행사에서 빠지지 않고 암송되는 경전입니다.
이 경전은 예불의 핵심입니다. 어찌 말하면 불교의 핵심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해석해서 뜻을 명쾌하게 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지나갑니다.
반야심경을 마치면 예불이 끝납니다.
지금 까지가 사시예불(巳時禮佛)의 일반적 형태입니다.
상단에만 예불을 드리고 중단은 생략하는 경우 중단을 향해
반야심경을 하는 것으로 중단 예불을 대신하지만 사찰에 따라서는
중단을 향해 별도의 예를 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중단불공이라 합니다.
기타 하단과 칠성단, 조사단, 산신각 등 각 단과 전각에서
별도의 예불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새벽예불이나 저녁예불은 약간 다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상단예불만 드리는 것을 기준하였습니다.
새벽의 경우 도량석을 돌 때 천수경을 봉송하고
예불을 시작하기 전에 아침종성을 합니다.
그 후 예불을 드립니다.
저녁의 경우는 저녁종성을 하고 칠정례까지 한 후 행선축원을 하고,
천수경을 봉독하며 반야심경으로 마칩니다.
예불의 형식이 확정적으로 이렇게 한다고 정해진 것이 아니고
사찰에 따라 각각 다르게 진행이 되므로 여기서 설명한 것과 다를 수도 있지만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 전체적인 것은 대동소이합니다.
앞에서 뒤에 다시 다루고자 한 행선축원의 문제를 살펴봅시다.
행선축원(行禪祝願)입니다.
선(禪)을 행하여 축복받기를 원한다는 뜻이지요.
이 축원은 부처님 당시에는 없던 것입니다.
내용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우리나라만의 의식입니다.
정확히 누구로부터 기인하는지 모르는 행선축원과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懶翁) 대화상(大和尙) 발원문,
이산(怡山) 혜연(慧然)(또는 연) 선사 발원문 중 사찰에 따라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축원이라는 것입니다.
축복받기를 원하는 점이 문제라는 겁니다.
축복을 바라는 마음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발달하면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이 됩니다. 바로 이기심입니다.
이 이기심으로 인하여 모든 범죄가 생겨납니다.
이기심은 진리의 가장 큰 적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추구하는 집단인 불교 종단에서 이것을 정당하게 수용한다는 것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행선축원이 사찰마다 조금씩 다르게 변하여 축원으로 바뀝니다.
축원 할 때 축원카드를 들고 참석한 불자의 가족을 모두 호명하여 축원해줍니다.
그 축원에 자신의 이름이라도 빠지면 그 때부터 그 신도는 난리가 납니다.
아예 다른 절로 가는 경우는 허다하고 심한 경우 종교 자체를 개종합니다.
그런 신도는 오로지 자신의 이름이 축원 시간에 불리워지는 재미로 절에 옵니다.
50대 이상의 대부분의 신도가 그렇습니다.
특히 여자신도는 더욱 그렇습니다.
심지어 축원시간에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다음
자리를 일어나 가는 신도도 종 종 있습니다.
볼 일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도들이 바로 집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공양간에 가서 남들보다 먼저 식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식사는 하고 가겠다는 것이지요.
더욱 웃기는 것은 사찰에서 축원비용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소위 기도비입니다.
축원만도 진리에 어긋나는 데 거기에 금품까지 수수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하루 빨리 고쳐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 살아납니다.
축원은 즉시 서원이나 발원으로 바뀌어야합니다.
부처님이나 보살님들께 무엇을 해달라는 기원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분들을 대신하여 무엇인가 작은 일이라도
하겠다는 약속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위와 같은 까닭에 앞에서 축원을 다루지 못하고 지금 다루는 것입니다.
태생(胎生)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를 위시한 전 세계의 불교는 아주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어느 하나 제대로 된 부분이 없습니다.
승단과 승려들이 진리에 대한 연구와 각성이 부족한 때문입니다.
아니 진리에 대한 인식이 정확하지 않은 까닭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부처님이 말씀하셔서 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는 시대가 변하고 나라와 풍습이 달라도 한결같이 옳은 이치입니다.
