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학과 기행시 쓰기 5. 조선시대의 기행문학 2.
지구는 돌고 만민은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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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使臣)은 왕의 권한을 대행하는 신하이다. 국내에 파견된 사신은 안찰사, 관찰사, 체찰사, 어사, 병마절제사 등 정규적인 사신과 사건이 있을 때마다 파견되는 임시사신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사신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특히 관찰사는 왕의 권한을 대신하는 직책이므로 사소한 일로 소환하거나 문책할 수 없었다.
외국으로 파견하는 사신은 고려 말에 틀이 잡혀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은 정사, 부사, 서장관, 통사 등과 수행원, 그리고 노비로 구성되었다. 정사는 정3품관 이상에서 선발되었으며 중국까지 육로는 28일이 걸렸지만 보통 40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일본에는 통신사가 가장 많이 파견되었으며 정사는 최고 정3~5품까지의 관원이었고 일본까지 왕복 10여개월이 걸렸다.
우리나라는 고대국가 시기부터 중국, 일본과 교류해서 삼국시대에는 중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스스로 신하로 칭하여 6세기경에는 정기적인 사신과 공물의 품목까지 정해질 정도로 조공관계로 발전했다. 그밖에 필요에 따라 일본, 여진, 류쿠(琉球 오키나와),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사신이 파견되었다.
사신의 명칭과 운영방식이 정해진 것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이며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대관계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은 1400년 정월에 보내는 하정사, 황제의 생일에 보내는 성절사(聖節使), 황태자 생일에 보내는 천추사(千秋使)에 사신을 보냈고 나중에 동지사가 추가되었다. 청나라 건국 후에는 천추사가 빠지고 세폐사(歲幣使)가 생겼으며 1645년 이후에 정기사신은 모두 동지사로 통합되었다. 이 밖에도 필요에 따라 사은사(謝恩使), 주청사(奏請使), 문안사(問安使) 등 상당히 많았다.
조선시대에 중요한 사신은 정 3품 이상인 정사, 부사, 서장관(書狀官)이었다. 그 외 압물관(押物官), 통사(通使), 의원, 서자관(書字官), 화원(畵員), 그리고 수행원과 노비가 기본이지만 상황에 따라 필요한 직책이 추가되었으며 인원은 총 30~40명이었다.
여비는 역관과 화원 등은 호조와 선혜청에서 부담하고 국내 경유지는 각각 해당되는 도에서 부담하였지만 수행원들의 비용이 부족하여 인삼 8포(八包:은 2,000냥 상당)를 가져가서 무역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상인들이 노비나 호송군으로 위장하여 금과 은으로 암거래하는 경우가 많아서 감찰을 하여 국경인 의주에서 재차 검문하였다. 여정은 육로는 28여일이고, 수로는 선사포나 안주의 노강진에서 출발하여 가도를 거쳐 등주를 지나갔으며 체류기간은 평균 40일 정도였다.
조선시대에 중국에 사신으로 간 관료들의 보고서나 기행문은 방대하게 전해지고 있다. 명나라에 간 사신들의 기록은 조천록(朝天錄)이라 하고, 청나라에 간 사신들의 기록은 연행록(燕行錄)이라고 한다. 특히 연행록은 청의 수도인 연경(燕京, 북경)에 다녀온 기록으로서 서장관의 보고서와 함께 참가한 이들의 기록도 100여 종이 넘게 전한다. 조선시대에 연행록의 모델이 된 것은 김창업의 ‘노가재연행록(1712)’, 홍대용의 ‘담헌연기’와 ‘연행잡기(1765)’, 박지원의 ‘열하일기(1780)’, 김경선의 ‘연원직지(1832)’이다.
18세기 이후부터 연행록의 인기가 높아지고 독자층이 확대되면서 여성이나 서민 독자층을 겨냥한 한글 연행록들이 쓰이기 시작했다. 한글로 기록한 연행록인 홍순학의 ‘연행가’는 1866년(고종 3) 왕비책봉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청나라로 파견되어 130일간의 연행 여정을 기술한 가사체의 연행록이다. 이 연행록은 당시 국제관계를 날카롭게 관찰한 기록으로 노정 내용이 자세하고 풍부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양반 가사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밖에 한글 연행록은 19세기 중반 김직연(1811~1884)의 ‘연행록’인데, 1858년(철종 9) 10월 26일 출발하여 12월 25일 북경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부터 1859년 3월 20일 귀국할 때까지의 과정이 상세하게 정리된 조선시대의 마지막 연행록이다. 지금 전해지는 한글 연행록은 허목의 ‘죽천행록’,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이계호의 ‘연행록’, 서유문의 ‘무오연행록’이 있다. 특히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은 한문본과 한글본이 있는데, 연로하신 어머니를 위해서 한글로 썼다고 한다.
연행록은 공식적인 보고문서와 다르게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연행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 견문과 감회, 의론 등을 적은 일종의 여행기록물이다. 연행록은 공적인 보고 형식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일기 형태의 저술이 대부분으로서 기록한 사람의 개성과 창작의 재능이 자유롭게 발휘될 수 있었다. 대부분 일기체의 ‘일록(日錄)’ 형식이지만 기사체(記事體)나 잡록(雜錄) 형식도 있다. 따라서 기행시나 기행산문 형태의 글이 많다.
탐구 1. 일기체 형식의 홍대용의 노가재연행록
조선시대의 4대 연행록 중의 하나인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은 조선 숙종 때 노가재 김창업이 동지사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인 김창집의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청나라의 사신으로 다녀온 1712년(숙종 38) 11월 3일부터 이듬해 3월 30일까지 5개월 동안의 과정을 기록한 일기입니다.
내용은 별록(別錄)과 일기(日記)로 되어 있습니다. 권두의 별록은 사신단의 인원과 말의 수, 특산물, 공물의 목록과 품목 명세서, 인정(人情)입니다. 그리고 연경에서 사신이 참가한 각종 예식, 가지고 오는 물품의 목록, 산천과 풍속, 경치 등이 실려 있습니다. 비중이 큰 것은 산천과 풍속인데 청나라의 진기한 풍속, 한인과 청인의 차이, 청나라의 지배에서 한인의 제도 변화와 청인의 변모 등이 주요 내용입니다.
일기는 모두 5권입니다. 1권은 영원위에서 북경에 도착하기까지, 권2는 신년 축하로부터 북경 유람까지, 권3은 사행을 마치고 북경을 떠나기까지, 권4는 북경을 떠나 돌아오는 길에 따로 의무려 산을 유람하기까지, 권5는 의무려 산과 천산을 유람하고 다시 일행과 함께 의주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7세기 초에 동아시아는 한중일 모두 역사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중국은 명과 청의 교체가 있었고, 일본은 에도시대가 열렸으며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청나라와 1637년에 벌인 전쟁, 즉 병자호란에 패하면서 명이 아닌 청에 조공외교를 해야 했습니다. ‘노가재연행록’의 가치는 명나라를 숭배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던 사상에서 북학파 사상으로 이어지는 시기를 대표하는 일기라는 점입니다. 당시 강희의 치세로 융성해 가는 중국 사회나 사상의 변화를 보이는 대로 썼기 때문에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 외에도 중국 관련 사료로서도 가치가 높습니다.
‘노가재연행록’은 날짜순으로 여정을 따라 글을 써 가는 일기의 형식으로 역사 기술의 편년체(編年體)에 가깝습니다. 이처럼 날짜에 따른 여행의 과정을 충실히 기록하여 ‘노가재연행록’은 ‘글이 평순하고 착실하며 조리가 분명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김창업의 노가재연행록처럼 중국이나 일본, 미국, 아니면 국내 여행에서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보고 느낀 것을 일기체로 정리해 보세요.
발전 1
김창업의 본관은 안동으로 17세기에 활약한 노론의 정치가이며 유학자인 영의정 김수항의 넷째 아들입니다. 어려서부터 김창협, 김창흡 등 형들과 함께 학문을 익혔는데 시에 뛰어나 후에 김만중에게 칭찬을 받았고 형들과 함께 당대에 문명을 떨쳤습니다. 원래 김창업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한양의 동교송계(東郊松溪), 지금 성북구 장위동에 은거하였습니다. 1689년에 기사사화가 일어나 부친이 화를 입자 포천에 있는 영평산 속에서 숨어살다가 1694년 정국이 노론파에 유리하게 되자 다시 송계로 나왔습니다. 그 후 나라에서 내시교관(內侍敎官)이라는 벼슬자리를 주려고 하였으나 받지 않고 세상일을 멀리하면서 향리에 사창(社倉), 즉 국가의 곡물대여 기관을 설치하고 거문고와 시 짓기를 즐기면서 사냥으로 낙을 삼았습니다.
김창업의 은거하는 자세가 잘 나타난 시는 ‘정축년 봄에 병에서 일어나 (丁丑春 病起)’입니다.
