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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커첸 선교사의 놀라운 전도력
전병호 목사
맥커첸 선교사와 삼례제일교회
1901년 남장로교회 파송을 받은 맥커첸(Luther Oliver McCuchen, 마로덕(馬路德)) 선교사는 서울에서 어학연수를 받고 1902년 전주 선교부에 독신으로 부임했습니다.(1908년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화여교 교사였던 요세핀(Joshephine Hounsell과 결혼) 그가 전주 선교부에 내려와서 제일 처음으로 설립한 교회가 삼례제일교회(삼례교회 현재 교회명)였습니다. 1903년 맥커첸 선교사는 최대진 조사를 대동하고 삼례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이에 장경태, 김헌식, 정찬신, 김계홍 등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장경태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삼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신도 수가 점점 늘어나자 전주군 창덕면 상후리(全州郡 昌德面 현 參禮面, 上后里 현 參禮里)에 초가 4칸을 예배당으로 하여 3월 5일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교회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당시 출석하는 평균 교인수가 장년 17명이었습니다.
1905년, 全州參禮敎會가 成立하다. 初에 宣敎師 馬路德과 助師 崔大珍의 傳道로 張敬泰 鄭昌信 等이 信敎後 熱心으로 傳道하며 上後里에 草家 四間을 禮拜堂으로 買入하야 17敎 友가 會集하다가 후에 禮拜堂을 西新里로 移轉하니라.(史記 137쪽. 김수진, 『호남기독교 100년사』 195쪽)
맥커첸 선교사
1905년 9월 사신리(四新里 현 參禮里 139번지)에 초가 세 칸인 곳으로 이전하였고 1907년 봄에는 교인수가 100명으로 늘었습니다. 그 해 가을 장경태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아동들에 대한 교육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정창신과 함께 기독영흥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 8월 31일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곧 학교 이름을 영신학교(1909년 개칭)로 개칭하였는데 학생 수는 최동만, 박석순, 김판암, 김계홍 등 10명이었습니다. 김계홍은 1911년 4월 8일 삼례교회의 첫 번째 장로가 됩니다. 서창순, 김성배도 영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김성배는 그 뒤 신학을 공부하고 1948년 삼례교회 목사(1948. 10-1952. 8)로 위임합니다. 영신학교는 1967년 3월 완주군교육청으로 이관되어 삼례중앙초등학교가 될 때까지 1,055명의 수많은 지역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삼례교회는 한국교회 역사에 크게 알려진 목사들이 거쳐 갔는데, 1918년 8월 26일에는 김인전(1876-1923) 목사가 전주 서문밖교회와 함께 동사 목회를 하였습니다. 김인전 목사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촌마을에서 태어나 1913년에 서문밖교회 장로로 1914년에는 목사로 그리고 1916년에 전라노회장을 지낸 분입니다. 그는 유불선도와 세상의 여러 학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져 비신자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는데, 그가 가르치는 성경공부 시간에는 300-5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의 강해를 들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령이 떨어지자 에베솔(Eversole Finley Monwell 한국명 여부솔 1912-1930, 전주에서 활동. 신흥학교 교장으로 삼일운동 당시 감옥에 갇힌 학생들의 석방운동을 하였다.)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해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홍보, 재정, 외교 등의 요직을 맡아 많은 임정요인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받았으며, 마침내 의정원 의장이 되어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이처럼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김인전 목사가 당회장으로 있었던 반면, 제29회 총회장시에 신사참배 창씨개명을 결정함으로 한국교회에 큰 부끄러움을 남겼던 곽진근(1897-1941)목사도 1924-25년간 삼례교회의 담임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1939년-1942년간에는 목포 양동교회와 이기풍목사와 함께 제주선교에 큰 업적을 남겼던 윤식명 목사가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삼례교회에서 꼭 기억할 이름은 영흥학교 출신인 김성배 목사의 가족사입니다. 김성배 목사의 할아버지는 삼례교회 첫 신자인 김헌식 영수로 아들 김창언과 손자 김성배, 김춘배, 김형배 등 온 가족을 데리고 1917년 만주 용정 천보산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김창언은 용정에서 포목장사를 하였는데 슬하의 3형제는 그곳에서 독립군 홍범도 부대에 입대하여 독립군으로 활동을 합니다. 김성배는 3년 동안 독립군으로 싸우다가 석탄골 전투에서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되자 독립군 활동을 접습니다. 독립군으로 목회자로 의사로 활동한 김성배 목사는 한국 초기 교회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인물입니다. 