그것이 진리의 보편성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오늘 맞다가 다음 날 틀리지 않아야 합니다.
천만 년이 흘러도 변함없이 동일해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나라에서만 맞고 미국에 가면 틀리지 않습니다.
안드로메다에 가도 맞아야하고 지옥에 가도 맞아야하며
극락에 가도 맞아야 진리입니다.
어느 특정한 곳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문화이며 관습입니다.
종교가 문화나 관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는 구원의 이치입니다.
더군다나 불교는 인간만이 아닌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이치입니다.
불교는 인간 차원을 훨씬 상회하는 종교입니다.
이제는 예불의 문제부터 시작하여 모든 부분을 진리와 맞추어
새롭게 바꾸고 조율해야 할 때입니다.
불교는 새롭게 거듭나야만 진리의 매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승단과 승려는 오로지 진리의 전달자입니다.
문화의 사절이나 관습의 수호자가 아닙니다.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와 실천만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과 사이비는 척결되어야 합니다.
맑은 눈으로 진리가 있는 곳을 향해야 합니다.
진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다시 예불의 문제를 마무리하고 다음 장으로 갑시다.
일반적으로 성인이 학습이나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평균 7분대입니다.
그 시간은 교육의 정도나 개성의 차이,
그리고 관심의 유무에 의해 다소 연장되는 경우는 있지만
가장 길어야 12분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일로 바꾸어 계속 실험을 한 결과 두 번째는 5분대,
세 번째는 3분대로 급격히 감소하였습니다.
어린 아이의 경우는 더욱 심하였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실험을 통하여 얻어진 것으로 전 세계 평균값입니다.
이 문제를 말하는 것은 예불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자는 것입니다.
예불의 목적이 부처님의 뜻을 기리고 우리도 부처님같이 되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불 시간이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충전하는 시간이 되려면 고도로 집중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집중력 유지시간을 먼저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불은 각 부분이 최대 7분 이내로 축소되고 의미도 간결하며 완성도를 높여야 합니다.
쓸데없는 부분은 정리되어야 하고 과장이나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다 합해서 15분 이내로 정리 되어야 예불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를 살릴 수 있습니다.
법문도 마찬가지로 7분을 초과해서는 안 됩니다.
의미가 불확실해도 안 됩니다. 개인적 견해를 전하는 것이나 부당한 강요도 없어야 합니다.
오직 진리에 입각한 것만 전해야 합니다.
위의 실험을 한 학자들이 다른 실험을 했습니다.
연극이나 영화를 볼 때의 집중력 실험입니다.
연극이나 영화의 경우 집중력이 최하 두 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가장 많은 증가를 보인 것은 코미디였습니다.
다음이 노래를 직접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실험으로 우리에게 상기하는 바가 엄청납니다.
광고나 텔레비전 프로를 구성할 때 이 자료를 기본으로 삼아 구성합니다.
효율성을 극대화하자는 것입니다.
예불도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면 이런 자료를 참고하여 새롭게 구성해야합니다.
예불시간이 진실하고 굳은 각오를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예불시간이 즐겁고 오래 계속 되었으면 하는 여운이 남아야 합니다.
법사의 법문은 명쾌하고 감동이 우러나야 합니다. 돌아가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도들은 자신이 이렇게 하여 가족이나 친지에게 진리를 전할 수 있었다는
성공사례도 공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어린 아이도 자신의 재주를 보일 수 있어야합니다.
다 같이 참여하게 틀이 짜여져야 합니다.
찬불가도 부처님이나 보살님에 대한 찬양 일변도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찬불가의 종류도 훨씬 많아져야 합니다.
승려들은 평소 많은 방법을 연구 개발하고 숙달시켜야 합니다.
승려는 진리의 전달자요 전문가입니다. 말하자면 프로입니다.
말로 만 프로가 아닌 실질적인 프로가 돼야 합니다.
새벽시간에는 예불과 법문을 포함하여 20분 정도,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의 경우 각 부 예불로 나누어
부별 30분 이내에 마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예불이 될 것입니다.
