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관심뉴스는 선조들께서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보은의 참배를 드리는 두 문중이 있어 소개합니다. 아름다운 일은 권하는 분위기를 많이 많이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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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전 은혜 절 받으세요”
북관대첩비 후손 해주 정씨 건립해준 전주 최씨묘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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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감사”두 문중 보은 정
해주 정씨와 전주 최씨 두 문중이 300년 전 인연을 계기로 ‘보은의 정’을 나누는 장면이 13일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서 목격됐다.
바로 북한에 인도된 북관대첩비의 주인공 농포 정문부(1565∼1624) 장군 후손 40여 명이 이 전승비를 세운 곤륜 최창대(1669∼1720) 선생의 대율리 묘소를 찾아 예를 갖춘 것.
물론 곤륜의 후손 10여 명도 “감개무량”하다며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농포의 후손들은 300년 전 선조가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낯선 청원땅을 찾아 보은의 참배를 하고 곤륜집의 시 한수를 액자로 만들어 선물했다.
◆최씨 후손들도 환대
두 가문의 인연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문부 장군은 임진왜란 때 함경도 북평사로 재직 중 반란을 진압한 데 이어 의병장으로 추대돼 곳곳에서 왜군과 싸워 전승을 거뒀지만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농포는 사후 43년이 지나서야 함경도 북평사 이단하 부자 등의 노력으로 복권돼 충의 시호를 받았으며 1700년에 역시 함경도 북평사에 부임한 최창대는 농포의 공적을 기려 9년 뒤 길주군에 대첩비를 건립했고 이로 인해 두 문중의 아름다운 인연은 맺어지게 됐다.
2006-06-14 메트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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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화폐(3페소)속의 인물 쿠바 체 게바라 출생
체 게바라(Che Guevara), 본명은 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 6. 14 ~1967. 10. 쿠바
쿠바 혁명(1956~1959)의 공산주의자로 후에 남아메리카의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다.
좌익 성향이 있는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천식을 앓았으나 운동선수와 학자로서의 재능이 뛰어났으며 1953년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여가가 생기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서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몸소 체험했으며, 빈곤에 대한 해결책은 폭력혁명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를 각각 독립된 여러 국가의 집합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문화적?경제적 실체로 보았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위해 전대륙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53년 그는 과테말라로 갔다. 그곳에는 하코보 아르벤스가 진보적인 정권을 이끌고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하고 있었다(이때 게바라에게 '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그것은 아르헨티나인들이 말할 때 흔히 붙이는 감탄사의 하나임). 1954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후원한 쿠데타로 아르벤스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미국이 진보적인 좌익정부에 반대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확신이 전세계적인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그의 계획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갔고, 그곳에서 쿠바인인 카스트로 형제(피델?라울)를 만났다. 카스트로 형제는 그때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며 쿠바의 풀겐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전복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카스트로의 군대에 합류해 1956년 11월말에 쿠바의 오리엔테 주(州)에 상륙했다. 그 군대는 상륙 즉시 바티스타 정부군에게 발각되어 거의 전멸했다.
그러나 부상당한 그를 포함한 몇몇 생존자들은 마에스트라 산맥에 이르렀는데, 그후 그곳이 게릴라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란군은 바티스타 정부군으로부터 무기를 빼앗고, 주민들의 지지 속에 신병을 모집해 차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카스트로가 가장 신임하는 보좌관이 되었고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는 싸움에 2년이나 참여했는데, 〈쿠바 혁명전쟁 회고록 Pasajes de la guerra revolucionaria〉(1963)에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1959년 1월 2일, 승리한 카스트로 군대가 수도 아바나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세운 후, 쿠바 시민이 되었다. 그는 혁명군에 가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정부에서도 유능한 인사였으며 쿠바를 대표하는 산업대표단을 이끌고 해외에도 나갔다. 또한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 미국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는 인물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국가 농업개혁연구소의 산업부장,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했다.
1960년대 초반, 쿠바의 정책과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많은 연설과 저술을 했는데, 그때의 저술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이 쿠바식의 공산주의를 논한 〈쿠바에서의 인간과 사회주의 El socialismo y el hombre en Cuba〉(1965)와 게릴라전의 교본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게릴라전 La guerra de guerrillas〉(1960)이다. 1965년 4월 이후 공적인 생활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후 2년간 그의 활동과 거처는 비밀에 붙여졌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다른 쿠바의 전사들과 함께 콩고로 가서 내전에 참전하고 있는 파트리스 루뭄바 부대의 조직을 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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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화폐(오스트리아-1000Schilling)속의 인물 -란트슈타이너 출생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1997년 발행
1868. 6. 14 ∼1943. 6. 26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의 면역학자·병리학자.