그는 서울감리교 협성신학교와 평양신학교(25회)를 졸업하였고, 삼례제일교회, 수원서둔교회, 목포양동교회, 전주중부교회, 전주성산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였으며, 만주에 신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만주에서 목회를 하던 중 병든 동포들이 많은 것을 보고 중국 상해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훈춘성민의원, 장춘성산의원, 곽산성산의원, 논산순천의원, 영등포동양의원을 세워 의사로도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청산학원에 유학하여 27세 나이로 일본중앙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철학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는데, 그 후 그가 받은 학위는 의학박사, 신학박사, 명예박사 등 7개나 됩니다. 김성배 목사는 1945년 이후 평북 정주 곽산에서 공산치하에 목회를 하며 성산의원을 운영하고 곽산여자중학교를 설립하였지만 전 재산을 몰수당한 뒤 1948년 10월 9일 월남하여 삼례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고향인 삼례를 떠난 지 31년 만에 고향교회에서 위임목사로 목회를 하게 됩니다. 1979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1984년 6월 2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로스엔젤스 로즈힐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김성배 목사의 동생 김춘배 열사의 독립운동사는 한편의 영화처럼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만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관심있으신 분은 삼례제일교회사를 참고 바랍니다)
삼례교회에는 걸출한 한국의 여성 지도자가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근대 한국 여성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임영신(1919-1977)여사가 바로 삼례교회 출신입니다. 그는 본래 금산 출생이나 기전학교를 나와 삼례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임구환(任九桓, 삼례교회 약사에는 임구식으로 나왔다)은 금산 상옥리 금산제일교회(충남 금산군 금산읍 1905년 3월 16일 맥커첸 선교사와 최대진 조사에 의해서 이원필의 집에서 설립)를 다니다가 삼례로 이사와 1939년 5월 28일 삼례교회 장로(1915년 3월 금산제일교회에서 장로 장립한 바 있음)가 됩니다.
임영신은 기전학교 다닐 시에 같은 반 친구인 김연실의 집에 갔다가 김연실의 아버지 김인전 목사를 만나게 되고 한동안 그에게서 자신의 신앙과 애국사상을 듣게 되니 훗날 김인전 목사가 자기를 키워준 큰 스승이라고 자신의 이력서에 기록하게 됩니다.(기전학교 학창시절 임영신의 활약상은 『기전 80년사』를 참고 바랍니다.) 3·1운동 당시 함태영(후에 부통령)에게 독립선언문을 받아 수백 장을 등사하고 전주 만세운동에 전달한 그는 이로 인해 체포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 선고를 받습니다. 1924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만행 사건 기록을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러 갔던 그는 미국 서던 켈리포니아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유학을 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독립운동협회를 조직하여 과일 장사를 하면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의 자금을 대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후 독립된 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일과 특히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의 참전을 위해 미국에 건너가 했던 그의 활약상은 익히 잘 알려졌습니다. 임영신은 4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최초의 여성 상공부장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임영신은 1947년 독립된 나라의 새 일꾼 양성을 위해 중앙대학교를 설립하여 중앙대학에서 배출된 수많은 인재들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임영신은 금산초등학교 3회 졸업생이라 금산이 배출한 위인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만(2013년 12월 26일 금산의 인물로 임영신, 정치인 유진산, 극작가 임희재가 선정되어 금산역 앞에 흉상을 세웠다.) 이미 기전학교 다닐 때에 가족이 삼례로 이사와 삼례교회를 통해서 신앙이 자랐고 전주 기전학교를 다니면서 독립 의지를 키웠으며 미국 유학을 마치고도 계속 삼례 집에 올 때마다 아버지가 장로로 있는 삼례교회에 출석하였으니 금산에서 뿐 아니라 삼례교회의 출신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1920년 7월 5일은 삼례교회에 또 한 가지 기억할 알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예배당이 남여로 구분되어 예배하여 왔는데 칸막이 포장을 떼어 내고 통간예배(通間禮拜)를 드렸으니, 이는 전북에서 최초의 일이였습니다. 1935년 12월 16일 오후 2시 30분 교회 헌당식과 함께 맥커첸 선교사의 선교 33주년과 회갑축하예배가 성대히 거행되었습니다. 누군가 맥커첸 선교사 환갑연 축시를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이승철 선생의 기록)
馬路德(마로덕) 宣敎師(선교사)
完山入鄕馬路德(완산입향마로덕) 마로덕 님 완산 땅 선뜻 들어서서
傳道行脚奧地域(전도행각오지역) 전도길 구석진 곳 여기저기 찾아
人逢勸勉耶蘇信(인봉권면야소신) 사람 만나 예수 믿자 권하지만
高鼻目睹不聽樂(고비목도불청락) 높은 코만 즐겨 볼뿐 들은 척 아니 하네
福音浸透驚斯文(복음침투경사문) 스며드는 복음 앞에 깜짝 놀란 유생들
日增聖徒邪敎視(일증성도사교시) 날로 느는 성도 보고 사교라지만
參禮敎堂施甲祝(삼례교당시갑축) 삼례교회 회갑 축하 푸짐한 잔치
長流大川加活力(장류대천가활력) 한내 물 힘을 받아 멀리멀리 흐르누나
맥커첸 선교사가 전북 동북부지역에서 보여준 선교활동은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으니 한국교회는 그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 누가 어느 교회가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삼례교회가 다시 그를 기억하고 그의 선교활동을 기념하는 일을 계속 했으면 합니다.