신도가 많은 사찰에서는 어린이부와 청소년부,
그리고 성인(成人)부로 구분하여 예불을 드리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포교에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법당도 기존의 횡렬식 인원 배치인 구조가 아닌 법사와 신도가
마주보는 대응식 구조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집중력을 높입니다.
기존의 법당은 개인 기도의 용도로 사용하고 신축하는 법당은
현대적인 강당의 형태를 취해야 합니다.
공간의 효율을 높이려면 강당 형태의 법당에 경사(傾斜)를 주어 의자를 설치하고
앞쪽에는 무대도 만들며, 합창단의 자리도 별도로 만들어야 합니다.
굳이 단층의 한옥 구조일 필요 없습니다.
공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에 단층 구조는 낭비가 심합니다.
더군다나 어린이를 위한 공간과 청소년을 위한 별도의 공간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옥이 건축 비용도 훨씬 많이 들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사찰이 산 속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도회지에 중생이 훨씬 많이 살기 때문입니다.
예불과 법회 때의 큰 절도 합장 반절로 바꾸어 행해야 합니다.
복전함도 이동식으로 제작하여 전체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불자들도 소득의 일정부분을 자발적으로 시주하는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그 금품으로 중생을 구휼하며 진리를 전파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시주금의 관리도 투명하고 철저해야 합니다.
비용의 지출도 합리적이고 합의에 의해야 합니다.
사찰의 운영에 신도도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정당한 건의는 받아들여지고 의식의 변환도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창의적인 시도에 망설여서도 안 됩니다.
이러한 시도가 좀더 많은 신도가 참여 할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불을 간소화하고 횟수를 조정하여 생겨나는 여유시간에 승려들은 자신의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하고 잘못을 반성하여 중생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병원이나 교도소 같은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위로하고 길을 안내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찾아 실질적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공공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앞장서서 중생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이재민이나 난민의 구호에도 앞장서야 합니다.
몸으로 실천을 보여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바 있지만 청소년을 인솔하여 극장에도 가고, 등산이나 축구도 같이 하며
그들 속에서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무한합니다.
실천의 각오만 되어 있다면 장애가 될 것은 그 무엇도 없습니다
첫댓글 좋은법문감사합니다. 잘모르니좀어렵기도합니다.기회가된다면가르쳐주세요
휴일에 다시보겠습니다. 글이 길고 자세히 보고싶어서, 음악도 조금 특색있습니다.감사^^
이글은 두고 두고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나중에라도 회원분들이 참고 하실수 있도록 초심자불교방으로 이동해 두겠습니다..긴글 올리시느라고 대단히 수고 많았습니다
참 어려운 글입니다. 몇번이고 계속 잃어봐야 할것 같고,,제가 일요일에 기회가 있어서 부석사라는 절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저 위에 계시는 천수천안 관자재보살님을 처음으로 뵈고 정말 신기하고 경외심을 느껴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시간내서 다시한번 천천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 아직은 미흡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야겠어요 ^^^**
많은 공부하고 갑니다...한번에 이해하고 마음에 담기는 어려운것 같습니다....자주 공부하는 마음으로 복습을 해야 할것 같습니다.......높은 식견에 항상 감사드립니다.....좋은 공부하고 갑니다...
정말 좋은 법문입니다 아름다운 이는 광채가 나게 공부 열심히 잘해섰것입니다
많은 공부을 하고 갑니다. 다 이해 하기란 어렵지많 두고두고 자주 와서 읽고 또 읽고 가겠습니다. 좋은 법문 많은 공부을 하고 갑니다.
초자 불자는 어렵기만한 말씀입니다. 자주 와서 보고 또보고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어시간을 여기서 보낸것 같습니다 참 잼미있게 봤어요
아쉬움이 있어다면 반야심경도 뜻을 풀이 해서 올려주셨음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불법에 대해 지식이 없는 저로서는 아주좋은 공부였습니다 장수넘어가게 기록했습니다
저~뒤안길에 짤막하게 올린글 보았습니다만~
좋은 글 주신데에 깊이 감사드리면 긴~글에 고생많이 하셧습니다 ..성불하세요~
나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