丁丑春 病起
김창업
淸明猶未試春衣 幾度踟躕始出籬 鞍着黃牛騎較穩 杖携烏竹步猶欹 雲峰矗矗天光近 村柳依依日影遅 始覺掩門多歲月 鄰童指點問爲誰 (大東詩選 卷5)
청명에도 오히려 봄옷을 못 입어보고
몇 번이나 울타리 밖에 나가기를 주저했나
황소에 안장 놓아 타니 제법 편안하고
오죽 지팡이 짚으니 걸음이 삐딱하다
구름은 뭉게뭉게 하늘빛이 가깝고
촌 버드나무는 무성해 해 그림자 더디네
비로소 문 닫은 지 오래임을 깨닫나니
이웃아이가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는구나
노가재처럼 부귀공명을 멀리하고 자연에 묻혀 유유자적하는 시를 써 보세요.
발전 2
노가재의 기행시는 백형 김창집을 따라 연경으로 가는 길에 평양의 연광정에서 봄의 경치를 본 감흥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연광정(練光亭)이 있습니다.
練光亭
김창업
普通門外草靑靑 浮碧樓前春水生 誰道吾行歸未晩 杏花如雪滿江城 (大東詩選 卷5)
보통문 밖에 풀이 푸르르고
부벽루 앞에 봄물이 풀렸네
내가 돌아온 것이 늦지 않았다고 누가 말했나
살구꽃이 눈처럼 날려 강가의 성에 가득하구나
이처럼 계절의 맛이 나도록 간결하고 시각적인 기행시를 4행으로 써 보세요.
발전 3
노가재의 또 다른 기행시는 연경으로 가는 길에 중국의 산해관 부근에 있는 망해정에 올라서 주변 풍경을 묘사한 ‘백형의 망해정 운에 따라(次伯氏望海亭韻)’가 있습니다. 노가재는 남쪽의 발해, 북동쪽의 만리장성, 그 끝에 산해관의 층층 누각, 그리고 바다와 산 너머의 사정을 상상하였습니다.
次伯氏望海亭韻
김창업
雄津枕海嶄東偏 上寘層樓勢屹然 雲映登萊知幾里 山低靺鞨見三邊 腐儒始識乾坤大 勝覽仍將慷慨連 朱檻碧窓無守者 敗碑猶認大明年 (大東詩選 卷5)
바닷가에 큰 성이 동쪽에 우뚝 솟았고
위에는 층층 누각이 높다랗구나
구름은 등주 봉래를 몇 리나 비추고
산은 낮아 말갈족이 세 변으로 보이네
썩은 선비가 비로소 건곤이 큼을 아니
풍광을 둘러보고 강개함이 이어지네
붉은 난간 푸른 창에 지키는 자도 없고
쓰러진 비는 오히려 명나라를 알려주네
노가재는 위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책밖에 모르던 우물 안 개구리가 여행을 통하여 세상의 거대함을 알게 되고 중국이 오랑캐인 청나라의 수중에 떨어진 것을 비분강개’하였습니다. 이처럼 여행 중에 자연 풍광이나 역사를 회고하면서 비분강개하는 시를 써 보세요.
탐구 2. 주제별로 기록한 홍대용의 담원연기
홍대용의 ‘담헌연기(湛軒燕記 1766)’와 ‘연행잡기(1765)’는 1765년 11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숙부인 홍억이 삼절연공 겸 사은사(三節年貢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갈 때 그를 수행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주제별로 나누어 6권의 책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1책의 내용은 주로 관제, 과거제, 풍속, 음악, 서화 등에 관한 설명, 다음에 관상대, 천주광의 관람, 천주학, 서양서, 역법, 안경, 망원경, 자명종 등 서양 문물에 관한 고찰, 마지막으로 조선과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에 대한 기록입니다.
2책은 주로 유구인, 몽고인, 대비인들의 기질과 풍습, 다음에 승려, 마부, 행상, 세리들의 일화, 셋째 가례, 실학 등에 관한 견해, 연경, 심양, 산해관 등 중요 지역의 풍속, 지리적 환경, 산업 등에 관한 것입니다.
3책의 주로 쑤저우(蘇州), 산하이관, 뤼산(閭山), 북경 등 주요 지역에 대한 유람기입니다.
4책은 주로 일상의 특징적인 풍물, 양금(洋琴), 기물, 세곡량(歲穀量) 등에 관한 기록과 경성에서 북경에 이르는 노정표가 실려 있습니다.
5·6책은 북경에 머무르면서 강남 출신의 학자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필담한 내용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날짜순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주로 양명학과 주자학·불교와의 관계, 중국과 조선의 가례에 대한 토론, 시·화 및 풍류 생활에 대한 대담, 교환된 시·부·기들을 모두 수록하였습니다.
북학파인 홍대용의 연경여행은 그의 실학사상을 체계화시키는데 큰 계기가 되었으며 후배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홍대용처럼 자기를 발견하게 된 외국 여행을 회상하여 그 내용을 주제별로 나누어 조목조목 정리해 보세요.
발전 1.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본관은 남양, 호는 홍지(弘之), 담헌(湛軒)으로 대사간 홍용조의 손자이며, 목사 홍역의 아들로 태어나 영조 7년부터 정조 7년까지 활동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과학사상가입니다.
홍대용은 유학자 김원행에게 배우고 북학파의 실학자 박지원과 깊은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1774년(영조 50)에 음사(蔭仕), 즉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받아 세손익위사직관(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선공감감역, 사헌부감찰, 그리고 1777년 태인현감, 1780년 영천군수를 지냈습니다.
홍대용은 천안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홍역이 나주목사로 오래 근무하여 어린 시절은 대부분 나주 근방에서 보냈는데, 나주 근방의 동복에는 천문학자인 나경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경진을 찾아가 그 집에 만들어둔 천문기구인 혼천의(渾天儀)와 자명시계인 후종(候鐘)을 보았다고 합니다.
홍대용은 매일 그 집에 가서 이 기구들의 원리는 물론 만드는 법과 사용법을 배웠으며 손수 제작하면서 천문학에 심취했습니다. 그리고 청주의 본가에 사설 천문대인 농천각(籠天閣)을 짓고 이것들을 보관했으며 천문 관련의 서적을 여러 권 검토하고 이 기구를 이용해 천체를 관찰했습니다.
홍대용이 여러 서적을 참고해 스스로 얻어낸 결론은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인데 중국의 영향도 받았게씾만 이 설은 그의 오랜 탐구와 관찰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지구의 둘레가 9만 리이고 하루 12시간 동안에 한 번 돈다고 여겼습니다. 홍대용보다 앞서 실학자 이익 등이 이를 주장한 적이 있지만 홍대용이 이를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홍대용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보다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와 같은 사상은 1765년 초 북경에서 서양의 사상이나 과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즉 북경에서 홍대용은 우연히 중국의 학자들을 사귀고 북경의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 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북경에서 깊이 사귄 엄성, 반정균, 육비 같은 인물과는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유가 계속되었으며 ‘항전척독(杭傳尺牘)’이란 개인 문집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북경방문에 대한 것은 ‘연기(燕記)’에 상세히 남아 있는데, 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고 뒤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연기’ 가운데 ‘유포문답(劉鮑問答)’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인 유송령( August von Hallerstein)과 포우관(Anton Gogeisl)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입니다.
홍대용은 서양 과학의 근본이 정밀한 수학과 정교한 관측에 근거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책을 썼으며, 여러 가지 천문관측기구를 만들어 농수각(籠水閣)이라는 관측소에 보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특히 과학사상을 담은 홍대용의 ‘의산문답(醫山問答)’은 의무려 산에 숨어 사는 실옹(實翁)과 조선의 학자 허자(虛子) 사이에 대화체로 쓰였으며 홍대용의 지구의 자전설, 생명관, 우주 무한론 등 상대주의적 자연사상의 입장에서 전개되었으며 사회사상으로까지 발전되었습니다. 즉 홍대용은 당시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홍대용은 북경에서 배운 과학기술 지식을 탑골 박지원의 사랑채에 모인 젊은 지식인이면서 실학 4대가인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등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들은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해서 조선이 발전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북학파의 모임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홍대용의 사상 속에는 동서양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는 한계가 있지만 조선시대의 가장 뛰어난 과학사상가였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홍대용은 이전의 연행록과 달리 인물이나 사건 등을 중심으로 ‘담헌연기’를 기록하였습니다. 누구나 들렸던 장소나 관례적인 내용들을 과감하게 빼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연행록을 정리할 때는 본인이 중국 견문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을 집중적으로 기술했습니다.
홍대용의 방법을 따라서 여행에서 만난 인물이나 사건 등 중요한 경험을 집중적인 기행시로 써 보세요
심화 1
시 짓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홍대용의 시비는 천안삼거리 공원에 있습니다. 거기에 적힌 그의 시는 ‘乾坤一草亭主人’입니다.
