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부터 충무로까지 여기저기 코스로 묶어 돌아야 직성이 풀린다. 최근에는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를 다녀왔다. 인쇄소와 공업사, 조명 가게 등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을 지켜온 낡고 투박한 건물과 오래된 가게 사이사이 저마다의 개성과 매력을 발산하는 젊은 가게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곳. 올드스쿨과 뉴타입이 섞여 독특한 바이브를 만드는 이 지극히 서울다운 풍경은 느긋한 마음으로 골목 골목을 걸어 다닐 때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을지로-충무로 지역에 신선한 감각과 에너지를 불어넣는 뉴타입 스팟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코스로 묶어 다니기에도 손색없는 7개의 로컬 플레이스. 하루 날을 잡아먹고, 마시고, 구경하고, 쇼핑까지 하며 한 큐에 즐기고 싶은 이들이라면 아래 리스트를 주목해 보자. [1] 피자
도우큐먼트
작년 10월, 충무로에 혜성처럼 등장한 피자 가게. 테이블이 5개밖에 안 되는 작은 매장이지만 오픈 이후 입소문을 타며 평일 점심이면 인근 직장인들로 붐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문서’, ‘기록’을 뜻하는 단어 ‘document’를 비틀어 지은 ‘도우큐먼트’라는 상호명이 단순한 언어유희에 그치지 않는 건, 두 명의 주인장이 2019년부터 꾸준히 피자를 공부하고 기록해 온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도우 실험을 위해 논산과 사천 등으로 우리 밀 여행을 떠나고 최근에는 도쿄로 피자 워크숍을 다녀오는 등 더 나은 피자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거쳐 도우큐먼트만의 개성 있는 화덕 피자를 제공하는 중이다.
깔끔하고 담백한 인테리어에 일러스트를 활용한 간판과 메뉴판이 귀여움을 더하고, 토마토소스 통 위에 피자를 올려 내어주는 깨알 같은 디테일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8-9종의 선택지에 2천 원을 추가하면 하프앤하프로도 즐길 수 있으니 다채로운 맛을 즐기기 위해 토마토소스와 크림 베이스의 피자를 반반씩 먹어보는 걸 추천한다. 겉바속촉을 제대로 구현하며 식사의 기대감을 한껏 돋우는 애피타이저 오징어튀김도 놓칠 수 없다. 크리미한 리코타와 페코리노 치즈에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이 좋은 화이트 미트볼 피자, 짭짤한 초리조에 진한 풍미의 블랙 올리브가 통으로 올라간 올리브 & 초리조 피자를 반반씩 먹어보면 어떨까. 고소하고 쫄깃한 도우는 옆 테이블에서 남긴 것까지 흡입하고 싶어지는 맛이다. (이런 걸 우리는 ‘닉값한다’고 부르기로 했어요.)
도우큐먼트 [2] 잡지
도탑다
일본 잡지와 패션을 사랑하는 덕후 친구의 집에 놀러 간다면 이런 느낌일까. 도탑다는 일본의 빈티지 잡지들을 자유롭게 읽고 구매도 할 수 있는 북카페, 아니 매거진 카페라고 생각하면 된다. 중앙에 놓인 긴 진열대와 책장에는 뽀빠이POPEYE ・ 브루터스BRUTUS ・ 스마트smart ・ 앙앙an·an ・ 케라KERA 등 일본 유수의 패션 매거진이 가득한데, 특히 발행한 지 한참 지난 과월호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부드러운 핸드드립 커피와 도라에몽이 좋아하는 간식으로도 유명한 도라야키를 주문한 뒤 어떤 잡지를 들춰볼지 유심히 둘러보는 시간이 즐겁다. 고민 끝에 고른 건 뽀빠이가 1980년에 발행한 ‘아이비룩’ 특집.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느긋하게 페이지 하나하나 넘기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아이맥 초기 버전과 전화기, 기무라 타쿠야가 미모를 뽐내는 광고 포스터 등 각종 빈티지 소품이 눈길을 끌며 책장을 채운 귀여운 물건들 역시 모두 구매 가능하다.
