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논리는 제나름의 근거와 합리성을 지니고 있고, 그 나름의 설득력 역시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그 사회가 추구하는 표현의 자유와 그것이 용인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기준의 차이일 겁니다.
전 이 두 입장이 모두 맞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남의 자유를 침해해서도 안 되고 남을 공격하는 것도 좋지 않죠. 하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금지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표현의 자유가 잘 보장된 나머지 그것 남용하고 악용하며 자신의 반사회적이고 윤리, 도덕에 반하는 가치관의 표현을 반복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고, 이런 경우 사회적 공해가 되어 듣기 싫지만 쫓아낼 수 없는 불편이 발생할 수 있죠. 누구도 커뮤니티의 어그로꾼이 열심히 활동하는 걸 바라지 않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표현에 대한 사회적 논란에 의해 금기 내지는 낙인이 찍혀 특정 표현이 금지되어 제재를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거나 납득이 발생했다고는 해도, 표현의 범위가 좁아진 것은 사실이고, 그와 유사한 경우가 반복될 경우 전례에 따라 같은 원칙이 적용되므로, 그러한 제한, 제재가 반복되어 표현의 폭이 계속 줄어들 것입니다.
전 이에 대한 기준이 그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잘 작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는,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표현을 했을 때,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누구라도 욕할 만한 개소리를 했을 때 대중에 의한 사회적 제재가 가해지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제한하고 얼마만큼 보장할 것인가가 갈려야 한다고 봐요.
미국을 예시로 들어보자면, 9.11에 대한 고인모독과 조롱은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장됩니다. 다만 어그로꾼에 대한 공격 역시도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장이 되죠. 개소리를 하고 혐오 표현을 해도 사람들이 그 표현에 대해 마찬가지로 욕할 자유 역시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 아래 대중들은 적극적으로 반사회적인 표현, 혐오 표현에 대한 민감하고 공격적인 반응을 보여주며 그러한 이들이 욕 먹을 소리를 했을 때 물 밑으로 가라앉게 해버리죠. 공개적으로 9.11에 대한 망언을 했다면 미국 사회는 그를 쉽게 용인하지 않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죄를 짓거나 혐오스러운 표현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며 그에게 사회적 패널티를 가할 것이고 공개적으로 이슈가 된다면 시장이나 경찰서장 같은 이들이 기자들 앞에서 우리 지역 사회의 부끄러움이라 비판하겠죠.
이는 도덕적 기준이 보편적으로 자리잡혀 있고 그것이 보편적 정의나 윤리의 기준에 더 가까울 때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물론 이들의 대중적 차원의 사회적 제재가 정의로운가에 대해서는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지탄이 발생할 때 한국이나 일본 같은 곳에선 쉽게 마녀사냥, 인민재판, 사적제재라 거품을 물고 비판할 사람들이 있을 거고요.
그러나 전 욕 먹을 짓을 했다면 욕을 먹는 건 당연하다는 상식에 따라 당연히 뒤따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정의롭고 아니고를 떠나서요.
미국과 같은 표현의 자유가 크게 보장된 사회에선 시민의 비난 역시도 표현의 자유로 인정되는만큼 비판 받을 행위를 한 사람은 대중에 의해 제재를 받습니다. 그렇게 비윤리적인 개인이나 집단, 혐오 집단의 준동을 억눌러왔던 것이고 도덕적 기준을 지켜올 수 있었으며 그렇게 도덕적 기준을 재확인해오기도 했죠.
물론 그게 그렇게까지 성공적이었다면 현 미국 사회와 정치가 더 나빠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경제, 사회적인 이유로 환경이 변하면 그에 맞게 반응해왔고 도덕적 기준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에 60년대 호황기에도 흑인들은 차별받고 린치 당하며 살해됐고 여성들 역시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기 쉽상이었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기준이 변하면 당연히 대중적 차원의 혐오분자에 대한 제재 역시 약해지거나 무감각해지게 되겠죠.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2000년대 초반에 비해 2010년대 이후 훨씬 커졌던 것처럼요.
