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대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언론인들의 친목단체인 관훈클럽이 매년 주관하는 해외문화유적답사의 올해 목적지는 중국 강소(江蘇)성 성도 남경(南京)이었습니다. 지난달 19일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가 있었던 인근의 상해(上海)나 중경(重慶)이면 몰라도 남경에 역사적으로 한국과 관련이 있는 문화유적이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경은 중국 근현대사에서 영욕이 교차하는 무대입니다. 청나라 멸망의 단초라 할 수 있는 아편전쟁과 남경조약, 홍수전(洪秀全)의 태평천국의 난, 손문(孫文)의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총독부,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가 일본군과 모택동(毛澤東)의 공산당 군에 밀려 두 번이나 쫓겨나야 했던 곳 등 통한이 서린 땅입니다.
남경대학살은 중일전쟁 기간 중에 일본이 저지른 만행으로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세계사적인 비극입니다. 남경대학살의 중국 명칭은 ‘남경 대도살(大屠殺)’로, 필자에겐 훨씬 참혹한 느낌으로 전해졌습니다.
남경 시내에 세워진 기념관 입구부터 내부 곳곳에서 발견되는 ‘조난자 300000’이라는 숫자는 당시 일본군에 의해 희생당한 중국인의 숫자입니다. 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태인 ‘600만 명’과 같은 상징적 숫자입니다.
1985년에 완공된 이 기념관엔 두 명의 일본군 장교가 저지른 '100인 참수경쟁'과 같이 일본인의 극한적 잔혹성을 보여주는 총 1만여 점의 자료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2차 세계대전 전 기간을 통해 전 유럽대륙에서 저지른 만행입니다. 남경대학살은 일본군이 남경공격을 개시한 1937년 12월 1일부터 6주간 동안 남경시 일원에서 자행됐습니다. 단기간에 저지른 만행이라는 점에서 나치를 능가합니다.
이 숫자의 진실에 대한 중일 간의 논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중국은 최소 25만에서 최대 35만으로, 종전 후인 1946년 이 사건을 다룬 남경군사법정에서 확인된 숫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선 일부 양심세력만이 30만 명을 인정할 뿐 20만, 10만, 수 천, 심지어 ‘20세기 최대의 사기극일 뿐 학살은 없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엇갈립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망언제조기’로 악명이 높은 일본의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도쿄도지사가 남경대학살에 대해서도 사기극 주장의 선봉에 서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입맛이 쓴 일이었습니다.
당시 남경의 인구가 30만 명이었다는 점에서 6주 만에 시민 모두를 죽인다는 게 가능하냐는 일본 측 주장에도 논증할 여지는 있습니다. 반면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하고 남경으로 진격했으므로 주변의 지역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남경으로 몰려든 상황을 감안하면 과장이 아니라는 중국 측 반박도 일리가 있습니다.
중국이 명확하게 입증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300000이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것은 이 숫자에 조금이라도 변동이 인정되면 일본은 막바로 침략전쟁을 부인하려 들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아사히신문이 위안부 오보를 시인한 것을 기회로 삼아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인하는 데 혈안이 되고 있는 일본정부의 술수를 중국이 모를 리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남경대학살의 전범들은 남경군사법정과 도쿄에서 열린 극동군사법정을 통해 처형됐습니다. 중국은 남경학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피해배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채 전후처리를 일단락지었고, 1972년 중국의 주은래(周恩來) 총리와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 간의 서명으로 국교정상화를 이뤘습니다.
남경대학살이 중국 측에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특히 호금도(胡錦濤 : 후진타오) 정부 이후 조어도(釣魚島)분쟁과 일본의 우경화 문제로 중일갈등이 첨예화하면서부터입니다. 남경이 함락된 1937년 12월 13일을 기념해 매년 그날에 평화집회를 열었고, 지난 2월27일 제12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의에선 아예 그날을 국가애도일로 지정했습니다. 민간인 희생자들 사이에선 일본에 대한 배상소송 움직임도 일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강제동원 위안부 배상 문제는 1992년 1월 첫 수요집회로 시작되었으나 일본 정부는 이후 22년이 넘도록 외면하고 있습니다. 남경대학살에 대한 피해배상 문제의 앞날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거사 반성에 관한 한 일본의 잡아떼기는 언제 어디서나 같습니다.