乾坤一草亭主人
홍대용
買宅深巷裏 西園一草盧 雖無山泉賞 林壑頗淸虛 繁陰翳崩岸 幽草遍層除 門無長者轍 床有遠方書 永懷先師訓 日與世人疏 無競免積毁 好友時叩門 壺酒有嘉蔬 不才絶虛譽 淸琴嚮危欄 中曲且悲噓 棄置固天放 素心或虛徐 憂樂無了時 物性奈如予
깊은 골목 안에 집을 샀더니
서쪽 동산 한 채의 초가집이라
볼 만한 산과 샘 없어도
숲과 골짜기가 자못 깨끗하도다
짙은 그늘이 무너진 언덕 가리고
우거진 풀은 층계 언저리를 둘렀구나
문 앞엔 어른들의 수레 없으나
책상엔 오래된 서적이 쌓였도다
앞서간 스승들의 교훈 길이 생각하니
세상 사람과는 날로 멀어지는구나
다툼이 없으니 온갖 비방을 면하고
재주 없으니 거짓 명예가 있을까
좋은 친구 때때로 찾아오누나
술에는 맛있는 산나물 술안주가 있으니
높은 난간에 기대어 거문고 타노니
곡조의 슬픈 감상을 그 누가 알리오
세상의 불우함이 진실로 하늘의 뜻이면
꾸밈없는 본래의 마음이 혹 태연하려나
근심과 즐거움은 다할 때 없으니
만물의 성품이 나를 어찌하겠는가
과거에 여러 번 떨어진 홍대용처럼 실패한 경험을 바탕에 두고 유명하지 않은 탓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경험을 중심으로 시를 써 보세요.
탐구 3. 문학적이고 독창적인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시대에 가장 창의적인 기행문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박지원은 1780년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수행하여 북경에 가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당시 조선의 사회제도와 양반사회의 모순을 신랄히 비판하고 백성들의 복지를 위한 실학사상을 옹호하는 내용을 사실과 허구를 혼합하여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서술했던 것입니다.
박지원은 실학자답게 열하일기에 기록하기를, 먼저 굴뚝과 구들 등 여염집의 구조와 배, 우물, 가마, 성의 제도, 다음에 산천, 절, 사당, 탑, 골동품, 셋째 저자거리, 여관, 교량, 수레, 넷째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 풍속, 제도, 시문, 천체, 음률, 활불(活佛) 등에 대해서 중국의 학자들과의 문답, 마지막으로 공자의 묘와 건물과 학교, 학사의 연혁과 규모 등 아주 다양합니다.
특히 실학사상이 표현된 한문소설 ‘허생전’과 양반의 위선을 폭로한 ‘호질’까지 포함된 ‘열하일기’는 당시 위정자들에게 배척당하고 정조의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어 필사본만 전하다가 1901년 김택영에 의해서 처음 간행되었습니다.
기행문학적으로 볼 때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여행의 여정과 주제의 장점을 모두 취해서 적절하게 섞어 놓았습니다. ‘열하일기’는 여정 순서의 일기 형식에다가 특별한 내용을 ‘기(記)’ 또는 ‘설(說)’의 형식으로 확대하여 무미건조한 연행록을 문학작품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 ‘열하일기’는 시간 순으로 기술하는 종래의 평면적 서술을 지양하고, 극적인 장면을 중심에 두고 생동감 있는 인물 묘사를 하여 독자들에게 널리 읽혔습니다.
열하일기의 특징에 비추어서 자기가 쓰는 기행문의 장단점을 비판해 보고 문학적인 기행문의 틀을 잡아 보세요.
발전 1
박지원의 실학적인 인간관과 그리움이 잘 형상화된 시는 ‘연암에서 돌아가신 형을 추억함(燕巖憶先兄)’입니다.
燕巖憶先兄
박지원
自將巾袂映溪行 我兄顔髮曾誰似 每憶先君看我兄 今日思兄何處見
우리 형 외모가 그 누구를 닮았더라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우리 형을 봤었지
오늘 형님 생각이 나는데 어디를 가보나
시냇물에 가 나를 비춰볼 밖에
이 시를 본받아 아버지와 형, 또는 누님에 대한 그리움을 시냇물을 소재로 하여 써 보세요.
발전 2
늙은 자기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탄식하는 시는 ‘이른 아침에 거울을 보며(元朝對鏡)’입니다.
元朝對鏡(이른 아침에 거울을 보며)
박지원
忽然添得數莖鬚 全不加長六尺軀 鏡裏顔容隨歲異 穉心猶自去年吾
홀연히 백발은 늘어났어도
몸은 6척 그대로이듯
거울 속 내 모습 해마다 변해가도
마음은 하나도 변한 게 없네
이 시처럼 몸과 마음의 모습을 이원적으로 묘사하는 시를 써 보세요.
발전 3
박지원의 서정적이고 관조적인 기행시는 ‘담원 팔영(澹園 八詠)입니다.
澹園 八詠
박지원
來靑閣(내청각)
紅蕉綠石出東墻 一樹梧桐窈窕堂 傲骨平生迎送嬾 丈人惟拜暮山光
붉은 파초 푸른 돌 동녘 담에 솟아 있고
한 그루 벽오동은 그윽한 누각 앞에
꿋꿋한 한평생 손님 응대 게으르니
저물녘 산 풍경에나 허리를 숙이신다네
鑑影池(감영지)
南陀竟日影婆娑 他耐可呼吾亦喚 乍綴微風鳧鷺去 不禁撩亂百東坡
남녘 둑의 못에 종일토록 그림자 한들한들
저 그림자 나를 부를 듯하고 나도 저를 부를 수 있을 듯한데
갑자기 산들바람 그치고 오리 백로 지나가니
내 그림자 어지러이 백 갈래로 나눠지고 말았네
素心居(소박한 마음으로 살면서)
已觀微白鼻端依 欲辨臟神掩兩扉 獨有暗香侵夢冷 羅浮明月弄輝輝
코끝을 따라서 어렴풋한 흰 기운을 바라본 뒤
장신(臟神)을 분별코자 두 눈꺼풀을 감았더니
그윽한 향기 호올로 쓸쓸한 꿈결에 스며들고
나부산(羅浮山) 밝은 달이 환히 빛나네
*장신(臟神)- 몸을 숨기고 나타내지 않음
松蔭亭(송음정)
松覆深深卍字欄 垂蘿攲石翠相攢 一任畵舫風吹去 盡夜寒聲瀉作灘
만(卍) 자 난간 깊고 깊어 솔 그늘 덮였는데
늘어진 다래 기울어진 돌 서로 얽혀 푸르네
그림배 바람 따라 흘러가게 맡겨 두니
밤새도록 차거운 솔바람 소리 여울처럼 쏟아지네
飛霞樓(비하루)
噀輕堪醒醉魂花 天褭行空翠鬣髿 採藥將尋劉阮去 路迷廉閃赤城霞
꽃잎에 살짝 뿜어 취한 넋을 깨워 주고
푸른 갈기 더풀더풀 허공 닫는 천마(天馬)인 양
불사약을 캐고자 유신(劉晨) 완조(阮肇) 찾아가니
적성의 노을 아른아른 길을 잃었네
*유신, 완조-중국 후한 때의 인물로 산에 들어가 두 여인을 만나고 살다 돌아오니 7대가 흘러갔다고 함
留春洞(유춘동)
花似將歸强挽賓 囑他風雨反逢嗔 自從洞裏修甁史 三百六旬都是春
꽃은 흡사 가려는 손 억지로 잡아 논 듯한데
비바람에게 불지 말라 당부했다가 되려 꾸짖음만 당했다오
두어라 골짝에서 병사(甁史)를 익힌 이래로
삼백이라 예순 날이 모두 다 봄이로세
嘯月臺(소월대)
玉麈淸宵獨上臺 杞棚霜落鴈流哀 一聲劃裂秋雲盡 萬里瑤空皓月來
옥주 쥐고 맑은 밤 홀로 누대에 오르니
구기자나무 시렁에 서리 지고 기러기 울음소리 애처롭네
한 가락 휘파람 소리 가을 구름을 다 흩날리니
창공이라 만리에 하얀 달이 솟아오르네
語花軒(어화헌)
花蘂夫人初入宮 含羞將語臉先紅 鸚哥舍利元非妙 誰識阿難悟道功
화예부인 처음으로 궁중에 들어오니
부끄럼이 말을 앞서 볼 먼저 붉어지네
앵가사리 본래로 묘한 게 아니라오
도를 깨닫게 한 아난의 공덕 그 뉘라 알려는지
*화혜 부인-중국 후주 때 재색이 모두 뛰어 난 여인
*앵가사리- 지혜롭고 말 잘 하는 앵무새
잊히지 않는 정경을 회상하여 8편의 묘사적이고 서정적인 기행시를 짧게 써 보세요.
발전 4
다음 시는 한양의 한겨울을 읊은 작품입니다.
極寒(극한)
박지원
北岳高戌削 南山松黑色 隼過林木肅 鶴鳴昊天碧
북악은 드높아라 수자리의 칼을 세웠구나
남산 소나무는 온통 검은빛
매 지나간 숲속 나무는 얼어붙었고
학 울음소리에 시퍼런 하늘
박지원의 ‘극한’처럼 한겨울의 서울을 간결하고 상징적으로 써 보세요
심화 1
박지원의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叢石亭日出)’는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지은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영조 41년(1765)에 연암은 벗 유언호, 신광온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할 때 지었다고 합니다. 칭찬을 들은 연암은 ‘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 7월 20일 조에 수록해 놓았습니다.
