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행 나누기
☺ 아무리 요리를 잘 해도 상을 차릴 줄 모르는사람은 뛰어난 요리사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 것은 행 나누기입니다. 행 나누기에 따라 그 작품의 의미와 이미지와 리듬이 살아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행을 나누려면 먼저 <시행(詩行)>과 <율행(律行)>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시행은 작품 속에 시인이 설정한 행을 말하고, 율행은 독자가 낭송할 때 자연스레 끊어 읽는 단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시행의 유형은 [시행=율행], [시행<율행], [시행>율행] 세 가지가 있습니다.
ⓐ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 양사언
ⓑ 동해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에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 장만영(張萬榮), 「달, 포도, 잎사귀」에서
ⓒ 누나의 손은 따뜻하다. 천지에 흰눈이 덮이던 날, 책보따리를 허리에 두르고 꽁꽁 얼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동구밖까지 나와서 기다리다가 눈투성이 코홀리개의 손을 잡아주던 누나의 손은 따뜻했었다. 공부를 한다고 초롱불 밑에서 코 밑이 까맣게 그을려 졸고 있으면 사탕이며 과자 몇 개를 살며시 쥐어주던 누나의 손은 따뜻했었다.
감나무 위에 까치가 울던 누나가 시집가던 날 아침, 잠꾸러기의 머리맡에 종이돈 몇 장을 손수건 에 싸서 놓아두고 이불을 여며주던 누나의 손은 따뜻했었다. 이제는 장성한 딸을 시집보내는 누나의 장년 “먼 데서 뭐할라꼬 왔노?” 화들짝 놀라며 가방을 받아드는, 어느새 어머니를 빼닮은 누나의 손은 아직도 따뜻하다. ― 유자효(柳子孝), 「누나의 손」 전문
ⓐ는 전체를〔시행=율행]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배치하면 시행을 읽는 것이 곧 율행대로 읽는 것이 되어 매우 원활한 리듬감이 형성됩니다. 근대 이전의 시가들이 이런 배행법(配行法)을 택한 것은 의미보다 리듬을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리듬에 이끌려 읽기 때문에 특정한 의미나 이미지를 강조하기 어렵다는 게 단점입니다.
ⓑ는 3보격과 4보격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첫째 연은 [시행〱율행]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설정하면 독자들은 다음 행의 일부를 끌어다 읽어 빠른 느낌이 들고. 각 행의 의미와 이미지가 한결 강화됩니다.
ⓒ는 첫행을 제외하고 모두〔시행>율행]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설정하면, 율행만큼 읽고 나머지는 다른 행으로 넘겨 리듬감이 파괴되면서 느린 느낌을 줍니다. 최근에 쓰인 시들이 이런 배행법을 택하는 것은 느린 느낌을 이용하여 현대인들의 우울하고 권태로운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시행의 배치가 왜 이런 느낌을 만들어낼까요? 그것은 다음 전봉건(全鳳健)의 작품을 개작하여 대조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겁니다.
ⓐ 점심때 우리는 나무 저를 쪼갠다.
전복 민어 삼치 홍합 문어 회를 먹는다. 생오이 토마토 참외가 곁들인다.
점심때 나무저를 움직이는 네 손에는 네 살빛하고 같은 빛깔의 보석. 그건 먹지 못한다.
ⓑ점심때 우리는 나무저를 쪼갠다. 전복, 민어, 삼치, 홍합, 문어, 회를 먹는다. 생오이, 토마토, 참외가 곁들인다. 점심때 나무저를 움직이는 네 손에는 네 살빛하고 같은 빛깔의 보석. 그건 먹지 못한다.
ⓐ는 원작이고 ⓑ는 개작입니다. 점심 때 식당에 가서 나무젓가락을 쪼개는 것은 흔히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의 1연을 읽을 때, 민감한 독자들은 나무저의 부드러운 빛깔과 ‘쪼갠다’는 의미에서 성적(性的) 암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을 바꾸기 위해 비워 둔 여백에서 젓가락을 들고 이것저것을 집어먹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2연을 읽을 때는 행이 바뀔 때마다 거명하는 회와 야채 이름에서 그런 음식들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연의 ‘네 손에는/네 살빛하고/같은 빛깔의/보석./그건/먹지 못한다.’라는 구절에 이르면 1연의 ‘나무저를 쪼갠다’는 구절에서 암시받은 금지된 욕망이 결코 자의적인 해석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개작시 ⓑ에서는 이런 이미지들이 그냥 행 속에 묻혀버리고 맙니다. 또, 나무저를 쪼개는 행위도 점심을 먹기 위한 준비로만 받아들여집니다. 그것은 행을 나누는 방식에 따라 아래와 같이 임의적 강약율이 적용되고, 강세(强勢)를 부여받는 단어의 의미가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 ⓐ 점심때/ ․ 우리는/ ․ ․ 나무저를 V 쪼갠다. /
․ ⓑ점심때 V 우리는/ ․ ․ 나무저를 V 쪼갠다. /
ⓒ점심때 우리는 나무저를 쪼갠다.
원작인 ⓐ는 첫행과 둘째 행말에 악센트가 주어지고, 셋째 행은 첫째 음보의 마지막 음절과 둘째 음보의 첫 을절에 악센트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들은 의미가 완전하지 않은 조사나 불완전명사라서 액센트가 부여된 어군(語群) 전체가 강조됩니다. 그로 인해 모든 단어들이 강조되고, 독자들은 이들의 개별 의미를 생각하며 읽게 됩니다.