주요혈액군을 발견했다.
수혈의 보편화를 가져온 ABO식 혈액형계를 개발해서 1930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빈 병리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었을 때(1898∼1908) 인간 혈액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하고, 아무 혈액이나 구분 않고 수혈하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간의 혈액에는, 적혈구의 원형질막에 붙어 있으며 항원으로 알려진 당분 함유물의 종류에 따라, 적어도 3가지의 주요 혈액형이 있다는 것을 입증했고(1901), 이를 A형, B형, O형이라고 불렀다.
A항원과 B항원을 모두 갖고 있으며, AB 항체는 갖고 있지 않은 4번째 혈액형(AB형)은 다음해에 발견되었다.
그뒤 M과 N식(1927) 혈액형, 그리고 리서스(Rh) 인자도 발견했는데(1940), Rh 인자란 그것이 발견된 원숭이종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Rh 인자는 산모와 태아의 혈액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산·유산 또는 신생아에게 위험한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 된다.
그의 연구는 친자확인소송이나 살인사건의 재판에서 중요한 증거를 제공하며 법의학 발달에도 큰 몫을 했다.
혈액형이 특정한 유전자를 통해 유전된다는 사실은 인류유전학과 인류학 연구에 유용한 수단을 제공했다.
빈대학교(1909∼1919) 재직
뉴욕에 있는 록펠러 의학연구소의 병리학 교수로 재직.(1922∼1943),
저서로는 면역학을 확립시키는 데 기여한 〈혈청반응의 특성 The Specificity of Serological Reactions〉(193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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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아르헨티나, 포클랜드전쟁에서 영국에 항복
아르헨티나 군이 포클랜드 섬에 상륙하자 영국이 반격을 개시했다.
1982년 6월 14일, 포클랜드를 점령하고 있던 아르헨티나군이 영국군의 우세한 군사력에 밀려 항복했다. 이로써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점령한 지 꼭 74일 만에 포클랜드 전쟁이 종결됐다.
전쟁결과 아르헨티나는 712명의 사망자와 1만1천명의 포로를 냈고 영국은 256명의 전사자를 냈다. 전쟁 전문가들은 영국군의 승인을 현대적인 무기보다 우수한 인적자원에서 찾았다.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를 전격 침공하자 영국의 대처수상은 즉각 100여척의 함선을 12,800km 떨어진 포클랜드 섬으로 파견했다. 4월 5일 영국을 출발한 영국군은 4월 26일, 포클랜드섬의 동남쪽 1,500km에 있는 남조지아섬을 탈환했고, 5월 15일에는 포클랜드의 작은 섬 페블섬을 점령했다. 영국군은 포클랜드의 요충지 포크스탠리를 점령하기 전 반대 방향의 산카를로스항을 첫 상륙지로 결정했다. 산카를로스항으로 영국군이 상륙할 것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불과 120여명만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5월 21일 새벽 4시, 영국군은 함포사격을 개시하며 산카를로스항의 아르헨티나 군관측소와 대공 및 해안포대를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영국을 떠난 지 46일 만에 육지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5월 27일까지 교두보 확대를 완료한 영국군은 최종목표인 포트스탠리를 향해 돌진했다. 5월 28일 다윈 및 구스그린지역에서, 6월 12일과 13일 이틀동안 포트스탠리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은 마침내 이날 아르헨티나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영국을 지원, 남미에서의 신뢰도에 금이 갔으며, 아르헨티나의 갈티에리군사정부도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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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 미국 대륙회의, 성조기를 국기로 채택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각 부대와 군함들은 각양각색의 깃발을 만들었다. 어떤 것은 흰 바탕에 푸른 소나무가 그려진 것도 있었고 'Don't tread on me'라고 쓰여진 뱀이 그려진 해군 깃발도 있었지만 13개 주가 모인 미국을 대표하는 깃발은 없어 많은 혼돈을 일으켰다.
이에 미 독립군을 대표하는 기의 필요성을 느낀 당시 독립군 사령관이었던 죠지 워싱턴장군에 의해 1776년 1월 독립군 공통의 색깔과 깃발이 공표되었다. 흰색과 빨간색 13개의 줄과 왼쪽 구석에 영국의 유니언 잭이 그려진 미국 전체를 상징하는 최초의 깃발이 태어난 것이다.
