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꽃송이들이 장식된 홀로, 아름다운 물빛 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엘뤼엔은 그녀의 모습이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 - 분명 어느 정도는 남성체라고 자각하고 있는 - 엘이 여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거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엘과 비슷한 누구인 걸까 라고 생각하며, 마족들을 벌벌 떨게 한다던 엘뤼엔은 뒤를 밟기 시작했다. 엘뤼엔의 성격 상 다짜고짜 들이대서 넌 누구냐- 하고 소릴 지르지 않은 것 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어라, 결혼식이었나.'
뒤따라오던 엘뤼엔이 발견한 건 결혼식장. 분명 아들이 살던 곳에 이 곳과 비슷한 결혼식장이 있었지. 주례인가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만든다는 늙은 대머리 마법사도 있고. - 엘뤼엔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 그리고 분명 바로 뒤에 따라오고 있었는데, 어째선지 맨 앞에, 여자와 함께 서있는 어쩐지 불길한 느낌의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보였다. 아니지, 설마 그 놈일리가 없어. 중얼거리던 엘뤼엔이 고개를 든 건 마법사 - 사실은 평범한 노인에 불과하다 - 의 질문 때문이었다.
"흠흠, 일단 아름다운 자네들의 결혼의 주례를 맡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신랑 라피스 라즐리 군은 신부 엘 양과 왜 결혼하고 싶은 겁니까?"
진짜였냐- 하고 발끈하던 엘뤼엔의 귀로, 평소와 다른 그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피스는 어깨를 으쓱 하고 대답했다.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전 그녀를 사랑합니다."
엘뤼엔은 지금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담담히 엘을 보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저 녀석이 저런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할 것은 상상도 안 했던 건데. 예상 외의 모습에 반박도 못 하고 있던 엘뤼엔의 귀로, 마법사의 말이 들려왔다.
"그렇군요, 좋습니다. 엘 양이 순순히 온 것을 보면 마음이 있는 것 같으니 묻지 않아도 되겠죠? 만일 여기 이 두 사람의 결혼을 해서는 안 될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말하세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어떤 말도 꺼내셔서는 안 됩니다."
엘뤼엔이 일어서서 뭐라고 하려던 찰나, - 사실 엘뤼엔은 아버지인 난 이 사실을 몰랐다 라고 투덜댈 생각이었다. - 누군가 말했다.
"제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러자 마법사가 잘라 말했다.
"자넨 안돼. 자넨 신부잖아?"
헉헉……꿈이었다. 엘뤼엔은 아침부터 왠 재수없는 면상을 보았다며 집무실을 파토낼 지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살기를 내뿜었다. (…아마 꿈속에서나마 정말로 결혼했다면 파토냈겠지만, 꿈속에서 그의 아들 엘이 불평하려던 것이 다행이었다.) 시뻘건 도룡농 주제에 어딜 넘볼 게 없어서 남의 귀한 아들을 - 하지만 딸의 모습을 한 엘도 상당히 마음에 들긴 했다 - 탐낸단 말인가. 지금은 물론, 크로아첸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마신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어쨋든 오랜만에 본 그 빨간 뱀 따위가 그렇게 나오니 그리울 리도 없었다. 엘뤼엔의 주변으로 어쩐지 먹구름이 낀 듯한 기색이 보이다가 이내 엘뤼엔은 눈을 감고 지금쯤 한창 유희 중일 아들을 찾았다.
"아들."
갑자기 들려온 엘뤼엔의 목소리에 그의 아들 엘은 깜짝 놀랐던 듯 무심코 몸을 일으키다가 나무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아픈 건지, 짜증난 건지는 몰라도 엘의 기색이 썩 좋지 않은 것을 본 엘뤼엔은 엘이 뭐라고 투덜댈지 생각하며 짐짓 한숨을 쉬었다. 분명 왜 갑자기 불러서 멀쩡한 정령 하나를 놀래켜 심장 마비로 죽일 거냐는 둥, 지금 유희에서는 - 나름 손이 귀한 귀족 집의 (아마도 한국에 있었을 때, 아들을 선호하던 게 반영된 모양이다) 무려 위로 누나가 10명이나 있는 막내 아들로, 엘의 오묘한 특성 상 비실비실한 체구를 갖춰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마법을 배운다 라는 설정이었다 - 제 딴에는 허약하지만 고고한 품위를 지니려 노력했는데 방금 일로 한 순간에 내 이미지가 무너질 거라는 둥 자신에게 온갖 불평을 할 거다.
