Ⅹ. 창가학회의 역사
여기서는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살아오신 삼대(三代) 회장의 발자취와 사제정신을 통해 창가학회의 역사를 배우겠습니다.
법화경은 불의(佛意-석존이 가르침을 설한 참뜻)를 밝힌 경전입니다. 불의는 만인이 자신의 생명에 본디 갖춰진 부처의 지혜를 나타내고, 자타 함께 확고한 행복과 평화로운 세계를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법화경에서는 이 불의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장애와 싸워 자타의 생명을 변혁하는 것이 진실한 대승보살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이 보살이 석존 멸후 말법에 출현하여 전 세계에 법화경을 넓히고 불의를 실현한다, 이른바 광선유포한다는 것을 설합니다. 그 사명을 짊어진 보살이 바로 ‘지용보살(地涌菩薩)’입니다.
이 지용보살의 상수(上首)인 상행보살(上行菩薩)의 사명을 자각하고 법화경에서 밝힌 광선유포의 불의불칙(佛意佛勅)을 자신의 대원(大願)으로 삼아 그 실현을 위해 일어서 말법의 중생과 시대를 구제하는 근본법과 실천을 확립하신 말법의 어본불이 니치렌 대성인입니다.
그리고 현대에 대성인의 정신을 계승해 세계 광선유포의 사명을 깊이 자각하여 그 실현을 위해 진지한 실천을 관철한 교단이 창가학회입니다. 또 현대에 광선유포의 자각과 실천을 확립한 지도자가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초대 회장,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제2대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제3대 회장(현 SGI 회장)에 이르는 ‘삼대 회장’입니다.
1.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 시대
창가학회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과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의 사제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은 모두 교육자였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1871년 6월 6일,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 아라하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소년기에 홋카이도로 건너가 일하면서 독서와 학업에 힘써 홋카이도 사범학교(지금의 홋카이도 교육대학교)에 입학해, 졸업 후에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교사 생활을 한 뒤 상경해 1903년에 최초의 저서인 ≪인생지리학(人生地理學)≫을 발간했습니다. 그 뒤 도쿄 각지의 소학교(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한편, 도다 선생님은 1900년 2월 11일, 이시카와현 가가시 시오야마치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902년 무렵에 일가가 홋카이도 아쓰타군 아쓰타무라(현 이시카리시 아쓰타구)로 이주해 소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일하면서 독학으로 교사자격을 취득해 유바리에서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사제의 만남
그 무렵 진지하게 인생의 스승을 찾던 도다 선생님은 도쿄에 왔을 때 이미 소학교 교장으로 활약하던 마키구치 선생님을 만나 서로 마음이 맞았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마흔 여덟살이고 도다 조세이 선생님은 열아홉살 때였습니다. 이윽고 도다 선생님은 마키구치 선생님 슬하에서 교사로 일을 시작해 스승으로 정한 마키구치 선생님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습니다. <상경 후 주경야독으로 가이세이예비학교, 주오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창가교육학회 창립
마키구치 선생님은 자신이 교육자로서 초등교육 현장에 종사하면서 모든 어린이가 스스로 행복한 사회인으로 자립할 수 있기를 바라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교육의 확립을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독자적인 교육학을 구상하여 그 토대가 되는 가치론을 깊이 추구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간이 사회 속에서 가치를 창조하는 확고한 주체가 될 수 있는 생명변혁의 원리와 그를 위한 근본적인 실천방안을 밝힌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만나, 1928년 대성인 불법을 계승한 닛코 상인(日興上人)의 흐름을 이어받은 일련정종(日蓮正宗)에 입신하셨습니다. 쉰일곱살 때였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입신 당시의 심경을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로 거의 60년에 이르는 생활법을 일신했다.’고 술회했듯이 대성인 불법을 ‘생활법’으로 받아들여 사회생활 속에서 실증을 나타낼 수 있는 가치창조의 원천이 되는 종교로 생각하고 귀의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법화경을 만나 믿어보니 우리 일상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과학과 철학의 원리로서 하등의 모순이 없다.’고도 입신 동기를 말했습니다.
