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서적과 골동품에 대한 단상
정종민
서점 앞을 그냥 지나면 왠지 허전하다. 꼭 들어가서 책 한권을 사들고 나와야 직성이 풀린다. 어떤 책이든 날마다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읽지 않으면 불안감이 든다.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잡았다. 아내의 푸념은 “제발 집에 와서까지 책 좀 보지 마세요.”이다. 지난 날 서울을 자주 다녔다. 터미널에서 내려오는 차표를 구입할 때, 차타는 시간을 최소 한 시간정도 뒤로 미루고 터미널지하에 있는 00문고에서 한 두 시간을 보내면서 꼭 필요한 책 한·두 권을 골라 샀다.
또 고속버스를 타고 오다가 휴게소에 들르면 볼일을 빨리 보고 제일 먼저 중고서적가판대에 가서 책을 사기도 했다. 여러 권 살 때도 있었다. 제법 오래된 책이지만, 입맛에 맞는 책을 구할 수 있어 좋았다. 오래된 재고 책이었기 때문에 거의 커피 한 잔 값이면 됐기 때문이다. 어쩔 때는 식사를 하지 않고 책을 살 때도 있었다.
한 때는 헌책방도 자주 찾았다. 한번 가면 한 보따리를 샀다. 고르다보면 책 수가 늘었다. 지금도 그때 산 고서적 중 얼른 생각이 난 책을 열거하면, 『퇴계집』,『다산시집』,『택리지』,『북학의』,『간디평전』,『박인환생애와 시집』,『노천명수필집』,『향토문화시대』등등 아주 많다. 그리고 순천관련 고서적은 거의 다 구입했다. 또 한 달에 한 권은 새 책을 우편으로 구입하여 읽은 책들이 쌓였다. 전공책과 동양사상책, 자기계발서, 시집 등등 그리고 순천관련 책을 합하여 가진 책이 약 2천여 권으로 방 벽을 장식했다. 다른 장식이 필요 없다.
오히려 전공책을 다 못 읽었지 비전공책은 거의 다 읽었다. 두 번 이상 읽은 책도 많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잘한 것 같은데, 아내는 불만이다. 나중 이 책들을 어떻게 처분할 것이냐고 나무란다. 그럴 때는 참 난감하다. 왜냐하면 한 권 한 권이 다 내 손때와 그 안에 밑줄이 쳐져 나의 분신과도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선현들이 말한 다독多讀, 다서多書, 다상량多商(想)量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항상 느낀다.
원래는 골동품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30여 년 전 옛 기와집을 헐고 새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오래 돼 보이지는 않지만, 한시, 문인화와 골동품(도자기)이 몇 점 보였다. 최근 순천지방에서 잘 알려진 분의 그림도 몇 점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도자기선물 받은 것과 누님집에서 가져다 놓은 그림이 대부분이다. 지금은 시골집 방 하나에 네면 벽을 그림으로 가득 채웠다.
