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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엘로힘, 예수
영원에 대한 사모함은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다. 이와 관련된 자료를 보내오니, 기쁘게 읽어 주시고 의견이 다를 경우엔 코멘트를 부탁드립니다. 신학교에들어가면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들”이라는 엘로힘을 알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여호와가 아버지일까요? 또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여호와의 사자를 예수라고 하기엔 부담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이 땅에 왔다는 것이 되니까요. 예수께서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형용을 본 적이 없고 그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다는데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은 누구일까요?
● 여호와와 엘로힘
여호와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야웨라고도 하는 여호와는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 넣은 창조주이며, 이스라엘을 이끌고 구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삼아 그들을 이끄신다. 그 이름을 구약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신약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이끄셨지만, 그가 이방인까지 구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름은 이스라엘이 불러야 할 이름이지, 천하 만민이 불러야 하는 이름은 아니다. 천하 만민이 불러야 하는 이름은 오직 예수 이름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구약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뒤에서 다루게 된다. 먼저 여호와/야웨를 표기한 히브리어 4문자에 대해 살펴본다.
○ 여호와와 야웨의 신성사문자
여호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글자는 4개다. 이 네 글자를 전통적으로는 여호와라고 읽었지만, 근자에 이르러서는 야웨라고 읽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표기하는 글자이기에 신성사문자(神聖四文字)라고 한다. יהוה(신성사문자)를 로마자로 표기하면 ‘YHWH’이다. 히브리어 네 글자의 발음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문자를 YHVH·JHWH·JHVH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첫 글자 요드(י, yod)와 셋째 글자 와우(ו, waw)를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기하는 것이다. 영어식으로 하면 요드(yod)와 와우(waw)이지만, 독일어식으로 하면 이것은 jod(요드)와 waw(바브)이기 때문이다. 다윗(David)이라는 이름도 히브리어(דָּוִד)나 헬라어(Δαυίδ)로 “다윗” 혹은 “다위드”라고 발음하지만, 영어로는 “데이비드”라고 하는 것과 같이 언어에 따라 표기와 발음 방식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히브리어는 어순이 우에서 좌 방향(←)이다. 게다가 모음이 별도로 있는 한글과 달리 모음 글자 자체가 없다. ㅇ(이응)에 해당하는 글자도 모두 자음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말하면 A E I O U도 히브리어론 모음이 아닌, 자음이다. 신성사문자 중 Y, W로 표기하는 두 문자(요드와 와우)도 모음이 아니라 자음이다. 히브리어와 달리 영어에서 Y와 W는 반자음으로 취급한다. 히브리어에서 모음은 자음 글자에 점(·)이나 선(-) 등을 붙여 표시하는데, 이것은 발음을 위해 후대에 편의상 만든 것이다. 그래서 모음 부호라고 한다. 모음 글자라고 하지 않는다.
○ 여호와/야웨와 아도나이
신성사문자의 발음은 여호와인가, 아니면 야웨인가? 아니면 아도나이인가? 여호와의 이름이 아도나이와 관련된 것은 구약 때부터 시작된 게 아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 주후 3세기경부터 이 이름을 읽을 때엔 “아도나이”(אדונאי “나의 주”라는 뜻)라는 말로 대용해 왔다. 아도나이 대신에 “그 이름”이라는 “하셈”(השם)이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시기에 대한 것은 학자에 따라 주후가 아닌 주전 바벨론 포로기(주전 538년 이후)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포로기라는 주장은 신약 시대엔 어떠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당시에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하고 있었다면 예수께서는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주지 않으셨겠는가? ‘아니, 너희가 왜 하나님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느냐?’ 하고 질책하거나 풀이해 주지 않으셨겠는가? 부활하신 예수의 첫째 명령은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아버지가 제자들의 아버지이고 예수의 하나님이 제자들의 하나님이신데 그 이름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겠는가? 이런 말씀은 만홀히 여길까봐 두려워서 아도나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무색해지는 명령이다. 아버지와 동등하신 아들 예수의 말씀은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두려워서 아도나이라고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를 친밀하게 “아빠 아버지”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갈 4:6).
신성사문자를 읽을 때마다 아도나이라고 했다는 것은 원문을 수정 변경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글자를 보고 발음만 그렇게 했다는 뜻이지만, 그런 설명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불렀다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따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덧 그렇게 부르는 것이 유대인들의 관습이 되었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율법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옳은”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어떤 “변고”에 의해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장로의 유전 혹은 유대교 전통에 따른 방식이었다.