또한 도다 선생님도 마키구치 선생님을 따라 그해에 대성인 불법에 귀의합니다.
1930년 11월 18일, 마키구치 선생님은 ≪창가교육학체계≫ 제1권을 발간했습니다. 이 책은 마키구치 선생님이 구상하신 교육학을 체계화한 내용으로 총 12권을 간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총 4권 간행)
제자인 도다 선생님이 사재를 털어 출판을 돕고 또 마키구치 선생님의 교육이론 메모를 순서를 정해 구상하고 문장을 정리하는 등 전면적으로 협력했습니다.
또 ≪창가교육학체계≫ 판권에는 저자인 마키구치 선생님, 발행 겸 인쇄인인 도다 선생님의 이름과 함께 발행처로 창가학회의 전신인 ‘창가교육학회’ 명칭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창가교육학회의 이름이 세상에 나온 최초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발간한 11월 18일을 창가학회 창립기념일로 정했습니다.
‘창가(創價)’는 ‘가치창조(價値創造)’라는 뜻입니다. 교육의 목적과 인생의 목적은 행복의 추구에 있으며 그 내실은 가치창조에 있다는 마키구치 선생님의 사상이 담긴 말입니다.
이 ‘창가’라는 말 자체도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이 나눈 사제의 대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창가학회는 그 출발부터 ‘사제일체(師弟一體)’의 혼의 결정(結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 직결의 불법을 실천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사제 두 사람으로 출발한 창가교육학회는 차츰 기구(機構)도 정비되어 거듭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창가교육학설에 공감하는 교육자들의 단체로 출발했지만, 드디어 교육자 이외의 사람들도 참여하게 되어 가치창조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실천하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가교육학회는 일련정종의 재가신도 단체였지만 종래의 강(講-승려의 지도 아래 말사에 소속된 신도 단체)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했습니다.
마치구치 회장과 도다 이사장을 중심으로 학회 운영도, 회원의 신심지도도 승려에 의존하지 않고 학회 독자적으로 운영했습니다. 학회는 처음부터 종래의 일련정종 종문의 틀을 넘어선 독자적인 재가단체였습니다.
또 그 실천에서도 불법을 사찰이나 장례식 등의 의식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신행(信行)의 심화(深化)로 각자가 현실의 인생에서 행복을 실현하고 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목표로 하는 ‘개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본디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실천 방법에 기준을 둔 것입니다.
좌담회와 지방지도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창가교육학회는 순조롭게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당시 전국의 회원은 약 30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군국주의와 투쟁
그러나 ‘국가신도(國家神道)’를 정신적 지주로 섬기며 전쟁 확대로 폭주하는 군부정부는 국내의 사상통제를 강화하고 학회의 좌담회 등도 사상범 적발을 주임무로 하는 특고(특별고등경찰)의 감시 속에서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신사참배와 신찰(神札)을 모시도록 국민에게 강요했습니다. 1943년 6월, 학회는 권력의 탄압을 두려워한 일련정종으로부터 법주의 입회 아래 신찰을 받으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련정종의 태도는 니치렌 대성인, 닛코 상인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방법(謗法-정법<正法>을 비방하는 것)을 용인하는 행위입니다. 이에 대해 마키구치 선생님은 신찰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학회는 니치렌 대성인이 밝히신 방범엄계(謗法嚴誡)의 가르침을 관철했습니다.
그해 7월 6일, 마키구치 선생님은 지방절복을 위해 방문한 이즈 시모다에서, 도다 선생님은 도쿄에서 특고형사에게 연행되어 최종적으로 간부 21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가 그 이유였습니다.
혹독한 취조에도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은 끝까지 퇴전하지 않고 신앙을 관철하셨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취조를 담당한 검사와 판사에게도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교의(敎義)를 설했습니다. 권력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불법의 정의를 관철하신 것입니다.
1944년 11월 18일, 마키구치 선생님은 연로하신 데다 영양실조까지 겹쳐 도쿄구치소에서 서거하셨습니다. 기이하게도 ‘창립기념일’과 같은 날, 향년 73세로 순교하셨습니다.