나이들어 그림이나 도자기를 자꾸 바라다보니, 뭔가 특별한 느낌으로 몰입이 된다. 또 도자기 몸에 무늬로 되어있는 학, 소나무, 매화와 난초, 대나무, 등을 볼 때, 청초하면서도 애절한 여인을 보듯 흠뻑 빠진다. 도공이나 화공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고서적도 그렇지만 그림이나 도자기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이것을 굽는 사람이 자기의 그리운 사람이나 혹은 자기의 배우자를 생각하며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물론 경제적인 상품성을 생각하고 만들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만 해도 우리들이 골동품이라고 한 백자를 생활도자기로 많이 썼다. 보통 민가사람들이 쓰는 접시나 대접이나 술병을 보라. 그들은 거기에 음식을 담아서 먹었으니 사치와 호사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이었단 말인가? 오늘날의 사람들이 사치를 한다고 하지만 옛사람들을 따를 수 없다. 그때 사람들은 그 그릇에다. 담아서 먹으며 매일같이 생활 속에서 평범하게 썼던 것들을 오늘날 우리는 장식장에 전시해 놓고 귀하게 보게끔 되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물론 알고 그렇게 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모르고 사용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생활도자기로 백자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사람들이야말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미 알았던 사람들인 것 같다. 그 시절에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사용하는 물건들을 모두 최고품으로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현재의 우리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물건이 있어도 아끼다가 결국에는 써보지도 못하고 구식이 되어 아예 버리기도 한다. 세월이 빨리 지나간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유행이 빨랐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골동품이라 하여 평범한 사람들은 가질 수 없을 정도의 가격이 매겨진다. 결국 자본가들의 점유물로 전락하였다. 정말 골동품에 빠지면 약이 없다고 했다. 정말 주위에 골동품만 보면 사려고 하는 분을 잘 안다. 일종의 습관이라고 본다. 이 정도까지야 필요 없겠지만, 골동품에서 예술의 향기를 감상할 수 있는 경지까지만 알아놓으면 삶에서 최고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서적이나 골동품에 빠진(?) 그 사람들은 예술에 대한 그만한 안목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경제적인 논리로 재산적인 가치만 노리는 것일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후자인 경제적인 가치를 더 따진 것만 같아 안타깝다.
10여 년 전에 신문에 소개된 골동품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자면, 종로구 인사동에 감정을 잘 하기로 소문난 도자기전문가가 있었다. 이 사람의 인터뷰기사를 읽었다. 내용은 “어떻게 국내 최고의 도자기 감정가가 되었느냐.”라고 기자가 물었다. 나는 어렸을 때 가난해서 학교진학을 못하고 영세한 아버지 도자기공방에서 청소나 잡일을 하고 자랐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한 번도 도자기에 대해서 말씀을 안 하시고 항상 청소와 도자기에 앉은 먼지만 닦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같이 있는 종업원에게는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께 따졌다. “저에게는 왜 청소만 계속시키고 도자기에 대하여 하나도 안 가르쳐 주느냐.”라고. 그랬더니 오히려 호통만 치시고 나중 때가 되면 가르쳐줄 것이니 잔소리 말고 도자기나 잘 닦으라고 했단다. 그래서 가출을 해 버릴까도 고민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5년 쯤 되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얘기를 해 주는데, “도자기는 하도 변화무쌍해서 보는 것보다도 질감의 감촉이 제일 중요하여 자꾸 만져보고 느낌을 익혀, 눈을 감고도 감정할 수 있는 영안靈眼을 가져야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아들이라 내 자식이 조선에서 최고가 되려면 혹독한 수련을 시켜야한다는 신념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회고한 것을 신문에서 읽었다. 정말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이 정도는 돼야할 것 같다. 나도 이런데서 배워 내 자식에게 이런 사랑을 베풀어야겠다.
지인 집에 가서 거실에 놓인 고풍스런 사방탁자·문갑 또는 벽에 걸린 편액이나 주련을 보면, 지인이 예사롭게 않게 보인다. 지인과 같이 한문 뜻을 해석해 보면서 극찬을 해준다. 그러면 정말 반색을 하며 좋아한다. 그래서일까? 더 맛있는 음식이나 차를 내온다. 상대방을 인정해 준 대가이다. 고풍스런 낡은 탁자하나, 주련이나 편액이 풍겨오는 품격과 운치는 그 번쩍거리는 자개농이나 다른 값비싼 장식장에 비견할 바가 아니다. 그윽한 운치하며 소담스런 맛 하나하나가 장인의 손길로 만든 것이어서 제각기 다른 품격의 멋을 느끼게 하는 것이 흥미를 더한다.
골동품에 대한 많은 지식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값비싼 도자기나 서화만을 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값싼 것도 괜찮다. 내가 감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고서적은 고서적대로 좋고, 항아리는 항아리대로 좋으며, 그림은 그림대로 좋다. 우리는 각자 가치관이 달라도 각 방면에서 예술의 혼을 넉넉하게 느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202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