이 방식이 기독교에도 영향을 끼쳐 근자에 이르러서는 여호와/야웨 대신에 “주”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구약 번역성경에서 신성사문자를 아예 “주”라고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약을 중심 성경으로 하여 채택한 것이 아니다. 구약만을 최고 경전으로 여기는 유대교 방식을 따른 것이다. 신약적 시각으로 신성사문자를 그렇게 표기한 게 아니라, 유대교적 관습에 따라 그렇게 변형한 것이다. 신약에 여호와/야웨가 “주”(퀴리오스)로 바뀌어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바꾼 게 아니라, 유대교의 전통적인 해석에 의거해 바꾼 것이다. 구약을 따른 게 아니라 유대교의 전통이라고 하는 이유는 신성사문자가 사람의 이름에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의 축소형은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구약 때 사람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과 같은 신약 때 중심인물에게도 사용되었다. 신성사문자가 사람의 이름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고 그래서 아도나이라고 했다는 가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기독교계가 유대교의 이런 관습과 경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인해 요즘 영어 성경에선 여호와/야웨에 해당하는 신성사문자를 the LORD로 표기하고 있다. LORD의 “ORD” 부분을 일반 글자 크기로 하지 않고, 작은 글자 크기로 축소한 형태를 여호와/야웨라고 하는 것이다. 즉, “주”는 Lord이고, “여호와”에 해당하는 것은 LORD라고 한다(*핸드폰에선 “ORD”가 작은 형태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음). 아무튼 이를 “작은 대문자”(소형대문자)라고 부른다. 이런 추세에 따라 Jehova(여호와)로 표기하는 성경은 점차 줄고 있다.
“여호와”는 신성사문자에 “아도나이”(אדונאי)를 발음할 때 사용된 모음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즉, 아도나이의 모음(A-O-ai)을 ‘YHWH’ יהוה에 붙인 것이다. ‘A-O-ai’라는 모음을 ‘YHWH(YHVH와 같음)’라는 자음에 그대로 연결해 읽을 경우 Yehowah(여호와 또는 예호바)로 발음된다.
아도나이의 제1모음(A)은 신성사문자의 제1자음(י) 아래서는 a로 읽지만 y 아래서는 e로 읽는다는 규칙에 따라 16세기 때부터 여호와(Yehowah, Jehova)라고 표기하게 된 것이다. 독일어·라틴어 계통에선 J 발음이 영어의 J와 달리 “ㅈ”(지읒)이 아닌, “ㅇ”(이응)이고, v나 w도 “ㅂ”(비읍)이 아닌, “ㅇ”이다. 예루살렘(Jerusalem, 저루살렘)이나 예수(Jesus, 지저스)를 보면 일반 언어와 달리 영어는 J를 다르게 발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신성사문자는 여호와로 발음해야 하나, 아니면 야웨로 해야 하나? 구약학자들의 의견은 대체로 야웨로 하는 게 좀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좀 더 타당하다는 것이지, 여호와라는 것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야웨가 타당하다는 것은 시편에 많이 나오는 “할렐루야”가 그 증거라는 것이다. 그 뜻은 “너희는 야[웨]를 찬양하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의 이름에 야웨의 축소형이 사용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축소형이 이름의 서두에 붙을 때엔 발음 법칙상 “여(예)호” 또는 “요”로 발음된다. 여호나단이나 요나단의 이름이 그런 예이다. 그 이름이 뒤에 붙을 때엔 “야”가 된다. 요나단이나 느단야(느다냐)는 모두 “야웨께서 주셨다”는 뜻이지만, 위치에 따라 발음에 차이가 난다. 두 이름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나단”은 “주다”(give)를 의미한다. 좀 더 타당하다고 한 것은 그 이름이 앞에 나올 때엔 “여”나 “여호”나 “요”가 되고, 이름 뒤에 나올 때엔 “야”가 되기 때문이다.
앞에 나올 땐 “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야웨”가 정확한 발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를 비롯하여, “여호웨”, “여웨”, “요와” 등이 구약 때 하나님의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발음하지 않아 정확한 발음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그런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신앙은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부르는 것인데, 발음을 잃었다는 것은 온전한 설명이 아니다. 게다가 사람의 이름에 그 이름의 일부 혹은 전부가 사용됐다는 것은 그 이름이 전혀 사용 불가인 것은 아니었다는 증거다.
○ 여호와/야웨의 뜻
여호와 혹은 야웨(Yahweh)의 본래의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있다’를 뜻하는 ‘하야’ 동사에서 변화된 것으로 대부분 추정한다. 왜냐하면 הָיָה (hayah) 동사의 어두(語頭) h를 강하게 발음하면 hayah(하야)가 되어 ‘산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성4문자는 ‘있게 하는 자’, 혹은 ‘살리는 자’라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여호와를 창조주로 강조하는 입장에선 ‘있게 하는 자’를 택하여 창조주로 인식하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에게로 이어진다고 하는 입장에선 ‘살리는 자’를 택하여 구원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로마서에선 이것을 아브라함의 믿음과 관련하여 말한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4:17) 하나님은 살리는 자요 있게 하는 자라는 것이다.