1941년 5월 5일 삼례교회는 노회로부터 삼례제일교회로 이름을 변경하여 불렀는데 전에는 삼례서신리교회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복음이 전달된 이야기- 제내교회, 봉상교회
익산 IC에서 왼쪽 완주 방향으로 나아가면 완주군 봉동읍이 있습니다. 봉동읍과 비봉면에 걸쳐있는 봉실산(372m)이라 일컫는 명산이 있는데 봉황이 알을 품는 형상이라 전해집니다. 조선건국 초기, 수도 송악을 옮기려고 무학대사가 수도 후보지로 한양과 계룡산, 이곳 봉실산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봉실산 주변은 한 나라의 중심지로는 지세가 조금 부족한 면이 있지만 앞으로 크게 창성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 완주 산업단지, 과학산업단지, 테크노벨리 등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통합 전주시는 100만 광역도시로 발돋움하는 것과 중추적인 중심 특화 거점도시로 발전할 잠재력이 많아 이 지역의 선도적 역할을 기대하게 됩니다. 바로 그 봉동 지역에 마치 관문처럼 제내교회가 있습니다.
제내교회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공을 했던 김성식과 정민혁은 자신들의 마을에서 50리 떨어진 곳인 전주 은송리 서문밖교회까지 걸어 다니며 믿음생활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토요일 저녁에 교회에 가서 잠을 자고 다음날 주일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00년 3월 5일, 28세 청년인 김성식은 자기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제내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1905년 신기부락에 곱배집 초가를 교회로 신축하고 공식적으로 제내교회를 등록함으로 사기에는 1905년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였던 것입니다.(제내교회 당회원들의 증언을 빌면 1904년 7월 24일이라고 함. 김수진 『호남기독교 100년사』 199-200쪽) 그리고 1915년 4월 5일 3차로 전북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에 17평의 교회를 초가로 신축하여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1908년 1월 25일 김성식(1871-1941)은 제내교회 첫 장로로 장립한 후, 1910년 4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4월 제6회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일찍이 김성식 목사는 충남 예산의 무관출신 양반 가문에서 출생하여 사업관계로 멀리 중국 간도 등지로 다니면서 신문화를 접촉하면서 기독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제내리는 성씨, 정씨, 임씨의 씨족 사회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제내리 김성식 목사의 사랑방 교회에는 산지기, 하인들, 머슴들 등 대체로 하층민들이 많았습니다. 김성식은 키도 크고 눈도 부리부리하고 신체가 건장하여 봉상교회, 소룡교회 등 인근 5개 교회를 맡아 바쁘게 시무하였습니다. 김성식 목사에게는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한 김현경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김 목사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 김현경은 일반 평신도로서 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는 1년 과정을 간신히 마쳤으나 더 이상 공부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지금 제가 공부할 처지가 못 됩니다. 우리 교회에다 학교를 세웁시다. 그것만이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자식의 뜻을 전해들은 김 목사는 사재를 털어 1925년 4월 15일 교회 내에 학원(4년제)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크게 공헌을 하는 등 아들 김현경은 평생을 제내리교회에서 평신도로서 섬기며 후학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영성학원은 정식으로 학교 인가를 받았으며 제내리 관내 12개 마을에서 학생들이 다녔는데 30리 밖 비봉과 왕궁에서도 학생들이 왔습니다. 김성식 목사는 매일 아침 30분씩 영성학원 학생들에게 채플을 인도하며 모세이야기 등을 통해 암암리에 민족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일본은 망한다는 설교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가기도 하였습니다. 1942년 영성학원은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를 하였는데 당시 교사로 김현경, 정청원, 강오식 등이 있었으며, 이들 교사와 학생들은 눈물로 학교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 후 재학생들은 3km 밖 왕궁소학교로 옮겨 갔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시 이곳을 점령한 인민군이 같은 마을의 우익진영 사람들에게 미제국주의자에게 아부한 죄과의 자백서를 제출할 것을 강요하며 핍박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인민군은 9월 중순 유엔군의 인천 상륙 이후 긴급 철수를 계획하고 우익진영 인사들 약 50명을 내무서로 긴급 소환하여 소방서 창고에 감금하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김상천(金相天), 김현경(金顯慶), 황해주(黃海周) 세 장로와 김은석, 김현주, 소금영, 김수배, 김흥섭, 이봉고 집사들이 있었습니다. 인민군은 퇴각 시간이 임박해지자 창고 문을 열고 닥치는 대로 총격을 난사하였습니다. 이때 창고 안에서는 큰 비명 소리와 “주여, 나의 영혼을 받아주소서”하는 울부짖음의 기도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총격을 받은 50여 명 중 29명이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았는데 대부분이 교회 직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상천, 김현경 두 장로는 이때 순교하였습니다.