반면에, ⓑ처럼 2음보로 배치하면, 앞뒤 음보가 대응하여 2보격의 리듬이 형성되고, 시어가 지시하는 의미나 그것이 환기시키는 이미지보다 2보격의 약동적인 리듬에 끌려 읽게 됩니다. 그로 인해 하나의 연으로 독립시키기에는 의미가 빈약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또, ⓒ처럼 배치하면 시라는 인식을 갖지 않는 한 산문의 한 구절로 받아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원작의 첫머리에서 화자가 금지된 욕망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의 단어를 한 행으로 잡아 리드미컬하게 읽히는 것을 방지하고, 행 중간에 묻힐 ‘우리’를 첫머리로 끌어내어 강조함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암시한 다음에 ‘나무저를 쪼개다’는 구절을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행 역시 임의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화제의 속성과 화자의 의도에 따라 나눠야 합니다.
자아, 배형(配行)의 기본 원칙을 알아봤으니, 이제까지 우리가 써온 작품의 행을 다듬어 완성해 봅시다. 그래, 어떤 작품으로 완성하고 싶습니까?
리드미컬하게 만들어 독자들이 암송하도록 만들고 싶다구요? 그럼 율행 단위로 배치하세요. 그리고 그게 좀 단조롭게 생각되면 율행 단위는 유지하되 군데군데 기준 음보 수보다 한 음보 더 많거나 적게 배치하십시오. 많은 곳은 다음 율행으로 밀어내며 읽느라고 느린 느낌을 주고, 모자라는 곳은 다음 행의 음보를 끌어다가 읽느라고 빠른 느낌을 줄 겁니다. 단, 이런 방식으로 나누면 독자들이 곰곰이 생각하며 읽는 게 아니라, 리듬에 따라 읽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고, 장중하거나 우울한 느낌이 들도록 만들고 싶다구요? 그렇다면 율행을 깨뜨리고, 〔시행>율행〕으로 배치하십시오. 아마 시상에 따라 읽고, 긴 문장의 느린 느낌과 동원한 어휘들의 뉘앙스가 겹쳐 장중하면서도 우울한 느낌이 들도록 만들 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강조하고 싶은 의미와 이미지가 행 속에 묻혀서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으며, 독자들이 암송하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하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 하나의 의미와 이미지를 독자들이 생각하며 읽도록 만들고 싶다구요? 그렇다면 행을 짧게 나누세요. 그리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만으로 한 행으로 만들거나 행 앞으로 끌어내세요. 그게 어려우면 명사형으로 만든 다음 관형어구를 붙여주구요. 그러니까 ‘하나의 나뭇잎이 파르르 떤다’라고 하지 말고 ‘파르르 떠는 하나의 나뭇잎’으로 바꾸세요. 우리말은 서술어 중심이라서 서술어 자리의 말에 초점이 쏠리거든요.
단락별로 의미를 강조하면서 독자들이 깊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없냐구요? 문장이나 구절 단위로 행을 나누지 말고 단락별로 나누고, 그걸로 연을 만드십시오. 문장이 길어지면서 사색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연과 연 사이의 여백에서 독자들이 시인의 말을 음미할 테니까요.
예를 들어볼까요?
칼쟁이는 날마다 칼을 간다. 자기를 위해 가는 게 아니라 언젠가 만날 칼잽이를 위해 간다.
샤브리느는 날마다 샤워를 한다. 자기를 위해 샤워를 하는 게 아니라 오후 두 시 딩댕동 울릴지 모르는 벨소리를 위해 샤워를 한다.
제주시 오라동 정실마을 이만수(李滿水) 씨는 해마다 호밀을 심는다. 밤마다 호밀밭 이랑으로 놀러와 북대기질치는 달(月)을 위해 호밀을 심는다.
나는 날마다 언어를 간다. 칼을 가는 칼쟁이랑, 날마다 샤워하는 샤브리느랑, 오후 두 시 푸르게 울릴지 모르는 초인종 소리랑
밤마다 호밀밭 이랑에서 히히덕댈 달을 위해 언어를 간다. ―필자, 「칼쟁이는 칼을 간다」 전문
어때요? 한 연 한 연 생각하며 읽을 수밖에 없지요? 하나의 행을 한 연으로 만들고, 연 단위로 의미를 통일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 작품을 이 책의 마지막에 소개하는지 아세요? 칼을 가시라고 부탁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칼을 가세요. 칼을! 노력하면 결코 안 되는 게 없습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됐네요. 사랑해요. 여러분! 부디 좋은 작품 쓰세요. 아니, 좋은 작품을 못쓰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쓰세요.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책값 이외는 돈도 안 들고, 잘못 쓴다고 형무소에 가는 것도 아니고, 비논리적으로 말해도 갈채를 받을 수 있고, 끝까지 노력하면 역사에 남을 방법은 아마 시쓰기뿐일 겁니다.
끝까지 쓰는 겁니다. 그럼 안녕! 안녕! 안녕! 사랑해요, 안녕! 【 우리가 할 일 】 ○ 행의 설정 방법과 유의할 점을 시작 노트에 정리해 두시오. ○ 자기가 쓴 작품의 행을 다듬어보시오. ○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시를 쓸 계획을 세워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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