여호와/야웨의 네 글자(יהוה)를 상형문자로 풀이하면, 예수를 보라는 뜻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첫 글자 י(요드)는 “손”을, 둘째와 넷째는 “보라”, 셋째는 못(막대기)을 뜻하기에 그렇게 해석한다. ‘손을 보라, 못을 보라’는 것은 부활 후 도마에게 하신 말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호와/야웨는 첫 언약을 성취하는 새 언약의 중보자인 예수와 연결된다. 이런 추정은 구약과 신약이 어떤 관계인가를 알아야 가능하다.
○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
구약성서에는 신성4문자 יהוה가 7,000번 이상 나오지만, 신약성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신약에서 이 이름이 등장하는 구약 구절을 인용할 때엔, 주(퀴리오스), 하나님(데오스), 아버지(파테르) 등으로 바꾸어 표기한다. 이렇게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יהוה가 본래 주,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인가? 전통적으로는 본래 그렇기 때문에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신약에서 그렇게 나오니까 본래 그런 것이라는 설명이다. 신약에서 그 존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양자를 동일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가 단절과 연속, 모형과 실체라는 기본 전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구약의 존재가 신약에서도 그대로 나오게 된다면 여호와는 하나님 아버지이고, 여호와의 사자는 예수에 해당한다. 연속 관계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단절과 연속이라는 “긴장”을 반영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설명은 모형과 실체라는 성취 개념을 반영하지 않았다. 그림자와 실상이라는 히브리서의 설명을 도외시한 것이다.
게다가 이런 설명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기 전, 곧 구약 때에 예수가 여호와로, 혹은 여호와의 사자로 이미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므로 문제가 된다. 그 설명은 신약성경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주장이 된다. 구약의 예언과 활동이 예수에 의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신약의 모든 가르침이 근거를 잃게 된다. 구약 때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실체로 나타났다면 성육신 사건은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가 준비한 식사를 먹었다면 말이다. 이런 주장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이 실체로 나타난 게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에 권위를 두면 하나님에 대한 것도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는데,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딤전 6:16) 예수께서도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요 5:37) 하지 않으셨던가? 하나님을 본 자가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다고 했는데,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구약의 많은 이가 보고 또 들었지 않은가? 구약 때 본 하나님은 누구이고, 또한 그에게서 들은 음성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때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예수가 참 하나님의 실체이고 그때의 하나님은 예표라는 말이 아닌가?
따라서 여호와가 하나님 아버지이고 여호와의 사자는 그 아들이라는 이런 설명은 논리적 근거가 없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단절과 연속의 관계라고 전제하면서도 단절은 생략하고 연속만 주장하는 것이다. 의미적으로는 연속되지만 실체는 신약 때 나타나셨다는 게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고 정설이다. 이것은 여호와와 예수의 관계를 모형과 실체로, 그림자와 실상으로, 예표와 성취로 설명하지 않으면 혼동하게 된다.
여호와는 신약에서 계시될 하나님의 모형과 예표이고, 그의 사자는 그의 아들이 나타날 것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다. 구약 때엔 독생자의 실체가 나타나지 않았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 모형으로 나타난 자일뿐이다. 따라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를 향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여” 하지 않는다. 여호와가 하나님의 실체가 아니라, 예수의 오실 길을 예비한 예표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구약 때 이스라엘에겐 아버지일 수 있지만, 예수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덧붙여 말하자면, ‘구약은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이라는 대립적 설명도 적합하거나 온전한 설명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는 공의이고 예수는 사랑이라는 것은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여호와가 준비한 길로 오셔서 그 뜻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셨다. 하나님의 공의를 공의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공의가 되게 하셨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두 번이나 말하지 않았던가? 로마서에선 예수를 “하나님의 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또한 구약 시대는 하나님 아버지 성부 시대, 신약 시대는 하나님의 아들 성자 시대, 지금은 보혜사 성령 시대라는 것도 온전한 설명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듯이, 예수는 어제인 구약 때나 오늘이라는 신약 때나 영원한 천국에 이를 때인 영원 때까지 영원토록 성경과 시대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구원의 주(아르케고스)요 온전케 하는 이(텔레이오테스)라고 한다(히 12:2). 아르케고스는 주(퀴리오스)라는 말이 아니라, ‘시작하는 이’라는 뜻이다. 텔레이오테스는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와 관련된다. 예수는 믿음의 설립자요, 종결자다. 요한계시록의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을 히브리서에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실체(모르페)요 형상(에이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마지막 구절에선 예수를 참 하나님이라고 하였고(5:20),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였다(10:30).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엘로힘이라는 단어로 표기한 것일까? 하나인데 왜 복수형태를 사용한 것일까?