그 생애는 실로 어서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실천을 관철하고 니치렌 대성인의 민중구제와 묘법홍통(妙法弘通)의 정신을 현대에 소생시킨 존귀한 선구자의 일생이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의 옥중 오달
도다 선생님은 1944년 연초부터 옥중에서 창제에 면려하는 한편, 법화경을 읽고 사색을 거듭하는 가운데 ‘부처는 생명’이라는 오달(悟達)을 득했습니다.
또 도다 선생님은 창제와 사색을 거듭하는 속에 자신이 바로 법화경에서 설하는 허공회의식(虛空會儀式)에서 석존 멸후에 법화경을 광선유포할 사명을 의탁받은 지용보살임을 깨닫고 ‘나는 지용보살’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1944년 11월의 일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 ‘옥중 오달’로 니치렌 대성인 불법에 대한 부동의 확신과 더불어 광선유포를 자신의 사명으로 자각했습니다.
또 도다 선생님의 이 같은 ‘옥중 오달’이 바로 불법을 현대에 생생하게 되살리고 창가학회가 광선유포의 교단으로 비약하는 원점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도다 선생님은 마키구치 선생님을 추모하는 법요(法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광대무변한 자비는 저를 감옥에까지 데려가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재재제불토(在在諸佛土) 상여사구생(常與師俱生)’이라고 묘호렌게쿄의 한 구절을 몸으로 읽고, 그 공덕으로 지용보살의 본사(本事)를 알고 법화경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신독(身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재재제불토 상여사구생’은 법화경 화성유품 제7에 나오는 경문으로 ‘스승과 제자는 모든 불국토에서 언제나 함께 태어나 민중구제를 위해 투쟁한다’는 사제의 유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탄압에 굴복해 많은 사람이 퇴전하는 가운데, 마키구치 선생님에 대한 보은감사의 정성을 다한 도다 선생님의 말씀에서 사제의 깊은 유대를 배견할 수 있습니다.
2.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 시대
1945년 7월 3일, 2년 동안의 옥중생활을 이겨내고 출옥한 도다 선생님은 마키구치 선생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오직 홀로 광선유포를 위해 일어서 이사장으로서 괴멸상태에 빠진 학회재건에 곧바로 착수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패전의 혼란과 황폐로 인해 일본 민중은 도탄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국민이 강요당한 국가신도 등 신념, 가치관은 부정되었지만,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그 민중을 구하는 대법리는 니치렌 불법밖에 없다며 광선유포의 대원에 나섰습니다. 먼저 교육개혁뿐만 아니라, 광선유포라는 전 민중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목표로 하는 학회의 목적에 입각한 학회의 명칭을 ‘창가학회’로 바꾸고 좌담회와 지방지도도 재개했습니다.
도다 선생님과 이케다 선생님의 사제의 만남
1947년에는 도다 선생님과 제3대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이 사제로서 만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1928년 1월 2일, 도쿄 오타구 오모리기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일본이 점차 전쟁에 돌입하던 아홉살 때 중일전쟁, 열세살 때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전황이 악화하는 속에 한창 일할 나이인 형 네명이 모두 징병으로 끌려가게 되어 이케다 선생님은 집안을 보살피며 군수공장에서 일하지만 이 무렵부터 결핵을 앓아 생사(生死)의 문제를 생각하며 고뇌하는 청춘 시절을 보냈습니다.
전쟁터에서 일시 귀국한 큰형에게 들은 전쟁으로 아시아 민중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말과, 공습으로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전쟁의 모순과 비참함을 통감합니다. 특히 다시 출정한 큰형이 버마(현재 미얀마)에서 전사한 사실을 전쟁이 끝나고 알게 됩니다. 이때 슬퍼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전쟁의 죄악(罪惡)을 실감합니다.
그리고 문학이나 철학서적을 통해 확고한 인생의 자세를 모색합니다.
