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어떻게 다듬을까 김춘수는 1950년대 말 전통적인 <의미(意味)의 시>를 포기하고 1990년대 중반까지 병치은유의 기법으로 <무의미(無意味)의 시>를 실험합니다. 그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던 의미의 시를 포기하고 30여 년 간 이와 같은 실험을 한 것은 다른 시인들처럼 대상을 노래하거나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언어로서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는 것은 그의 이와 같은 실험정신 때문입니다. 1. 구조 다듬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고(草稿)가 완성되면 한두 번 읽으면서 어색한 곳을 고치고는 더 이상 쳐다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 너무 긴장하고 지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작에선 완성이란 없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다 시인이 아니라, 맘에 들 때까지 고치고, 작품집이나 전집(全集)으로 낼 때도 고치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기 인생을 가다듬듯 끝없이 고치고 가다듬는 사람만이 시인이고, 그렇게 가다듬는 과정이 곧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작품을 다듬을 때 제일 먼저 가다듬어야 할 구조적 층위에서 고쳐야 할 대상과 고치는 방법을 알아보고, 문학사에서 길이 살아남기 위해 개성을 찾는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1. 전 조직을 유기화(有機化) 하기 ☺ 시는 문자 의 행렬이 아니라 그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시에서 완성이란 … 작품을 다듬을 때 먼저 검토하여야 할 것은 창작 의도대로 쓰여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초고를 완성하자마자 곧바로 검토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글을 쓰는 동안의 흥분과 상상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잘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빨리 완성하고 싶은 생각으로 인하여 대충 다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루나 이틀 뒤쯤에 다듬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흥분이 가라앉은 다음 다시 보면 의도대로 쓰여진 작품은 거의 드뭅니다. 초고를 마칠 때는 '야! 하나 건졌다'라는 생각이 들던 작품도 불필요하게 주제를 노출시켰거나 모호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문장조차 엉망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는가 따져보면서, 꼼꼼히 문장을 다듬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글을 발표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후회하고, 오자와 탈자 그리고 문장이 뒤틀린 작품을 그대로 발표하는 것은 마치 속옷을 드러내놓으면서 거리를 활보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로서의 완성도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완성도'라는 말이 너무 막연하게 들린다면, 그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짜여졌는가를 검토하시면 됩니다. 어느 한 부분이 뛰어나도 횡설수설하는 부분이 있으면 아직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유기성을 따지려면, 먼저 그 작품의 주제와 화자의 관계를 검토해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화제에 어울리는 화자를 내세웠으면 유기적이고, 어울리지 않는 화자를 내세웠으면 가다듬어야 합니다.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은 작중 인물에 맞춰 조직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시인들은 작중 화자를 자신으로 생각하고 어울리지 않는 화자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김소월과 한용운의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 밖에는 눈, 눈이 와라, 고요히 창 아래로 달빛이 들어라. 어스름 타고서 오신 그 여자는 내 꿈의 품 속에 들어와 안겨라. 나의 벼게는 눈물로 함빡히 젖었어라. 그만 그 여자 가고 말았느냐. 다만 고요한 새벽, 별 그림자 하나가 창 틈을 엿보아라. - 김소월(金素月), 「꿈꾼 그 옛날」 전문 ⓑ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음으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에게는 인격(人格)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生命)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罪惡)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율은 칼과 황금(黃金)을 제사(祭祀)지내는 연기(煙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의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서릴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韓龍雲), 「당신을 보았습니다」 전문 이 두 사람은 우리가 모두 민족 시인으로 상찬(賞讚)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소월의 작품이 어색한 것은 그리움이라는 여성적 화제에 남성화자를 내세우고, 또 행동은 여성적이고 어조는 남성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일부 비평가들이 '못난이'리고 평가하는 것도 꿈 속에서 님이 왔다가 떠났다고 '벼게'를 안고 우는 화자를 등장시키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여성화자로 바꿔야 합니다. 만해의 작품에서 그리움에 여성화자를 내세운 것까지는 적절합니다. 그러나, 그리워서 님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생각한다는 식의 3단 논법을 구사하고,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할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라는 남성 가운데도 가장 남성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어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들은 빼야 합니다. 