行旅夜半相呌譍 길손들 한밤중에 서로 주고받는 말이
遠鷄其鳴鳴未應 먼 닭이 울었는가 아직 울지 않을 텐데
遠鷄先鳴是何處 먼저 우는 먼 닭은 그게 바로 어디냐
只在意中微如蠅 의중에만 있는 거라 파리 소리처럼 희미하네
邨裏一犬吠仍靜 마을 속의 개 한 마리 짖다 도로 고요하니
靜極寒生心兢兢 고요가 심해서 찬기 일어 마음이 으스스 하네
是時有聲若耳鳴 이때 마침 소리 있어 두 귀가 울리는 듯
纔欲審聽簷鷄仍 자세히 들으니 집의 닭울음 뒤따르네
此去叢石只十里 여기서 가면 총석정이 십 리밖에 되잖으니
正臨滄溟觀日昇 동해에 곧바로 다다르면 해돋이를 보겠구먼
天水澒洞無兆朕 하늘과 맞닿은 물만 넘실넘실 해 뜰 조짐 전혀 없고
洪濤打岸霹靂興 거센 파도 언덕 치니 벼락이 일어나네
常疑黑風倒海來 노상 의심쩍은 건 폭풍이 바다를 뒤집어엎고
連根拔山萬石崩 뿌리째 산을 뽑아 뭇 바위 무너질까
無怪鯨鯤鬪出陸 기이한 고래와 곤이 다투다가 뭍으로 나올 법도 하네
不虞海運値摶鵬 뜻밖에도 항해하다 나래치는 붕새를 만날지도
但愁此夜久未曙 다만 걱정되는 건 이 밤이 오래도록 아니 새어
從今混沌誰復徵 이제부터 혼돈을 뉘 다시 징벌할지
無乃玄冥劇用武 아마도 겨울 신이 제 힘을 과시하여
九幽早閉虞淵氷 구유(九幽)를 일찍 닫고 우연(虞淵)을 얼게 하지 않았나
恐是乾軸旋斡久 아마도 하늘 축이 오래도록 돌고 돌다
遂傾西北隳環絙 서북으로 기울어져 묶은 줄이 끊어진 게지
三足之烏太迅飛 세 발 달린 까마귀 날기로는 천하 제일인데
誰呪一足繫之繩 누가 주술을 부려 발 하나를 노끈으로 매어 놓았나
海若衣帶玄滴滴 해야(海若)의 옷과 띠엔 물방울이 뚝뚝 듣고
水妃鬢鬟寒凌凌 수비(水妃)의 쪽 찐 머린 추위 서려 싸늘하네
巨魚放蕩行如馬 큰 고기 활개 치며 준마같이 내달리니
紅鬐翠鬣何鬅鬙 붉고 푸른 지느러미 어찌 그리 더부룩한고
天造草昧誰參看 개벽 이전 어두운 누리 본 사람이 누구더냐
大呌發狂欲點燈 참다못해 외쳐 대며 등이라도 켜려 드네
欃槍擁彗火垂角 혜성이 꼬리를 끌고 화성(火星)이 광망(光芒)을 뻗치네
禿樹啼鶹尤可憎 낙엽 진 나무의 부엉이 울음 더욱더 밉상일레
斯須水面若小癤 조금 뒤에 수면에 작은 부스럼 생긴 듯
誤觸龍爪毒可 용의 발톱 잘못 긁혀 독기로 벌겋더니
其色漸大通萬里 그 빛이 점점 커져 만리를 비추누나
波上邃暈如雉膺 물결 위에 번진 빛 꿩의 가슴 비슷하네
天地茫茫始有界 아득아득 이 천지에 한계 처음 생겼으니
以朱劃一爲二層 붉은 붓 한 번 그어 두 층이 되었구려
梅澁新惺大染局 매삽이라 신성이라 염색집이 하도 커서
千純濕色縠與綾 몇 천 필 색을 들여 온갖 비단 으리으리하도다
作炭誰伐珊瑚樹 산호나무 누가 베어 참숯을 만들었나
繼以扶桑益熾蒸 부상나무 뒤이으니 더욱더 이글이글하고
炎帝呵噓口應喎 염제는 불을 불어 입이 응당 비틀리고
祝融揮扇疲右肱 축융은 부채 휘둘러 바른팔이 지쳤구려
鰕鬚最長最易爇 새우 수염 가장 길어 그슬리기 제일 쉽고
蠣房逾固逾自 굴껍질은 굳을수록 더욱더 절로 익네
寸雲片霧盡東輳 한 치 구름 조각 안개 동으로 다 쓸려 가서
呈祥獻瑞各效能 온갖 상서 바치려고 제 힘을 다하누나
紫宸未朝方委裘 자신궁(紫宸宮)엔 조회 전에 바야흐로 갖옷을 모셔놓고
陳扆設黼仍虛凭 병풍만 펼쳐 논 채 용상은 비어 있네
纖月猶賓太白前 초승달은 샛별 앞에 오히려 밀려나서
頗能爭長薛與滕 먼저 예를 행하겠다고 등설(滕薛)처럼 제법 맞서누나
赤氣漸淡方五色 붉은 기운 차츰 묽어 오색으로 나뉘더니
遠處波頭先自澄 먼 물결 머리부터 절로 먼저 맑아지네
海上百怪皆遁藏 바다 위 온갖 괴물 어디론지 숨어 버리고
獨留羲和將驂乘 희화만이 홀로 남아 수레 장차 타려 하네
圓來六萬四千年 육 만이라 사천 년을 둥글둥글 내려왔으니
今朝改規或四楞 오늘 아침 동그라미 고쳐 어쩌면 네모가 될라
萬丈海深誰汲引 만 길의 깊은 바다에서 어느 누가 길어 올렸을까
始信天有階可陞 이제서야 믿겠노라 하늘도 오를 계단이 있음을
鄧林秋實丹一顆 등림에 가을 열매 한 덩이가 붉었고
東公綵毬蹙半登 동공이 채색 공을 차서 반만 올렸구려
夸父殿來喘不定 과보는 헐레벌떡 뒤따라오고 있고
六龍前道頗誇矜 육룡은 앞서 끌며 교만스레 자랑하네
天際黯慘忽顰蹙 하늘가 어둑해져 갑자기 눈살 찌푸리고
努力推轂氣欲增 어영차 해의 수레 미니 기운이 솟아난 듯
圓未如輪長如瓮 바퀴처럼 둥글지 않고 독처럼 길쭉한데
出沒若聞聲砯砯 뜰락 말락 하니 철썩철썩 부딪치는 소리 들리는 듯
萬物咸覩如昨日 만인이 어제처럼 모두 바라보는데
有誰雙擎一躍騰 어느 뉘 두 손으로 받들어 단번에 올려놨노
심화2
다음 ‘一夜九渡河記(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는 열하일기 중에서도 가장 명문으로 평가되는 작품으로 ‘山莊雜記(산장잡기)’편에 들어있습니다. 이글을 감상하고 기행문에서 묘사의 방법을 탐색해 보세요.
