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궁, 화살 그리고 플레쳐의 기원-
편집 and 번역: 강희대제
'플레처' 는 13세기 초에 쓰여진 사람의 "성"이다. 플레처 사람들은 1203년 영국의 스태퍼드셔 《Staffordshire 잉글랜드 중부의 주》에
서 거주하였으나, "Ralph le Flescher" 와 "Nicholas le Fletcher"는 1273년에 링컨셔 《Lincolnshire 영국 동부의 주(州);略 Lincs.》라
는 곳으로 이주하였다.
플레처사람들과 길드의 활제조장인들은 1363년 런던시 상업조합으로 인정되어졌다. 하지만, 1370년에 플레처사람들과 다른 활제조장
인들은 둘로 나뉘어 붕괴되기 시작했는데, 1429년 도시에서 포고가 내려져 그들 각각의 영역이 규정 지어질때까지 그들 사이에서의 관
할문제에 대한 논쟁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플레처 사람들은 런던에선 1386년에 정식으로 독립되어 등록되었는데, 이것은 전설적인
웨일즈 longbow사수의 기술과 플레처 사람들의 전문기술이 퍼져나간 역사의 증거다.
일부 역사학계에서는 현대의 플레처 성을 가진 사람들의 선조들은 중세longbow사수에게 기본적인 보조 노동 인구로 행동했다는 학설
제시하기도 하는데, 이게 가능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 학설이 영국의 longbow궁수 집단내에서 플레처사람들이 타협했다는 것을 설
명하는것일까?
1. 웨일즈 longbow사수의 기원과 역사
<그림1> 웨일즈지방의 궁수
영국안에 기원전 3천년의 고고학증거물을 찾아보면 longbow의 사용을 살펴볼수 있는데, 그것은 유럽전체에서 널리 사용되어졌다.
그때부터도 longbow가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현재까지 발전되어졌는지는 모른다. 고대 켈트족과 로마인들은 지금의 longbow와
유사한 무기가 존재했고, 그들은 소규모로 그것을 운용하였다. 바이킹은 농사를 위해 활과 화살의 제공을 제한하였고, 서기 633년
Offrid에 있는 Northumbria의 왕 Edwin의 아들은 웨일즈의 Mercians전쟁에서 화살에 맞고 전사하였다 그화살이 웨일즈의 longbow
에 의해 발사된 화살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이야기는 일찌기 웨일즈 궁수가 군사작전에 활약했다는 증거가 된다.
알아주는longbow 전문가인 Robert Hardy의 의견을 들어보면 웨일즈에서 longbow가 영국이라는 섬에 먼저 소개되어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주는데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주장하길 "웨일즈인들은 덴마크인들이 활을 무기로 채택하기 이전부터 이미 활을 사용했
으며,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사람들이 활을 사용하기 이전부터 영국에는 웨일즈 지방을 중심으로 먼저 활이 보급되어 있었다" 고한다.
17세기까지 영국안에는 제대로된 정규 육군이 없었고, 13, 14세기 그리고 15세기동안 궁수는 영국의 비정규 육군의 일부에 포함되어 전
투에서 활약했다. 그나마 배치된 육군 전투병들은 해산되었고, 궁수들은 고향에 있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갔다. 궁수가 다시 필요 해졌
을 때는 봉건 상류 계급에 의해 징집되거나 보충되었다.
633년 Offrid에서 에드윈의 아들이 웨일즈인의 화살에 의해 전사했고, 이것때문에 그후 수백년후의 영국인과 노르만 왕조에 의해 널리
사용되어졌고, 웨일즈인들이 longbow를 군사작전에서 가장 먼저 사용했다는 사실은 1054년 영국의 웨일즈 지방으로 쳐들어온 Saxon
족의 기병대가 longbow 궁수로 이루어진 웨일즈 산적들의 매복에 의해 격퇴당한 사건에서 찾을수 있다. 그당시 궁수들은 정확하면서도
맹렬하게 사격을 가했고, 웨일즈인들이 다가가 창을 던지기 전에 Saxon의 기병대는 도망갔다.
1182년에 있었던 Abergavenny성 포위전 때는, 웨일즈 longbow궁수가 쏜 화살이 4인치짜리 목재성문 을 관통했고, William de Braose
가 웨일즈 궁사가 쏜 화살에 맞아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 화살은 정확히 사슬갑옷(chainmail)의 넙쩍다리 부분과 안장,
그리고 그가 타고 있던 말까지 관통시켜 버렸다.
영국의 왕 Edward 1세는 웨일즈 궁사가 사용하는 longbow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이것을 발전시켜 13~15세기의 군사원정기간 동안 웨
일즈 궁사를 적극 활용했다. 남동 웨일즈 지방은 훌륭한 longbow궁사를 창시해낸 곳이였고, 그들은 곧 매우 멀리 떨어진 Pembroke로
보충되었다.
1299년 봄 Falkirk에서 Edward가 거둔 승리는 웨일즈의 longbow궁사의 강력한 효과 덕분에 이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투이다.
<그림-2>cracy 전투
1346년 프랑스에서의 crecy전투는 롱보우의 뜻있는 무대가 되어주었고, 전쟁양상을 변화시켜 버렸는데, 당시 Edward 는 웨일즈 지방
출신의 3천~6천 궁사를 이끌고 가던중 적의 기사들과 직면했으나, 잘 훈련된 웨일즈 궁사는 분당 약 10발 가량을 쏠수 있어 전투
당시에는 금세 수천발에 달하는 화살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고, 목격자들은 그것이 흡사 하늘에서 눈비가 내려오는 모습같았다고한다.
프랑스 석궁수들은 longbow궁수들보다 화살을 장전하는 속도가 느렸고, 이 이점은 결정적으로 영국군의 전황이 유리하게 끔 만들었다.
<그림-3>agincourt 전투
웨일즈의 궁사들은 또한 Agincourt전투에서 긴요한 역활을 담당했는데, 1415년 10월 25일 헨리 5세의 지휘아래 longbow궁수와 영국군
은 Agincourt에서 프랑스의 기병부대를 완벽하게 격퇴했다. 이로써, 숙련되고 경험있는 궁수들에 의해 움직이는 longbow의 화살은 적
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강한 활에서 발사되는 화살은 180~200야드 사이의 먼 거리에 있는 사슬갑옷과 투구를 관통할수 있었는데,
이 겁없는 longbow 궁사들은 그들의 적과 바다건너 유럽인들을 약 3세기동안 두려움에 떨게했다. 이 두려운 중세 longbow궁사들은
일반적으로 두손가락을 사용해 활사위를 잡아 당겼는데, 프랑스 군인은 이들의 손가락을 잘라버렸으나, longbow사수들은 전투가 임했
을때, 항상 두손가락을 적군이 잘볼수 있게 떠받들어주어 상대방 병사들을 조롱했다.
편집 and 번역: 강희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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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까페에다 번역해서 써먹은글인데.. 까페내에서는 번역이나 내용이 이상하다고 이의제기해주시는 분이없어서 여기다 올리게됐습니다..
엑박 뜨는뎁쇼~~
으흠 액박이 뜨신다면 원본 -> http://cafe.naver.com/booheong/4419
엑박 ....
엑박이 뜨신다면 이리루 http://cafe.naver.com/booheong/4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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