김상천 장로의 외증손자인 한일장신대학교 차정식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1921년 3월 15일 제내교회 2대 장로가 된 김재식 장로의 아들인 김상천 장로는 1930년 5월 18일 제내교회의 3대 장로가 되었습니다. 1950년 9월27일 순교한 김상천 장로는 2000년 12월 9일 제내교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드리는 예배에서 순교가 인정되어 순교자 명단에 올랐으며, 김재식 장로의 공도 인정되어 김상천 장로의 아들인 김수봉 장로가 공로패를 받았습니다. 제내교회의 3대에 걸쳐 장로로 교회를 섬기는 순교자의 가정에 천대에 이르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봉동 읍내에는 봉상교회가 있습니다. 봉상교회(장기리 교회라기도 하고 보상리교회라고도 불렀다) 연혁에 보면 1904년 4월에 김성원, 유명수, 서옥전, 박공선 등이 본래 전주 서문밖교회를 다녔지만 너무 거리가 멀어 봉상면 장기리 윗 장터 187번지에 초가를 매입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봉상교회가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봉상교회는 한 뿌리에 세 교회가 있는 셈인데, 바로 봉상교회와 1960년 9월 4일 통합과 합동의 분열로 분립된 봉동중앙교회 그리고 서두교회가 그곳입니다. 서두교회는 1902년 김희서, 박공선이 서문밖교회를 다니다가 처음 우산(현 은하리) 서두부락으로 옮기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서두교회는 본래 윗 장터에서 봉상교회 설립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현 봉동초등학교 자리로 예배 처소를 옮겨가기로 하였다가 각기 다른 처소로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 당시 서두교회 김희서 장로가 영수로 교회를 인도하였습니다. 봉상교회 연역을 보면 1906년 4월에, 봉동중앙교회 연혁에는 1908년 우산교회(현 서두교회)가 분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자료의 미비로 알 수 없지만 봉상교회, 봉동중앙교회, 서두교회의 교회의 시작은 장기리 윗 장터교회이니 한 뿌리 세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서두교회에 도태구 장로의 조부모는 신앙이 투철하고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하여 봉동면 일대에 이 댁의 밥을 밥 안 먹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6·25 전쟁 때 서두교회와 교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도태구 장로의 조부모 때부터 내려온 구제활동에 공산당들도 고맙게 여겨 서두교회를 보존시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두교회는 1960년 봉동중앙교회와 분리되기 전 봉상교회와는 같은 교회역사이므로 편의상 봉상교회 역사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봉상교회의 첫 당회록을 보면, “본 교회 설립된 지가 8년인데 즉 주후 1904년이라. 주후 1911년 10월에 대리회로 작정한 위원들이 모여서 장로를 장립하였으니 이 직분 받은 이는 씨라 이후부터 당회록을 기록하여 교회정치에 의론하고 작정하는 일을 기재하노라. 1911년 11월 17일 회장 마로덕 서기 이영원”이라고 하였습니다.
