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쓰노미야 일기
1901년 일본군 소좌(少佐)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가 주영(駐英) 일본대사관
무관(武官)으로 부임했다. 그는 육군 유년생도로 군대와 인연을 맺은 뒤 육사를
나와 육군대학을 거친 일본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보병으로 출발해 정보장교로
변신, 참모본부에서 일했다. 우쓰노미야는 당시 세계의 중심인 런던에서 5년 근무
하며 라이벌 러시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 혁명가들을 지원하는 공작을 벌였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해진 1905년 봄 도쿄로 돌아올 때 우쓰노미야의
계급은 대좌(大佐)였다. 빠른 승진은 런던에서의 활약을 말해준다. 참모본부로
돌아와 해외정보 담당 부장이 된 그는 이번엔 중국을 와해시키려는 공작에 몰두,
모략(謀略) 전술의 달인(達人)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자신의 중국 정책을 담은
‘대(對)지나(支那) 사견(私見)’을 주위에 돌리는가 하면 재벌 미쓰비시에서 10만
엔을 받아 손문 등 중국 혁명파에 건넸다.
소장·중장으로 승승장구한 우쓰노미야는 일선 사단장을 거친 뒤 1918년 조선군
사령관이 됐다. 야전군 출신의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무단(武斷)통치를 폈던 데 비해 모략 전술에 일가를 이뤘던 우쓰노미야는 조선인
회유 전술을 폈다. 그는 민족운동가와 종교인 등 조선 지도층과 자주 어울리며
정보를 얻고 친목을 다졌다.
우쓰노미야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15년 동안의 일기와 편지·서류가 85년 만에
공개됐다. 그가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적은 일기는 20세기 초 동아시아
역사를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다. 제암리 학살사건 은폐 과정, 상해임시정부
분열 공작 등 일제의 내밀한 움직임도 드러낸다.
1919년 4월 15일 발생한 제암리 사건에 대해 그의 일기는 일본군이 약 30명을
교회에 가둬 놓고 아기까지 죽이고 방화했지만 일본군이 거짓 발표를 통해 이를
부인했음을 증명한다.
우쓰노미야는 그해 4월 18일자 일기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하고 처분을 하면 가장 간단하겠지만 학살·방화를 자인하는
것이 돼 제국의 입장에 심대한 불이익이 되기 때문에, 간부들과 협의한 끝에
'저항을 했기 때문에'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밤 12시 회의를 끝냈다"고 적었다.
그의 아들이 1970~80년대 평화·군축 운동으로 유명했던 우쓰노미야 도쿠마
(宇都宮德馬) 의원이다.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중국과 북한에 우호적이었던
그는 “조선 민중에게 고통을 줬던 아버지를 보상하려는 잠재의식이 내게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우쓰노미야 부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은 것처럼 보이지만
한반도 경영 전략에 관심을 가졌던 점에서는 부전자전(父傳子傳)이다.
우쓰노미야 부자를 통해 아시아와 일본이라는 나라의 역사적 명암을 함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