그러나, 엘의 반응은 그의 생각과는 달랐다.
"아야야야……아니 지금 내가 내 이마 따위를 챙길 때가 아냐."
이마를 만지작거리던 엘이 이 까짓 것은 엘뤼엔을 처음 만났을 때의 공격 - 신력으로 이마를 때렸던 것을 말하는 모양이다 - 보다야는 나은 거라고- 라고 씩씩하게 말하며 앉았다. 물론, 엘뤼엔의 입장에서야 자기 아들 이마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버지,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럽다는 눈길로, 비록 눈을 마주하고 있진 않지만 엘은 조심히 물어왔다.
"어쩐지 오늘따라 이상한 걸. 목소리에 살짝 언짢은 기색도 있고."
의외의 반응에 놀란 건 엘뤼엔 쪽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불쾌한 감정이 목소리에 들어났던가 하고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의 목소리에는 그 어디에서도 짜증이란 감정이 깃든 곳은 없었다. 사랑스런 아들에게 불쾌한 목소리로 말을 할 리 없지 않은가.
"…아니, 별 거 아니야. 그 전에 내가 화라도 냈어?"
"응? 아니. 그냥 목소리가 별로 안 좋길래. 굳이 말하면 악몽을 꿔서 잠을 푹 못 자서 살짝 가라앉은 거 같길래. 혹시나 해서…"
이런, 모르는 새 점술사라도 될 생각이었나- 하고 엘뤼엔이 생각하고 있을 때, 엘은 엘뤼엔이 사랑해 마지 않는 그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아빠 기분을 모를 리 없잖아. 이래뵈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턴가 엘은 내 기분을 잘도 알아차렸지- 하고 엘뤼엔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엘이 직접 보진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 아주 미묘하게 기뻐한다던지, 슬퍼한다는 식의 감정을 용케 알고 있었다. 때로는 자신도 모르는 감정을 알아내기도 햇던 것이다.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는 엘뤼엔의 얼굴을 보고도 잘도 알아내는 엘이라는 것을 알지만 매번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아빠. 나 오늘 놀러가면 안 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빙긋 웃는 엘의 모습은 그야말로 귀염둥이 아들 모습이라 엘뤼엔이 거절할 리는 없었다.
"아빠-"
품에 폭 안기는 엘을 보고 엘뤼엔은 아침의 불쾌한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는 걸 느꼈다. 못 본 새 - 라고 해도 실제로 만나지만 않았던 것 뿐이지만 - 아들은 점점 애교가 많아지는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 바락바락 대들던 녀석이 시간이 지날 수록 마음을 열다 못해, 이젠 자신의 마음까지 달래는 존재가 되버린 게 아닌가. 한편으로는 인간으로 태어날 때 딸로 태어났으면 지금 쯤 엘이 딸 행세를 하고 있고 자신은 꾸며주느라 정신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전에, 어떻게 온 거야? 신계에는 함부로 올 수 없잖아."
특히, 넌 아크아돈을 관장하는 정령왕이고- 라는 말은 쏙 들어갔지만. 엘뤼엔은 그의 아들이 어떻게 온 건지 궁금하긴 했다. 설마 나도 모르는 새 엘의 정령왕으로서의 직분이 끝났을....리는 없겠지.
"그게 말이지- 악신을 처치한 공로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제 아크아돈도 굉장히 안정되었다고- 주신께서 아무때나 놀러와도 된다고 했다고."
"………근데, 지금 처음 온 거야? 처치하고 난 뒤 한참이나 지났는데?"