봉상교회의 초대교회 이야기에서 봉상교회의 초대 장로인 이영원 장로의 어머니 유씨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봉상교회 100년사론』(2004년)에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전주군 봉상면 신성리에 전주 이씨 부인이 있었습니다. 회안대군(懷安大君, 1364년-1421년 4월10일. 조선 태조의 넷째 아들인 방간(芳幹)의 15대손인 이익신(1850. 5. 18.-1896. 3. 28.))과 결혼하여 지금의 신성리 288번지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위 송직강이 동학혁명에 연루되어 관직에 삭탈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다가 병고로 죽었습니다. 유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전주 친정집을 오고가며 전주에서 선교사들을 만나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유씨는 키도 크고 한학에도 조예가 깊으며 지혜가 출중하여 선교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물질적으로 예수교병원을 크게 도왔다고 합니다. 맥커첸 선교사와 함께 장기리 윗 장터교회를 세우는 데 크게 협력을 합니다. 바로 그의 아들 이영원(본래 우형 1873. 8. 12 -1923. 11. 27.)이 교회 설립 7년 만에 봉상교회 첫 번째 장로가 된 것입니다. 이영원 장로의 가계도를 살펴보는 것도 큰 은혜가 됩니다. 이영원 장로의 장남 이년교(철환)장로(1894.7.10-1942.3.3.)로 예수교 병원의사로 완산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부인은 최연순 권사입니다. 이철환 장로의 딸이 이안례 권사로 그의 아들이 송무섭 장로입니다. 이영원 장로의 차남 이진교(천만)의 손자가 이선구 장로입니다. 3남 이환교(화평)의 부인이 진오덕 권사로 18세 때부터 전도사로 활동하였습니다. 4남 이훈교(일평)는 봉상교회 장로가 되었고 부인은 전순선 권사이며 아들 이전식 역시 현재 봉상교회 장로로 시무하고 있으니 봉상교회를 3대에 걸쳐 장로로 섬기고 있어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업을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또한 봉상교회의 대표적인 가문을 소개합니다. 오창수 장로의 가문입니다. 봉상은 옛날부터 생강의 주산지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봉상주민들이 생강을 짊어지고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팔았습니다. 1915년 황해도 장연지방 어느 마을에서 그곳 주민들이 생강을 팔러온 봉상 사람들을 집단으로 폭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의협심이 남다른 오창수가 그곳 사람들을 제압하고 “동방예의지국에 사는 사람들이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는가”하며 일장 연설을 하였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선교활동 하던 선교사가 오창수를 만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끝에 오창수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오창수는 기독교를 통하여 민족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봉동으로 내려와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서 오기영, 오준영, 오영 세 아들 중 두 분이 목사가 되고 전주성암교회 장로로 봉직하였으며 5명의 딸들도 목사 부인이나 장로의 부인으로 권사로 봉사함으로 믿음의 유업을 이어갔습니다. 아마도 3대 장로의 가문으로, 1931년 3월 13일 장로가 된 오창수 장로의 장남 오기영 장로, 오기영 장로의 장남 오정식 장로로 장로가 장남으로 계속 이어지는 예는 한국교회 역사에 보기 드문 일이라 하겠습니다. 오창수 장로는 민족의식이 뚜렷하여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지만 오 장로는 반대하여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오기영 장로는 1914년 5월20일 태어나 1926년 맥커첸 선교사로부터 학습과 세례를 받고 1941년 7월30일 장로로 피택됩니다. 해방 후 독립촉성국민회의 지역간부로 활동한 사실로 6·25전쟁 시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공산군들이 철수하며 전주형무소를 불태워 많은 수감자들이 세상을 떠났으나 오기영 장로가 있던 방은 불에 타지를 않아 살아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에 살아나가면 목사가 되어 죽도록 교회를 섬기겠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선원대로 그는 53세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1965년 5월 18일 고향교회인 봉상교회 목사가 됩니다. 그러나 이듬해 1966년 11월 5일 병환으로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복음의 뿌리는 점차 자라나고- 소룡교회를 중심으로
1908년 고산면 소룡리 소룡교회가 영흥학교를 세웠습니다. 이는 이곳에 오경수란 분이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전주예수병원을 방문한 이후 기독교를 영접하여 메케첸 선교사와 함께 서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이곳에 기독교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역 여건이 좋지 않아 1910년 봉상교회로 영흥학교를 이전하였습니다.(『봉상교회 100년사론』 341-342쪽) 맥커첸 선교사와 김성식 목사, 이영원 장로, 한경문 장로 등에 의해 학교는 크게 발전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특히 김성식 목사의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된 학생들 중 정희일 학생은 상해로 건너가 광복군이 되었고, 김병학, 정동찬, 노순석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3·1운동 때에 봉동 장터 만세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후 신사참배를 반대하므로 일제는 1942년 학교를 폐교시켰습니다.