一夜九渡河記(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
박지원
河出兩山間。觸石鬪狠。其驚濤駭浪。憤瀾怒波。哀湍怨瀨。犇衝卷倒。嘶哮號喊。常有摧破長城之勢。戰車萬乘。戰騎萬隊。戰砲萬架。戰鼓萬坐。未足諭其崩塌潰壓之聲。沙上巨石。屹然離立。河堤柳樹。窅冥鴻濛。如水祗河神。爭出驕人。而左右蛟螭。試其挐攫也。或曰。此古戰塲。故河鳴然也。此非爲其然也。河聲在聽之如何爾。余家山中。門前有大溪。每夏月急雨一過。溪水暴漲。常聞車騎砲鼓之聲。遂爲耳祟焉。余甞閉戶而臥。比類而聽之。深松發籟。此聽雅也。裂山崩崖。此聽奮也。群蛙爭吹。此聽驕也。萬筑迭響。此聽怒也。飛霆急雷。此聽驚也。茶沸文武。此聽趣也。琴諧宮羽。此聽哀也。紙牕風鳴。此聽疑也。皆聽不得其正。特胷中所意設而耳爲之聲焉爾。今吾夜中一河九渡。河出塞外。穿長城會楡河潮河。黃花鎭川諸水。經密雲城下。爲白河。余昨舟渡白河。乃此下流。余未入遼時。方盛夏。行烈陽中而忽有大河當前。赤濤山立。不見涯涘。葢千里外暴雨也。渡水之際。人皆仰首視天。余意諸人者仰首默禱于天。久乃知渡水者。視水洄駛洶蕩。身若逆溯。目若沿流。輒致眩轉墮溺。其仰首者非禱天也。乃避水不見爾。亦奚暇默祈其須臾之命也哉。其危如此而不聞河聲。皆曰遼野平廣。故水不怒鳴。此非知河也。遼河未甞不鳴。特未夜渡爾。晝能視水。故目專於危。方惴惴焉。反憂其有目。復安有所聽乎。今吾夜中渡河。目不視危則危專於聽。而耳方惴惴焉。不勝其憂。吾乃今知夫道矣。冥心者。耳目不爲之累。信耳目者。視聽彌審而彌爲之病焉。今吾控夫。足爲馬所踐。則載之後車。遂縱鞚浮河。攣膝聚足於鞍上。一墜則河也。以河爲地。以河爲衣。以河爲身。以河爲性情。於是心判一墜。吾耳中遂無河聲。凡九渡無虞。如坐臥起居於几席之上。昔禹渡河。黃龍負舟至危也。然而死生之辨。先明於心。則龍與蝘蜓。不足大小於前也。聲與色外物也。外物常爲累於耳目。令人失其視聽之正如此。而况人生涉世。其險且危。有甚於河。而視與聽。輒爲之病乎。吾且歸吾之山中。復聽前溪而驗之。且以警巧於濟身而自信其聰明者。(끝)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흘러나와 바윗돌과 부딪치며 세차게 흘러간다.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과 슬픈 곡조와 원망하는 소리가 굽이쳐 돌면서, 우는 듯, 소리치는 듯, 바쁘게 호령하는 듯, 언제나 만리장성을 무너뜨릴 기세가 있다. 전차(戰車) 만 대와 기마 만 마리, 대포 만대와 북 만개로도 그 무너뜨리고 내뿜는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 위에 큰 돌은 흘연(屹然)히 떨어져 섰고, 강 언덕에 버드나무는 어둡고 컴컴하여 물지킴과 하수 귀신이 다투어 나와서 사람을 놀리는 듯한데 좌우의 교리(蛟螭)가 붙들려고 애쓰는 듯싶었다. 혹은 말하기를, “여기는 옛 전쟁터이므로 강물이 저같이 우는 거야.”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니, 강물 소리는 듣기 여하에 달렸을 것이다. 산중의 내집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어 매양 여름철이 되어 큰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항상 거기(車騎)와 포고(砲鼓)의 소리를 듣게 되어 드디어 귀에 젖어 버렸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서 소리 종류를 비교해 보니, 깊은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요, 대피리가 수없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노한 탓이요, 천둥과 우뢰가 급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놀란 탓이요, 찻물이 끓는 듯이 문무(文武)가 겸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취미로운 탓이요, 거문고가 궁(宮)과 우(羽)에 맞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슬픈 탓이요, 종이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의심나는 탓이니, 모두 바르게 듣지 못하고 특히 흉중에 먹은 뜻을 가지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만든 것이다.
지금 나는 밤중에 한 강을 아홉 번 건넜다. 강은 새외(塞外)로부터 나와서 장성을 뚫고 유하(楡河)와 조하(潮河)ㆍ황화(黃花)ㆍ진천(鎭川) 등 모든 물과 합쳐 밀운성 밑을 거쳐 백하(白河)가 되었다. 나는 어제 두 번째 배로 백하를 건넜는데, 이것은 하류(下流)였다. 내가 아직 요동에 들어오지 못했을 때 바야흐로 한 여름이라, 뜨거운 볕 밑을 가노라니 홀연 큰 강이 앞에 당하는데 붉은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 끝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은 대개 천리 밖에서 폭우(暴雨)가 온 것이다.
물을 건널 때는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우러러 하늘을 보는데, 나는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머리를 들고 쳐다보는 것은 하늘에 묵도(黙禱)하는 것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물이 돌아 탕탕히 흐르는 것을 보면, 자기 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눈은 강물과 함께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현기가 나면서 물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머리를 우러러 보는 것은 하늘에 비는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 함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잠깐 동안의 목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랴.
그 위험함이 이와 같으니, 물소리도 듣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요동 들은 평평하고 넓기 때문에 물소리가 크게 울지 않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하(遼河)가 일찍이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히 밤에 건너보지 않은 때문이니,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이 오로지 위험한 데만 보느라고 도리어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하는 판인데, 다시 들리는 소리가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데만 있어 바야흐로 귀가 무서워하여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마음이 깊은 자는 귀와 눈이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혀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 마부가 발을 말굽에 밟혀서 뒷차에 실리었으므로, 나는 드디어 혼자 고삐를 늦추어 강에 띄우고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으니, 한 번 떨어지면 강이나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으며,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을 삼으니, 이제야 내 마음은 한 번 떨어질 것을 판단한 터이므로 내 귓속에 강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 건너는데도 걱정이 없어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起居)하는 것 같았다.
옛날 우(禹)는 강을 건너는데, 황룡(黃龍)이 배를 등으로 떠받치니 지극히 위험했으나 사생의 판단이 먼저 마음속에 밝고 보니, 용이거나 지렁이거나 크거나 작거나가 족히 관계될 바 없었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니 외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 이 같거늘, 하물며 인생이 세상을 지나는데 그 험하고 위태로운 것이 강물보다 심하고,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이 되는 것임에랴. 나는 또 우리 산중으로 돌아가 다시 앞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이것을 증험해 보고 몸 가지는데 교묘하고 스스로 총명한 것을 자신하는 자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심화 3
다음 전기는 이이화의 ‘인물 한국사’를 조정한 글입니다. 지금까지 감상한 시와 다른 박지원을 소재로 역사적인 인물 중심의 시를 한 편 써 보세요.
1.
서울 탑골 주변에는 불우한 문사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때는 정조 연간이었고 그 중에서도 터줏대감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었다. 30대의 박지원은 이들 문사만이 아니라 운종가 즉 지금의 종로 네거리 부근의 장사치들, 막벌이꾼, 거지들에게까지 명성이 자자해 때로는 그들의 스승으로 때로는 그들의 벗으로 통했다.
열여덟 살의 소년 문사 박제가가 다 쓰러져가는 박지원의 사립문을 두드렸다. 집주인은 가슴을 풀어헤치고 망건도 쓰지 않은 맨상투를 너덜거리며 뛰어나왔다. 그리고 두 손을 마주잡고 방 안으로 맞아들였다. 두 사람은 나이나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문학과 세상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 먹을 때가 되자 박지원은 밥을 지어 들여왔는데 차 끓이는 주전자에 밥을 해서는 물 담는 옹기에 퍼 담아 들여왔다. 두 사람은 맨바닥에서 밥을 먹고 난 뒤 밤을 새우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박제가는 이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열흘이고 한 달이고 자기 집에 돌아갈 줄을 몰랐다. 이 자리에는 주변에 살고 있는 문사들도 모여들었다. 박지원의 집 바로 길 건너에 있는 이덕무를 비롯해 유득공, 이서구, 서이수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뛰어난 문사들이었으나 서이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서얼 출신이어서 불우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이들과는 달리 5대 문벌가로 치는 노론 집안의 반남 박씨였지만 벼슬길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이들 서류나 불우한 문사들과 어울리기만 했다.
그는 혼자 살고 있었다. 생활은 뒤죽박죽이었다. 사흘씩 밥을 굶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낮잠만 자기도 하고 책만 읽기도 했다. 그러다가 주변의 문사들이 모여들면 시와 술로 흥을 돋우었다. 그들의 화제는 현실의 모순과 비리를 개혁하는 것으로 옮겨졌다. 이들은 박지원으로부터 글을 익히고 세상을 배우고 돌아가는 인심을 논했다. 이서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느 여름날 밤 연암 어른을 찾아갔다. 연암 어른은 사흘을 굶고 있었다. 그때 버선을 벗은 맨발로 탕건도 풀어버리고 문지방에 걸터앉아서 행랑지기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서구는 이때 굶주린 박지원과 함께 밤을 새워 고금의 치란과 당세의 문장에 대해 논했고, 촛불이 다해 꺼지자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시 박지원의 가족은 광주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몸이 뚱뚱해 더위를 견디지 못했고 모기와 개구리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해 여름이면 혼자 서울에 와 있었다. 서울 집은 좁기는 했지만 모기와 개구리가 없어서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한 계집종이 박지원을 수발했다. 그러나 그 여종은 박지원이 눈병이 들자 주인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먹을 것도 없고 밤낮이 따로 없는 주인을 더 모실 수 없었으리라. 그는 가버린 종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밥 지을 사람이 없자 행랑아범에게 밥을 붙여 먹었다. 행랑아범은 박지원에게 농지거리를 하면서 거리낌 없이 대했고 박지원도 그와 이야기 나누기를 즐겼다.
박지원은 며칠씩 세수를 하지 않고 열흘씩 머리 손질도 않고 지내면서 더러 땔나무꾼이나 참외장사를 불러들여 담소를 즐겼다. 그리고 다리 부러진 어린 까치에게 밥알을 던져주면서 장난치는 일에나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이서구가 찾아오던 날도 사흘을 굶은 끝에, 행랑아범이 남의 집 기와를 얹어주고 사온 쌀로 지은 밥을 얻어먹던 참이었다.
2.