섭섭함이 묻어나는 엘뤼엔의 목소리에 엘은 가만히 발돋움을 하더니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미안하다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뤼엔은 그저 아들의 애교 한 방으로 이미 아침의 사건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기분이 풀린 듯한 엘뤼엔의 표정에 엘이 활짝 웃더니 안심이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지- 사실 좀 더 많이 오고 싶었는데. 아들은 나 하나 뿐이라서 너무 과보호를 하더라고. 그래서 쉽게 나올 수 없었단 마랴-"
귀엽게 투덜거리는 엘의 모습에 엘뤼엔은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엔 아버지 기분이 너무 우울해 보여서 다짜고짜 뛰쳐나온 거였기에, 지금쯤 가족들이 난리가 났을 거라며 엘이 웃었다.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엘은 때때로 무모하달까 엉뚱한 짓을 저질러서 남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걸 즐기는 거 같다. 그래도 이번에는 예의상 '아버지를 만나러 갑니다' 라는 쪽지 한 장을 써놓고 왔으니 양호하지 않겠냐는 엘의 말에 엘뤼엔은 오묘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글쎄…저쪽의 아버지가 이해해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쨋든 오랜만에 나오니까 너무 좋다. 저쪽 세계의 누나들은 말이지- 10명이나 되니까 성격 차이도 엄청난단 말야-"
누나들이 자신을 여장시켜서 11자매라고 한다는 둥 푸념 어린 엘의 이야기를 듣던 엘뤼엔이 빙그레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예전과 달리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자신의 상황이 싫진 않은 듯 푸념을 하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띈 엘은 정말로 귀여웠다. 그나저나 계속 유희만 할 생각이려나. 인간으로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긴 할테지만…….
"저쪽에서 내 나이가 슬슬 결혼을 하라고 압박을 할 때거든- 그래서 조만간 탈출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왜, 결혼도 한 번 해보고 그러지?"
"음…그러면 재밌긴 한데, 아빠가 마음에 들 만한 상대는 딱히 없을 거 같아."
그리고 이제 슬슬 무성 이라는 게 느껴져서 어쩐지 고민된다고- 라고 볼멘소리로 말하는 - 누나들이 10명이나 되다보니, 자신이 이제 여성체로서의 삶을 사는 것 같아서 그렇다나 - 엘을 보다가 엘뤼엔은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했다. 라피스 라즐리가 크로아첸이 된 지금, 누가 엘과 계약을 맺은 거지? 라미아스는 오래전에 아크아돈을 떠났고...(..당연한 거지만, 드래곤으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의미다) 일전에 물어봤더니 모른다는 식으로 고개를 젓더니 슬쩍 일러주길 카노스라고 해서, 열심히 부려먹고 있긴 하지만. 자신이 카노스를 부려먹고 있으니, 중간 매개체가 없는 상황에서 엘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진 않을텐데.
"아, 카노스 말고도 계약을 맺긴 했어. 실버 드래곤의 프로스트야. 마나가 아주 풍부한 친구. 그게 궁금했던 거야?"
어떻게 알았냐는 듯 바라보는 엘뤼엔에게 엘은 그건 비밀인데- 하며 귀엽게 웃었다.
"아무튼 결혼은 별로야. 크로아첸이 계속 쫓아다니는 통에 너무 귀찮단 말이지."
"…호오, 그 겁대가리 없는 도룡농이……아버지가 후환이 없게 끝내줄까?"
"…같은 신인데 그래도 되는 거야?"
"까짓거 좀 혼나고 말면 되지."
"업무가 늘어나면 어떡해?"
"……카노스를 부려야지, 그럼."
곧바로 실행할 듯 형형히 불타는 엘뤼엔의 눈을 본 엘이 꺄르르 웃더니 아빠가 날 그렇게 사랑하는 것을 알았으니 괜찮아 하고는 엘뤼엔에게 꼭 매달렸다. 이제 보니 영락없는 어린애다. 엘뤼엔은 머리를 쓰윽 쓰다듬어주곤, 애정어린 눈길로 엘을 바라보았다.
"…빨간 도롱뇽은 무지 마음에 안 들어. 그렇지만 네가 좋다면 그녀석도 감안해야겠지."
"라피스는 친구야, 아빠."
"말이 그렇단 거다, 아들아."
"참, 아빠. 얼마 전에 생일이었지? 그날 오려고 했는데 4서클 시험이 있어서 말야. 못 왔어."
그러고 보니 생일이었군. 엘뤼엔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엘은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냐, 아들?"
"어…그러니까 저쪽의 누나들이랑 찍은 사진. 내 머리카락 색은 눈에 띄니까 누군지 안 알려줘도 되지?"
"………예쁘네."
한참을 바라보던 엘뤼엔이 내뱉은 말은 그 한 마디였다. 엘은 활짝 웃었다. 엘뤼엔이 기뻐하는 걸 알아차렸던 모양인지.
