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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네 [Jules Emile Frdric Massenet 1842∼1912]
프랑스 작곡가. 루아르의 몽토 출생. 파리음악원에서 C. 토마에게 작곡을 배우고, 1863년 신진작곡가 콩쿠르에서 로마대상을 수상하였다. 3년간 로마에 유학하고 파리에 돌아와 오페라 작곡에 주력하였으며, 《라오르의 왕(1877 초연)》 등으로 명성을 높였다
그의 오페라는 모두 36곡에 이르며, 여주인공의 사랑과 생애를 그린 것이 많고, 외면적 효과보다도 정서표현을 중시하는 관현악 용법으로 작곡되었다. 대표작은 《마농(1884 초연)》 《르 시드(1885 초연)》 《베르테르(1892 초연)》 《타이스(1894 초연)》 등이다. 그의 가곡은 프랑스 근대가곡의 창시자 C.F. 구노와 G. 비제를 잇는 위치에 있고 프랑스어의 자연스러운 억양과 선율미를 조화시켰다.
Jules Emile Frdric Massenet (1842∼1912)
12형제 중의 막내 아들이었던 마스네는 자기의 이름(쥘)을 싫어하여 그 머리글자만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배워 1859년에 1등상을 받고, 1851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는데, 양친이 파리를 떠나 샹베리로 주거를 옮겼기 때문에 1856년부터 1857년까지의 1학년은 휴학해야 했다. 1858년에는 피아니스트로서, 특히 앙주와 투르네에서 몇 차례 음악회에 출연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가수의 반주를 하거나 짐나즈의 관현악단에서 트라이앵글을, 이어서 카페 샤를르나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팀파니를 담당하기도 했다. 르베르(화성), 사바르 M. G. Savard(대위법), A. 토마(작곡)에게 배운 뒤 1863년 푸가에서 1등상을 획득함과 동시에 칸타타 다비드 리치오 David Rizzio로 로마 대상을 획득했다. 이것은 베를리오즈의 의견이 콩쿠르의 결과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61년부터 마스네는 작곡 활동을 시작하여 마이어베어의 “프로에르멜의 허락”에 바탕을 둔 연주회용 대환상곡 Grande fantaisie de concert sur le “Pardon de Ploërmel” de Meyerbeer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요청에 따라서 1900년에 파기되었다.
마스네는 2년간 메디치장에 체재하면서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제출해야 할 작품을 썼다(연주회용 대서곡 Grande ouverture de concert과 레퀴엠, 그리고 뒤에 오라토리오 막달라 마리아 MarieMagdeleine가 되는 오페라의 단편 등). 또한 빅토르 위고의 에스메랄다 Esmeralda에 의한 오페라도 기획했다. 리스트의 제자였던 생트 마리 sainte Marie와 알게 된 것은 로마에서였으며, 그는 프랑스로 귀국한 후 그녀와 결혼했다. 또한 받은 상금으로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를 여행했고, 그곳에서 받은 감명으로 나폴리의 풍경 Scenes napolitaines(1864)과 헝가리의 풍경 Scenes hongroises(1871)을 작곡했다. 그리고 1866년부터 많은 그의 작품이 파리에서 초연되게 되었다. 서곡 외에 주목되는 것은 폼페이아 Pompeia이며, 그 일부는 부수음악 복수의 세 여신들 Érinnyes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2개의 환상곡에서 다시 사용되고 있다.
로마상 수상자에게는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1막짜리 작품의 상연권이 주어진다는 새로운 규정에 따라서 마스네는 수주간 사이에 종조모 La GrandTante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1867년 4월에 상연되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의 오케스트라 악보는 바장의 돈 세자르 Don César de Bazan의 악보와 마찬가지로 1887년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화제로 일부 소실되었는데 그 후 복원되지 않았다. 그러나 피아노와 노래의 악보에서 이 최초의 오페라 작품이 놀라운 수완을 발휘한 것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3등상을 획득한 어떤 콩쿠르를 위하여 작곡한 오페라 튈레 왕의 술잔 La Coupe du roi de Thulé은 현재까지 전해져 오지는 않지만, 그 음악은 계속하여 작곡된 5개의 오페라 작품 속에서 다시 사용되고 있다.