그런 가운데 이케다 선생님은 1947년 8월 14일, 처음으로 창가학회 좌담회에 참석해 그 자리에서 생애 스승인 도다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이날, 도다 선생님은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강의하셨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에게 ‘올바른 인생이란’ ‘진정한 애국자란’ ‘남묘호렌게쿄란’ 잇따라 질문했습니다. 군부정부와 싸우며 2년 동안 옥중투쟁을 관철한 도다 선생님의 깊은 신념이 맥동하고, 논리정연하고 명쾌한 답변에 이케다 선생님은 ‘이 사람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1947년 8월 24일, 신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마흔일곱살, 이케다 선생님이 열아홉살 때였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 이듬해 다이세이학원(현재 도쿄후지대학교) 야간부에 입학합니다. 9월에는 도다 선생님의 법화경 강의 수강생이 되어 불법연찬을 심화하는 속에 도다 선생님을 스승으로 받들어 광선유포에 꿋꿋이 살아갈 것을 서원합니다.
또 1949년 1월에는 도다 선생님이 경영하는 출판사에 입사해 소년잡지 편집에 종사합니다.
사제공전(師弟共戰)으로 학회재건
1949년 7월에는 창가학회 기관지로서 새롭게 ‘대백연화(大白蓮華)’가 탄생합니다. 그 창간호에 도다 선생님은 논문 ‘생명론’을 집필했습니다.
그뒤 도다 선생님의 사업은 혼란한 경제의 영향으로 어려움에 처해 이듬해 1950년 8월 24일, 도다 선생님은 학회 이사장직을 사임할 의향을 발표합니다.
이때 “앞으로 제 스승은 누구입니까?” 하고 묻는 이케다 선생님에게 도다 선생님은 “고생만 시켰지만 자네 스승은 나일세.” 하고 사제의 유대를 확인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 사업을 처리하느라 분주한 속에서 이 궁지를 타개하여 반드시 도다 선생님을 학회 회장으로 모시겠다고 깊이 결의했습니다.
스승을 돕기 위해 야학을 단념한 이케다 선생님에게 도다 선생님은 대학교육보다 뛰어난 모든 학문의 개인교수를 해주셨습니다. 이 개인교수는 도다 선생님이 서거하기 전까지 이어져 ‘도다대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이러한 악전고투 속에서도 도다 선생님은 늘 곁에 있던 이케다 선생님에게 광포의 언론전을 위한 기관지 발간과 소카대학교 설립 등 미래의 구상을 말했습니다. 세이쿄신문도 소카대학교도 이 사제의 대화에서 탄생했습니다.
제2대 회장 취임
역경을 극복한 도다 선생님은 많은 회원의 요청을 받아들여 1951년 5월 3일, 제2대 회장에 취임합니다. 그 인사말에서 75만 세대 절복을 달성하겠다는 서원을 선언합니다. 당시 학회원은 실질적으로 약 3000명 정도로 누구도 믿지 못할 홍교 목표였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회장 취임을 앞두고 학회조직을 재편해, 그 후 발전의 기반이 되는 지부체제를 정비하고 광선유포를 위한 포진을 새롭게 했습니다.
회장 취임 직전인 4월 20일에는 기관지 ‘세이쿄신문’을 창간해 도다 선생님은 창간호부터 묘오공(妙悟空)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인간혁명≫을 집필해 연재했습니다.
《인간혁명》은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실천하여 각자 자신의 생명경애를 변혁하고 전 인류의 숙명전환(宿命轉換)을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도다 선생님은 생명론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혁명의 이념을 내걸고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현대에 전개했습니다.
또 회장에 취임한 뒤에는 곧바로 부인부를 비롯한 남자부, 여자부 등 각부를 잇따라 결성했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이듬해 1952년 연초, 도다 선생님의 명을 받아 가마타지부의 지부간사가 된 이케다 선생님은 2월 한달 동안에 지부에서 201세대의 홍교를 추진해, 당시 홍교의 벽을 무너뜨렸습니다.(2월투쟁) 이것이 계기가 되어 75만 세대 달성을 향해 학회 전체의 홍교에 가속도가 붙어 전진이 시작됩니다.