"…딸 있었으면 한 적 있잖아. 아니야?"
"……난 아들 하나면 된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딸 바란 거 알고 있어, 아버지."
살짝 그러긴 했지- 하고 엘뤼엔이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은 지금은 엘 하나로 충분한 심정이었다. 잘 자라준 아들 하나면 다른 걸 바랄 생각도 없었다. 엘로 모자란다면 지나친 욕심이라 생각되니.
"난 딸은 되어 줄 수 없을지도 몰라, 아빠. 아직도 지훈일 때의 기억이 남아있거든. 그때 내가 불행했다면 다 잊어버리고 싶겠지만, 그 곳엔 소중한 친구들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 점점 남성체로서의 자각이 많이 약해지는 거 같아. 그렇다고 해도 딸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좀더 곰살맞게 굴 수는 있지 않을까?"
"……너 그 말…."
"굳이 아들이라고 할 필요는 없단 거야, 아빠. 나에겐 그냥 엘이면 족해. 살아보니 딸처럼 사는 것도 나쁘진 않더라고. 저쪽의 아버지는 내가 아들이긴 하지만, 누나들을 사랑하듯 날 무척 아끼거든. 밤길에 뭐라도 만날까 얼마나 마음을 졸이는지- 내가 꼭 외동딸이 된 느낌이라니깐- 이래뵈도 내 몸 지킬 능력은 되는데."
"……"
"엘은 이제 그냥 아빠한테 애교나 부리고 살려고. 그래도 같이 목욕하고 싶거나 그러면 말해. 그땐 아들로서 함께 갈게. 아빠 등도 밀어주고…아, 신들은 그런 문화 없으려나..."
엘뤼엔은 말없이 엘을 끌어안았다. 사실 마음 속으론 딸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엘이 섭섭해 할까 꺼내지 못했던 자신을 알고 있었다. 하기야 엘만한 딸을 구하는 게 어렵기도 하겠지만, 엘 하나를 챙기는 걸로도 흡족했으니까. 엘은 이제 남성체라는 자각이 많이 흐려지다 못해, 자진해서 딸 역할도 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어느 새 이렇게 커버린 그의 소중한 엘이 더더욱 소중해짐은 당연한 거다. 엘뤼엔은 흐려지는 눈을 훔치며 엘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혹시 변태같은 놈이 달려들거든, 아버지를 불러라 엘아. 그럼 이 아버지가 당장 그 놈이 여권이 필요하게 만들어주마."
"…에? 여권이면…국외추방이라도 하려고? 근데 그전에 여권은 어디서 안 거야 대체.."
"아빠가 바빠서 연락이 안 되거든 소릴 빽빽 질러도 되고, 언젠가 왠 변변치 않은 놈팽이를 데려오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절대 못 넘겨준다' 라고 말도 해줄게. 그러다 진짜로 눈에 흙뿌리는 무개념한 놈이 있으면 좀 때리기도 하고…나중에 새엄마 싫다고 울어도 괜찮아. 물론, 가끔은 목욕탕도 같이 갔다가 바나나 우유 한 잔씩 마시면서, 옷도 사러 가고. 커플룩도 맞춰보고……"
"생각보다 아빠, 하고 싶은게 많았구나….한 번에 다 하는 건 무리지만…시간은 많으니까, 하나씩 해보면 되겠네. 그 전에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엘은 엘뤼엔의 머리를 덥썩 잡더니, 목마를 태워 달라고 졸랐다. 엘뤼엔이 거부할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안 해주면 울어버릴 거야- 란 기색으로 바라보며.
"헤에- 아빠 키 정말 크구나. 근데 아빠, 만약에 라피스가 그 눈에 흙 뿌린 놈이면 어떻게 할 거야?"
"뭐야?! 고작 뱀 새끼가 그런 건방진 짓을 해?"
"…만약이잖아, 아빠…그리고 지금은 드래곤도 아니고……."
"차라리 드워프가 내눈에 흙을 뿌렸다고 해. 고놈은 엘을 채가는 걸로도 이미 미움 산 놈이야. 흥."
속으론 그래도 엘이 좋아하면 포기할 테지만- 이라고 중얼거리며 엘뤼엔은 엘이 다칠까 조심조심 걸었다. 엘의 요청으로 잠시 들른 에바스 에덴에서 그는 처음 보는 꽃을 - 그래봐야 보석이지만 - 보았다.
