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크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촌, 인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 고뇌를 생각한다.
평화와 정의의 이름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전쟁, 전쟁이 지속되도록 불을 지피는 보이지 않는 사탄의 세력들, 악에 세뇌되고 중독된 인간의 영혼, 경제적인 이해타산으로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나라와 기업들, 자국민의 안전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고 있는 최첨단 살인산업의 활성화와 천문학적인 무역규모 앞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너무 초라하다. 너무 미미하고 무력하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저마다 간절히 기도하지만 기도가 얼마나 파당적이며 이기적인가!
지금 러시아 교회들은 러시아의 승전을 위해 기도하고 우크라이나 교회들은 우크라이나의 승전을 위해 기도한다. 러시아와 이해타산의 궤를 같이 나라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러시아 입장에 서며 러시아 승전을 위해 기도하며 블록을 형성한다. 우크라이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나라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우크라이나의 자리에 서며 우크라이나의 승전을 위해 기도하며 영적인 또 하나의 블을 형성한다.
나처럼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세계의 크리스천들은 속히 종전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며 참회를 하지만 안타깝게도 살인, 폭력, 파괴, 방화의 전쟁을 막지도 멈추지도 못한다. 애통하게도 사랑으로 바치는 우리의 기도가 인간의 대량 살상의 범죄와 악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참으로 지구상의 대부분의 문제는 사랑의 부재에서 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쟁과 빈곤과 기아의 문제 등을 사랑으로 풀지 못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살고 있다.
세상을 모르던, 순진무구한 시절에는 내가, 우리 인류가 서로 사랑하면 지구상이 그대로 천국으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긴 세월 살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도 지구 차원의 거대한 변화와 변혁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으며 인간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크지도 많지 도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그분의 사랑의 완성으로 이해하며 인간의 삶의 의미와 완성 역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신앙의 연장선에서 청소년기부터 지구촌의 대 이슈인 빈곤과 기아, 환경오염, 평화와 교류, 패권 다툼, 독재와 이념의 대립 등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그 문제는 인간의 죄성과 존재문제이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악이며 모순이며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탐구욕과 탐욕의 문제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현재 지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누적된 인간의 지식과 교만, 탐욕과 방종의 문제이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직접 다스릴 때 비로소 해결된다는 대오각성 끝에 나는 지구촌이 직면한 거대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절망하거나 자포자기(自暴自棄)한다는 말이 아니다. 무관심하거나 방관한다는 뜻이 아니다. 묵인하거나 동조한다는 말이 아니다. 나 자신이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문제를 만드는데 참여한 범인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나 자신 또한 지구촌의 문제와 함께 형성된 현대문명과 문화의 혜택과 복지, 쾌락과 편리를 누리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거대담론과 정치적인 이슈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아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를 날마다 기원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시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간구하며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일한다는 의식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은혜로 쓰임 받는 종의 의식을 가지는 일대의 대전환이 왔다.
종은 주인의 손발로서 주인에게 매여서 주인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주인에게 위임을 받은 일을 해야 하는 권리와 의무, 책임과 사명이 있다. 그러므로 종은 이 땅에서 주님을 대신하여 주님께서 보내주는, 만나게 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주님께 위탁 받은 사건과 사고를 감당하고 수행해야할 책임과 사명이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고귀하고 위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종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세상눈으로 볼 때 크고 위대하지 않으며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고 하찮은 일이다.
종으로서 날마다 주인의 작업의 지시를 받았는데 그것이 매일 같았다. ‘순간순간 만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사랑하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만나는 달릿(인도 카스트제도에서 최하층 천민)들을 세상에서 최고 존귀한 자, 하나님의 자녀로 존중하며 예우하며 축복하며 친구처럼 지냈다.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보다 더 행복하길, 더 잘 되길, 은혜가 충만하길 빌어 주었다. 그렇게 기도하며 달릿을 위하여 내 몸을 팔아서 먹이고 싶고 입히고 싶고 부자가 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떠돌이 순회 전도자로 일하며 달릿들과 함께 허물어진 교회 빈터와 나무그늘에서 예배드리며 기도하고 먹고 마시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고 나의 주된 사역이었다.
그러나 종의 마음으로 시골마을들을 돌아다니며 기도하며 우는 일을 하면서도 마음 한 편에서는 위대한 일, 큰일, 많은 일에 대한 열망과 욕구가 있었다. 인도사회를 대대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위한 영적으로 성숙한 미래 지도자를 키우고 싶은 욕망이었다. 영적이고 창의적인 교육 및 훈련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작은 모세와 아브라함 같은 지도자를 배출하고 싶었다. 인도사회에서 카스트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영광 받게 되는 일에 크게 쓰임받기를 열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다른 곳에 있었다.
