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의자 위에 헌 눈이
안정옥
자고 있는 동안 내린 눈은 정묘精妙하다 들썩이는 사람 없으니 집중을 다해 내렸을 것 오래전 내 놓은 헌 의자도 눈이 되어있다 의자 위에 눈은 치우지 않는다 버려질 의자에 앉아 마지막 보낼 장문을 써내려갔을지 모르겠다 간밤에 내린 헌 눈 위로 수시로 눈을 보태, 눈도 소나무 위에 걸터앉기는 식상했을 것이다 사람에게 흩날리기도 따분했을, 크리스마스 카드 속에 침묵하기도 그렇고 의자에 앉기는 좀 색 다른가
기력을 다한 의자를 변신할 수 있는, 흘러내린 눈물 위에 다시 눈물을, 헌옷이 새 옷에게, 사람도 지나간 일 위로 자꾸 새로운 일 보태주는 것이 삶이듯 그렇게 소리 없이 지나가기만 하는 일들은 애달프다 눈은 내렸고 버겁다 풀어 쓸 수조차 없는 희미한 죽음이 당도해도 해줄 수 있는 일은 소리 없이 왔다가는 눈처럼 그저 모호하게 바라보는 일뿐이어서 더 애달프다 나도 지나간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발표
안정옥 시인
1990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다시 돌아 나올 때의 참담함』 외에 9권이 있음.
[출처] 헌 의자 위에 헌 눈이 - 안정옥 ■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신작시 □ 2023년 7월호 ㅣ 2023, July ㅡ 통호 171호 ㅣ Vol 171|작성자 웹진 시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