"…예쁘지? 내가 정말 힘들게 만든건데.."
"……그렇네. 우리 엘, 손재주도 좋았구나."
"…그럴 땐 잘했다 내새끼라던지 우리 딸이라고 하는 거야, 아빠."
아프지 않게 살짝 꿀밤을 먹이는 엘의 행세의 엘뤼엔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색감이 특이한 걸…가운데 푸른 색의 보석이 자잘하게 모여 하트 모양을 이루고 있었고, 꽃잎은 금색이랄까, 묘한 노란색 계통으로 된 보석이 몇 겹씩 둘러 싸고 있군. 장미같지만 조금 다른 거 같기도 하고……그나저나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헉?!"
"응? 아 이거..? 꺾어도 되는 거야. 한 번 만들었는데 꽤 잘 자라서 말이지. 가끔씩 뜯어주는게 더 낫더라고."
"그 전에 갑자기 왜 꽃을 만든 거야?"
"아빠 생일 선물- 가운데는 엘의 사랑을 의미하는 거고, 꽃잎은 아빠의 사랑을 의미하는 거지롱. 흔한 보석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단 말야.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데- 푸른 색 보석은 말이지, 아쿠아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말야. 물을 의미하는 거야- 잘했지?"
"...꽃잎은?"
"그건 스텔라라고 붙였는데. 아빠 무릎을 베고 잘 때마다 아빠 머리가 꼭 은하수같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별이란 뜻을 넣어서 붙였지. 참 꽃이름은 아모르야-"
꺄르륵 웃어대면서 엘은 엘뤼엔에게 꽃을 들려줬다. 흐뭇한 마음과 함께 왠지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하고 고민하는 엘뤼엔을 알아차린 듯 엘이 입을 열었다.
"익숙한게 당연한 거야- 내가 아빠 생일 전에 신계 여기저기에 그 꽃을 보냈거든- 참고로 아빠 집무실 어딘가에도 한 송이 숨어있어. 이젠 엄청 늘어날 거 같지만."
"......."
"지난 유희에서 연금술사가 되면서 보석 만드는 연구를 하느라 일생을 다 썼지만, 잘 만들어진 거 같아 너무 기뻐. 원래는 좀 더 일찍 주고 싶었는데, 너무 오래 걸렸지? 아무튼 1년 전부터, 틈틈히 신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선물하고 다녔다고. 거기 신족들이랑 신들은 다 하나씩 있는걸 뭐. 사실 신계는 1년 전부터 거의 매일 가다시피 했는데- 아빠가 얼마나 보고 싶던지. 그래도 아빠 생일 즈음 아빠가 기뻐할 걸 생각해서 꾹 참았는데. 결국 당일 날은 못 오고 지금 오게 되었네, 헤헤. 그래도 아빠 잘 때 슬쩍 보고 간 적은 있어. 깰까봐 두근두근거렸는데."
처음...만나러 온 게 아니었구나. 엘뤼엔은 왜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던가 하고 생각했다. 요근래 어쩐지 자신에게 아는 척하거나,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본 신들이 늘어났다 싶었더니. 그의 소중한 엘이 뭔가 벌이고 있었던 거다. 그것도, 아빠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그렇지- 주신도 엘의 사랑에는 깜짝 놀랐으니까- 설마 했는데 정말로 뭔가를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고 하시더군."
"카노스- 오랜만이야!"
엘이 손을 마구 휘저으며 말했다. 과연 조금 - 사실은 많이 - 업무에 시달렸던지 핼쑥해진 얼굴로 카노스는 빙그레 웃어보였다. 자신의 계약자이자, 소중한 친우가 사랑하는 아이다. 그리고, 1년 전부터 신계에 아름다운 꽃 - 에바스 에덴은 아름다운 꽃들로 유명했는데, 그 중 가장 아름다운 꽃을 만들어 낸 엘이었다. 아마도 사랑이 담겨서 그런게 아닐까 싶지만 - 아모르를 전하고 있는.