그는 쉰 살이 넘어 벼슬살이에 나와 마지막으로 양양부사를 지냈다. 양양부사로 1년도 채 복무하지 못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사직했다. 몸은 비대했고 눈은 사물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박지원은 현실 문제에 대해 예리한 비평을 가하고 많은 글들을 썼다. 그는 선배 홍대용이 청나라에 다녀와 많은 과학 지식을 전달해주자 여기에 심취했고, 제자들과 함께 청나라 문화의 좋은 것을 배워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때 박지원에게 하나의 시련이 닥쳤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세도를 부리고 있었다. 홍국영은 박지원과 그 일파가 안하무인으로 세상을 깔보며 자기네를 무시한다고 해 벽파로 몰아붙였다. 다시 말해서 정조를 반대하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에 박지원은 1777년 한양을 버리고 황해도 금천 땅 첩첩산골인 연암 골짜기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그의 호가 연암이 되었다.
이것은 피난이 아니라 그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시끄러운 한양을 벗어나고 싶었다. 더욱이 놀고먹는 자들을 매도하던 그로서는 직접 생산자가 되는 길을 택해 노력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연암 골짜기에 큰 꿈을 걸었다. 주변에 과일나무를 심고 양어장을 만들고 1백 통의 벌집을 늘어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꿈이었다. 연암에서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초가삼간을 짓고 돌밭 몇 뙈기를 일구었을 뿐이었다. 손이 부르트고 발바닥이 갈라지도록 일을 해보았다.
그가 농사일을 하다가 연암당(燕巖堂)을 짓고 틈틈이 그 아래 연못에서 낚시를 즐기며 살았다. 어릴 적부터 부모를 잃고 형수의 손에서 자란 박지원은 혼자된 병든 형수를 이곳에 모시고 와 호강시키려 했지만, 형수는 이 골짜기에 와 호강도 못해보고 죽어 뒷산에 묻히는 비극을 겪었다.
그가 숯 굽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자 그의 이웃은 서너 집이 되었다. 그들은 누더기 옷에 검정 칠을 하고 숯만 구워 팔 뿐 그가 바라는 농사는 짓지 않았다. 이런 말이 아닌 고생 속에서도 그는 “마음은 이것을 즐기며 바꿀 생각이 없다”고 쓰고 있다.
박지원이 살던 18세기는, 유교적 통치이념이 새로운 도전을 받던 시대였다. 새로운 사상개편을 요구하고 현실개혁론을 주장한 세력들을 흔히 실학파라 부른다. 이 실학파들은 진보적 지식인들로 때로는 현실참여로, 때로는 묵은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때로는 자아각성으로 그들의 근대 지향적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은 그들의 중심인물이었다. 특히 박지원은 앞에서 본 대로 현실에 부딪치며 실천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적어도 이론이 아닌 행동인으로서는 정약용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3.
박지원이 살았던 시기는 영정조 시대는 문예 부흥기였다. 개혁을 추진하려는 두 왕이 탕평 정책을 펴고 또는 온건한 방법으로 통치했기에 일컬어진 말일 뿐 실제로 봉건사회의 내면은 더욱 곪아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제도가 더욱 문란해지면서 대토지 소유가 점점 확대되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조세와 지대(地代), 공납은 영세 자작농 또는 소작농에게 가중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제도가 극도로 문란해져, 일부 지배층에서는 노비 소유가 대량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노비들은 신분의 굴레를 벗기 위해 끊임없이 도망했고, 국가와 노예 주인들은 도망친 노비를 추쇄(推刷), 즉 찾아서 잡아들이는 일로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양반의 곁가지인 서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처지를 벗기 위해 여러 모로 움직이고 있었다.
온갖 정치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는 특권 양반지배층에 대해 소외되고 몰락한 향반들의 불평은 늘어가고,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유리걸식하고, 노비들은 추쇄를 피해 산이나 섬으로 들어가서 숨고, 이런 틈을 서학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불안요소들은 다음에 올 민란의 시대를 예고하는 듯 내면으로 세차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살고 있던 박지원은 위기의 현실을 통찰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묵은 봉건적 요소들에 대한 일대 수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박지원은 이 같은 시대상황에서 어떻게 현실에 대처하고 있을까?
그는 1799년(정조 23) 농정(農政)에 대한 임금의 물음에 그의 견해를 밝힌 글에서 자기의 처지를 연압집에 이렇게 쓰고 있다.
“신의 집안은 대대로 청빈해 본디 농사지을 땅이 없었고, 서울에서 자라 눈으로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신의 할아비가 나라의 녹을 먹었는데, 신은 어렸을 적에 썩은 쌀을 뜰에 심고 싹트기를 기다렸습니다. 조금 자라서는 선비들이나 쫓아다녔지 들사람이나 농사꾼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중년에 어려운 신세가 되어 비로소 귀농할 뜻이 있어서 이른바 농사관계의 책들을 구해 초록을 해두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돌아갈 만한 농토가 없어서 다만 벼루 밭에다 붓갈이(문필생활)나 했을 뿐입니다. 더러 들판에서 갈이 하는 법을 보았지만······
원래 박지원은 노론의 명문 반남 박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두 살 적에 아버지가 죽었고, 녹봉이 없는 명예직의 벼슬을 하던 할아버지 박필균의 손에서 자랐다. 그가 열여섯 살 적에 할아버지가 죽고 형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남겨진 유산이 없었던 탓에 떠돌이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의 집은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고 중년이 될 무렵 가족은 경기도 광주로 이사를 했지만 그는 탑골 뒷골목의 오두막집에서 혼자 지냈다.
연암은 북학파들과 함께 주자학을 비판하고 청나라의 과학과 문물을 이야기하다가 때가 되어 쌀이 있으면 밥을 지어 격식 없이 함께 먹었고, 게다가 막걸리라도 있으면 더욱 흥이 났다. 이러한 모습은 ‘선비들이나 쫓아다녔다’고 말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그는 서른네 살에 초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뒤, 벗들의 강권으로 회시의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일부러 시험지를 내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의 겉모습 또한 가관이었다. 옷은 너덜너덜하고 옷고름은 풀어헤치고 갓은 아무렇게나 뒤집어썼다. 그 ‘연암집’에서 자신이 스스로를 평하기를 “광달(曠達)하기는 장자 같고, 불공하기는 유하혜(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군자) 같고, 술 마시기는 유령 같고, 저술하기는 양웅(중국 전한 말기의 문장가) 같고, 스스로 견주기는 제갈량 같다”고 했다.
‘열하일기’는 당시에 풍미하던 존명배청, 즉 명나라를 존경하고 청나라를 배격함의 풍조, 소중화 의식, 북벌론 등의 허구를 여지없이 깔아뭉개고 풍자했으며, 청나라의 좋은 점을 배우자고 역설했다. 한 대목을 보면 ‘의복이 명나라 것과 닮았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상복이 아니냐? 머리를 깎지 않는다고 자랑하지만 상투는 남쪽 오랑캐의 풍속과 같지 않느냐? 티끌만큼도 그들(청나라)보다 낫지 않으면서 상투 하나 가지고 잘난 체하다니······’라고 당시의 잘못된 생각들을 매도했다.
3.
청나라 문물을 소개하는 기행문 형식의 열하일기는 당대 베스트셀러였으나, 비속어를 많이 써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볼 때 ‘열하일기’는 연암 골짜기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에 중국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특히 ‘열하일기’에 담긴 ‘호질문(虎叱文)’ ‘허생전(許生傳)’은 풍자문학의 극치를 이룬 작품이다. ‘호질문’에서 그는 북곽 선생이라는 위선에 가득 찬 학자를 풍자했다. 북곽 선생은 과부와 간통을 했는데, 과부의 아들들이 그를 여우가 둔갑한 것이라 해 여우를 잡아 돈을 벌자고 하자 도망치다 똥통에 빠졌다. 겨우 기어 나오니 호랑이가 도사리고 있어 애걸복걸 살려달라고 하자 호랑이는 한참 꾸지람을 늘어놓다가 선비는 속이 썩었으므로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가버린다.
‘허생전’에서는 매점매석으로 큰돈을 번 허생이 그에게 벼슬을 권하러 온 어영대장 이완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제갈량 같은 인재를 천거할 테니 효종임금에게 여쭈어 삼고초려할 것, 명의 망명 정객에게 국혼(國婚)을 주고 대신들의 집을 징발해줄 것, 명문의 자제들을 뽑아 머리를 깎고 되놈 옷을 입혀 유학생이나 상인으로 청나라에 보내 간첩의 사명을 완수하게 할 것 등이다.
당시 조정에서 도무지 인재를 찾으려 하지 않고 불공평하게 등용하는 것을 비꼰 것이다. 그리고 몇몇 세도가에게 계속해서 국혼을 주느니 차라리 ‘대국’이라고 섬기는 명나라의 정객에게 국혼을 주라고 빈정거렸으며, 오랑캐라고 멸시하면서도 청나라에 왕실과 조정 신하의 딸들을 징발당하는 모순된 현실을 풍자했다.
또한 청나라를 치자고 외치면서도 과감히 그들 속에 뛰어들어 실정을 파악하려 들지 않는 뻔뻔한 북벌론자들을 매도한 것이다. 물론 이완은 세 가지 중 하나도 실천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허생은 그제야 일어서서 그를 크게 꾸짖고 칼을 찾아 찌르려 했다. 이완은 소스라치게 놀라, 들창을 박차고 뛰어나가 한달음에 도망쳤다.
