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가 불순한 날을 빼고는 박 노인은 매일 정 노인을 만나 보라를 데리고 공원에 나와 지낸다. 박 노인은 평소 하던 코스대로 연못가 언덕위에 있는 동물원으로 유모차를 두 손으로 밀어 올렸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박노인은 언덕길에 유모차를 혼자 몰고 오르지 못했었다. 지금 언덕길을 유모차를 몰고 쉽게 오를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보라의 덕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슴과 공작새, 사육장을 지나 보라가 가장 관심을 갖는 토끼장 앞에 유모차를 세웠다. 보라는 금방 반응을 보였다. 유모차가 흔들거릴 정도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박 노인은 보라를 일으켜 유모차를 딛고 토끼장 철망을 잡고 서 있게 했다. 그리고 뒤에서 보라의 양쪽 겨드랑을 잡았다. 순백 그대로인 보라의 조가비만한 하얀 손이 철망 사이를 잡고 몸을 우쭐우쭐 대며 좋아했다.
보라가 그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박 노인 역시 너무 좋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달콤한 피가 온 몸에서 생성되는 듯 희열을 느꼈다. 토끼장에는 다양한 색깔의 토끼들이 뛰놀고 있었다. 까만, 회색, 쥐색, 줄무늬, 얼룩무늬, 흰 토끼 등이다. 보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빨간 눈의 흰 토끼를 제외한 토끼들은 모두 눈동자가 새까맸다. 보라는 흰색이 좋아 흰 토끼를 좋아하는 것인지 흰 토끼의 빨간 눈을 좋아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흰 토끼의 움직임에 따라 보라의 즐거운 시선이 따라다니며 입을 잠시도 쉬지 않고 쫑알거렸다. 동물원에서는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동물들의 배설물로 인한 악취가 심했기 때문이다.
동물원에서 연못가로 내려오는 길목에서 박 노인은 유모차를 잠깐 멈추었다. 화단 모서리에 만삭이 된 도라지 열매들이 제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쓰러져 있었다. 박 노인은 쓰러진 도라지 열매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오래 서 있었다. 박 노인은 그 도라지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렸다. 봄에 새싹이 파랗게 돋아났을 때나 여름에 꽃이 피었을 때나 지금처럼 터질 듯 꽉 찬 씨앗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볼 때도 같은 마음으로 아려왔다.
박 노인의 아내는 도라지와 거의 반평생을 같이 살았다.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도 도라지 속에 얼굴을 묻고 떠났다. 박 노인은 못난 자신을 남편을 둔 탓으로 아내가 쓴 도라지만 만지다가 떠났다고, 마음 아파했다. 농촌 출신으로 초등학교밖에 배우지 못한 박 노인은 이십대 후반에 서울로 와 막노동을 했다. 일정치 못한 일용 근로자의 수입으로 살기가 어려워져 아내는 부업으로 도라지 껍질을 까는 일을 시작했다.
첫댓글 선생님 오늘도 아침일찍 만납니다.박노인이 보라를 보면서 유모차끄는게 일과이듯 제겐 선생님 소설에 푹~~!!!!
순분님 아침인사에 저도 푹빠집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아픔을 보라의 순백한 몸짓으로 달래가며
박 노인은 오늘도 유모차를 밀고 있네요.
네 이렇게 아침일찍 와 주셔서
너무감사합니다. 좋은 날 되세요.
박 노인의 삶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네요.
도라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도 알게 되구요.
아직 작품 초반이라 등장인물이
또 있습니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얼쑤~~~~
소봉님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