"모두들 감탄하고 있다고. 아모르는 잘 자라기도 하지만, 같이 있으면 어쩐지 편안해지고-"
"그치그치? 내가 울 아빠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숙면 기능도 되고, 피로 회복 기능도 있다고-"
레몬밤이니, 라벤더니 식물 이름을 늘어놓으며 자랑하는 엘의 모습에 카노스와 엘뤼엔은 조용히 웃고 있었다. 사랑스런 아이, 어떻게 이런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되어 주었는지. 기쁜 기색이 완연한 엘뤼엔의 모습을 바라보다 카노스는 입을 열었다.
"너는 몰랐겠지만, 엘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알아? 엘뤼엔에게 들키면 안된다고 해서 열심히 숨어다니며 이곳저곳 꽃을 보냈다고. 자기 기운도 좀 실었으니 아빠가 날 보고 싶어할 때 이 녀석이 그리움을 달래줄 거니까 최대한 많이 보내둘거야- 라고 했다니깐. 덕택에 신계는 지금 엘뤼엔과 엘의 아름다운 가족애에 한껏 감동한 상태라고."
"........그랬구나. 난 아들딸은 정말 잘 둔 거 같네."
"....응? 아들딸? 아아..엘이 딸 역할도 하겠다고 했나보네-"
"그래도 기본은 아들이지만요, 카노스. 근데 진짜예요? 신계가 감동 받은 거예요?"
"덕택에 온 신계가 아모르로 덮여버릴 정도로. 꽃이 예쁘기도 하지만, 그 마음이 애틋하다나 뭐라나."
더불어 크로아첸은 질투심에 투덜거리면서도 마계에도 그 꽃을 심는 모양이더라고. 마족들이 아름다운 걸 숭상하기는 하니까- 하고는 카노스는 다시 남은 일을 해야겠다며 돌아갔다. 엘뤼엔은 이제 자신의 어깨 위에 앉은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넘치는 사랑을 주체할 줄 몰랐다.
"....아-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나 보다. 아빠, 조금 아쉽겠지만 난 이만 갈게.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정말로 저쪽의 가족들이 울어버릴지도 몰라. 아모르는 혼자 놔둬도 잘 자라니까 걱정 마. 난 아빠의 아들이잖아-"
엘뤼엔은 아쉬운 기색이 가득한 엘을 보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그래, 자신에게는 소중한 아들이 있다는 존재만으로 괜찮은 거다. 설령, 엘이 성에 안 차는 녀석을 데려온다고 해도 어쩔 수 없겠지.
"아, 깜박하고 말 안 했는데- 난 아빠같은 사람이 좋아-"
지금은 남자로 유희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이참에 모두들 기억을 지우고 - 실버 드래곤의 힘을 빌어서 - 여자로 살았던 것처럼 해볼까? 오빠 10명을 둔 여동생이라 재밌겠지? 하고 돌아가는 엘의 뒤로 엘뤼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들아, 그것만은 안된다. 아버지는 오빠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딸의 애교를 보는 순간 녹아버릴 지도 몰라' 라고.
한바탕 소란 끝에 저쪽의 가족들 틈에 휩싸인 엘은 보이진 않지만, 엘뤼엔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만날 때를 기대하며. 뭐, 하긴 내일 갈 생각이었지만.
엘뤼엔의 생일을 기점으로, 신계에 아모르라는 꽃이 잔뜩 개화함과 동시에 신계에는 갑자기 아들이나 딸을 갖고 싶다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기야 그렇다고 해도, 엘만한 아이는 없겠지만. 매일같이 찾아오는 엘이나, 집무실을 꽃으로 가득 채운 - 청아한 향기가 꼭 엘을 닮은 아모르 말이다 - 엘뤼엔이나 한가득 미소를 지어보이는 통에, 신계는 앞으로도 계속 떠들썩할 듯 싶다.
....쓰다보니 어마어마하게 길어졌네요.
원래는 다른 걸 쓰려고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식사랑이 가득한 엘뤼엔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만 사실 예전부터 엘뤼엔은 팔불출 아부지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지라....
처음에 엘이 만들어준 꽃 이름을 엘 아모르(El Amor)라고 하려다가...스페인어에서 정관사 el을 뺀 아모르로 결정!
....가운데 보석이 되어준 아쿠아는 그리스어에서 따왔지만요. 스페인어로는 아구아가...되버려서....
스텔라는......별을 뜻하는 스페인어 Estrella를 쓰려다가, 그 모태가 되어준 라틴어에서 따왔습니다:)
스페인어를 배우지만 ^^; 정작 많이 써먹진 못했네요.....