○ 엘로힘과 엘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אלהים)은 왜 복수형인가? “엘”이라는 단수 단어만으로도 하나님을 뜻하는데 왜 굳이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 것일까? 하나님은 “하나”라는 말 그대로 유일하신 절대자이기에 하나님 외에는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하나”인 분에게 어떻게 “하나님들” 하며 “들(pl)”이라는 복수형을 쓸 수 있겠는가? 게다가 “엘”이라는 단수형이 있는데도 굳이 엘로힘으로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임”의 형태는 복수형을 뜻한다. “탈락된 자들”을 뜻하는 네피림, “하늘들”을 뜻하는 샤마임, “그룹들”로 번역된 그루빔(cherubim), “스랍들”로 번역된 스라빔(seraphim) 등이 복수형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야웨는 이스라엘과의 언약과 관련되고, 엘로힘/하나님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이름인데, 왜 하나님 외의 것을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된 것일까? 다시 말해 구약에서 엘로힘은 2,500회 이상 쓰였는데, 왜 그 뜻은 절대자 하나님만을 뜻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을 뜻할 때 여호와/야웨 다음으로 많이 쓰였는데, 왜 하나님 외의 존재에게도 사용된 것일까? 엘로힘은 형태상으로 복수이지만, 구문에서는 단수로 취급하는데, 어떤 이유로 단수 개념인데도 복수 형태를 취한 것일까? 어떤 존재이기에 영어의 all과 비슷하게 복수이면서도 단수 같은 존재일까? 엘로힘이 단수 동사나 단수 형용사와 함께 쓰인다는 것은 단수적 존재라는 게 아닌가? 이런 질문을 갖고 BDB 사전을 중심으로 엘로힘의 용례를 점검해 본다.
○ BDB의 엘로힘 설명
BDB는 히브리어사전의 대표격으로 Brown-Driver-Briggs(BDB)의 약칭이다. 이에 따르면, 엘로힘(אלהים)은 복수형 남성 명사이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이에 대해 BDB는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수적으로 복수인 경우이다. 둘째는 강조형 복수를 표시할 때이고, 셋째는 관사가 붙어 참 하나님을 뜻할 때이고, 넷째는 관사 없는 하나님을 뜻할 때이다.*본 항목은 이해를 돕기 위해 BDB의 논고에 관련 성구를 기입하면서 필자의 의역적 설명을 약간 추가한 것임을 밝힌다. 예컨대 BDB에서 ‘창세기 1:1’이라고 했다면 그 구절을 “태초에 하나님(אלהים)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같은 방식으로 기입하며 추가로 설명하기도 했다.
1. 첫째 수적으로 복수인 경우
1) 엘로힘은 단수가 아닌 수적으로 복수인 경우에 사용된다. 그 엘로힘은 신성한 장소에 있는 신적인 대표자인 통치자, 재판관을 뜻하거나, 신적인 위엄과 권세를 반영하는 통치자, 재판관을 뜻한다(rulers, judges, either as divine representatives at sacred places or as reflecting divine majesty and power). 엘로힘은 이와 같이 복수적 개념의 용어이기에 재판장이나 “신들”과 같이 복수형일 경우에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 엘로힘은 절대자 하나님을 뜻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적인 재판관이나 신적인 재판관을 엘로힘이라고 하였다. 출애굽기 21:6에선 귀 뚫을 종이 있을 경우, 그를 엘로힘(האלהים)에게 데려가라고 했는데, 한글 성경에선 이 단어를 일부 영어성경과 같이 “재판장”으로 번역했다(τὸ κριτήριον τοῦ Θεοῦ, “하나님의 재판장”). 출애굽기 22:8에 나오는 “재판장”도 엘로힘이다. “너는 재판장(אלהים)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찌니라”는 출애굽기 22:28은 사도행전에서 인용되는데, 거기서도 엘로힘은 재판장을 뜻한다. 이 구절은 바울이 대제사장을 비판한 것에 대한 책망으로 인용되었다.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행 23:5)
사무엘상 2:25에도 엘로힘이 나오는데, 그것도 “재판장”으로 번역할 수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한글개역성경은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אלהים)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삼상 2:25)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사람의 죄를 재판하는 자는 사람이고 하나님에 대한 죄를 재판하는 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이기에, 여기 엘로힘도 재판장으로 번역하는 게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로힘은 무조건 하나님이라는 선입관이 이런 오역을 낳은 것이다.
