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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성 전투와 여포의 최후
진나라에 이어
두번째로 중국에 통일제국을 세웠던 한나라,
한나라는 서기 8년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고 신나라를 세움으로써
한때 위기를 맞이 하였다.
그러나 왕망 정권은
농림들의 대규모 반란과, 유인, 유수 형제의 봉기로
15년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후 유수가 후한을 세워,
한나라는 100여 년 동안 더 존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는
근복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황제곁에 환관들은
국가의 1년 재정보다도 많은 재정을 유용하였으며, 각 지방의 호족들은
농민을 착취하여 그 감소분을 채웠다.
그리고
호족들에게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유리걸식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대규모 농민군을 조직하였으니,
이들이 황건족이었다.
그리고
이 황건족의 난을 평정한다는 명목으로,
각기에서 세력을 쌓은 귀족들이 일어나서 시대는
바야흐로 영웅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황건족의 난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동탁이었고, 조조나 원술등도
명성을 쌓고 있었다.
그런데 동탁은
어느날 지난날의 친구인 정원의 집을 방문하여,
자신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9척 장신으로
불릴만큼 우람한 체격에, 창과 칼, 활등 못쓰는
무기가 없었다.
그의 이름은 여포,
그러나 여포는 돈 이나 명성 따위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동탁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말 적토마를 선물하였다.
그리고 여포에게
정원의 목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이 계획을 짠 것은 왕윤,
왕윤은 여포가 단지 정원곁에 머물며, 말이나 돌보는데
만족 할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
여포 역시
동탁이 말을 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비록 정원은 어려서 부터
자신을 길러준 인물이었으나, 보다 큰 야망을 위해,
정원을 죽이고 동탁에게로 간다.
그리하여 여포는
동탁과 부자의 서약을 맺었으며 동탁을 곁에서
호위하였다.
하지만 동탁은
성격도 독단 적일 뿐더러, 이전의 환관 보다도 더한
전횡을 일삼고 있었다.
이런 이유 떄문에 동탁은
다른 군웅세력에 쫒기는 신세가 되어, 서한의 수도였던 낙양 을 버리고
동안의 수도였던 장안으로 황제를 볼모삼아
옮겨가게 되었다.
하지만 장안으로 수도를 옮긴 동탁은
더욱더 전횡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화극을 여포에게
던지기도 하였다.
결국 왕윤은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고 폭정을 임살고 있던 동탁을
죽일 계획을 꾸미게 되었다.
동탁과 여포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기회로 여포를 동탁
주살 계획에 끌어들인다.
헌제가 미앙전으로
신하를 소집했을 때 동탁을 불려들여, 여포는 동탁을 죽이고
그의 삼족을 멸하고 말았다.
이 때가 192년(초평 3년) 4월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여포가 동탁을 죽인 또 하나의 이유로왕윤의 양녀 초선을
차지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당시 여포는 초선을 흠모하고 있었는데
동탁이 초선을 후첩으로 만들려 하자 죽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포가 동탁을 죽였을 때 초선은
자결하였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조금 앞뒤가 맞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여포를 이용하여 동탁을 없앴으면,
여포가 지략이 부족하다고 볼때, 왕윤과 초선 부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실권을 장악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초선과 여포의 이야기는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이, 소설의 흥미를 더하기 위한 허구적 장치를
덧 씌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후일 여전히 초선을 잊지 못하고 있던 여포는
서주를 차지한 후에 첩을 얻게 되는데, 그 모습이 살아생전 초선과
매우 닮아서 초선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하비성이 포위 될 때
초선이 끝없이 불안해 하며, 여포의 출정을
막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관중은
여포의 성격을 우유부단하고, 남의 말에 휘둘리는
인물로 그리고 있다.
이 같은 것 역시,
나관중이 패장 여포를 폄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시킨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동탁을 죽인 후 여포는
분무장군에 임명되고 온후(溫侯)에 봉해졌고 조정의
정사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길러준 양부에 이어,
부자의 예를 올린 동탁까지 죽인 여포에 대한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리고 동탁의 무리였던
원술에게 몸을 맡기려 하였으나
여포의 배반을 증오한 원술이 받아들이지 않자,
원소에게 가서
그와 함께 장연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원소와의 사이가
이내 틀어지고 그는 원소를 떠나 장양 합세하였다.