어느 날 예수 목사로부터 그의 교구에서 ‘두 명의 남자가 에이즈로 죽었고 그들의 부인들과 이웃 사람 몇 명이 에이즈로 합병을 앓고 있다’ 고 하는 말을 들었다. 도시 사람도 아닌 시골 사람들이 에이즈로 죽었다는 사실과 그들의 아내들과 이웃 사람들 또한 에이즈에 걸렸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므로 호기심과 궁금증이 발동하여 유가족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예수 목사를 따라서 에이즈 환자가 있는 마을을 방문하였다. 그가 마을 안에 있는 크리스천 세대 몇 집을 방문하고 나서 '다 돌아보았다'고 하였다. 당시 나는 사람들이 에이즈환자가 되면 나환자처럼 외모가 흉측하게 변하는 것으로 상상하였기 때문에 방문한 가정에서 그런 흉측한 환자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예수 목사가 일부러 에이즈 환자 가정을 피했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집에 가줄 것을 다시 부탁하였다. 그는 나의 부탁에 “무슨 소리야! 이미 다 돌아보았는데 왜 다시 가냐”고 반문하였다.
그 후 그로부터 HIV의 감염과 에이즈의 환자가 당하는 고통과 치욕에 대하여 들었다.
일단 에이즈 환자라는 것이 드러나면 가족과 친척들과 마을에서 차별과 냉대를 받고 직장이 있는 사람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심한 경우에는 마을에서도 쫓겨난다고 하였다.
에이즈환자 방문 이후로 여러 마을에서 에이즈 혼자들이 굶어서 죽고, 외로워서 죽고, 아파서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두 눈으로 보았다.
2005년경에 자말라마두구라는 아주 작은 읍에 있는 캠벨병원이라는 시골병원이 에이즈환자 치료병원으로 선정되고 그곳에서 에이즈 환자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부모가 죽은 후에 남겨진 아이들이 병원 안에서 뒹굴며 그 곳에서 밥을 얻어먹고 지내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외롭고 슬픈 아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가 들다.
아이들을 위한 집을 짓고 20개의 침대를 들여 놓았다. 그리하여 23명의 아이들을 섬기며 돌보는 “샨띠홈”이 시작되었다. 직원 3명을 임명하여 그들을 돌보게 하였고 나는 순회하며 오다가다 들러서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그 당시 나의 최고 관심사는 그들, 부모로부터 수직 감염된 에이즈 아동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과 고독과 고뇌를 가슴으로 느꼈다. 무엇보다 나는 그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사회가 그들에게 주는 멸시와 천대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며 격려하며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예우하며 존귀하게 여기며 따스한 의식주를 제공하며 신앙으로 양육하고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다.
샨띠홈을 세우고 6년째가 되었을 때 나는 비자법 위반으로 인도에서 나와야 하였다. 그 때 가장 마음에 걸린 것은 샨띠홈 우리 아이들이었다. 인도 밖에서 지내는 8년 동안 아이들에게 간다는 인사 한 마디도 못하고 나온 것이 가장 마음 아프고 힘들었다. 그 다음에는 사춘기가 되어 절망과 우울증에 빠지는 아이들의 문제를 가지고 누가 씨름하며 누가 그들을 이해하며 격려할 수 있을 것인가가 나의기도 제목이 되었다. 물론 운영비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큰 관건이었다.
어디에 있으나 나의 마음은 인도로 달려갔고 많은 인도의 형제자매 중에서 아이들을 가장 그리웠고 그러기에 못 다한 사랑으로 절기마다 용돈과 선물을 보내며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아이들에게 문안해주길 당부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전문학교나 대학교에 가면 장학금을 주기로 한 약속대로 장학금을 보냈고 심지어는 직업훈련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도 장학금을 주었다. 그러면서 샨띠홈을 생활공동체로 만들려는 구상을 가지고 대구 동원교회의 지원으로 남아들의 숙소를 신축하고 여아들의 숙소를 리모델링하였다.
그러나 에이즈 아동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닥터 헬렌이 은퇴하고, 새 원장이 부임하면서 코로나팬데믹의 광풍이 불어 닥치자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러나 나는 연락 단절로 그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아이들이 떠남을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아이들이 돌아왔느냐?', '몇 명이 돌아왔느냐'를 묻기 만하고 돌아가면 샨띠홈을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생활공동체를 만들려는 꿈을 꾸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작년 시월, 인도비자를 받고 드디어 샨띠홈에 갔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나를 보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모인 아이들을 만나며 ‘샨띠홈’이 용도 변경이 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부분적으로 확인하며 비참과 절망에 빠졌다. 그렇지만 슬프고 아프고 상한 마음을 하나도 내색하지 않고 팔 년 만에 만난 아이들을 마음껏 축복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우려하였던 현실이 눈앞에 나타난 것으로 속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땅주인인 병원과 건물 용도로 싸울 능력도, 시간도 없고 에너지도 부족하고 그 사이에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서 도움받을 사람도 없으므로 ‘샨띠홈’을 붙잡을 재간이 없었다. 인도 밖에서 보낸 8년 동안 샨띠홈을 생활공동체로 멋지게 개혁하여 아이들을 소외와 천대로 일관하는 세상을 향하여 당당하고 멋지게 보란 듯이 살게 하려는 나의 꿈, 구상이 허무하게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 제가 얼마나 이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아시잖아요!’