참, 가입인사도 안했네요.
얼마 전 가입한..따끈따끈한 고3신입....<이봐
아츠시입니다 하하하하하
....고3이지만...이러고 있는 이유는...숲의 종족 클로네를 다 읽고 갑자기
엘퀴네스를 다시 보고 있기 때문이랄까요. 헉...
"그런데 아버지, 귀환의 주문이 뭐였었지?"
"바보냐 아들? 아직도 기억못해?"
"..."
" '보고싶어요' 아버지였잖아." 를 보고 쓰고 싶어졌다는 마음은 비밀입니다.
아무튼 수능 끝나고...다들 잘 부탁합니다. 이곳엔 좋은 분들이 많아서 즐거워요.
무튼, 팬픽은 잘 안 써봐서...좀 어색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즐거운 시간 되셨길.
근데..설마 3000자 못 넘는 건 아니겠죠? 이렇게 나름 길게 썼는데.
첫댓글 이런 훈훈한 팬픽을 써주시다니...저를 달달하게 녹여버리시려는 겁니까아?ㅠ.ㅠ.
후후후 사실은....제 자신이 녹고 싶었습니다.....
아이고 레알 너무너무 훈훈하네요.. *′∀`* 지금 제가 해탈한 것 같은 미소를 지은 게 혹시 보이시나요! 김레알 최트루 너무 훈훈 돋아 죽을 것 같아요ㅜㅜ 엘이 아빠! 하고 부르다니.. 왠지 엘뤼엔가 더 친밀해지고 격식없어지고 무성으로서 더 익숙해진 것 같은 것 같은 느낌이 드네여 *′ㅅ`* 훈훈해요!
...왠지 그 미소가 눈에 선하네요 하하하 전 기본적으로 훈훈 스토리를 지향하거든요...숲클은 그게 안 되서 아쉽지만...완결나면 훈훈 스토리가 될 수 있으려나ㅜ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귀엽죠 귀엽죠 실은 제가 쇼타.....가 아니라 그냥 귀여운 아들이 갖고파서.....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엘뤼엔은 명대사가 많아서 좋아요...('ㅅ'*)/
우와아~ 넘 훈훈하고달달합니다아~ 너무나도 귀엽습니다아~ 그 명대 진리죠!! 캬하하~
다음에도 뭐 하나 잡아서 써볼까 하구요 후후후
삭제된 댓글 입니다.
씩, 씩 웃으신거...화낸 거 아니죠?하핫 재밌게 보셨다니 다행이네요:)
검사 완료:)☆
으엄.. 아츠시 님, 마지막 부분에 저것이 작가사담인가, 아닌가 싶은 것이 한 문장이 있네용. -청아한~ 아모르 말이다- 이 부분인데요, 끝의 -를 빼고 마침표를 찍어주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어감이 사담같아 보이기도 해서 좀 애매하네요()
에, 혹시.. 아츠시 님께서 소설 중에 많이 쓰시는 - 이것이 … 이런 뜻인가요?() 부연설명 같아 보여서요' '...
부연설명이 아니라, 원래 스타일이 그러하시다면 터치하지 않겠습니다:)
앗...'-' 이건 대화 내에서 사용될땐 말을 길게 늘이는 걸 의미하는 거구요, 큰따옴표가 없는 경우에는 부연설명으로 많이 씁니다. 소설 내용 자체에는 작가 사담이 없구요, 소설 끝내고 마지막 부분과 첫부분 주의사항에만 사담이 들어갑니다:)
훈훈한 가족관계예요~ 이쁘네요^ㅇ^
제가 훈훈한 걸 좋아하거든요 히히
아 역시ㅠㅠ 엘뤼엔ㅠㅠ 훈훈합니다
엘뤼엔같은 아버지가 있으면 하고 썼던 건데...역시 훈훈하죠?
우와 훈훈하네요
이공카 분들은 글잘쓰시는것같아요
그렇죠. 잘쓰시는 분이 많아서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저같은 새내기는 굉장히 부끄럽답니다 하핫
우에~완전 훈훈해요!!!! 절로 흐뭇해지네요~
이 훈내가진동하는 분홍분홍한 가족애라니 행복한마음이 무럭무럭자라날거같아요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