한편, 도다 선생님은 어서전집 발간에도 착수했습니다. 광선유포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어서를 올바르게 연찬하는 것이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석학이신 니치코 상인에게 편찬을 의뢰하여 1952년 4월, 입종 700년의 가절을 맞아 ≪니치렌대성인어서전집≫을 발간했습니다. 이 어서전집을 한사람 한사람이 진지하게 연찬함으로써 어서근본의 정신이 학회 전체에 확립됩니다.
권력의 마성이 준동
학회는 민중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를 위해 투쟁하신 니치렌 대성인의 ‘입정안국’의 정신을 근본으로 삼아 부패한 정치를 정화하고 정치를 민중의 손에 되돌려주기 위해 1955년 4월 통일지방선거에서 최초로 독자적으로 추천한 후보를 내세웠습니다.
이듬해 1956년, 이케다 선생님은 간사이에서 비약적인 절복을 추진해 5월에는 오사카지부가 1만 1111세대라는 미증유(未曾有)의 홍교를 달성합니다. 또 7월에 실시한 참의원선거에서는 이케다 선생님이 지원활동의 책임을 맡은 오사카 선거구에서 당선은 불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학회가 지지한 후보자가 당선합니다. 일반신문에서도 “설마가 실현”이라는 표제를 내걸 정도의 멋진 승리였습니다.
이 선거에서 학회가 추천한 참의원 세명이 탄생합니다. 이 무렵부터 창가학회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띤 단체로 주목받게 됨과 동시에 여러 기성세력의 부당한 압력이 가해지게 됩니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이케다 선생님은 학회원을 지키기 위해 과감하게 싸웠습니다. 홋카이도의 유바리 탄광노조가 신교(信敎)의 자유를 짓밟고 학회원을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957년 6월, 곧바로 현지로 달려가 탄광노조에 단호히 항의하는 자세를 분명히 해 사건해결을 위해 분투했습니다.(유바리탄광노조사건)
그 직후인 7월 3일, 이케다 선생님은 오사카부 경찰에 부당하게 체포되었습니다.(오사카사건)
이것은 그해 4월에 실시된 참의원 오사카지방선거구 보궐선거에서 선거위반자가 나온 것과 관련하여 선거지원 책임자인 이케다 선생님을 사건의 주모자로 몰아세워 사실무근한 죄를 덮어씌우려 한 것이었습니다.
이 7월 3일은 1945년 도다 선생님이 출옥한 날과 같은 날이며, 이케다 선생님은 훗날 ‘출옥과 입옥의 날에 사제(師弟) 있노라’ 하고 읊었습니다.
15일 동안에 걸친 가혹한 취조에서 검찰은 이케다 선생님에게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도다 회장을 체포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미 도다 선생님의 몸은 쇠약한 상태였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스승을 지키기 위해 일단은 죄를 뒤집어쓰고 그 후 재판에서 결백을 증명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7월 17일에 오사카구치소에서 석방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로부터 4년 반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1962년 1월 25일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이 판결은 확정되었습니다.
광선유포의 후계를 맡기다
1957년 9월 8일, 도다 선생님은 창가학회 평화운동의 기조가 되는 ‘원수폭금지선언’을 발표합니다.
이 선언에서는 불법(佛法)의 생명존엄의 원리에서 핵무기를 인류의 생존권을 빼앗는 ‘마(魔)’의 산물로 포착하고 핵무기 사용을 절대악으로서 단죄합니다.
그해 12월에는 도다 선생님이 서원(誓願)하신 75만 세대 홍교를 달성합니다.
이듬해 1958년 3월에는 학회가 다이세키사(大石寺)에 건립해 기진한 대강당이 완성됩니다. 3월 16일, 도다 선생님은 이케다 선생님을 비롯하여 한자리에 모인 청년부 6000명에게 광선유포의 일체를 맡기는 의식을 여는 자리에서 “창가학회는 종교계의 왕자다!” 하고 선언하십니다.