반대로 법적인 제재를 통해 특정 표현에 대한 구체적인 제재가 공권력에 의해 이루어져야할 필요는 그러한 상황이 심각해진, 혹은 위태로운 사회에서 발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필요가 있을 경우 그러한 힘이 작동해야 할 수도 있다고요.
한국 사회도 반사회적 행위자에 대한 국민적 지탄은 어렵지 않게 발생했던 시절이 있고 지금도 그 관성이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사회적 비판을 받을 일을 했다면 온 국민이 그놈 나쁜놈이라며 욕하고 손가락질 했죠. 그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보편적 도덕 기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시대적, 의식적 한계로 인해 그 수준이나 지탄의 방식이 현 시대의 것을 기준으로 하면 다소 미개해 보이거나 과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적용되고, 그것을 어떻게 쓸지도 개인의 판단에 따릅니다. 따라서 양식 있고 도덕적인 사람이라면 최대한의 자유가 주어져도 할 말과 못 할말을 구분하고, 할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을 구분하여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려 노력할 겁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고 그들은 자신의 자유가 보장하는만큼 난장을 피워도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그러한 행위에 대한 제재에 반발한다는 겁니다.
대중이 이들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고 그들의 난장을 반대한다면 사회적 지탄과 대중적 차원의 비판으로 그들을 수면 아래로 내려보내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후퇴시키거나 도전을 꺽어버리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게 되는 경우, 혐오가 충분히 제재받지 않아 수면 위로 조금씩 올라오고, 그 규모를 키워가게 되어 누군가 혐오 표현을 했다고 해도 그에 대한 비판과 제재를 가하려는 측의 힘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거나, 오히려 역으로 혐오세력에게 제압, 혹은 무력화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혐오 세력이 수면 위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그 규모를 키워갈수록 혐오자들이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반사회적, 비윤리적 표현을 반복할 때 파편화되고 상대적 소수에 불과했던 이들이 대중의 반발에 의해 어렵지 않게 제압되었던 것에 반해 이들은 그러한 반발에 대응하게 됩니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든 보장되고 내 자유를 억압하지 말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런 이유로 혐오 받는 건 당연하다거나, 유사해보이지만 구분될 수 있는 사례를 가져와 동일한 것이라며 자신의 혐오 표현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 무시하고 걍 내 맘대로 할 거라며 조롱하는 경우 역시 충분히 많죠.
이러한 이들이 규모를 키워갈수록 기존 어그로꾼, 혐오자들에 대한 제재를 근거했던 사회적 도덕 기준은 낮아지게 될 거고 덜 도덕적이게 됩니다. 저소득 흑인이 경찰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논란이 되었을 때, 이전이라면 약자의 죽음, 혹은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희생 등 다양한 이유로 그들을 추모하고 경찰을 비난하거나 책임을 요구했을 것을 현 시대엔 범죄나 저지르는 깜둥이의 죽음에 환호하거나 조롱하죠. 최소한 그들의 죽음에 무감각하여 그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어떤 비난을 받는지에 대해서도 관계되고 싶어하지 않는 경우 역시 많아졌습니다.
혐오 세력은 점점 그 규모를 키워가며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더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갈 것이고, 그들에 대척점에 있는 이들의 세력은 점점 줄어들어 사회 보편적 도덕 기준의 후퇴를 겪어야할 것입니다. 혐오 세력의 표현들은 쓰레기 같을 지언정, 다양한 이유로 그것에 호응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호응하는 이들의 가치관이 상대적으로 더 맛이 갔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과 공감할 법한 주장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죠. 나치가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나치가 얼마나 미친놈들인지 몰랐기 때문이기 이전에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줬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미국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는 이유 역시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그걸 얼마간 실천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옳고 그름을 떠나 지지와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세력이 성장하고 더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전에 그들의 근간을 공격하거나, 지엽적으로 혐오 표현에 대한 법적인 제재를 가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습니다. 이는 대중의 사회적 제재, 지탄이 힘을 발휘할 수 없어 혐오 세력을 충분히 수면 아래로 잠재우지 못했기 때문이며, 사회적 도덕 기준을 지켜내기 위해서 발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당연히 지향되어야할 이점이지만 그것이 더 선한 사람보다 더 악한 이들에게 큰 힘을 주고 그들의 성장에 자양분이 되는 근거가 된다면 어느 정도 제한되어서 얻을 사회적 이익이 더 클 수 있습니다.
