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실고개 너머로
주말부터 닥친 추위가 물러날 기미가 없는 십이월 셋째 화요일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펼쳐 볼 날은 이보다 더 추워질 어느 날에 들리기로 아껴놓았다. 아침 기온이 영하권이라도 이 정도 추위는 산책을 나서기에 무리가 되지 않은 날씨였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창원중앙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평소라면 집에서부터 역까지 가볍게 걸었는데 추운 날씨를 고려 버스를 이용했다.
창원중앙역에서 한림정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승차권을 끊었다. 새벽에 순천을 출발 진주를 거쳐 삼랑진에서 부산 부전으로 가는 무궁화호였다. 플랫폼으로 오르니 진주 쪽에서 오는 승객은 다수였으나 부전으로 가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아마 창원중앙역에 내린 승객들은 관공서나 회사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인 듯했다. 나는 학생 신분으로 열차를 타고 자연학교로 등교하는 길이다.
함께 내린 승객이 몇 되지 않은 한림정역을 빠져나가 북쪽으로 뻗친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걸었다. 농로를 겸해 철로와 나란하게 곧게 뻗은 길에 가끔 자동차가 질주해 보도가 확보되지 않아 차가 지날 때는 멈춰 서주었다. 부평마을 갈림길에서 오서로 가는 들길로 드니 화포천 습지가 나왔다. 환경부 낙동강유역청에서는 화포천 수질 개선을 위한 토목 공사를 몇 년째 진행 중이었다.
오서교를 지난 외오서 동구에 마을 지명 유래가 적힌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오서는 마을 복판에 야트막한 동산을 두고 외오서와 내오서로 나뉘었다. 지형이 까마귀가 알을 품는 둥지에 네 마리 용이 엉킨듯해 효자와 충신을 배출할 명당이라 까마귀 오(烏), 살 서(棲)로 불렀다. 조선 후기 지역 출신으로 의금부 도사였던 김병헌이 까마귀는 흉조라고 나 오(吾)에 서녘 서(西)로 바꿨다.
오서에서 금곡리 본동으로 향했다. 금곡은 일제 강점기 수탈로 마을 뒷산에 철광석을 캔 동굴이 있다고 했다. 쇠 금(金)에 골짜기 곡(谷)으로 불린 금곡은 우리말인 쇠실로 더 알려졌다.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본관을 쓰는 광주 노 씨 집성촌으로 이웃한 정촌과 모정에도 노 씨들이 다수 살았다. 멀지 않은 진영 봉하마을 태생 노 대통령은 쇠실에 뿌리는 둔 노 씨들과는 집안이 달랐다.
쇠실마을 안길을 지나는 길섶에서 지난봄 전호나물을 캐 왔던 자리를 살펴보고 쇠실고개로 향했다. 두해살이 전호나물은 올여름 떨어진 씨앗은 가을에 싹이 터 새순이 돋아 자랐다. 생태계는 늘 변하는지라 내년에는 올해보다 개체 수가 적어 지천으로 무성하지는 않을 듯했다. 들녘 길섶이나 수로에서 겨울을 난 전호나물은 해가 바뀐 봄이면 나의 나물 채집 배낭을 채워주지 싶었다.
금곡 본동에서 4대강 사업 때 무척산을 돌아 김해 상동으로 가는 자전거 길이 난 쇠실고개로 올랐다. 고갯마루 쉼터에서 삶은 고구마를 꺼내 먹고 작약산 허리로 뚫린 임도를 걸었다. 아까 지나온 쇠실이 가까웠고 멀리 진영읍과 낙동강 술뫼생태공원이 바라보였다. 임도에서 되돌아 나와 고갯길을 내려서니 봉림공단이 나왔다. 자동차 공장으로 보낼 단조 부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차량이 드물게 다니는 도로변에 낡은 슈퍼가 보여 문을 밀고 들어서니 70년대 점방 수준 구멍가게였다. 함석으로 된 연돌로 가스가 배출되는 연탄난로 온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인근 공장에 기숙하는 외국인 노동자 취향에 맞춘 식료품이 진열되어 있고 라면을 끓여준다는 안내가 보여 반가웠다. 연탄난로에 언 손을 녹이는 사이 아주머니가 라면을 끓여내 와 한 끼 점심을 때웠다.
점방에서 나와 강마을 도요에서 김해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수로왕릉 근처에서 창원 버스로 환승을 했다. “아궁이 탄을 갈며 보일러 데운 물로 / 온돌방 대신하던 동절기 난방장치 / 이제는 이발관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 한겨울 길을 나선 한갓진 도로변에 / 외국인 상대하고 라면도 파는 점방 / 연탄불 피운 난로에 꽁꽁 언 손 녹였다” 집으로 오다 남긴 ‘연탄난로’ 전문이다. 23.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