도다 선생님이 후계 청년에게 광선유포의 대원을 맡기신 이 ‘3·16’은 훗날 ‘광선유포기념일’이 됩니다.
1958년 4월 2일, 도다 선생님은 모든 원업(願業)을 이룩하고 향년 쉰여덟살에 서거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옥중 오달을 원점으로 학회를 재건하고 광선유포의 확고한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3. 이케다 다이사쿠 제3대 회장·SGI 회장 시대
도다 선생님 서거 후, 신설 역직인 총무로서 실질적으로 학회운영을 책임진 이케다 선생님은 1960년 5월 3일, 제3대 회장에 취임합니다.
“비록 나이는 젊지만, 오늘부터 도다 문하생을 대표하여 화의(化儀)의 광선유포를 목표로 일보 전진하는 지휘를 하겠습니다!”
도다 선생님 때와 똑같은 ‘5월 3일’에 거행된 회장 취임식에서 이케다 선생님이 사자후하신 제일성에서 학회의 새로운 대전진이 시작됩니다.
1960년 10월 2일에는 북남미를 향해 출발해, 세계광포의 제일보를 내디뎠습니다. 이듬해 1961년 1월에는 홍콩, 인도 등 아시아를, 그해 10월에는 유럽을 방문하는 등 세계광포의 포석을 하나하나 다지기 시작합니다.
니치렌 대성인이 밝히신 ‘불법서환(佛法西還)’ ‘일염부제(一閻浮提) 광선유포(廣宣流布)’를 위한 본격적인 발걸음이 이케다 선생님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창가학회의 역사와 정신을 올바르게 후세에 남기기 위해 1965년부터 세이쿄신문에 법오공(法悟空)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인간혁명≫(총 12권)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혁명은 이윽고 한 나라의 숙명도 전환하고, 나아가 전 인류의 숙명전환도 가능케 한다’는 주제로 사람들의 행복과 인류의 평화건설에 도전하는 삼대(三代) 회장의 투쟁이 그려집니다. 그 집필활동은 현재 소설 ≪신·인간혁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평화, 문화, 교육운동
학회는 사회에 공헌하는 청년을 육성하는 단체입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광선유포가 추진되면 많은 인재가 육성되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활약하게 된다. 이윽고 창가학회는 인류의 평화와 문화를 떠맡을 중심적인 존재로서, 그런 인재를 키워내는 장대한 교육의 모체가 될 것이다.”라는 은사 도다 선생님의 전망을 구현화(具現化)하기 위해 불법(佛法)을 기조로 한 평화, 문화, 교육운동을 펼치며 사회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의 제안으로 교육부(현 교육본부), 학술부, 예술부, 문예부, 국제부(현 국제본부), 닥터부를 결성했습니다.
또 사회부, 농촌부(농어광부), 전문부, 낙도본부(낙도부), 지역부도 만들고 나아가 동양학술연구소(현 동양철학연구소)와 민주음악협회(약칭 민음), 도쿄후지미술관을 설립하는 등 다채로운 교육, 문화, 사회공헌 운동을 전개합니다.
정치 분야에서는 서민을 위한, 대중을 위한, 사회를 위한 정치를 확립하기 위해 1964년, 독립된 정당으로서 공명당(公明黨)이 탄생합니다.
또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교육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도쿄 고다이라시에 소카중학교와 고등학교(1968년 개교), 도쿄 하치오지시에 소카대학교(1971년 개학), 오사카 가타노시에 소카여자중학교와 고등학교(1973년 개교, 현재 간사이소카중학교, 고등학교)를 창립하는 등 유치원, 초등학교에서 대학, 대학원에 이르는 ‘창가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했습니다.
2001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군에 미국소카대학교를 개교했습니다.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의 평화, 문화, 교육에 초점을 맞춘 대화의 행동은 세계에 크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1968년 9월 8일에는 중일국교정상화 제언을 발표합니다. 1972년부터 이케다 선생님은 영국의 세계적인 역사가 아널드 J. 토인비 박사와 2년 넘게 40시간에 걸쳐 대담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세계의 지성와 대화하는 ‘평화, 문화, 교육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동서냉전, 중소대립의 벽이 두텁기만 하던 1974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중국, 소련(당시), 미국을 잇따라 방문하여 각국 정상들과 회견하고 평화와 우호의 길을 개척합니다.