관훈 클럽이 ‘중국인이 본 남경대학살’을 주제로 개최한 현지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한 남경대학 정부역사학원 양단위(楊丹偉 : 양단웨이) 교수는 “남경대학살에 관해 중국인들이 일본에 가장 분노하는 것은 전범들을 신사에 안치한 것”이라며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에 참회도 없이 역사를 왜곡하며 세계의 도덕적 심판을 벗어나려는 일본인들의 단체기억상실증에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발표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이 남경대학살에 대해 “대학살을 잊는 것은 또 하나의 대학살이다”고 한 말로 마무리됐습니다. 대학살 기념관 안에도 ‘可以寬恕 但不可以忘却(용서하되 잊지는 말자)’이라는 경귀가 씌어 있었습니다.
* 덧붙임 글 : 남경 일원에서 볼 수 있는 한국 관련 문화유적으로는 양주(揚州) 시에 세워진 신라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崔致遠)기념관과, 기념관 옆에 세워진 고려 말의 신하 정몽주(鄭夢周) 동상이었습니다.
최치원은 당나라로 유학을 와 과거에 급제하여 양주에서 벼슬을 한 한국 최초의 해외관직 취득자였고, 정몽주는 명나라 초기에 사신으로 북경에 왔다가 남경을 거쳐 해로로 귀국하던 중 배가 난파됐으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사건을 기념하여 동상을 세운 것으로 돼 있습니다.
대만을 방문 할 적마다 필자가 느꼈던 소회는 장개석은 왜 두 번이나 남경에서 패퇴했나였는데, 이번 현장 방문에서 그 느낌은 더욱 절실했습니다. 그가 국공 내전에서 승리했더라면 아시아의 판도, 그중에서 한국의 판도는 어찌되었을까? 최소한 6·25전쟁은 없었을 것이고, 남북은 오래전에 통일됐지 않았을까? 조어도 같은 중일 간 영토분쟁의 원인도 원천 제거되지 않았을까? 4박5일 동안 문득문득 그런 공상에 빠지게 한 남경여행이었습니다.
[펌] / 임종건(서울경제 논설실장, 사장, 부회장 역임) / 2014.10.17
병장과 이등병
마흔 후반 천 상사가 인사계였다. 30년 세월 저쪽인데도 눈에 선하다. 사람 좋은 얼굴에 배가 불룩했다. 일 처리가 삐끗해 동생뻘 중대장한테 핀잔이라도 들은 날이면 "에이, 옷을 벗어야지" 하고 구시렁댔다. 이튿날이면 언제 그랬냐 싶게 막사 페치카를 살피고 다녔다. 부대 경례 구호가 '단결'이었다. 이등병은 "따안~ 겨얼!" 악을 썼다. 말년 병장은 인사계에게 "단결입니다~" 하고 느물거렸다. 천 상사는 "징그러워, 관둬" 하면서 잘도 받아줬다.
▶서툴기만 한 이등병 때도, 취직 걱정에 볼살 빠지던 말년 때도 천 상사가 곁에 있었다. 10시간 넘는 철야 행군을 하면 이등병부터 쓰러졌다. 덩치가 소만 한 황 병장이 이등병을 둘러업고 의무대까지 20리를 뛰었다. 대구에서 금은방 하다 입대한 배 일병이 군장을 뺏어 짊어졌다. 침상 끝에 얼어붙어 앉아 있으면 강 상병이 옆구리를 찔러 PX에 데려갔다. '원산폭격'에 '줄빳다'를 치던 시절이었다. 선임이 못되게 갉기도 했지만 때론 형 같았다.
▶육군이 병 계급을 넷에서 둘로 줄이려는 모양이다. 막내 이등병과 최고참 병장을 없애고 군 생활 내내 일병・상병으로 지내게 하는 안(案)을 내놓았다. 갖은 처방에도 병영이 시끄럽자 '계급 간소화' 방책을 들고 나왔다. 훈련소를 마치면 바로 일병이고 제대 날 비로소 병장을 달아준다. 우수한 상병을 뽑아 병장 겸 분대장을 삼는 건 별도다. 잘게 나뉜 계급을 둘로 좁혀 왜곡된 서열 문화를 고치겠다고 했다. 병사 계급을 손보는 게 60년 만이다.