‘열하일기’는 청나라 문물을 소개하는 기행문의 형식을 빌렸으나 자신의 창작품을 필요한 대목에 포함시켰다. 그런 탓인지 이 책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모든 선비들이 다투어 읽었다. 그러나 인세 한 푼 들어오지 않을 때였으니 이러한 작품들이 읽히거나 말거나 그의 가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박지원은 선배 홍대용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제가 한 언덕과 한 골짜기를 일군 지 9년이 되었습니다. 풍찬노숙 끝에 헛되이 두 주먹만 쥐었습니다. 마음은 피로하고 재주가 졸렬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생활을 바꾸려는 생각은 없다고 했다.
4.
비록 스스로 생산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 말라고 외쳤지만, 글이나 읽는 선비가 농사를 짓기에는 너무나 조건이 맞지 않았다. 이때 그는 선비는 선비로서의 할 일이 따로 있다고 깨달았다. 이리하여 박지원은 쉰 살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주 하찮은 벼슬을 받았다. 이어 현감이나 부사 같은 원 노릇도 하게 되어 가난을 조금 면했다.
그러나 그에게 시련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1792년 그에게 큰 비난이 쏟아졌다. 그가 쓴 ‘열하일기’와 소설들이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린 것이다. 고루한 선비들은 그의 비속한 말, 저속한 표현 그리고 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평을 역겨워했고, 그의 문체가 젊고 기예한 선비들의 문장 표본이 되어가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리하여 임금을 꼬드겨 박지원과 그를 추종하는 일파를 몰아내려 했다.
이에 정조는 그의 글을 읽고 무척이나 못마땅해 하면서 반성의 글을 쓰라고 했다. 박지원은 굽힐 수밖에 없었다. 늙어서였을까? 정조는 다시 지어 올린 글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만족스러워하지 않았지만 그냥 덮어두게 했다.
1799년, 면천군수가 된 지 2년 뒤에 올린 농서(農書) 앞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임을 맡은 이래로 농사에 관해 수령이 해야 할 칠사(七事)의 경책(警策)을 섭렵하지 않음은 아니나, 못나고 게을러서 끝내 입으로 지껄이고 귀로 들은 학(學)이 되어 서로 맞아떨어지지 못하고, 습속이 안이한 탓으로 쉽게 고치지도 못해 옛 습관에 따라 다만 권농했을 뿐입니다. 다음 쓸 이야기 중에 한두 가지는 아직 시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직분을 얻은 지 몇 년이 되었으나 백성의 생업인 농사가 제대로 성행하지 못했습니다. ······ 이로 인해 밤낮 걱정했으나 진실로 시위소찬(尸位素饌)하여 죄를 벗어날 수 없겠습니다.”
이 문맥에서 그가 수령으로서 제일의 임무인 ‘권농’에 대해 노심초사했고, 실제로 자기의 방법을 농민들에게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겸손한 표현을 썼으나, ‘과농소초(課農小抄)’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농업 관계에 대한 옛 의견을 기록하고, 자신이 직접 겪고 본 것을 제시했다. 그리고 국가정책으로 밀고나갈 것을 요구했다.
파란이 겹친 생애였으나 우리는 그의 삶에서 어떤 시사를 얻게 된다.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몸을 내던지며 광인처럼 살았고, 내면에서 꿈틀대는 고뇌를 삭이며 살았던 양심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본다. 어떤 사정으로든 벼슬자리에 나갔으나 수탈하는 수령, 무사안일에 빠진 목민관이 아니라 평소 그의 꿈의 일부를 펴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국가제도와 묵은 습관 때문에 쉽게 실현되지 못했고,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도 받았다. 이런 삶의 모습과 현실인식은 그의 많은 저술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1798년(정조 22) 정조는 수령들과 선비들에게 농업정책에 대해 각자 의견을 내라고 했다. 토지제도가 문란해 국가재정과 농민의 생활이 극도로 악화되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박지원은 앞에서 든 것처럼 이듬해에 이에 대한 의견, 즉 ‘과농소초’를 냈는데, 이것이 얼마만큼 조정에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과농소초’에 대한 언급은 당시 자료에는 없으며 정조가 보았다는 기록 역시 없다.
그러나 여기서 박지원은 농업 전반에 대한 정책을 건의하면서 그 개혁의 중심을 ‘토지겸병(土地兼倂)’에 두고 있었다. ‘과농소초’ 중에는 “농사꾼들이 하는 말로, 1년 내 부지런히 농사지어도 소금 값도 안 된다”는 말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들에게 아무리 농사짓는 법을 잘 일러주고 부지런히 농사지으라고 한들 아무 실효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땅을 가진 자영농이 열에 한둘도 되지 않는데, 그들마저도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야 겨우 먹고살 정도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조세를 바치고 지대를 내고 농비를 부담해야 한다. 그러다가 가정에 큰 일이 있거나 흉년이 들거나 하면 유리걸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박지원은 이런 참담한 농민의 생활은 우선 토지겸병에 원인이 있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저 겸병하는 부호들은 가난한 농민의 땅을 강제로 사들인 것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모두 차지하게 된 것이다. 부유하고 강한 자산에 의지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온 동네의 땅을 팔기를 원하는 자들이 스스로 토지 문서를 가지고 부잣집 문 앞으로 몰려온다. 입고 먹는 것 말고도 길흉대사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요, 혹 빚 독촉에 압박을 받거나 혹 모리(牟利)와 미납된 세금에 쪼들리고 쪼들려서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을 적에 땅을 팔 수밖에 없다.······ ”
결국 토지의 겸병이 확대되어 빈부의 격차가 심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의 집안 몇 세대를 보니, 할아버지, 아버지의 땅을 잘 지켜 팔지 않고 남에게 준 것이 열에 다섯이요, 해마다 땅을 떼어준 것이 역시 일곱 여덟인데도(소작 또는 자식들에게 갈라주는 상속 따위로) 그 땅이 하나도 줄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 이익을 독점해 더욱 점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한번 일정한 대토지를 점유하면 그 이익으로 더 많은 토지를 확대 점유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국가제도를 바꾸어, 토지 점유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구가 일정한 토지 이상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혹 부호들이 숨겨 기록할 적에는 이를 적발해 몰수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토지의 제한이 있은 뒤에야 토지의 겸병이 그치고, 토지의 겸병이 그친 뒤에 산업이 고르게 발달하게 되고, 산업이 고르게 발달한 뒤 농민이 모두 토지에 안착해 땅을 갈 수 있어야 부지런함이 나타나게 되고, 부지런함이 나타난 뒤에야 농사를 권장할 수 있고 농민을 가르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아무리 권농을 한들 농토가 없고 농사를 지어도 살 수 없을 적에는 실효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토지 겸병을 막아 빈부의 격차를 제도로 보장해야 하고, 이외 국가의 조세, 벼슬아치의 수탈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통계를 제시하면서 토지 개혁을 도모했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가 끊이지 않고 도둑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런 개혁책과 경고는 고루한 벼슬아치와 독점적 특권을 누리던 양반 지배층의 완강한 반대로 시행될 수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18세기 초기 민중의 전면적 봉기를 맞게 된다.
그러면 특권지배층인 양반을 정점으로 하는 사회 신분제에 대한 그의 견해는 어떠했는가? 실제 봉건 왕조는 토지제도와 신분제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신분제적 특권은 토지 등 경제적 부를 누리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이런 점에서 양반을 여지없이 매도했다. 그는 ‘양반전(兩班傳)’에서 양반을 한 마리 좀으로 단정하고 아무 쓸모없는 인물로 묘사했다. 양반을 위선에 가득 찬 인물로 그리면서, 근면한 산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이 따위 양반은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도 양반 신분이었으나 선비를 자처하면서 선비의 소임을 말했다. 직접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것보다 실제 경험에 의해 생산계층을 지도하고 이끌 임무가 결국 지식인에게 주어졌음을 알게 된 것이다. 다만 ‘선비’의 지식이 산지식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양반전’에서 그는 “글을 읽으면 선비라 하고, 선비가 벼슬자리에 나가면 대부가 된다”고 했다. 글을 읽어서 아랫자리의 농사꾼, 장이, 장사치들을 이끄는 것이 선비의 소임이긴 하지만, 벼슬을 해 나라와 사회의 일에 참여할 수도 있으므로 신분상으로는 양반에 속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우성은 이렇게 지적했다.
“사는 농공상과 더불어 사민의 하나라고 했지만, 사대부로서의 지위는 농공 상과 동렬의 것이 아니다. 기실 사는 농공상에 대한 지배계급이다. 적어도 이조 초기에 있어서는 이것이 하나의 체제로서 보장되었다. 비교적 공평한 과거의 선발시험을 통해서 능력이 있는 대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일반 사대부에게 균등하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독서하고 계몽하는 역할의 선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릇 선비는 아래로는 농공상에, 위로는 왕공(王公)에 벗할 수 있으니, 지위로 말하면 등급이 없는 것이요 덕으로 말하면 아름다운 일이다. 한 선비가 글을 읽어 덕택을 온 천하에 미치게 하면, 공적이 만세에 드리우게 된다.”