이런 재판장뿐만 아니라, 신적인 존재를 엘로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사기 5:8의 “무리가 새 신들(אלהים)을 택하였으므로 그때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에 나오는 “새 신들”은 사람이 아닌, 신적인 존재이다. 여기 엘로힘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뜻하는 게 아니라, 복수의 신을 말한다. 그래서 시편 82:6에서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אלהים)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고 하였고, 시편 138:1에서도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אלהים)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신들”은 복수이며, 절대자인 “주”와는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엘로힘이 이렇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기에 시편 82:1에선 “하나님(אלהים)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אלהים) 중에서 판단하시되”라고 하며 하나의 단어로 두 가지 의미를 표현했다. 이 구절은 엘로힘이 일반 재판장과 신적인 존재 모두를 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회”와 “(재판장들) 중에서”라는 단어가 시사하듯이, 여기서도 엘로힘은 단수가 아닌, 복수의 개념이다.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재판장과 하나님 둘 다이다. 이렇게 엘로힘의 개념은 두 가지이다.
2) 엘로힘은 하나님과 천사를 포함하는, 신적인 존재, 곧 초인간적인 존재를 뜻한다(divine ones, superhuman beings including God and angels). 위에선 부정적인 이방신들을 포함한 엘로힘을 말했지만, 여기서는 긍정적인 존재인 천사들을 말한다. “저를 천사(אלהים)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는 시편 8:6(한글성경에선 8:5)과 사람이 “하나님(אלהים)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창세기 1:27이 이에 해당한다. 히브리서에선 시편 8:6의 엘로힘을 “천사들”로 번역했다(2:7, 9).
3) 엘로힘은 천사를 뜻한다(angels). 시편 97:7의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אלהים)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라는 구절의 엘로힘은 천사를 의미한다. 그래서 욥기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אלהים)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뜻한다. 엘로힘이 천사를 뜻하기에 그 “아들들” 또한 천사이다. 그에 반해 어떤 이는 이들을 강한 자가 아닌, “경건한 자”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4) 엘로힘은 “신들”을 뜻한다(gods). 출애굽기 18:11의 “여호와는 모든 신(神)보다 크시므로”에 나오는 “신”은 엘로힘(אלהים)이다. 출애굽기 22:19의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찌니라”의 “(다른)신”은 엘로힘이다. 사무엘상 4:8의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의 “신들”이 엘로힘이다. 역대하 2:4의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보다 크심이라”(한글성경에선 2:5)에 나오는 “신” 또한 엘로힘이다. 시편 86:8의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의 “신들” 또한 엘로힘이다.
엘로힘에 해당하는 구절은 이 외에도 여럿이다. 뜻은 ‘다른 신’ 혹은 ‘외국 신들’을 의미한다. 관련 구절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엘로힘이 하나님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 명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라고 하면 절대자 하나님, 홀로 한 분이신 분을 연상하지만, 그 단어는 영어로는 God 혹은 god이기에 어떤 하나님인지 그 정체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혼동이 올 수 있다.
2. 강조형 복수
1) 접미사와 함께 ‘-의 신’과 ‘-의 여신’(god or goddess)을 뜻하는 데 엘로힘이 사용된다. 강조형 복수라 함은 접미사와 함께 하면서 그 뜻이 ‘제한된다’, ‘강조된다’는 것이다. “-의 신”이라 함은 포괄적인 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에게’ 제한된다는 의미이다. 접미사와 함께 나오기 때문에 엘로힘은 אֱלֹֽהֵיכֶ֗ם와 같이 변형된 형태가 된다. 사무엘상 5:7에선 “우리 신 다곤”(Dagon), 사사기 11:24에선 “네 신 그모스”(Chemosh), 열왕기상 18:24에선 “너희 신(Baal)을 부르라”, 사사기 9:27에선 “그 신당(神堂)에 들어가서(‘신당’은 ‘אלהים의 집’)”, 다니엘 1:2에선 “자기 신(엘로힘)의 묘에 이르러 그 신(엘로힘)의 보고(보물창고)에 두었더라” 하였다. 이와 같이 “시돈 사람들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모두 엘로힘이라고 하였다(왕상 11:33). 열왕기하 17:26에선 “그 땅의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 신이 사자들을 저희 가운데 보내매” 하며 엘로힘을 두 번이나 사용했고, 그 다음 구절인 27절에서도 사용했다. 열왕기상 20:28에선 수리아 사람들이 여호와/야웨는 산의 신이고 계곡의 신이 아니라고 추정했다고 말한다. 즉, ‘-의’ 신이라고 할 때 “신”은 엘이 아닌, 엘로힘이 사용됐다.
2) ‘하나님 같은 자’ 혹은 ‘하나님의 것’을 뜻하는 데 사용된다.
출애굽기 4:16에서 하나님은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하시며 모세가 아론에게 하나님 같은 자가 된다고 하셨다. 출애굽기 7:1에선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אלהים)이 되게 하였은즉” 하며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 같은 자가 된다고 하였다. 사무엘상 28:13에선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오는데 “신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하였다(אלהים).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나 그에게 특별히 속한 것을 표현할 때에도 사용되었다(시 68:16의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 겔 28:13의 “하나님의 동산 에덴”, 겔 28:14의 “하나님의 성산”, 겔 28:16의 “하나님의 산”; 겔 31:8과 9의 “하나님의 동산 에덴”; 욥 1:16의 “하나님의 불”).