물론 모두의 표현의 범위가 조금씩 후퇴하고 제약되는 건 사실입니다. 부당한 피해자나 억울한 제재가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혐오 세력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도덕적이고 양식 있는 사람의 경우 스스로의 자유를 남용하지 않고 정도를 지키려 할 것이기에 혐오 표현에 의해 피해를 볼 지점은 혐오 세력이 비해 훨씬 적습니다.
혐오 세력에게는 그들의 내부적 핵심 원리와 동력원이 법적 제재로 인해 적출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대중의 경우 더 혐오 세력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이들은 얼마간 피해를 보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록 아무 피해 없이 자신의 정신건강을 해롭게 하는 외부적 공해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될 겁니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은 모두가 우려하는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죠. 표현의 자유가 한번 후퇴하면 다른 경계선적 표현에 대해서도 논란이 발생할 수 있고, 저건 되고 이건 안 되느냐는 지적에 다시 한번 후퇴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표현의 제약이든, 기존 제약했던 영역의 석방이 될 수도 있겠죠. 또한 언제까지, 어디까지 제재하고 제약하는지에 대해서도 정해야 합니다. 사회적 합의는 혐오세력의 규모만큼 치열하고 지리할 것이고요.
무엇보다 그러한 기준을 마련해야할 정치인이 누구의 손을 드느냐에 따라서도 결정이 갈리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그러한 표현의 제약이 발생했을 때 그것은 결코 영구적이고 항구적인 법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이유는 혐오 세력의 성장과 보편화를 막기 위한 것이고, 그러한 임무가 충실히 성과를 보았을 때 제약은 유연하게 후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 이상 그러한 제약이 필요치 않다거나 그 제약의 범위와 정도를 축소시키는 쪽으로요.
이런 이유로 전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와 표현의 제약이 발생하더라도 처벌하는 사회는 그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얼마나 잘 작동하고, 혐오 세력에 대한 사회적 제재가 잘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회적 제재가 반드시 정의롭거나 올바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그 사회가 가진 도덕적 기준과 상식에 대한 증명이자 확인이기 때문에 마녀사냥, 인민재판이라는 비판으로 일축할만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욕먹을 짓을 했다면 당연히 욕을 먹는 건 당연한 겁니다. 잘못을 했는데 마녀사냥이라고, 인민재판이라고 그 입을 다물거나 공격을 금지시키는 것 역시 대중이 향유하는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행위이고요.
혐오 세력은 혐오를 동력으로 성장하고 그 성장은 외부 자원을 받아들여 이루어집니다. 대중에 의해 제재받지 않고 억눌려지지 않거나 그러한 사회적 제재를 금지하여 그들을 방치할수록 혐오 세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혐오 세력이 대중에 의해 무력화되지 않는 사회일수록 제약을 감수하고서라도 법적으로 제재하는 건 필요한 선택지로 고려됨에 마땅합니다. 할 수 있느냐와 별개로요.
첫댓글 어떻게 해야 빨간 장막으로 진실을 가리며 장난치는 마타도르를 때려잡을 수 있을까요? 기준잡기가 어렵습니다 ㅎㅎ
커뮤니티 운영 입장에서도 그걸 칼같이 나누는건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 카페 운영자나 저 또한 타 카페 운영하는 입장으로 볼 때 쌍방으로 혐오표현을 썼을 때 쌍방으로 처벌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죠.
심지어 다수가 그 혐오를 공유하는 여론일 경우도 다수를 처벌할지 아니면 그 혐오에 휩쓸릴지도 마찬가지죠.
AI가 아닌 사람이 하는 판단인데 가치판단에 있어서 매번 시대마다 다르고
이 시대가 멍청할 자유 역시 보장되는 만큼 또 미워할 원인 자체가 존재하는 만큼 사라지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