이 깃발은 비공식적으로 미국의 깃발 역할을 하다가 1777년 6월 14일 의회에서 유니언잭 대신 13개의 별과 13개의 줄을 그려 넣은 기를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Stars and Stripes)로 정하게 되었다. 얼핏 듣기에는 성스럽고 뭐 그런 깃발이라는 의미인 듯 싶지만, 말 그대로 Stars 성(星), Stripes 조(條)이다.
성조기의 도안과 설명에 대한 그 어떤 공식적인 문서나 기록도 남아있지 않지만 성조기를 디자인 한 사람은 뉴저지 출신의 가수 겸 디자이너인 홉킨슨(Francis Hopkinson)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후에 워싱턴이 국기에 사용된 흰색, 빨간색, 푸른색의 의미를 부여하여 흰색 줄은 국가의 청정과 안정, 빨간색 줄은 미국의 자유를 위해 흘린 피, 흰 별은 자유, 푸른색은 정의를 의미하고 13개의 줄과 별은 당시 13개 주를 의미한다고 정하였다.
이렇게 디자인이 완성된 성조기는 워싱턴이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봉재업을 하던 벳시 로스를 찾아가 제작을 부탁하여 실제로 펄럭이는 깃발로 태어나게 되었다. 원래 워싱턴이 의뢰했던 기의 별은 삼각형 두개를 포개놓은 육각별이었으나 벳시 로스가 정오각형 별로 할 것을 제안하여 지금의 별 모양으로 하게 되었다.
당시는 별의 배열에 대해 아무 규정도 없었기 때문에 원형(圓形)으로 배열한 것, 수열(數列)로 늘어놓은 것 등 그 종류도 다양하였으나, 1795년 버몬트·켄터키 2주가 증가되면서 별만이 아니라 줄 또한 증가시키기로 결정되어 15개의 줄과 15개의 별이 그려진 국기로 변형되었으며, 그 후로는 주가 증가되어도 줄은 그대로 두고 별만 더하기로 결정하였다. 성조기는 현재까지 26번 변경되었으며, 최근의 변경은 1960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 째 주(州)로 승격하였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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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러시아 소설가 막심 고리키 사망
1936년 6월 14일, 누군가에 의해 독살됐다는 의문을 남긴 채 고리키가 생을 마감했다. 1891년 11월 1일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슈코프는 러시아 남부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의 어느 다리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지난 넉달 동안 오데사에서 트빌리시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줄곧 걸어온 청년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이 아름다운 도시의 경관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청년의 머릿속은 장기간의 대기근에 허덕이는 광활한 러시아땅을 방랑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대자연의 영상들로 터질 지경이었다. 그것들은 머지않아 문자로 옮겨져 청년을 위대한 작가로 탄생시킬 터였다.
페슈코프 청년이 러시아어로 `가장 큰 고통`을 뜻하는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으로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한 것은 1892년 9월 12일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세계 문학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인 고리키는 변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해 1905년 혁명과 관련해 이듬해 당국에 체포됐다가 추방되어 7년간 계속된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을 거쳐 이탈리아의 카프리섬에 정착한 고리키는 그곳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어머니`를 완성해 러시아 사회 혁명에 영향을 미친다.
그 이후로 `유년시대` `세상 속으로` `대학시절`등의 작품을 남겼다. “고리키의 작품은 위대한 10월혁명으로 나아가는 과정, 즉 러시아에서 혁명적 위기가 성숙해 가는 전과정을 포괄한다.” 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고리키의 소설들은 혁명을 앞둔 제정 러시아의 혼란과 지배계급의 부패상, 그 안에서 움트는 새로운 사회의 싹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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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6년 양귀비 자살
1736년 프랑스 물리학자 C.A쿨롱 출생. 「쿨롱의 법칙」발견.
1775년 미국 육군 창설
1777년 美 국기 처음 제정
1811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저술한 미국의 여류작가·스토 출생
1825년 미국 수도인 워싱텅 D.C.의 기초도면을 설계한 건축가 랑팡 사망
1868년 란트슈타이너 출생 - ABO식 혈액형분류법 개발로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1876년 브라질의 고목나무종자, 바나나잎에 싸여 런던으로 밀반입됨.
1889년 미국-영국-독일, 사모아섬에 관한 조약을 베를린서 체결
1890년 영국, 잰지바르를 보호령화.