3. 참 하나님
관사가 붙어 “참 하나님”(האלהים)을 뜻하는 경우는 신명기 4:35와 39 등에 나온다. 신명기에선 ‘세상을 창조하신 날부터 상고해 볼 때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 같은 일을 행한 신이 어디 있느냐’ 질문하면서 여호와/야웨가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האלהים, 하엘로힘). 참되다는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정관사(ה, 하)가 붙어 있다. 이런 내용은 다음 구절에서 확인된다.
신명기 7:9; 열왕기상 8:60; 18:39(2회); 역대하 33:13; 이사야 45:18; 여호수아 22:34; 열왕기상 18:21, 24; 역대하 32:16; 사무엘하 7:28; 열왕기상 18:37; 열왕기하 19:15; 역대상 17:26; 이사야 37:16; 느헤미야 9:7; 창세기 5:22,24; 6:9,11; 17:18; 여호수아 22:34; 창세기 44:16; 사사기 6:36,39; 7:14; 10:14; 16:28; 21:2; 사무엘상 10:3,7; 14:36; 사무엘하 2:27; 6:7; 7:28; 12:16; 열왕기상 8:60; 18:21,24 (2회); 18:37,39 (2회); 19:15; 욥기 2:10; 예레미야 11:12; 이사야 37:16; 45:18; 시편 108:14; 다니엘 1:9,17; 사무엘상 6:20; 느헤미야 8:6; 에스라 1:3; 다니엘 9:3.
이외에도 많은 구절에서 발견된다. 특히 여러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איש האלהים)은 신적인 권위와 영향력 아래에서 행하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천사(삿 13:6,8)나 선지자를 지칭한다.
4. 하나님
관사가 붙어 참 하나님을 뜻하는 경우가 아닌, 관사가 붙지 않은 형태로 하나님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관련 구절은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אֱלהִים)이시요 사시는 하나님(אֱלהִים)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로서 예레미야 10:10에 나와 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모두 관사가 없는 형태다. “참 하나님”에 사용된 “참”(אֱמֶ֔ת, 에메트)은 관사가 아니라, “진리”, “견고함”, “신실함” 등을 뜻하는 단어다.
1) 엘로힘(אלהים)은 주어로, 때로는 직접 목적어나 간접 목적어로 사용된다. 창조와 홍수 기사에서 50회, 다른 곳에서 28회 나온다. 창세기 3:1,3,5(2회)와 같이 주로 시적인 표현에 사용된다. 창세기 9:27; 39:9; 신명기 32:17,39, 사사기에 21회, 사무엘상하에 50회, 열왕기상,하에 29회 역대기상,하에 45회, 시편 42-86편에 180회 나온다(시편은 편집에 따라 약간의 조정이 있다.)
그 외에는 시편 3:3; 5:11; 7:11; 7:12; 9:18; 10:4; 10:13; 14:1; 14:2; 14:5; 25:22; 36:2; 36:8; 77:14; 100:3; 108:2; 108:6; 108:8; 108:12(2회); 시편 149:9; 욥기 5:8; 20:29; 28:23; 32:2; 34:9; 잠언 2:5; 3:4; 25:2; 전도사 (7회) 호세아 (5회); 아모스 4:11 (여기서는 소돔을 쓸어버리는 하나님으로 나온다); 예레미야 50:40; 이사야 13:19, 스가랴 8:23; 12:8; 미가 3:7; 이사야 35:4; 이사야 후반부(9회); 예레미야 10:10; 에스겔(13회); 말라기(5회); 요나(4회); 창세기 28:21; 17:7,8; 출애굽기 6:7; 9:45; 레위기 11:45; 22:33; 25:38; 26:12,45; 민수기 15:41(P); 신명기 26:17; 29:13; 사무엘하 7:24 (= 역대상 17:22); 스가랴 8:8; 예레미야(6회); 에스겔(6회).
“의로우신 하나님(קדשים ׳א)”은 시편 7:10, “거룩하신 하나님(הים צדיק)”은 여호수아 24:19(E); “살아계신 하나님(חיים ׳א)”은 신명기 5:23; 사무엘상 17:26,36; 예레미야 10:10; 23:36; “살아계신 하나님(חי ׳א)”은 열왕기하 19:4,16 (= 이사야 37:4,17) 등에 나온다.