둘째로, 화제와 화자에 어울리는 배경과 상황을 설정했는가 검토해봐야 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논리적이고 지적인 화제에 남성 화자를 택했으면 빛의 시간으로, 감성적인 화제에 여성 화자를 택했으면 어둠의 시간으로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모든 상항에 이런 규칙을 적용할 수 없는 일이지요. 남자도 감성적일 때가 있고, 여자도 대범할 때가 있고, 대낮에도 성적 욕망을 느낄 때가 있으니까요. 이와 같이 어긋날 때는 화제나 화자를 바꾸면 창작 의도가 바뀌기 때문에 배경을 조절해야 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필자의 '칸나꽃 뒤로 보이는 풍경을 위하여'에서 대낮이긴 하되 폭풍우가 몰아쳐 밤처럼 캄캄한 대낮으로 설정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미쳐 날뛰는 바다로 화자의 남성성과 심리적 상태를 은유하고, 대낮의 어둠으로 그런 욕망이 어느 정도 타당하면서도 불안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배경으로 조정할 때는 거듭 말하지만 <특정한 공간의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모습>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테마에 관계없는 것들을 모두 삭제하고 나머지 것들은 섬세하게 묘사해야 합니다. 셋째로, 화자의 어조가 화자 자신과 화제와 청자에 어울리는가를 검토해봐야 합니다. 이때, 먼저 따질 것은 화자의 성과 연령입니다. 작품 속의 인물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므로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특히 작중 상황이나 인물의 심리를 설명할 장치가 없는 서정에서는 더욱 그답게 표현해야 합니다. 또 상황에 걸맞는 어조와 어법인가도 검토해봐야 합니다. 가령 자기집 뒤뜰에 불이 났다고 합시다. '아버님, 지금 뒤꼍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으니, 제 생각에는 어서 피하시는 것이 좋을 듯 사료됩니다'라고 말하면, 아마 아버지는 '아이고, 이 답답아!' 하실 겁니다. 다급할 때는 짧으면서도 어순이 뒤틀린 문장으로, 평상시에는 정상적인 문장으로, 혼란스러울 때는 비문(非文)이나 헛소리를 구사해도 무방합니다. 이 점에서 제가 죽어도 못 따라 잡을 작품이 있어, 소개해드리니 참고하세요. ⓐ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 아름다운 베암… ⓒ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 꽃다님 같다. ⓔ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 소리 잃은 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 푸른 하눌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무러뜯어, ⓗ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 석유(石油) 먹은 듯…석유(石油)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 바늘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베암. ⓝ 우리 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여라! 베암. - 서정주(徐廷柱), 「화사(花蛇)」 전문 아마 다른 사람들 같으면 각 행과 연을 <기준(N)⨦1>의 범주 안에 들도록 나눴을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화자의 정서 상태에 따라 각 행의 길이와 연을 불규칙하게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음보에서 8음보 사이를 넘나들고, 어떤 곳은 한 행으로, 어떤 곳은 세 행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설정한 것은 행과 연이 어조의 발생 장치로서, 화자의 정서 상태가 격정에 빠졌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따라잡기 힘든 것은 ⓘ이후부터 비문을 구사한 점입니다. 그 이전의 문장도 매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저 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다음에 무엇 때문이라는 이유가 와야 할 텐데, 엉뚱하게 ‘석유(石油) 먹은 듯…석유(石油)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또 ‘바늘'로 꼬여 두를 수 없는 뱀의 빛깔을 꼬여 두루려 하고, 뱀에게 액체(液體)처럼 입술에 스며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 먹은'은 입술은 징그럽고, ‘고양이’는 야웅하고 할퀼 것 같은 데 키스하고 싶어 합니다. 소심한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비문은 남겨둘 수 없어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비문을 구사한 게 뭐 그리 대단하냐구요? 원형 상징을 이야기할 때, ‘뱀’의 의미가 뭐라고 했지요? 그런 상황에서 정제된 문장과 문법을 따지는 것은 자기 집이 다 타고 있는데도 존댓말을 찾으려고 끙끙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실제로 글을 쓸 때는 그렇게 못 쓰기 때문에 대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화자의 욕망에 따른 구성인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 중요한 이야기는 먼저 하고, 그렇지 않은 이야기는 뒤로 미룹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이야기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그 욕망이나 중요한 이야기가 바로 그 작품의 테마입니다. 하지만 테마보다 먼저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작품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과 상황입니다. 독자들은 배경과 상황을 통해 그 작품의 내용을 상상하며 읽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 구성을 가다듬을 때 검토할 사항을 소개할 테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① 완결성을 강조하기 위한 구성 : <A-A-B-A> ② 극적인 역전을 강화하기 위한 구성 : <A-A-B-B-A> ③ 반복을 나타내다가 결말에 이른 것을 나타내기 위힌 구성 : <A-B-A-B-A> ④ 끊임없는 반복을 나타내기 위한 구성 : <A-B-A-B-A-B> ⑤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담기 위한 구성 : <A-(a-a-b-a)-A>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를 다듬을 때 처음에 떠오른 시상(詩想)대로 다듬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상이 떠오르던 그 순간은 감정적으로 격했던 순간이므로, 쓰여진 작품을 중심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 우리가 할 일 】 ○ 화자 중심으로 유기화의 절차를 시작노트에 정리하시오. ○ 이와 같은 기준으로 자기 작품을 다듬어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