▶중공군은 문화혁명 때, 소련 붉은 군대는 공산혁명 때 계급을 아예 없앴다. "프롤레타리아는 군대도 뭉쳐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장군・사병 사이도 평등했다. 중공군은 1988년, 붉은 군대는 1930년대 계급을 되살렸다. 이번엔 군 현대화를 내세웠다. 중공군 병은 상등병・열병(列兵) 둘만 뒀다. 북한군 병 계급도 50년대부터 상등병・전사 둘로 했다. 복무기간이 너무 길어 상등병끼리 5년 넘게 차이 나자 1998년 다시 넷으로 쪼갰다.
▶70년대 남성 듀엣 '하사와 병장'이 떠오른다. 병장은 하사와 어울려 보일 때도 있다. 병 시절엔 계급장에 '막대기' 하나 쌓는 게 얼마나 힘겹고 대견했는지 모른다. 병장이 대장보다 높은 '오성 장군'이라 뻐겼다. 육군의 취지는 알겠다. 서열을 없애 내무반 사고를 줄이자는 생각이다. 지금 군 현실은 조금 다르다. 입대가 한 달만 차이 져도 자기들끼리 상・하급자로 나눈다. 눈에 보이는 계급을 없앤다고 눈에 안 보이는 서열까지 사라질까.
[펌] / 출처; 프리미엄조선, 만물상 / 김광일(논설위원) / 2014.10.16 05:38
울창한 강산에서 우리의 문화를 보다
얼마 전 우리나라를 찾아온 독일인 경제학자와 와인 잔을 앞에 놓고 오붓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한국의 경제 관련 자료를 보면 짧은 기간 동안에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것은 틀림없는데, 어떻게 그 눈부신 성공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다며 의아해했습니다.
그분도 필자가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아마 부담스럽지 않은 질문을 화두로 던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비전문가의 의견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나름대로 필자의 생각을 들려주기로 했습니다.
필자는 경제 문제와는 약간 동떨어진 우리의 푸른 강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필자가 독일 유학 중이던 1964년의 일입니다. 일시 귀국 차 올림픽을 개최한 도쿄를 경유해 한반도 상공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고국에 왔다는 벅차고 설레는 감동보다는 암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조국의 강산이 거의 사막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던 낙동강 유역은 헤아릴 수 없는 공중 및 지상 포격에 의해 그야말로 폐허나 다름없었습니다. 참담하게도 푸른 나무라곤 없는 흉측하기 그지없는 민둥산들만 보였습니다. 그런 크고 작은 민둥산은 서울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런 얘기를 해 준 다음 필자는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당신이 보듯 남한의 산야가 푸른 수목으로 꽉 들어차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분은 언젠가 유엔 기구가 발간한 보고서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再산림녹화사업(Reforest Project)을 추진한 수많은 나라 중 한국만이 유일하게 성공했다는 자료를 읽은 기억이 있다며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한반도의 강산이 그런 무서운 몸살을 앓았는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경제 부흥보다 산림을 재조성하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인데 정말 놀랍습니다.” 그분의 얼굴엔 감동의 빛이 역력했습니다.
필자는 그분에게 식목일 얘기도 해주었습니다. “해마다 4월 5일을 국가 지정 휴일로 정해 너도 나도 몇 그루씩 나무를 심었습니다. 학생과 공무원을 비롯해 온 국민이 참여했죠. 이와 더불어 정부는 산림 보호를 위해 입산 금지 정책을 철저히 지켰고요. 그 덕분에 오늘날의 푸른 강산이 가능했던 겁니다. 국가가 ‘나무 심는 날’까지 지정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분은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오늘의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데는 독일의 경우처럼 한 민족의 결집된 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화 민족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도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필자의 이런 설명에 그분은 무릎을 치며 말했습니다. “한국의 울창한 산야에서 한국의 살아 있는 문화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필자는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을 이룩한 데에는 문화라는 보이지 않는 저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근래 우리 사회는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우선시하기보다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문명에 지나치게 끌려가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앞섭니다. 그렇기에 일제 강점기라는 시련을 겪어 황폐하고 허약한 국가적 상황에서도 부강한 나라가 되기보다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지길 바랐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높고도 깊은 뜻이 새삼 가슴에 와 닿습니다.
[펌] / 이성낙(가천대 명예총장) / 2014.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