도탑다 [3] 갤러리
N/A
각종 철공소와 인쇄소, 조명 가게가 즐비한 을지로4가 대림상가 옆 골목. ‘이런 데 갤러리가 있다고?’ 싶은 마음으로 근화금속 간판 아래 하얀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면 잘 찾아온 것이다. 두 명의 포토그래퍼가 뜻을 모아 2018년 11월에 문을 연 N/A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단면을 절묘하게 압축한 공간에 동시대의 예술을 담아 선보이는 근사한 소규모 갤러리다.
주변 풍경만큼이나 갤러리 내부 공간 역시 국립미술관이나 대형 갤러리와는 조금 다르다. 오래된 건물을 그대로 살린 흔적이 구석구석 느껴지는 가운데, 하얀 배경 벽을 덧대지 않은 쪽은 원래부터 있었을 거라 짐작되는 비정형의 무늬와 색상이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벽면을 가득 채운다. 녹슨 타일 위로 무심하게 걸린 작품이나 회벽에 새겨진 오묘한 푸른색 패턴 등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서 오는 매끈한 미감이 아닌, 낡고 투박해진 것들이 주는 자연스럽고 거친 에너지가 도드라지는 곳. 단순히 작품 감상하는 걸 넘어 전시장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껴 보는 경험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 보길 권한다.
N/A [4] 레코드
다이브 레코드
집에 턴테이블도 없으면서 종종 레코드숍을 구경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매장을 채우는 풍성한 사운드의 음악에 귀 기울이다, 눈길이 가는 아트워크의 레코드를 열심히 뒤적거리고, 정말 궁금하면 청음까지 해보는 일련의 경험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발견하고-듣고-구매까지 하는 과정을 가장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에서 장비 보유 여부나 음악 지식 따위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을지로3가역 10번 출구 앞에 위치한 다이브 레코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어디 가서 ‘음악 좋아한다’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민망한 초심자 입장에서는 레코드 물량으로 압도하는 가게가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다이브 레코드는 엄선한 음반을 불편함 없이 살펴볼 수 있도록 매장을 여유롭게 사용하고, 한쪽에는 커피를 마시며 쉬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빈티지한 우드 톤과 모던한 철제 프레임이 어우러지는 공간에 느긋하게 앉아 있다 보면 없던 구매 욕구도 생길지 모른다. 처음부터 레코드 구매를 목적으로 방문할 예정이라면 도보 2분 거리의 레코드숍 ‘클리크 레코드’와 묶어 가는 걸 추천한다.
다이브 레코드 [5] 오뎅과 하이볼
요오
오랜 시간 사랑 받아온 노포 맥줏집부터 트렌디한 감각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내추럴 와인 바까지, 퇴근 후 술 마시기 좋은 가게들이 즐비한 을지로-충무로 일대. 지난 3월에 새로 문을 연 요오는 오픈 전부터 줄을 세울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오뎅 & 쿠시카츠 바’다. 최대 12명까지 앉을 수 있는 닷지 형태의 좌석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시티팝을 들으며 따뜻한 국물과 시원한 술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혼술을 위해 방문한 나는 무 ・ 치쿠와 ・ 유부주머니를 단품으로 시키고, 닭 안심 쿠시카츠와 요오 하이볼을 곁들였다. 극강의 부드러움과 짭조름한 감칠맛이 터지는 무 한입에 탄산수로 만들어 과한 단맛 없이 깔끔한 하이볼 한 모금, 떡이 들어가 더 쫀득한 유부주머니를 연겨자에 찍어 한입 먹고 웰컴 드링크로 내어준 사케 한 모금, 마지막으로 부드럽고 담백한 쿠시카츠 크게 한 입까지 베어 물고 나니 하루의 고단함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앞서 소개한 도우큐먼트에서 피맥으로 든든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2차로 넘어오는 코스도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