그 무렵 몇 개의 오페라가 작곡되려 하고 있었다. 스케치인 채로 남아 있던 1869년의 만프레드 Manfred와 1870년에 완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메두사 Méduse이다. 출판업자 아르트만 Hartmann과 만났고, 그 후 그에게서 격려를 받게 됨에도 불구하고 마스네의 경제 상태는 불안정했다. 그래서 1868년 로마 유학 기간이 끝나자 개인교수를 하거나 라 포르트 생 마르탱 극장에서 다시 팀파니를 담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파리의 포위 작전(그는 보병대에 가담했다), 이어서 파리 코뮌의 혼란한 시기에 그의 창작활동은 뜸해지는데, 1871년 봄부터 왕성한 활동이 재개되어 파리 포위 작전 동안에 씌어진 교향곡에 만족하지 않았던 마스네는 그림 같은 풍경 Scenes pittoresques(1871), 극적 풍경 Scenes dramatiques(1873)과 일련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을 만들어 냈다. 단 몇 주 사이에 작곡한 4막의 오페라 코미크 바장의 돈 세자르는 1872년 11월에 상연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평범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을 마스네는 1888년에 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서곡 페드르 Phedre와 부수음악 복수의 세 여신이 작곡되는데, 후자의 가치는 곧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마스네의 진정한 명성의 확립은 1873년 4월 오데옹 극장에서 상연된 오라토리오 막달라 마리아에 의해서 였다. 개작되기는 했지만 이미 몇 년 전에 완성되었던 이 젊은 날의 작품이 주목받는 것은 단순히 마스네 개인의 착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후 마농 Manon 속에서 재현되는 마스네 고유의 표현방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874년에 작곡된 3부의 신비극 이브 Eve가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몇 페이지를 제외하면 그 악보에서 현저한 진보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마스네는 5막의 대 오페라 라오르의 왕 Le Roi de Lahore에 착수하는데, 1872년부터 1877년에 걸쳐서 작곡된 이 작품은 1877년 4월 오페라 극장(가르니에 궁)에서 상연되어 마스네의 명성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이듬해 36세 때 음악원의 작곡가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카미유 생상보다 먼저 프랑스 학사원의 회원이 되었다. 진심으로 감명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과장된 이 오페라는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마스네가 받고 있는 평가를 뒷받침해주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몇 개의 살롱을 위하여 작곡된 음악적 소품 멋진 벨 불 L'Adorable BelBoul(1874), 베랑제르와 아나톨 Bérangere et Anatole(1876)은 진지한 음악가라는 평가를 유지하기위하여 마스네 자신이 파기해 버렸다. 4장의 오라토리오 성처녀 La Vierge(1878)는 1880년에 초연할 때 받은 악평에 비해서 오히려 정당한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인데, 1881년 브뤼셀의 모네 극장에서 초연된 에로디아드 Hérodiade는 라오르의 왕으로 얻은 성공을 재현시켰다. 에로디아드는 1884년 파리에서 재연되는데, 이것은 이탈리아 극장에서의 이탈리아어에 의한 공연이었다. 이 작품의 소박한 발레 부분은 실제로는 행해지지 않았으며, 동화 나라의 풍경 Scenes de féerie(1881)이 되었다.
마스네가 알자스의 풍경 Scenes alsaciennes이라고 명명하여 가장 잘 알려진 마지막 7번째 관현악 모음곡을 작곡하는 것은 1881년의 일이다. 그 이후에는 주로 오페라에 전념하게 되는데, 가곡도 정기적으로 계속 작곡했다. 이것은 의뢰를 사양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보다 좋은 수입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든 가곡은 똑같은 식으로서가 아니라 마스네의 작품의 결점마저 나타내고 있으며, 그 선율의 대부분은 영감을 별로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마스네가 작곡한 285곡의 가곡 중 몇 개는 가집(歌集)으로 정리되어 있다 - 4월의 시 Poeme d'avril(1866), 추억의 시 Poeme du souvenir(1868), 전원시(田園詩) Poeme pastoral(1874), 10월 시 Poeme d'octobre(1876), 사랑의 시 Poeme d'amour(1879), 겨울의 시 Poeme d'hiver(1882), 저녁의 시 Poeme d'un soir(1895)이다. 몇 개의 가곡은 마스네의 오페라의 유명한 부분이나 실패작을 다시 다룬 것으로서 25곡의 가곡에는 작곡자 자신에 의해서 씌어진 오케스트라 반주가 붙여져 있다.
