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서울의 민간 방송국(뒷날의 TBC)에서 주최한 아마추어 노래자랑에서 당시 여고생이었던 이미자는 1등을 한다. 그 후 가수 남일해가 이 노래자랑대회의 심사위원(황문평)이 작곡가 나화랑에게 "이미자가 대성할 아가씨니 지도를 잘 해서 아주 스타로 만들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하는 얘기를 듣고 그녀를 찾아온다. 이미자는 바로 작곡가 나화랑의 연구생으로 들어가, 1960년 겨울에 첫 음반 「열아홉 순정」을 녹음하여 가요계에 데뷔하게 된다.
한국 가요계에서 '가요계의 여왕', '엘레지의 여왕'이란 칭호를 받는 불세출의 가수 이미자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라고 작가 장석주는 현대 한국의, 아름다운 명인들의 삶을 탐구한 저서「지금 그 사람 이름은」에서 밝히고 있다. 가요사(歌謠史)에 의하면 가수 남일해 또한 「이정표」(나화랑 작곡)란 노래로 작곡가 나화랑에 발탁되었다고 한다. 그 가사를 음미해 보자.
길 잃은 나그네의 나침판이냐/항구 잃은 연락선의 고동이드냐/해지는 영마루 홀로섰는 이정표/고향 길 타향 길을 손짓해 주네//
바람찬 십자로의 신호등이냐/정처 없는 나그네의 주마등이냐/버들잎 떨어지는 삼거리의 이정표/ 타 고향 가는 길손 울려만 주네//
-「이정표」
지금 중·장년 층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 가운데 「이정표」(남일해)「열아홉 순정」(이미자) 「비의 탱고」(도미)「무너진 사랑탑」(남인수) 「향기 품은 군사우편」(은방울 자매)「닐니리 맘보」(백설희/이미자) 「청포도 사랑」(도미) 「울산 큰애기」(김상희) 등이 모두나화랑 작곡품이다.
이미자의 「열아홉 순정」은
보기만 하여도 울렁/생각만 하여도 울렁/수줍은 열아홉살 움트는/첫사랑을 몰라주세요/
세상의 그 누구도 다 모르게/내 가슴 속에만 숨어있는, 응-/내 가슴에, 응- 숨어 있는/
장미꽃보다 더붉은/열아홉 순정이래요//
바람이 스쳐도 울렁/버들이 피어도 울렁/수줍은 열아홉살 움트는/첫사랑을 몰라주세요/
그대의 속삭임을 내 가슴에/가만히 남 몰래 담아 보는, 응-/내 가슴에, 응- 담아보는/
진주빛보다 더고운/열아홉 순정이래요//
-「열아홉 순정」
이처럼, 수줍게 울렁이는 첫사랑 처녀의 맘을 잘 그려냄으로써 이미자, 그녀를 가요계의 여왕으로 만들어 낸 히트곡이었다.
그 나화랑은 어떤 사람인가? 최근, 대중가요를 듣다가 우연히 그의 이력에 흥미를 느껴 조사해 보게 되었다. 우리 나라 대중가요사, 가요 연구가들의 글에 나타난 그의 이력과 업적을 요약해 보면 이렇다.
나화랑의 본명은 조광환(曺曠煥)으로 1921년 김천시 봉산면 인의동(속칭 봉계)에서 출생하였다.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1940년, 송설 제5회 졸업. 백과사전에 김천농업학교 졸업으로 표기돼 있음은 오류임)한 뒤, 도쿄(東京)의 중앙음악학원에서 음악공부를 하였으며, 현존 동향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김천고등여학교(현재의 김천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6.25 때 육군 군예대에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가수 생활을 시도한 적도 있다. 1943년 태평 레코드사에서 주최한 제21회 레코드 예술상 전국 결선(당시 서울 종로 제일 극장에서 있었던, 가수 선발대회)에서 입상, 가수로 데뷔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작곡 쪽에 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시 포리돌 레코드사 및 지구레코드사에서 전속 작곡가로 있으면서 가수 발굴, 가요 비평 등에도 힘썻던 것으로 알리고 있다. 나화랑은 이 밖에도 송민도, 도 미 같은 가수를 배출시키며 가요계에서 활약하다가 1983년 타계하였다.
조광환의 맏형이 조경환(曺景煥)이었는데, 이이가 예명을 고려성(高慮星)이라 쓴 작사가였다. 1930년대 말부터 가요 작사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데, 대표곡이 백년설의「나그네 설움」(이재호 작곡, 1939년 발표)이다. 고려성이 당시 작사가로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기에(태평 레코드사 문예부장) 흘러간 가요 음반 중에 고려성(조경환)작사 나화랑(조광환) 작곡의 음반을 흔히 발견하게도 된다. 또한 나화랑의 부인(예명 탁소연)도 작사가로 활약하였던 기록이 보이며(대표곡「울산 큰애기」;김상희), 오늘날 10대들에 잘 알려진 가수 겸 작곡가 조규찬은 나화랑의 자제로서, 그 또한 3형제가 가수로 활약하고 있기에 나화랑의 집안은 부전자전의 음악인 집안이라 하겠다.
곧, 나화랑은 자신을 포함하여 형제와 가족, 후손들이 가업으로써 우리 나라 대중가요의 진흥에 이바지한 음악인이다.
대중가요는 대중의 삶을 대변하며 대중의 정서를 표출하는 에너지의 하나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지금은 과거에 비하여 두드러지게 대중가요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였고, 가요 탄생의 유형과 보급 방식 그리고 소비의 유형도 많이 달라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대중가요=팝송으로 인식되기 십상이었으나, 요즘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가요는 거의가 국산 가요들이다.
그리고 명곡은 훌륭한 작사·작곡에서 탄생하여 재능 있는 가수에 의해 대중에게 전파되는 것인데, 작곡가와 작사가의 이름은 대중들에게 잘 기억되지 않는다. 작사가의 이름은 작곡가의 이름보다 보다 더 잘 기억되지 않는다. 그래도 클래식 음악은 작곡가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활용되지만 현대의 가요는 거의가 가수의 이름으로 대중에게 기억될 뿐이다.
작사가 고려성이 남긴 대표작으로 「일자일루」(백년설 노래),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개사(改詞)하여 발표하였다는「마상일기」(진방남 노래) 등이 있다.
밤이 새면 장거리에 풀어야 할 황앗짐/별빛 잡고 길을 물어 가야 할 팔십 리란다/
나귀 목에 짤랑짤랑 향수 피는 방울 소리/구름 잡고 도는 신세 발길이 설다//
경상도다 전라도다 충청도다 강원도/오양간 나귀 몰아 조바심 몇 십 년이냐/
길 친구에 입을 빌어 더듬어 본 추억 속에/말만 들은 옛 고향에 처녀를 본다//
-「마상일기」
* 최근 나화랑의 노래를 즐겨 듣다가 조사하여 쓴 글입니다. 오늘은 그의 "이국 땅"(남일해)을 들으며 다시 다듬어 여기 옮겨 싣사오니 회원님들 참고로 하십시오. - 빛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