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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姜太公)
01. 생애
강태공(姜太公)은 기원전 1211년(은나라 경정(庚丁) 8년)에 출생하여 기원전 1072년(주강왕 6년)에 까지 나이가 139세에 달했다. 또 다른 중국 기록에서 기원전 1140년 9월 12일(음력 8월 3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 중국의 은(殷,상商)나라를 멸망시킨 인물로 염제신농(炎帝神農)의 후손이며, 동해(東海)가 고향으로 현재의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의 해안 지역 일대다. 성(姓)은 강(姜), 씨(氏)는 여(呂), 이름과 별명은 강상(姜尙), 강자아(姜子牙), 여상(呂尙), 여아(呂牙)이며, 태공망(太公望), 사상보(師尙父), 모성(謨聖), 백가종사(百家宗師)로 불렸으며, 도가(道家)에서는 비웅(飛熊)이라 한다. 때문에 주 문왕이 꿈에 곰(熊)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이에 근거한다.
동해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데릴사위로 갔는데 일을 안 하고 빈둥거린다고 쫓겨나 서방을 유랑하면서 세상의 견문을 넓히고 도살업, 여관업, 술집, 점쟁이 등을 하면서 천하정세를 관찰하였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주 문왕(서백)이 낚시하는 강태공을 만났을 때 「선군(先君)이신 태공(太公)께서 예전에 ‘장차 성인(聖人)이 와서 우리 주나라를 크게 일어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혹시 당신이 바로 태공께서 말씀하신 성인이 아닙니까? 우리는 태공 이래 참으로 오랫동안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태공이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뜻에서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강태공은 기원전 1072년에 신선계에 들었으며, 그때 나이가 139세였다. 의관(衣冠)을 서주(西周) 호경(鎬京)에다 안장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강태공의 덕을 생각하여 제나라에다 강태공 의관총(衣冠塚)을 세웠다. 강태공은 주역(周易)의 확립자[출처 필요]이며, 강태공이 저술한 육도삼략(六韜三略)[출처 필요]이 현재에도 전해져 오고 있다. *육도·삼략(六韜·三略)은 중국 고대 병서의 최고봉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둘을 차지한다. 후대인 손무(孫武)의 손자병법(孫子兵法)도 강태공의 육도삼략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후일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는 강태공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칭하여 천하통일을 이룬 군주로 인정하였다.
육도·삼략(六韜·三略)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주나라 강태공이 썼다고 전해지는 고대의 병법서이다. 《육도(六韜)》의 ‘도’는 원래 활집이나 칼전대를 말한다. 여기서 깊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 파생되었다. ‘도’는 바로 병법의 비결을 뜻한다. 육도의 명칭은 전체의 내용을 6개의 도로 나눈 데서 나왔다.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표도(豹韜)〉 〈견도(犬韜)〉가 그것이다. 6권 6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글자는 1만 6,800여 자다. 《삼략》의 4배 분량에 해당한다. 여타 병서와 비교할 때 매우 많은 편에 속한다. 시간적으로 볼 때 지금으로부터 3,000년도 넘는 까닭에 역대 병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병서에 해당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 서적들은 후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더러는 강태공이 육도(六韜)를 저술하고, 그것을 황석공(黄石公, 진나라 말기에 살았던 인물)이 다시 개량하여 쓴 저서가 삼략(三略)이라고도 한다. |
여담으로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주 문왕을 만났을 때 이미 70대의 노인이었으나, 주나라가 성립되고도 한참을 더 살았다. 이 강태공의 장수에 대하여 나온 말이 궁팔십달팔십(窮八十達八十)이다. 태어나서 여든 살이 되도록 궁하게 살았으나, 나이 팔십에 서백 창을 만나 등용되면서 주나라를 세우고 영화롭게 8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160년을 살았을 리는 없겠지만, 이후 반평생을 어렵게 살다가 나머지 반평생을 성공한 인생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우리나라로 비교하자면 106세에 한나라를 물리친 명림답부(明臨答夫,고구려 최초의 國相)급의 인물이지만 물론 고대 인물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다. 그 당시 수명을 생각하면 전설적인 이야기다.
02. 역성혁명 주도자
강태공은 문왕(서백 창)이 은나라의 주 왕에 의해 유배되자 미녀를 바치라는 조언을 하여 유배에서 풀려나게 하는 등의 활약을 한다. 이후 문왕과 아들 무왕을 보좌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달성했다. 이때 혁명(革命)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 강태공이다. 그 공으로 주(周)의 재상이었고, 제(齊, 산동 반도)의 공(公)으로 봉해졌다.