적어도 3개의 오페라 로베르 드 프랑스 Robert de France(1880), 지롱드 당원 Les Girondins(1881), 몽탈트 Montalte(1883)의 작곡을 포기한 후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지배인 카르발로 Carvalho가 권유했던 푀베 Phoebe의 작곡을 거절한 마스네는 자진해서 메이야크 Henri Meihac에게 마농의 대본을 의뢰했고, 그는 어떤 수정도 하지 않기 위해서 최초의 리허설을 할 때 이미 인쇄가 끝난 악보를 갖고 왔다. 보통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 삭제되어 작품의 균형이 깨짐으로써 그 정신이 변형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이렇게 함으로써 마스네는 갖가지 수법을 사용하면서 더없이 뛰어난 모범적인 작품을 의식하여 구축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무렵 마스네는 에밀 졸라 Émile Zola에게 무레 신부(神父)의 과오 La Faute de l'Abbé Mouret의 독점권을 요구했으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르 시드 Le Cid(188485)에서 마스네는 대 오페라의 정형을 밟으면서도 상투적인 수단에서 영감을 받고 있다.
베르테르 Werther(188587)의 주제는 르 시드의 주제만큼 마스네를 열중케 하지는 않았지만 내면적인 틀속에 그의 창작력의 최상의 부분이 발휘되고 있다. 베르테르는 1892년 빈에서 독일어로 초연되었으며, 1893년 파리에서 상연되었을 때도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이 새로운 작품이 반음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스네가 1886년 바이로이트에 갔을 때 거장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때 마스네는 30년 가까이 바그너의 숭배자로서 이미 그의 음악을 알고 있었음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바그너의 영향이 보다 확실한 아마도 너무나 확실한것은 에스클라르몽드 Esclarmonde(188788)로, 만국 박람회에서 상연되었을 때 상당한 호평을 얻었으며, 그 평판은 마스네가 주인공으로 고른 시빌 샌더슨 Sibyl Sanderson에게도 미쳤다. 그 이전의 작품에 비하면 감흥과 선율선의 확산을 보이고 있는데, 극의 전개에 있어서는 끝까지 똑같은 농도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동방의 세 현인 Le Mage(1889, 초연 1891)에서 마스네는 다시 대 오페라의 결함에 빠졌는데, 주제의 복잡함이 원인이 되었으며 이 결함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좋았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같은 해에 전설에 바탕을 둔 오페라 아마디스 Amadis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의 사후에야 상연하게 된다. 아마디스는 1910년에 개정되어 1922년 몬테카를로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등질(等質)은 아니지만 프롤로그에 그때까지 마스네가 하지 않았던 고전 취미와 근대 취미의 결합이라는 대담한 수법을 도입하고 있다.
마농의 초상 Le Portrait de Manon(189293)에 의해서 마스네는 향수에 교묘하게 미소를 혼합시킨 오페라 코미크의 연한 빛깔로 회귀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나톨 프랑스의 타이스 Thais에 대한 보다 야심적인 창작에 전념하고 있었다. 오페라 극장을 위하여 작곡된 타이스는 1894년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그리고 이 일로 해서 성스러운 것과 관능적인 것, 심각한 것과 해학적인 것을 놀라운 방법으로 완전히 독창적으로 연결시켰다.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이 작품의 전체상은 왜곡되어 버렸다. 나바라의 여인 La Navarraise은 1893년 여름, 몇 주 동안 씌어져서 10일만에 관현악으로 편성되는데, 그 비극적인 색조로 인해서 사람들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성행하던 베리스모에 경도 또는 심취하려 했다. 사실 베리스모의 영향은 이 작품의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1893년부터 1901년에 걸쳐서 마스네는 몇 번이나 그리젤리디스 Grisélidis에 착수하여 몇 개의 판을 만들었다. 타이스에서처럼 이 작품에서도 그는 여러 가지 양식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는데 대본이 그의 신뢰를 배반했다. 마스네는 자기의 영감의 원천을 조사하려 했던 것처럼 신데렐라 Cendrillon(189495, 초연 1899)로 동화의 영역에도 손을 대고 있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도 참다운 천재임을 나타냈는데, 그만큼 대본 작자의 무능함이 아쉽다.