2) 연계형(construct)으로 사용된다(*히브리어에서 두 개의 명사가 나올 경우, 앞의 명사는 연계형, 뒤의 것은 절대형 이라 한다. 연계형이라 함은 뒤에 나오는 단어와 연계된다는 것이다. 연계형 명사는 모음변화를 일으키기에 변형이 있지만, 뒤의 것은 어형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절대형이라고 한다,Absolute). 엘로힘이 연계형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엘로힘”이라는 글자에 변형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사람과 결합되는 형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אֱלֹהֵי אַבְרָהָם)과 같이 모음과 글자에 변화가 있다. 아브라함은 뒤에 있는 절대형이기에 변형이 일어나지 않지만, “하나님”은 연계형이기에 형태가 달라졌다. 창세기 26:24; 28:13 등이 그러하다. “나의 주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같은 것은 창세기 24:12,27,42,4, “조상의 하나님”은 창세기 31:5,29,42; 46:3; 50:17; 출애굽기 3:6,13,15,16; 15:2; 18:4; 여호수아 18:3 등에 많이 나온다. 사무엘상 17:45에선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출애굽기 5:3에선 출애굽 시키는 “히브리인의 하나님”으로 나온다. 이처럼 엘로힘은 다른 사람들의 이름과 결합하여 사용되면서 변형된다. 셈, 나홀, 다윗, 히스기야, 엘리야 등의 사람과 결합되어 사용된다. “내 주 왕의 하나님”이라고 열왕기상 1:36에서 사용되었다.
둘째는 속성이나 관계성과 관련된 명사와 결합한 구절에 사용된다. 신명기 33:27의 “영원하신 하나님”, 역대하 15:3의 “참되신 하나님”과 같은 구절에 사용되었다. 예레미야 32:27에선 “모든 육체의 하나님”, 창세기 24:7에선 “하늘의 하나님”, 시편 18:47에선 “나의 구원의 하나님”, 사무엘하 22:3에선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시편 43:2에선 “나의 요새이신 하나님”, 시편 109:1에선 “나의 찬송이신 하나님”으로 사용된다.
3) 접미사와 함께 사용된다. 사사기 10:10의 “우리” 하나님과 같이 엘로힘에 “우리”라는 접미사가 붙는 경우가 있다. 레위기 19;14,32에선 “네”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 또한 “여호와(יהוה) 하나님”과 같은 경우는 수백 번 나온다.
○ 장엄의 엘로힘, 삼위일체의 엘로힘?
BDB에서 설명하는 것을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엘로힘은 절대자 하나님에게만 사용된 고유 용어가 아니다. BDB의 용례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엘로힘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뜻하기도 하지만, 재판장을 뜻하기도 한다. 대상이 단수이기도 하고, 복수이기도 하다. 게다가 하나님과 사람, 천사 모두에게 쓰였다. 엘로힘은 하나님에게만 전적으로 사용된 고유명사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뜻하지만, 천사나 이방신에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심지어 사람을 뜻하기도 했다.
엘로힘이 이렇게 다양하게 사용되다 보니, 하나님에게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장엄의 복수”라는 개념을 적용했다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그 형태는 복수형을 취하지만 단수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고대 세계에서 공동체의 대표자를 말할 때는 대체로 복수형을 쓰는 것이 관례였으며, 더욱이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복수형 표현은 수적인 다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위대함(장엄함)이나 탁월성을 나타내는 관용적 용법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성경은 이 같은 표현 방식을 취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창 1:1). 그러나 이런 설명은 하나님이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복수형”을 취했다는 것이기에 온전한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홀로 유일하신 분이 허세를 위해 누군가가 후원하고 옹위하고 있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대한 자로 나타내기 위해 “허장광세” 했다면 하나님으로서 권위가 있는 것일까?
학자들도 이런 허구적 가설에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기에 그렇게 표현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엘로힘이 복수형인 것에 대해 삼위일체를 뜻한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삼위이시기에 복수형을 취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구약학계에선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나치게 교리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엘로힘이 때로는 모세와 같은 사람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장엄의 복수형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왕이 자신을 짐(朕)이라고 칭하듯이, 왕이 we(위, 우리는)라는 표현을 쓰듯이 말이다. 약점이 있는 설명인 것을 알면서도 뾰족한 수가 없기에 장엄의 복수형을 지지하는 것이다.