봉동에서 화산으로 넘어가 운산리 밀파마을에 가면 운산교회가 있습니다. 1896년에 세워졌으니 전락북도에서는 군산교회 전주 은송리교회 다음으로 세워진 오래된 교회입니다. 1896년 4월 10일 운산 병암에서 4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920년 5월 10일 밀파리로 교회를 이전하여 김운식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밀파교회로 불렸습니다. 김운식은 후에 운산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교회가 전소되어 교회 역사자료들이 소실되어 자세한 교회 초기 역사를 알 길이 없습니다. 1980년 3월 8일 미파교회를 운산교회로 개칭을 하고 누하로 이전하여 이호성 씨의 임야에 32평 교회 건축을 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이영설, 김경철 원로장로와 이영휘, 공병철 시무장로와 함께 송기정 목사에 의해 아름답게 교회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1904년 5월 맥커첸 선교사는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 강원경의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원암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906년 4월에 초가 4칸 예배당을 신축하였습니다. 1930년 강민석이 장로로 임직을 하며 교회가 크게 발전을 하였습니다. 1932년 3월 15일 해월면 38-2 18평 교회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습니다. 1950년 12월 22일 정동호 영수와 성찬수씨가 순교를 하고 인민군의 방화로 교회가 반이나 소실되기도 하였습니다.
소농마을의 한자 표기는 ‘소룡리’(巢龍里)이나 지금은 쉬운 발음 ‘소농’이라 합니다. 또 수원이 좋고 수렁이 많아 “수렁골”이라고도 합니다. 마을 앞 고목나무가 일품이며 곁에 정자까지 세워 풍치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이 소농마을에 들어서면서 어떻게 이 골짜기까지 맥커첸 선교사가 오게 되었는가 의아할 정도로 숨겨진 마을 같습니다.
1905년 맥커첸 선교사는 삼례제일교회와 제내교회를 설립하고 고산면 소룡리로 들어와 소룡교회(소농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마로덕 선교사의 전도로 오경수가 믿게 되었고 그 후 열 명의 여인이 동시에 믿어 8칸 예배당을 신축하여 교회가 계속 부흥하게 되자 고산읍과 율곡리에 두 교회를 분리하였고 후에 오경수를 장로로 장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경수는 1874년 무과에 합격하여 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장 자헌대부 지충주보사를 지낸 오도연(1824-1888)의 3형제 중 셋째 아들인데, 당당한 양반집 아들이 외국인 선교사와 어울리고 소농교회를 나가니 주변사람들의 야유와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 고산 화산의 유학자들은 위세가 대단하였습니다. “양이 보았는가?” “양이가 무엇인디?” “색목인(色目人) 양코백이 말이야” “양코배기가 뭐어지?” “아, 서양 놈도 몰라아?” “서양놈? 어디에 있간디” “오야소(吳耶蘇) 집에 가 보랑께.” “오야소는 또 누구디여?” “오야소! 예수도 몰러? 상구정(삼기정) 오경목이네 말이여!”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오경수는 맥커첸 선교사의 도움으로 소룡학원을 설립하였는데 고산 6개면에서는 최초로 세운 학교였습니다. 이리하여 김규동, 정승진은 신흥학교를 졸업했고 고산지역 신교육 제1세대입니다.
1906년 소농교회를 다니던 장덕선이 어수리에 율곡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기록에는 장덕수 외 여러 사람이 소룡리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드리던 중 선교사 마로덕이 소룡에 와서 전도하니 수가 많아져 신자들이 400원을 출연하여 예배당을 신축하였다고 합니다. 김영서, 박원섭, 김경보 등이 교회에 출석하여 전도에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특히 김영서는 장터에서 장사를 하면서 전도를 하였고 배우면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으로 맥커첸 선교사와 함께 계성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일제 말 이 학원의 고영호 교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학교를 이끌었습니다. 고영호 교사는 기장목사가 되었습니다. 계성학원원장으로 있던 윤춘경 장로는 전주로 이전하여 전주 남문교회 장로로 시무하였습니다.