‘이렇게 만들려면 왜 시작하게 하셨어요!’
‘이 아이들의 고통과 고독이 얼마나 큰지 저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에이즈 환자들의 고통과 불안을 잘 아는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을 도둑맞은 아이들을 마구 쫒아낼 수가 있어요!’
‘이렇게 흩어져 버렸으니 이제 보려고 해도 보지 못하고 나누고 섬기려 해도 할 수가 없어요.
앞으로 어떻게 아이들과 연락을 계속할 수 있나요?‘
‘아이들이 고난을 이기며 함께 살 수 있도록 어떻게 위로하며 격려할 수가 있나요?’
‘이번 만남으로 아이들과 영영 헤어져야 하나요? 앞으로 전혀 볼 수 없나요?’
하나님은 나에게 사랑하려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 고 하였다. 아무리 사랑하여도 안을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고 하였다. 함께 지내는 것도 사랑이고 버리는 것도 사랑이라고 하였다. 사랑은 굳이 크고 위대한 일일 필요가 없으며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고 하였다. 또 사랑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므로 주어질 때 사랑한 것으로 만족하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샨띠홈을 되찾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거나 혈기를 내며 다투지 마라 고 하였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순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은 알 수가 없으나 나중에 알게 되는 꼭 그럴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이들을 고통의 거리로 내몰고 십사 년 동안의 일구어 온 우리의 사랑과 노력을 우리와 아무 상의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뒤엎어버린 사람에 대한 분노와 정죄하는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였다.
그 때 영어를 할 줄 아는 수바와 벤이 내 번호를 요구하며 자기들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는 텔레그램으로 연결되어 거의 날마다 소식을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샨띠홈에서 함께 생활하였던 아이들의 거주지와 연락처, 생일을 파악하는 거였다. 그리고 내가 부재하였던 기간에 찍은 아이들의 사진들을 받았다. 그리고 내 사진도 보내주었다.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생일 선물’을 보내기로 하였다.
네팔에 있을 때 수바에게 한 약속대로 가장 먼저 그에게 생일 선물을 보냈다. 구입비 10만원, EMS 택배비 15만 원으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그런데 며칠 후 연락이 왔다. 우체국에서 소포를 받으려면 텍스비 2만5천원을 가지고 오라는 연락이 왔는데 2만 5천원이 없어서 선물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주변 사람들에게 빌려서 물건을 찾으라고 하였다.
선물을 받고 흥분한 수바가 박스 속의 물건들을 사진 찍어 보냈는데 아뿔싸! 몇 가지가 안보였다. 그러나 그의 기쁨을 깨고 싶지 않아서 ‘축하한다’는 말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반복하였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그 다음 순번의 나레쉬와 크리슈나에게 생일 선물을 보내려는데 너무 고민이 되었다. 결국 선물을 보내지 않고 그곳에서 살 수 있도록 현금을 보내기로 하였다. 두 사람의 생일축하를 한꺼번에 할 수 있도록 파티비용도 보냈다. 현금을 생일 선물로 받고 기뻐하는 나레쉬의 동영상과 사진이 왔다.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 동안 한번도 생일잔치를 못해주었는데 아이들이 함께 모여서 생일잔치를 할 것이라고 하니 다소 위안이 되었다.
며칠 전에 벵과 툴라가 3월에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이 왔다. 둘이 다 에이즈 환자지만 서로 사랑하여 결혼한다니 불구인 내 아들과 딸이 결혼을 하게 된 것처럼 마음이 기뻤다. 지금 나는 이 아이들의 결혼을 어떻게 축하해주어야 할지 기도하며 연구 중이다.
내가 한국에 거주하면서 샨띠홈에서 쫓겨난 아이들과 텔레그램으로 서로 자유롭게 소식을 전하며 사랑을 주고받게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
그렇다!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 나누고 섬기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그들이 완벽하게 살 수 있도록 크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통하면 사랑의 길은 열리고 뚫린다.
우리네 인생살이 사랑하여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사랑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는 일이다.
사랑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두 가지라도 상대방에게 마음을 쏟아 붓는 일이다.
사랑은 내가 하고 싶은 크고 위대한 일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격려하며 마음과 시간을 나누는 일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하라고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들에게 크고 위대한 일을 다 하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크고 위대한 일을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주님은 분주한 마르다에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다.
생산과 생활을 함께 하는 에이즈 환자들의 자립공동체를 만들어 세상의 울림이 되는 메시지를 만들고자 하였던 나의 사랑, 희망, 꿈을 하나님께서 깨주셨다. 주님께서 아이들과 동행하며 그들과 함께 하실 일이 있으신 것이다.
그렇다! 사랑은 큰 일,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2023.1.30.월 새벽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