엘로힘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이단들이 이 개념을 자신의 교리를 합리화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하나님 아버지”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어머니”도 있다는 이단설을 주장하는 게 “하나님의 교회”다. 이들은 교주 자신을 신격화하는 데 핵심 개념으로 엘로힘을 이용한다. 그들이 자신의 교회 조직 이름에 “하나님”을 내세우는 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보다 성부 개념의 “하나님”의 교회라는 게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어머니가 있기에 엘로힘이라는 복수형 단어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교주는 하나님 어머니이고 그 전의 교주인 남편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둘이기에 복수형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이다. 괴이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엘로힘이라는 구약의 단어를 근거로 이단설을 주장하고 있기에 구약의 절기 “유월절”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와 제자들은 당시에 유월절을 지켰으니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을 성취한 부활절을 지키는 기독교를 공격한다. 오순절에 해당하는 성령 강림절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것은 구약에 매여 신약을 배격하는 모습이다. 이런 것은 성령 하나님 대신에 교주를 신격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다. 그들은 모형과 그림자에 갇혀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다. 신약에선 하나님이 데오스(θεός)로 나온다는 것에 그들은 눈을 감고 있다. 신약에 복수형 하나님은 배격해야 할 이방신을 뜻한다는 것에 그들은 귀를 막고 있다. 아론에게 요청한 “신들”은 금송아지 신으로 하나님은 그런 신을 만든 자들에 대해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출 32:10) 하며 격노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이 노를 맹렬히 발하신 것을 자칭 “하나님의 교회”라는 자들이 자행하고 있다. 그들은 구약의 엘로힘을 근거로 부부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데, 신약의 데오스에 대해선 어떻게 말하겠느냐는 것이다.
○ 엘로힘과 데오스
구약에서 하나님은 엘로힘으로 나오지만, 신약에선 데오스로 나온다. 신약에선 구약처럼 하나님을 뜻할 때 복수 개념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온전히 단수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구약에선 복수형일까? 왜 신약에선 단수형일까?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을 쓴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대리한 자, 곧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호와 혹은 여호와의 사자는 대부분 하나의 존재로 등장하여 활동하지만, 그 이름은 가브리엘과 미가엘과 같은 천사장들도 함께 사용했다. 자신을 미가엘이라고 하며 나오는 때도 있지만, 미가엘이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며 등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들도 예언할 땐 “하나님이 이르노라” 하며 선포했다. BDB에 나와 있듯이 천사들도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איש האלהים)이라고 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사람이거나 천사이지만, 하나님을 대행하는 자였기에 “하나님이 이르노라”, “여호와가 이르노라” 하며 예언했다. 그들은 단순 대행자나 전달자가 아닌,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말씀을 선포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내신 하나님은 유일하시지만, 그가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을 대리하여 그 길을 준비한 자는 이렇게 단수가 아니라 복수였다. 그래서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이 필요했고, 여호와라는 칭호가 필요했다. 그들은 데오스가 아니지만, 유일하신 하나님을 대리한 엘로힘으로서 예수 오실 길을 준비했다. 유일하신 하나님(데오스)의 뜻에 따라 그 일을 수행했다. 그래서 엘로힘이 했음에도 그것을 데오스가 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데오스의 뜻에 전적으로 엘로힘으로서 순종하며 행했기 때문이다.
구약에선 복수형 엘로힘을 사용한 것과 달리 신약에선 오직 단수 데오스만 사용했다.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엔 데오스가 복수 형태로 나오지 않는다. 단수일 뿐이다. 복수일 수 없는 이유는 마지막 날에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실체를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모형과 그림자 시절엔 엘로힘이 필요했지만, 실상과 실체일 때엔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실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가 드러내신 분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였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래서 요한복음 17:3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하였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일 수밖에 없기에 그것을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하였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귀신도 믿고 있는 사실을 인간은 오히려 믿지 못하고 있다.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은 엘로힘이 아니라 데오스인데, 인간들은 믿지 못하고 있다. 데오스에 대해선 귀신들도 믿고 있는데, 어떤 신학자는 믿지 못하고 있다. 그런 자는 지금은 바로 데오스 시대인데도 엘로힘 시대로 역주행하고 있다. 데오스를 믿지 않는 불신의 끝엔 “떠느니라”는 심판과 형벌의 공포가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귀신은 떨고 있는데, 그들은 오히려 방자하게 구약학을 강의하고 있다.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마지막 날, 곧 신약 때에 그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셨다. 아들을 통해 ‘나는 홀로 유일하단다’ 하신 것이다. 엘로힘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던 선지자의 시대를 마감하시고, 데오스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아들 시대를 여셨다. 하나님은 그의 실체가 연속과 불연속, 모형과 실상, 곧 여호와와 예수를 통해서 확인되게 하셨다. 그래서 신약에선 복수 개념인 엘로힘을 쓰지 않고, 단수 개념인 데오스를 쓴 것이다. 신약 시대엔 여호와를 부르지 말고, 예수를 불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여호와를 야웨로 바꿔 부른다고 자부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오직 “예수여” 할 뿐이다. “주여, 주여” 하다가 망한 사람은 있어도 “예수여” 하다가 망한 사람은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겠는가? 귀신들만이 “예수여” 했어도 망했을 뿐이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눅 23:42) 예수가 구원의 이름이요 천하 만민이 불러야 하는 이름이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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