조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하여
서주의 도겸을 치러 본거지를 비웠을 때, 여포는 장막과
합세하여 복양을 점거하였다.
그러나
조조에게 결국 패배하여 유비에게
몸을 의탁한다.
유비가 원술을 치러 나갔을 때 여포는
기회를 잡고 하비를 급습하고 서주를 취하였다.
근거지를 빼앗기자 유비는
여포에게 귀 의하였고, 자신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받아 주었던 유비를
여포 역시 관대하게 받아 주었다. 그리고 여포는 스스로를
서주자사라고 칭하였다.
또한 조조는
이무렵 여포를 좌장군에 제수하기도 했다.
후한의 건안 3년(198), 조조는
수춘(지금의 회남시 부근)에 있는 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고
첫번째로 서주를 점령했다.
그리고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하비성을 겹겹이 포위해 버렸다.
그러나 여포는 역시 강하였다.
몇달을 공격해도 하비성은
전혀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포를 구원하러 오던
원술의 기병대를 전멸시켜도, 여포가 이끄는 군대는 전혀
사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갔고,
서서히 겨울이 다가 오고 있었다.
당시 낙양성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원소,
서쪽에는 유표와 장수, 남쪽에는 원술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조조는 하비성에 모든 전력을 투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조는
하비성의 포위를 풀고, 군사를 낙양으로
회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책사 순욱과 곽가가
기수, 사수를 이용해 수공전술을 펼칠 것을
제안했다.
조조는
그 작전을 받아들여 두 개의 강둑을
무너뜨렸다.
그로 인해
사수가 성벽까지 차올랐고 성은 점점
고립되어 갔다.
일이 이 지경에까지 미치자
여포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너무나도 수척해진데
놀라 술을 끊기로 결심하고 병사들에게도
금주령을 내렸다. .
하지만, 적토마를 타고,
방천화극을 휘두르는 여포에겐 대적할
장수가 없었다.
후방에서는
여포의 맹장 장료가 군량창고를
태우기도 하였다.
모든 전술을 써도 여포를 이길 수 없자,
조조는 최후의 방법으로 이간책을 썼다.
여포 휘하의 장수
그들에게 재물과 관직을 약속하였다.
이들 세사람은
여포의 다리와도 같았던 적토마를 훔치고,
여포의 두뇌 역할을 하였던 진궁을 체포하고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삼국지연이에는
여포의 최후를 매우 허무하고 비참하게
쓰고 있다.
그는 마지막 날 술에 취해,
조조의 기습군이 침실까지 오는데도 모르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더구나 조조에 잡혀서는 목숨을 구걸하였으나,
조조가 그를 천하의 배신자로 몰며 끝내 여포의 요청을
외면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유비도 여포의 재능을
조조가 손에 넣을 것을 우려하여 여포의 처형에
찬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포는
백문루에서 교수 당하였다.
이후 조조는
원술과 원소세력을 모두 제압하고,양자강 이남
지역을 재패하였다.
또한 손권 가문은
전통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양자강 이남, 즉 강남지역을 재패하였고,
유비는 세력을 모아 관중지역을
손에 넣었다.
이로써 후한은
삼국으로 분열하게 되었고, 여포는 무지한
배신자라는 오명을 남겼다.
그러나,
수많은 영웅들이 출현 하였던 삼국시대 사람 중에는
여포가 최고이고 말 중에는 적토마가
최고라는 말이 있었다.
여포의 비굴한 죽음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관중의 일그러진 승자 중심의 역사관이
만들어낸 스토리에 불과한 것 같다.
그는 하비성 전투에서
수십만의 조조군을 맞아, 조금도
물러섬 없이 싸웠다.
하지만 여포의 책사 진궁이
포로로 됨에 있어서는, 더 이상의 책략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무력은 뛰어났지만,
통치자로써의 교양과 지식은 부족하였다.
그러나 조조에게 잡힘에 있어, 목숨을 구걸한 따위의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포의 비극적인 최후는
어쩌면 승리 지상주의가 만들어 낸, 역사의
왜곡일지도 모르겠다.
[출처] 역사속의 인물 - 여포
[출처] 역사속의 인물 - 여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