기원전 1046년 2월 겨울, 은나라 주(紂)왕의 흉폭한 정치가 계속되어 천하가 비탄에 젖어 있을 시 홀연히 나타나 주 문무왕의 스승이 되어 4만 5천의 군사로 72만의 은군을 대파하는 기적적인 전쟁을 일구어낸 동이지사(東夷之士)이며 기인(奇人)이다. 이 전쟁을 목야전쟁(牧野戰爭)이라 하며, 목야전쟁이 주는 의의는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섬멸한 기적의 전쟁이요,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정의(正義)는 반드시 필승(必勝)한다는 정법을 확립시킨 정의필승의 전쟁이며, 대륙을 통일한 천하통일전쟁이라 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은나라는 하늘의 신을 믿었지만 강태공은 이를 인간의 힘으로 바꾼 것이다. 당시 강태공의 여러 역할 중 제사장(祭司長)의 역할도 있어서 동요하는 군사들을 결집하는데 기여하였다. 이후 중국은 하늘의 신을 거부하고, 차라리 조상신을 모시게 된 것이다.
03. 제(齊)나라의 시조
주(周)나라 문왕,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이며, 전국칠웅인 제(齊)나라의 왕이 되었다. 또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춘추전국 시기의 제(齊)나라의 건국자요, 딸은 주 무왕의 왕후이다.
지위를 큰아들 강급(姜及)에게 물려주었고, 강급은 제 정공(齊 丁公)이라고 불렸다. 이후 제(齊)나라를 일으켜 제1대 초대 국왕으로 제나라는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다. 강태공을 이어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16대 임금인 제 환공(桓公) 강소백(姜小白) 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왕(覇王)이 되어 중국 천하를 호령하며 강태공의 얼을 이었다. 그때 활약한 사람이 바로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인 관중(管仲,관자)이다.
단, 전국시대의 제나라는 나라의 주인이 전(田)씨로 바뀌었기 때문에 태공망의 후손은 아니다. 이것은 강태공의 기조가 자기의 자식이 아니라 국가는 능력 있는 자가 경영해야한다는 사상이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제나라는 그런 나라였던 것이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유가, 법가, 도가, 병가 등 다수 학파들이 강태공을 선조로 모시는 관계로 백가종사(百家宗師)라 불린다.
04. 낚시의 시조
자기를 스카웃 할 인물을 만나기 위해 그는 위수(渭水)가 반계(磻溪)에서 낚시를 했다. 반계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고 해서 이를 반계수조(磻溪垂釣)라 한다. 왕이 지나갈만한 곳에서 때를 기다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데서나 때를 기다린다면 바보가 아니겠는가. 이때 휘어있지 않은 낚싯바늘로 낚시를 하고 있었다고 하여 강태공이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낚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지만, 실제로는 곧은 낚싯바늘도 낚시용 도구로 사용했었다. 또는 낚시를 하긴 하였는데, 그 낚시대가 수면에서 세치는 높은 곳에 있었다고 해서 나온 이야기가 '태공조어 이수삼촌(太公釣魚 離水三寸)'이다.
백수로 지내며 낚시를 하던 중 그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서백(西伯) 창(昌), 즉 훗날의 주나라 문왕의 눈에 띄어 중용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오늘 큰 것을 낚았소' 이야기가 나왔다.
05. 자손 성씨 번창
강태공의 자손 성씨가 상당히 많은데 강(姜), 고(高), 노(盧), 여(呂), 구(丘,邱), 정(丁), 최(崔), 시(柴), 허(許), 사(謝), 하(賀), 경(慶), 장(章), 제(齊), 신(申), 악(岳), 기(紀), 상(尙), 두(钭), 강(强)씨 등 총 102개의 수많은 성씨가 강태공의 자손으로부터 갈라져나갔다. 강태공 사당에는 해마다(매년 9월 12일 중국 산동성/제나라 문화축제) 강태공의 후손과 강씨에서 분파된 성씨가 대거 참례를 온다.
현재 강태공의 후손은 분성 성씨 외에 한국의 진주 강씨와 중국의 천수 강씨가 있다. 한국의 강태공(姜太公)의 후손 8개 성씨로는 진주강씨(姜氏), 노씨(盧氏/교하노씨 등), 구씨(丘氏/평해구씨), 여씨(呂氏/함양여씨 및 성산여씨), 최씨(崔氏/충주최씨), 정씨(丁氏/압해정씨 및 나주정씨), 시씨(柴氏/태인시씨), 장씨(章氏/거창장씨)가 있다.
[출처] 강태공(姜太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