앙브루와즈 토마의 사후, 파리 음악원 원장으로 와달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일이 더욱 바빠지고 여기 저기로 이동할 때가 많아지자 작곡과 교수직도 사임했다. 그의 제자들도 많았는데, 이 천부적인 교수였던 마스네의 교육자로서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마스네가 그들이 각기 지닌 개성들을 억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이 그 이상의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마스네로부터 받은 철저한 교육의 결과였다. 제자들 중에는 알프레드 브루노, 가브리엘 피에르네, 크자비에 르루, 귀스타브 샤르팡티에, 앙리 라보, 샤를르 쾨클랭, 플로랑 슈미트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로마 대상의 수상자였고, 또한 이 콩쿠르에 참가하지 않았던 에르네스트 쇼송, 기 로파르츠, 레이날도 안도 들어 둘 만하다.
교수직을 사임한 후 마스네는 완전히 자유로운 시간을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그 최초의 성과가 된 것이 사포 Sapho였다. 1896년 여름에 만들어진 사포는 1897년 11월부터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상연되었고 알퐁스 도데의 다음과 같은 목표를 예상하여 풍차간 소식 Les Lettres de mon moulin의 장면을 덧붙여서 1909년에 다시 상연되었다. 1897년에는 또 12곡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연탄곡집 지난 해 Année passeé와 첼로 독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이 작곡되었다. 별로 종교적이지 않은 마스네가 직접 불가타(라틴어 역 성서)의 텍스트를 오라토리오 약속의 땅 La Terre promise으로 번안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이 작품은 1897년과 1899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한편 노틀담의 종글뢰르 Le Jongleur de NotreDame의 주제는 마스네의 사적인 신뢰에 적합한 것이었다.
이 작품을 통하여 마스네 고유의 시적 상념 이상으로 감취할 수 있는 것은 당시 현저해지고 있던 그레고리오 성가와 중세 음악에의 흥미의 소생이다. 노틀담의 종글뢰르와 같은 무렵에 만들어져 1902년에 초연된 피아노 협주곡의 끝곡에는 옛날의 곡상이 다시 사용되고 있는데, 아다지오에는 마스네 만년의 작품의 특징인 가을을 연상케 하는 화성적 색채가 나타나 있다. 마스네는 같은 시기에 로마 Roma를 착수하였고, 아리안 Ariane(1905, 초연 1906), 바커스 Bacchus(1908, 초연 1909), 로마(190210, 초연 1912), 클레오파트라 Cléopatre(191112, 초연 1914)와 같은 작품들도 잘 마무리 되었으나, 일반적으로 말하듯이 영감이 부족한 것이 아닌데도 성공은 미미했다. 1903년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스네의 조언자이며 프랑시스 드 크루와세 Francis de Croisset의 후원자였던 실비 샌더슨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며칠 사이에 씌어졌다고 하는 천사 셰뤼뱅 Chérubin은 특히 마스네의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대혁명 때의 에피소드를 다룬 테레즈 Thérese(190506, 초연 1907)는 천사 셰뤼뱅만큼 강렬하며, 자기 자신을 변혁해 가는 마스네의 능력을 보충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에 반해서 음악에 의한 고귀한 농담인 파뉘르주 Panurge(1911, 초연 1913)는 아무런 인상도 남겨놓지 않았으나, 1910년에 샬리아핀에 의해서 초연된 돈 키호테 Don Quichotte(1909)는 마스네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걸작의 하나이다. 그것은 대본의 뛰어난 구성에 기인하고 있는데, 반면 어떤 극적 주고받음의 허술함이 마스네에 대해서 사람들이 흔히 비난하는 빈약함의 원인이 되기도 했었던 만큼 더욱 성공적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나 음악과 극을 잘 융합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던 마스네는 내면적인 질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독창적인 오페라의 어법을 찾아내는 비결을 몸에 익히고, 광범한 이해와 가급적 충실한 상연을 보증하는 유일한 것인, 단순함의 추구에 거의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고 있던 이 작곡가는 오페라 작자로서의 장인성의 희생이 될 때가 종종 있었다. 그에게는 본질적으로 그러한 장인성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아마도 그는 자기의 감성보다도 그 기교적인 우수성에서 재능이라 할 만한 것을 이끌어 내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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