그리고 1975년 1월 26일에는 세계 51개국·지역 대표가 괌에 모여 국제창가학회(SGI)를 발족해, 이케다 선생님이 SGI 회장에 취임했습니다.
학회가 세계 광선유포에 크게 비약하는 가운데 1977년 무렵부터 종문(宗門)의 말사(末寺) 등에서 승려의 부당한 학회비판이 되풀이됩니다. 제1차 종문사건입니다.
거기에는 반역자가 승려와 결탁해 광선유포의 지도자인 이케다 선생님과 회원의 사제(師弟) 유대(紐帶)를 분단시켜 학회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려는 모략이 있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 공격으로부터 회원을 지키고 승속화합(僧俗和合)을 이룰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1979년 4월, 회장직을 사임하고 명예회장으로서 사태수습에 힘썼습니다.
잇따른 상찬과 현창
1983년부터 1월 26일 ‘SGI의 날’을 기념하여 이케다 선생님은 해마다 ‘평화제언’을 발표해, 그 제언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또 세계 대학과 학술기관에서 한 강연도 30회 이상 됩니다.
이케다 선생님과 해외 식자와의 대담도 확산되어 국가원수, 문화인, 대학총장과 나눈 대화가 1600회 이상이 됩니다. 세계의 지성들과 나눈 대담집은 70점을 넘고, 이중 토인비 대담은 세계 약 30개 언어로 출판되어 ‘세계문화의 이정표’ ‘인류의 교과서’라는 평가를 받는 등 세계의 학식자와 지도자에게 찬동을 넓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명간 대화’ ‘종교간 대화’는 상호이해를 깊게 하고 민중의 교류를 잇는 선(善)의 연대(連帶)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1995년에는 SGI(국제창가학회)의 인간주의 이념을 명확하게 밝힌 ‘SGI 헌장’을 제정하고, 1996년에는 도다 선생님의 유훈(遺訓)을 모토로 ‘도다기념국제평화연구소’를 창설했습니다.
이런 SGI 운동에 대해 전 세계 각지에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 이케다 선생님의 이름을 붙인 공원과 거리 등이 탄생하고, 이케다 선생님에게 세계 각국에서 국가훈장과 여러 학술기관에서 명예박사, 명예교수 등, 세계 각지의 명예시민 칭호를 수여하는 등 상찬과 현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 1991년에는 일련정종 종문이 창가학회의 1000만 신도를 ‘파문(破門)’하는 횡포가 그지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제2차 종문사건)
그러나 학회는 종조(宗祖) 대성인에 위배하고 부패 타락한 종문의 대방법(大謗法)을 끝까지 추궁하여 종문사건에 대승리하여 세계 192개국·지역에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넓히는 세계광포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각국 SGI는 불법 인간주의 정신을 기조로 착실하게 사회공헌에 힘써 두터운 신뢰와 상찬이 넓혀지고 있습니다.
2013년 11월, 도쿄 시나노마치 총본부에 ‘광선유포 대서원의 전당’을 완공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광선유포 서원의 비’에 “광선유포는 세계평화와 사회번영을 여는 대도(大道)이다. 전 인류를 구하려는 우리 구원(久遠)의 대서원이다.” 하고 쓰셨습니다.
전국, 전 세계 동지가 대서원의 전당에 모여 실시하는 ‘광선유포 대서원 근행회’에서는 각자가 ‘대법홍통 자절광선유포 대원성취(大法弘通慈折廣宣流布大願成就)’라고 씌어 있는 창가학회 상주어본존에게 광포서원의 기원을 올리고 새로운 결의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창가학회의 실천으로 니치렌 대성인 불법은 바야흐로 인류 전체를 비추는 희망의 태양이 되었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