그러고는 당시 선비의 폐습을 이렇게 말했다.
“선비는 성명(性命)을 고담(高談)하면서 경국제세를 빠뜨리거나 부질없이 문장이나 숭상하면서 바른 정치는 베풀 줄 모른다.”
이어 선비의 구체적 소임을 이렇게 밝혔다.
“사의 학은 실로 농공상의 이치를 포괄한다. 이 세 가지 업은 반드시 사를 기다린 뒤에야 이루어지게 되는데, 무릇 농사를 밝히고 상업을 통하게 하고 공을 베풀게 하는 것이다. ······ 생각하건대 후세에 농공상이 업을 잃게 된 것은 곧 사가 실학이 없었던 잘못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5.
그가 도덕군자라고 자처하는 허위에 찬 북곽 선생을 여지없이 능멸하고(호질문, 허생 같은 실질의 인물을 높이 쳤던 것(허생전)은 이런 그의 견해의 일단을 나타낸 것이다.
성명이나 외쳐대며 공리공담에 빠져 있는 성리학자들을 아무 쓸모없는 인물로, 실질 있는 학문으로 민중의 문제에 파고드는 실학을 삶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는 ‘사’의 역할을 유형원보다 더욱 구체화시켰다. 그러기에 소설을 통해 농사꾼, 장사치, 장이들을 부각시켰고, 불우하고 찌든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신분제적 질서를 비꼬았던 것이다.
‘마장전(馬駔傳)’에서는 비렁뱅이로 떠돌며 저자에서 광인처럼 노래 부르고 다니는 세 사람을 등장시켜 참된 우도(友道)를 논하게 했다. 당시 덕 있는 군자인 척, 교양 있는 양반인 척 거들먹거리며 권세나 낚고, 명예나 움켜쥐고, 이익이나 차지하려는 위선자의 모습을 이들을 통해 마음껏 풍자한 것이다.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에서는 똥을 쳐 서울 근교의 채소밭에 나르는 노동자를 등장시켰다. 엄행수는 비록 똥을 치지만 건실한 생활태도와 성실함은 곧 가장 훌륭한 삶의 구현자임을 찬양하고 참된 친구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덕을 높이 사서 ‘예덕’이라 한 것이다. 손 하나 까딱 않고 덕 있는 체하는 양반을 꾸짖은 것이다.
‘민옹전(閔翁傳)’에서는 민옹이라는 영특하고 슬기로운 무관 출신의 기인을 등장시키고 있다. 당시 무반을 깔보고 문반을 위주로 하는 관인사회에 대한 풍자, 특히 놀고먹는 양반을 메뚜기로 비유하는 필치를 보이고 있다. ‘광문자전(廣文者傳)’에서는 거지 출신의 광문이라는 사람을 등장시켜, 그의 성실과 정직과 능력을 말하면서 이런 표본적 인간이 인간 대접을 못 받는 사회를 꾸짖고 있다. ‘김신선전(金神仙傳)’에서는 신선이 되어 세상을 피해 사는 인물을 통해 불우한 인사가 사회를 등지고 사는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에서는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열녀를 강요한 사회 모습을 그리고 있다. 새파란 나이에 혼자되어 오래 세상을 살아가자면, 길이 친척들의 가엾이 여기는 바가 되고, 이웃사람들의 못된 억측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얼른 이 몸이 없어지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성욕에 몸부림치며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가엾은 노력을 하는 늙은 과부의 이야기를 앞에 기록해 수절의 강요를 풍자했다.
이렇듯 그의 작품의 소재는 하층민의 문제이다. 곧 신분제도의 철폐를 우회적인 수법으로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양반지배층이 아무 쓸모없는 유식배(遊食輩)임을 강조하고, ‘사’의 소임이 신분제적 특권이 아닌 민중을 이끌고 계도하는 것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양반의 곁가지인 서얼의 금고에 대해서도 그 부당함을 말하고 있다. ‘의청소통소(擬請疏通疏)’ 앞에는 “하늘이 재주를 내릴 적에 신분에 따라 달리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우리나라에서 서얼을 폐고(廢錮)한 지 3백여 년이 되었는데, 크게 어그러진 정사가 이보다 지나친 것이 없었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기회의 균등을 말한 것이요, 모든 정사 중에 서얼 금고가 가장 잘못된 법임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부계를 중시하는 것이 문벌인데도, 서얼에 있어서만은 모계 위주로 따지고 있는 것은 크나큰 모순이라 했다. 여기서 그는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부당함을 지적했다. 이 밖에도 노비계층을 동정했고 무사계층을 옹호했다.
그러나 토지제와 신분제에 있어 그의 견해에 관해 두어 가지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토지제에서 겸병과 독점을 막아야 한다고 했으나, 국가소유의 토지, 곧 궁방전(宮房田), 즉 왕자나 공주에게 딸린 토지나 공방전(公房田), 즉, 관아에 딸린 토지 등에 관해서는 지적한 것이 없다. 그리고 대토지 소유의 하나였던 사전(寺田) 즉 절의 토지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둘째, 신분제에 있어 노비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결여되어 있었다. 노비문제야말로 양반 특권을 배제하고 국가의 재정과 군역에 있어 가장 당면한 중요과제였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농업중심사회였다. 역대로 국가에서 농업을 가장 장려했고 농업 생산품이 바로 국가의 부가 되고 재정의 중심이 되었다. 이 때문에 농업을 권장하는 왕의 윤음(綸音)이 때마다 반포되었고, 수령들이 해야 할 칠사 중에 농상(農桑)이 첫 자리를 차지했다. 그야말로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의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짙게 깔려 있었다. 농사의 수확은 토지에 따라 한정되었던 탓으로, 조정이나 목민관은 언제나 검약을 내세웠다.
특히 18세기 중농주의를 제창한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에 속하는 실학자, 그 중에서도 성호 이익은 부국강병과 민생의 윤택을 위해서 검약을 제일의 방법으로 내세웠다. 그는 하루 한 끼를 먹고 견뎌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따라서 농업중심사상은 상공업을 말리(末利)로 보아 천시했다. 이것은 중국에서도 그러했지만 우리나라가 더욱 심했다.
그러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에 속하는 실학자, 그 중에서도 박지원, 박제가는 상업과 공업의 발달이 있어야 부국과 민부(民富)가 이룩된다고 주장했다. 곧 명농(明農), 통상(通商), 혜공(惠工)으로 균형 있는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주장을 ‘이용후생’이라 했는데, 사물을 잘 써서(利用) 삶을 풍요하게(厚生)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농업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농업을 기초로 해 유통과 교역, 기술 개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이우성은 이렇게 쓰고 있다.
“농업주의 운운해······농민의 생활은 경전이식(耕田而食)하고 직포이의(織布而衣)하면 될 뿐이며, 화폐의 유통조차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에 반해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이윤의 추구와 아울러 더욱 자기 신장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진작 그것을 이해하고 지지한 것이 연암 그룹이었다. 연암 그룹은 평소 그들의 견해도 그러했거니와 중국여행을 통해 당시 중국인의 물질생활, 특히 부유한 생활수준과 조리 있는 생활양식을 목격한 후에 더욱 각성된 바가 많았던 것이다.”
6.
상공업세력은 17세기 후반부터 국가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크게 신장했다. 다만 정조의 통공(通共)정책이 실행되어 상인과 장인의 활동을 넓혀 주었을 뿐이다. 그들은 지역 간의 교역, 시장경제의 확대, 가내수공업에서 상품수공업으로의 전환을 도모했다. 이것은 특산물의 교환이나 특정지역에 모자라는 상품을 공급하는 효용성이 있었던 탓이다. 이런 현실 조건을 박지원 일파는 민감하게 파악하고, 도시적 분위기 속에서 사무역(私貿易)과 사공업(私工業)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에 왕래하면서 실질적인 생활태도와 산업규모를 목격하고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존명배청의 정책을 내걸어 의례적으로만 청나라에 굽실거렸고, 내면으로는 오랑캐라고 얕보아 그들의 문물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이에 박지원 일파는 이런 조정의 정책에 반대해 청의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는 이론을 편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주장을 책으로 펴냈다. 홍대용의 《담헌설총(湛軒說叢)》,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북학파라고 불렀다. 부르기는 달리했을지언정 그 뜻에 있어서는 ‘이용후생’이나 ‘북학’이 같다.
박지원의 생에 있어서 후반기는 현실참여를 통해 개혁을 이룩하려는 의지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쉰 살이 넘어 벼슬살이에 나와 마지막으로 양양부사를 지냈다. 양양부사로 1년도 채 복무하지 못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사직했다. 몸은 비대했고 눈은 사물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김씨 문벌정치 아래의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의 개혁사상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바쁜 벼슬살이에서 그의 사상적 체계를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만년에는 붓끝이 흐려져 있어서 개량적이고 타협적 수준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따져 박지원을 북학파의 대표적인 문사 또는 실학사상가로 꼽고 있다.
그의 묘소는 장단의 송서면 대세현 언덕바지에 있었으나 현재 북한 땅이어서 그 형편을 제대로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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