2006년 4월 1일 율곡교회 100년 기념식에서 장인완 목사가 율곡교회 백년을 축하하며 품바타령을 하였습니다. 다음은 품바타령의 내용입니다.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율곡교회 성도님들 하늘 문으로 들어간다 부활영생 천국복음 예수 천당 믿음으로 빛과 소금을 감당터니 백년 역사가 은혜로다 우리 선열들 지킨 교회 지킨 교회 구석 구석이 눈물이요 하는 일마다 예수 흔적 고산 땅이라 율곡리 하늘 백성들 사는 곳 가난한자를 돌보고 사람 세우는 학교요 은혜위에 진리로다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세상을 사랑하신 예수정신 실천하여 천국길로 들어간다. 품바허고 잘이헌다.
1907년 9월 18일 맥커첸 선교사와 오경수에 의해서 화산에 종리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종리교회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주에 사는 이거두리(李普漢; 족보 기록 聖漢, 1872-1931)라는 사람이 서문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종리에 살고 있는 아버지 친구 이돈수 진사를 전도할 목적으로 교회에 나가자고 권유를 하였습니다. 이돈수는 처음엔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나가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약속한 날이 되어 이거두리가 이돈수를 모시러 집에 갔더니, 고산군 운동하면(지금의 경천면) 화암사에 놀러 갔다는 것입니다. 이거두리는 전주에서 80리 길을 달려 화암사로 찾아갔습니다. 이 진사는 약속을 잊은 채 태연히 쉬고 있었습니다. 이돈수는 놀라는 한편 찾아 온 뜻을 이야기 하는 이거두리에게 “눈이 많이 쌓여 가기 어렵다.”고 대답합니다. 이거두리는 “제가 눈을 쓸겠으니 거기까지 만이라도 갑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돈수는 “그러자.”고 해 놓고 속으로 ‘니가 어디까지 쓸겠나?’하며 이 진사는 이미 약속한 일인지라 체면상 몸을 일으켰습니다. 절 마당을 나서자마자 이거두리가 앞을 쓸고 이돈수는 뒤를 따르는데, 10미터, 50미터, 100미터를 내려와 결국 산 아랫마을 싱그랭이에서 가천, 경천, 길마재, 아래용동리, 용수마을, 굴앞들을 거쳐 종리교회(기록에는 화산)까지 닿았습니다. 이돈수는 이러한 이거두리의 적극적인 권유를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 예배당에 들어섰습니다. 이리하여 이돈수 진사는 ‘종리교회’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서문교회에 열심히 나갔고 장로가 되었으며, 1927년 1월 10일 완산교회가 분립했을 때 그곳으로 따라갔습니다.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서 발원하여 16km를 흘러온 소양천이 만경강과 만나는 곳에 회포대교가 놓여 있고 그 아래 강태공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대붕의 꿈을 꾸며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는 소양천을 옆으로 끼고 논밭을 뒤로 하고 길게 자리 잡은 송전리 신기마을이 있습니다.
100년 전 이 마을에 맥커첸 선교사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복음의 낚싯대로 망국의 설움에 빠져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건져 올리니 1912년 12월 5일 초포면 상운리 699번지(신기마을) 초가삼간 집에서 송전교회가 설립됩니다.
당시 송순자, 신복수, 정영임, 유성녀, 이종록이 첫 세례교인이 됩니다. 송전교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1943년 11월 5일 교회당이 강제 철거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철거 후에도 10여 명이 삼례면 수계리 모래거리 현 덕천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해방 후 18평의 교회를 재건축하자 송전교회의 복음의 문은 다시 열리게 되었습니다. 송전교회는 마을 복음화에 힘을 써 후에 이 마을은 “예수마을”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1960년대 초 신앙 노선의 문제로 송전교회는 호성교회와 호성제일교회로 나누어져 오늘날까지 서로 성장해 왔습니다. 지난 2012년 12월 1일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호성제일교회에서는 최초의 신자인 신복수, 유성녀의 후손인 이선근 목사와 송순자, 이종록, 정영임의 후손인 이광주 집사 등에게 기념패와 추념패가 주어졌습니다.
한일장신대학교가 있는 완주군 상관면 신리에 1906년 12월 7일 맥커첸 선교사의 전도를 받은 이춘경 씨가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신리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신리교회는 100년이 넘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 묵묵히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여 오늘도 신리의 등대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완주군 상관면 의암리 저수지 옆으로 749번 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계월교회에 오게 됩니다. 1907년 7월 28일 맥커첸 선교사와 김봉언(1884.6.18.-1974.7.11.), 정창열, 조성국 등에 의하여 시작되어 그 후 17명의 교인이 28원을 모아 초가 4칸을 지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계월교회 원로장로이고 원광대학교 명예교수(행정학 전공)인 김귀곤 박사께서 김봉언 장로가 예수를 영접하게 된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해 주었습니다.