1891년 철도사고/바젤(스위스) 사망 100명
1900년 파리-리용간 최초로 국제자동차레이스(경주) 개막
1907년 내각관제 공포(의정부 폐지)
1907년 노르웨이, 여성 참정권 부결
1909년 청나라-스웨덴, 북경통상조약조인
1914년 올림픽 오륜기 제정.
1917년 만주 하르빈의 '공제회'를 '한국인회'로 개편 추진.
1919년 최초의 금속제 여객기 융커스 F-13(4-5인승), 첫 비행에 성공
1920년 독일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 사망.
1924년 전국 육상대회 개최.
1926년 총독부, 세제조사위원회 설치.
1928년 여성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 사망
1928년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 출생
1929년 바티칸.프로이센, 정교조약 조인
1934년 히틀러-무솔리니, 베니스서 회담.
1936년 러시아 소설가 막심 고리키 사망
1937년 스페인정부, 막스주의 통일사회당에 해산명령, 스페인 인민전선이 붕괴됨
1938년 별의 시선속도를 분광학적으로 측정한 미국의 천문학자 윌리암 캠벨 사망
1940년 제2차 세계대전/독일군, 프랑스 파리 점령.
1946년 김규식.원세훈.여운형.허헌, 좌우합작회담 개시
1946년 세계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에 성공한 베어드 사망
1949년 베트남에 바오다이 정권 성립.
1949년 이승만 국회에 출석하여 대정부 협조 요청.
1949년 한국.미국 화폐환율을 900대1로 인상.
1950년 한국, 유네스코 가입.
1954년 중국인민정부, 헌법초안을 채택 발표
1961년 부정축재처리법 공포
1963년 소련, 보스토크 5호 발사
1966년 서울서 제1회 아스팍회의 개최-아시아,태평양각료이사회 창설
1967년 미국 화성탐사선 마리너5호 발사
1967년 부정선거규탄 학생데모, 서울시내 11개대학 임시휴교
1968년 195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탈리아의 시인 콰시모도 사망
1977년 아르헨티나 북한과 단교
1977년 일본, 2백해리 수역발표
1980년 국내 첫 태양광발전소 가동
1982년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첫 공판
1984년 캐나다 트뤼도 수상 고별 연설
1986년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 사망
1989년 부시 미국 대통령, 전략방위구상 (SDI) 프로그램 지속 천명
1993년 영화촬영 중이던 헬기, 한강에 추락
1994년 `문 리버`의 작곡자 헨리 맨시니 사망
1994년 박유광 한국고속철도공단 이사장과 피에르 빌저 프랑스 GEC알스톰그룹 회장, 21억160만달러의 경부고속철도 차량도입계약을 정식 체결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8.15 고향방문 등 5개항 합의-서명
2001년 미국 육군 창설 기념일인 6월14일부터 검은 베레모를 일반 장병들의 군모로 착용
2002년 한국 포르투갈 1대0 승. 사상처음 월드컵 16강 진출
2004년 남북, 군사분계선(DMZ)지역의 모든 선전 도구 철거
2004년 남북함정, 국제상선 공용통신망 첫 무선교신(호출부호 남-한라산, 북-백두산)
2005년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개막(평양)
2005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5년 8개월의 해외도피생활 마치고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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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세요!
첫댓글 북관대첩비-두 문중의 화합이 보기 좋습니다. 그런데 중앙박물관이 서울에 있으며 반환도 남한의 노력에 의한 것이면 북에 줄 필요가 있는지, 나중에 현지에 세우면 될 것을..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시 아)는 하나밖에 없는 순양함을 잃어 버렸습니다. 특히 모험적 전쟁은 금물. 김우중-뭘 믿고 돌아왔는지...
2002년 오늘 우리나라가 최초로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날이군요. 2006년 월드컵에서도 좋은 성적 올리기를 기원해봅니다.
화폐 속의 인물이 두분이나 출생한날이네요... 요즘은 T-셔츠에도 많이 등장할정도로 젊은이들의 막연한 우상이 된 체게바라와 혈액형 ABO식을 알아낸 오스트리아의 란트슈타이너까지... 반대로 생을 달리한 예술가도 있네요... 유명한 작곡가인 헨리 맨시니는 과거의 오늘 생을 달리했네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알며, 흥얼거리는 '문리버'의 작곡가입니다.
2002년 포루투갈전의 승리의 함성이 오늘까지 들리는듯합니다.토고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남은 두경기에서도 좋은모습 보여주었음 합니다.
날씨도 그렇고 ...... 건강하세요
막심고리키의사망...체게바라의탄생...오늘은사회주의인물들이태어난날이군요...