호남정맥상의 만덕산(761.8m)에서 북서쪽으로 가지를 친 산줄기가 정치를 지나 솟구쳐 올린 산이 있는데 그 산이 묵방산(538m)입니다. 1906년 여름 22세 청년 김봉언은 친구 정창열, 조성국과 함께 묵방산 자락 숯재 기슭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피곤도 하고 잠시 간식을 나누고자 할 때 한 외국인을 만나게 됩니다. 맥커첸 선교사였습니다. 그도 사냥하러 이곳에 온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떠듬거리는 한국말이지만 김봉언하고 의사소통을 하며 맥커첸 선교사는 빵을, 김봉언은 인절미 찹쌀떡을 서로 나누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헤어질 때 김봉언은 맥커첸 선교사에게 자기가 잡은 꿩 한 마리를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봉언은 아버지가 더위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40리 떨어진 전주 장날의 약전거리에서 한약 한재를 사가지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장터에서 막걸리를 많이 마시게 되었는데, 잔뜩 취한 채 비틀거리며 논두렁길을 걸어오다가 그만 논두렁 밑으로 떨어져 정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맥커첸 선교사는 밤 예배를 마치고 등불을 켜 들고 그 논두렁 길을 오다가 논바닥에서 무엇이 반짝거리며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인가 가까이 가서 보니 한 남자가 쓰러져 있는데 그의 두루마기 사이로 담뱃대 곰방대 놋쇠가 불빛에 반짝거렸던 것입니다. 맥커첸 선교사는 급히 그를 예수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난 김봉언이 자기를 데려온 사람이 얼마 전 묵방산에서 만난 그 서양 선교사인줄 알아보게 되었는데, 맥커첸 선교사도 그를 보고 한편으로 놀라워하면서 반가워했습니다. 김봉언은 자기의 생명의 은인이라며 맥커첸 선교사를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하여 큰 대접을 하였습니다. 식사를 마친 맥커첸 선교사는 함께 예배를 드리자고 요청했고, 그들은 사랑방으로 건너가 다른 사람들도 초청하여 예배를 드림으로 계월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몇 번 김봉언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그 사랑방은 술과 담배의 찌든 냄새가 너무 나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정창열 집으로 옮겨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점차 사람들이 많아지자 산에서 소나무, 잣나무를 베어 와서 초가 4칸을 지어 예배당으로 삼았습니다. 김봉언은 술은 끊었으나 담배를 못 끊고 있다가 담뱃대 3개를 부러뜨리고서야 완전히 담배를 끊을 수 있었습니다. 김봉언은 세례를 받고 교회 영수가 되고 계월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습니다. 김봉언 장로는 지역 삼일운동에 앞장서고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교회 내에 영신학원을 운영하여 문맹퇴치에 힘썼습니다. 슬하의 1남 8년 모두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그리고 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인 한예정성경학교(1923년 9월 4일 설립)를 졸업시켰습니다. 자손들 모두 목사와 목사사모, 장로, 권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김봉언 장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 영혼과 그 가정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한 치의 예외도 없이 꼭 들어맞게 진행되고 있음을 다시금 확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연이 있는 계월교회에 유독 눈에 띠는 종이 있습니다. 그 종은 1925년에 제작이 되었습니다. 1936년 8월 초순경부터 비가 내리다가 8월 14일 밤 11시부터 새벽 3시경까지 187mm의 집중호우가 내리니 종각이 무너지고 종이 유실되었습니다. 그 후 종을 찾지 못하다가 1944년 김봉언 장로가 전주천 상류 수원지 근원인 상관천 내 바닥을 후벼가면서 도랑을 치다가 내 바닥 모래에 묻혀있는 종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밥그릇 숟가락 등 모든 쇠붙이를 다 공출해 가는 일본 순사들의 눈을 피해 그대로 개울에 묻어 두었습니다. 해방 후 1946년 종을 찾아온 계월교회는 종각을 지어 종을 울렸다고 합니다. 1967년 9월 5일 제53회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전주 완산교회에서 있었는데 개회 기념으로 계월교회 종을 빌려다가 타종을 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김봉언 장로의 비문에는 “한 가정의 선도자 지역사회의 선각자 인류문화 발전의 선구자 그 밝은 빛으로 비추리라”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이는 김봉언 장로의 아호가 일광(一光)이기도 하지만 그의 일평생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며 복음의 길을 걸었던 그에게 합당한 비문일 것입니다.
(‘기독교사상’ 2015년 11월호)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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